인연이라 쓰고, 소명이라 믿다
김동근•임향욱 가정
1. 탄생과 성장 2. 초•중학교 시절 3. 우연을 넘은 인연 4. 남기고 싶은 말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동근, 백석 단어의 대중화, 어려서부터 교회 출석, 교육에 대한 자립성이 요구, 농업고등학교 입학, 고2때 통일교회 입교, 의도하지 않은 대학교 입학, 김봉태 회장과의 인연, 등록금 마련의 곤경, 학사장 생활, 대학원 진학 및 윤리교육학 교사 자격증 취득, 10년간 해외 선교사 활동, 대학원 공부, 선정고등학교 윤리 교사 근무, 회갑을 맞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 가족들의 선문대 동문 학연
1. 탄생과 성장
“흰 눈같이 결백하고, 눈같이 고운 그 이름도 아름다운 백석이라네…”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한창이던 1960년대에 부락대항 체육대회가 열릴 때면 부르던 내 고향 백석(白石)마을의 노래 가사이다. 요즈음은 고향, 망향, 실향이라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류이지만, 나에게는 명절, 고향, 부모님이라는 말은 동심을 자극하는 그리움이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추억의 단어이다.
나의 고향은 충청북도 보은군 산외면 백석리 437번지 산골이며, 국도에서 6k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속리산 자락에 우뚝 서있는 장구봉의 높은 정기와 영감이 감돌고, 앞으로는 안산으로 인해서 가로 막혀있으며, 그 사이에 좌로는 지퐁골, 우는 고래실로 트인 곳을 이용하여 외부와 소통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순백한 강도로 결정된 큰 차돌바위가 있었기에 백석리로 명명되었고, 자연부락 이름으로는 흰돌(흔들)로 불리기도 하며, 지금도 그 바위 돌 일부가 남아서 마을에 의미를 지켜주고 있다. 주민들은 순백과 강직을 기풍으로 삼고 합심단결하며, 상부상조하는 협동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고향 백석(白石)이라는 글을 가끔 접하노라면 반가움과 추억이 떠오른다. 좋은 글자이기에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북방에서>의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 서울에 백석대학교, 인근에는 백석고등학교(일산), 백석역(지하철 3호선), 백석교회(은평) 등 많이 있다.
고향하면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새벽닭 우는 소리와 교회 새벽 종소리가 있다. 마을에는 천주교 분당과 장로교 예배당이 있으며, 할머니는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고, 나는 어린 시절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딱딱한 마루바닥에 희미한 호야등불을 켜고, 성경책과 오르간도 없었고, 두루마리 괘도에 적은 가사를 보고 따라 부르는 찬송이었지만 매우 은혜로웠다. 주일학생 시절에 어른들만이 참석하는 새벽기도에 가끔 참석하였고, 주일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하여 공책을 탔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나는 부친 김문수, 모친 강금례의 3남 1녀 중에 4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집안사정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중학교를 다녔기에 부족한 편은 아니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새 엄마 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을 하였다고 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44세에 돌아가시는 등 원만한 가족사는 아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 4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릴 적에 경험하였던 바로는 시골에 떠돌아다니는 지적 장애인들에게 친절하게 밥을 챙겨도 주고, 행려자에게 거처를 마련하여 머물게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품성이 착하고, 양보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편이었다. 은연중에 그런 부모님을 보고 배우며 닮아지는 생활을 한 것 같다.
2. 초•중학교 시절
집에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장갑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장갑천을 건너야 하는데, 여름철에 비가 많이 내리면 학교를 가지 못하였다. 수업 도중에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나기 전에 일찍 귀가를 하는 일도 있었다. 3학년부터는 우등상을 탈 정도로 공부를 좀 하였다. 당시 시골에서는 진학에 대한 관심도 적었고, 교육 여건도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였다. 초등학교 60명의 동창 중에서 대학출신은 내가 유일하다.
농촌에서의 일상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동기부터 농사일에 필요한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 초등학생이 되면 소를 몰고 나와 풀을 뜯어 먹게 하고, 쇠풀(소먹이 풀)을 베는 것이 방과 후의 일과였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내기 봉사도 참여했고, 오뉴월 더위와 함께하던 힘든 보리타작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에 집에서는 목돈 마련의 수단으로 담배를 경작하였고, 여름철에는 방에다 누에를 쳤다. 나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골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런 푸근한 이미지가 내 가슴에 바탕화면으로 깔려져 있다.
12km 거리의 읍내 보은 중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진학한 초등학교 동창도 별로 없고, 방과 후면 장거리 통학으로 귀가하기가 바쁘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도 없었으며, 공부에 집중을 할 여건도 안 되었다. 중학교의 추억으로는 남아있는 것은 다양한 통학 수단뿐이다.학교와 가까운 이모네 집에서도 다녀 보고, 도보로 30리 길을 통학도 해 보았다. 도보로는 3시간여, 하루 6시간 정도를 걸어서 다녀도 보았다. 어머니가 새벽밥을 짓고 5시 경에 깨우던 소리가 어머니에 대한 가장 정감어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자전거 통학도 산골짜기 지퐁골 고개 길을 자전거로 이동하기가 힘들어서 3km 거리의 문암 마을에 자전거를 맡기고 다녔다. 겨울철은 방을 얻어 할머니가 밥을 해주기도 하였고, 하숙도 해 본 경험이 있다. 중 3때에는 체육시간에 다리골절로 기브스를 하고 한 달을 집에서 요양을 한 일도 있었다.
시골 농촌의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공부와 진학에 대하여 직접적인 관심이나 조언이 없었다. 그저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 것을 지켜 볼 뿐이다. 나도 고등학교를 가야하겠다는 필요성, 목표나 간절함도 없었다. 학교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합격을 하였어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를 해 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내 명문이라는 청주고등학교를 응시하여 실패를 하였다.
3. 우연을 넘은 인연
지나 온 삶은 무엇인가의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기 보다는 누군가에 이끌림에 의하여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이를 사명(使命) 보다는 소명(召命, calling)이라고 표현해 본다. 관심을 갖고 도전하였던 고등학교(청주고), 군대(육군사관학교), 대학(충북대학), 교사(경북, 충남) 등에는 실패를 하였다. 그러나 우연을 넘어 인연 따라 본의 아니게 육군병장으로 병역에 의무도 하였고, 학사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교직으로 정년을 마치게 되었고, 대학 목회에 더하여 해외선교라는 소명을 받기도 하였다.
‘착각은 자유’라고 해도 좋다. 나에게는 ‘위대한 착각’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하늘의 과분한 은총과 은혜로 불림을 받았다는 믿음이었고, 갚을 길은 한이 없고, 인도 해 준 모두에게는 고맙고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다.
1) 농업고등학교 진학(1970년 3월)
고등학교 입시 실패를 하고 진학에 대한 관심도 없이 지내던 중에 중•고등학교 시절 함께 자전거 통학을 하던 같은 마을의 유호영(농업과3) 선배가 농업고등학교에서 추가로 학생을 받고 있다는 안내를 해 주었다. 입학식이 한참 지난 후에 학교를 찾았으며, 농업과, 임업과, 축산과 등이 있으나 목적이나 전공 등에는 관심도 없었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정해주는 농업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군내 유일의 남자 고등학교이기에 학생들의 사연도 각양각색이었다. 타지에 갈 수 없는 형편, 실력이 부족하거나 타지에서 입시 실패한 학생, 초•중학교 때의 선후배가 함께하는 경우 등 복합적으로 구성이 되었다. 마음을 잡고 집중력을 갖고 시험에 임하면 반에서 1등, 때로는 전교 1등 소리도 들어 보았다.
2) 통일원리를 접하다(1971.12.21)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3일 전에 같은 반 이창희(성화학생회장)가 갑자기 내용은 말하지 않고, “부탁을 하나 들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약속을 했고, 그 부탁으로 따라 간 곳이 통일교회이었다. 평소 교회에는 관심이 없어서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약속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어서 따라갔다. 성화학생 3일 부흥회를 실시 중이었다. 둘째 날은 타락론 강의였다. 유일한 초청자가 된 관계로 융성한 환대를 받았고, 강의 내용이 내 마음을 끌었다. 삼일 째는 강의가 없었고, “방학 중에 청주에서 성화학생 7일 수련이 있다.”고 권유하여 참가를 하였다. 수련활동으로 받았던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교회활동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3) 통일교회 체면을 세워라(1972.11)
대학진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교회 다니는 것이 좋아서 교회 활동에만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며 보냈다. 고3 방학도 서울 전국성화학생총회 3일, 성화학생 하계전도로 진천교회에서 21일, 그리고 교구 수련 7일 등으로 집을 떠나 교회활동 참가로 바쁘게 보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 후에 오정근 담임선생님의 수업(전작) 시간에 통일교회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교회에 대한 비난을 하였다. 담임선생의 보은여고 2학년인 딸(오미숙)이 외가에 놀러 간다고 하고는 성화학생 21일 하계전도로 진천교회에 함께 참석하였다. 그런데 기간 중에 담임 선생님이 장인의 부고로 처가에 가 보니 딸이 없었다. “외가에 있지 않다면 어디로 갔는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교회로 긴급 연락이 와서 오미숙 학생은 전도 활동을 중단하고 귀가를 하였다.
담임선생은 딸의 7일 금식 이야기를 시작으로 통일교회를 비난하더니, 급기야는 나의 성적을 문제 삼았다. “반에서 1~2등을 하던 김동근이도 통일교회에 빠져서 성적이 엉망이다.”라는 말까지 곁들였다. 내 입장에서 보면, 시험에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안 좋은 것이지, 교회활동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노병승교역장께 보고를 드리니 “교회 이미지를 실추시켰으니 반드시 책임을 지고 체면을 세우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였다.
그 동안의 학교생활은 대학진학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보냈는데, 3개월 정도를 남겨놓고, 대학입학예비고사에 도전을 하라는 말씀이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을 하여 2주 정도 해 보았으나 자신이 없었다. 또한 나보다 성적이 못한 친구가 합격을 하고, 내가 실패를 하면 더 교회 체면을 구기는 것 같아 교역장을 찾아뵙고, 포기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니 “믿고 도전하라.”는 말씀뿐이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두 달여를 준비를 하였고, 결과는 믿기지 않는 합격을 하였다. 담임선생은 합격소식과 함께 전체 앞에서 “통일교회에도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였다. 역시 승리하여 좋은 결과를 얻게 되니 비판이나 비난이 사라지고 칭찬이 있게 되었다. 교회의 체면을 세워 주는 기회도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이요, 신앙에 대한 확신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4) 대학문을 두드리다(1973.3)
경제적 여건도 그렇고, 대학진학에 대한 관심도 없이 보은교회에서 성화학생수련기간에 7일 금식을 하는 중이였다. 농업고등학교에서 어렵게 예비고사에 합격을 하였는데 진학을 않고 있으니까 내 사정이 아쉽게 보였는지 김대식(양잠)선생이 축하 겸해서 조찬을 차려 놓고 나를 부르셨다. 금식 중이라 식사는 사양했다. 선생님은 서울 건국대학교 입학원서를 전해주시며 “시험만이라도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대학은사라는 농업교육과 백대현교수를 추천해 주었다. 그냥 응시를 해 본 것이 4년 장학생이라는 합격통지를 받았다. 이로써 우골탑의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인연이 없었으면 대학생활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김대식선생은 중•고•대•대학원 및 윤리교사까지 선후배의 학연을 맺게 되었다.
5) 영원한 CARP인이 되다(1973.3)
건국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장안학사를 찾아가 김봉태학사장과의 만남으로 원리연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섭리에 2등은 없다.”는 집념과 열정, “정성을 드려서 안 되는 일이 없고, 정성 없이 되는 일이 없다.”라는 절대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동을 받았고, 많이 배웠다. 대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원리연구회 활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6000가정 축복 후에 공직으로의 출발인 대학 순전단 활동을 시작으로 장안학사장, 경원학군장, CARP 선교사로 해외에도 다녀왔다. 이 모든 것이 김봉태학사장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그는 내 인생의 멘토이였으며, 신앙의 대부이었다.
6) 재산보다는 배움을 물려줘라(1973.9)
농사에 밑천인 소를 팔아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만 약속 받고,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2학기 등록금에 대한 생각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려고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보다는 원리연구회 활동의 기회가 한 학기뿐이라는 절박함이 앞섰다. 나는 원리연구회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 학기를 마치고 2학기 개강을 하여 상경을 하였으나 등록을 못하게 되어 낙향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안학사 오성환(전국대학원리연구회 회장, 축산3)선배가 함께 시골 보은 집까지 동행을 하여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보다는 배움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지는 결단을 하여 땅 두마지기를 팔아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고, 나는 한 학기를 더 연장하게 되어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7) 대학복귀의 꽃을 피우다(1974.11)
대학 내 중심식구들이 휴학을 하고 헌수생으로 동원(1972년)이 되다 보니 대학의 학사활동은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분위기이었다. 대학 초년생이었을 때 조돈희(농학2, 건국대원리연구회장)선배와 만났다. 믿음의 자녀이기도 한 그는 나에게 원리연구회 활동의 동반자이면서도 대학생활의 우산이 되어주고, 징검다리가 되었다. 농고 출신에 농과대학, 교비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함께하는 것까지 동변상련의 심정이었다. ROTC 간부, 총학생회장 후보(1974년)로 캠퍼스 내에 널리 알려진 지명도로 학사활동에도 학교 간부급 학생들이 많이 모였다. 급증하는 전도 실적이 있었고, 원리연구회가 교내 총장배 써클대항체육대회(1974.6)에 우승을 하였다. 이런 성과로써 장안학사의 전성기 꽃을 피웠다.
특히 선배의 권유와 도움으로 기숙사(생활관) 자치회 식당운영을 맡게 되는 식당운영부장(식감) 선거에 출마를 하여 당선이 되었다. 그 수당으로 학자금 대출 상환을 할 수가 있었고 학업을 계속하는 결정적 계기도 되었다. 이처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나는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8)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1975.3)
1학년 성적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을 시골에 송금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3학년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되는데, 보증인이 필요하였다. 주위에 마땅히 부탁할만한 지인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이에 대한 문제는 김우상(생활관 신관 사감)선생이 직접 학교거래 은행인 한일은행을 찾아가 보증을 해결해 주어서 무난히 3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대출금 상환은 기숙사 자치회 식당을 운영하는 수당으로 매월 상환을 하게 되었다.
9) 사회의 첫발을 딛다.(1979.10.1)
대학 졸업(1977.2) 후 병역의무를 마치고(1979.6) 진로를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대학 은사인 백대현교수를 찾아뵈니 후계자로 함께 일을 하였으면 하는 제안을 하였고, 김봉태회장은 학사 활동을 권하였다. 3주간(1979.7. 20~8.12 강원 인제, 횡성)의 순전단 4기 지방 순회 전도 일정에 동참해 보았으나 군 생활에 무뎌진 신앙에 당장 목회현장에 나선다는 것은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정동곤(축가, 일화연구실) 장안학사선배가 일신석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는 안내를 해 주어 장안학사에서 생활을 하며 잠시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마음으로 일신석재공예(주) 총무과에 입사(1979.10.1)를 하였다. 교회 내 회사에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을 하면서 3년여의 기간 중에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고, 약혼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실로 감사한 기간이었다.
10) 하늘이 예비한 교직(1980.9.)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학사생활에서 벗어나 구리 수택리에 정동곤선배의 자취방으로 합류하여 바쁜 생활을 하였다. 출근 전에 새벽반으로 청량리 재수생 학원에서 영어 한 강좌씩 듣기도 하는 등, 무엇인가 보고 듣고, 찾아보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승수선배(농화학)가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며 나에게도 추천을 하였다.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퇴근 후에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직과는 관계가 없이 교육행정 전공으로 입학(1980.9)을 하였다. 두 개 과목만 추가 이수하면 국민윤리 교사 자격증을 발급한다는 안내에 교직에 관심이라기보다는 한 과목이라도 더 수강한다는 생각에 신청을 하였다. 이렇게 받아놓은 국민윤리 교사자격증(1984. 02)이 17년 후에는 교직으로 발을 딛을 수 있는 소중한 준비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준비를 한 자에게 미래는 밝게 찾아오는 것을 깨달았다.
11) 섭리적 중심국가로의 파라과이 섭리(1994~1995)
지구촌 반대 남미에 조그만 국가 파라과이가 한 때는 참부모님 섭리의 중심국가로 부각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김형태 당시 남미대륙회장의 징검다리 역할과 물심양면의 많은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적집단인 하나님의 교회(Iglesia de pueblo de Dios) 간부들을 브라질로 초청하여 원리교육을 실시하였고, 파라과이 상황을 직접 참부모님께 보고를 드려 파라과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다. 파라과이 국가 지도자들의 방미 연수 등을 주관하여 진행하는 등, 참부모님의 파라과이 섭리에 물꼬를 트게 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 12월에 참어머님 파라과이 대회, 1995년 5월에는 국가적인 차원에 영접을 받으며, 참부모님께서 파라과이를 방문하였으며, 한때는 참부모님의 섭리에 관심이 파라과이에 집중되는 등 하늘의 특별섭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1995년 6월경 김형태회장은 남미 특별순회사로, 나는 UTS 입학을 명받아 브라질과 파라과이를 떠나게 되었다. 동병상련의 상황에서 김형태회장은 그 동안의 함께하였던 소회와 “김선교사는 욕심이 없는 것이 단점이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에게는 이 조언의 말이 칭찬 겸 감사의 의미로 들렸다.
12) 2세섭리의 현장으로 가다(1997.3)
참부모님으로부터 미국에 UTS 입학을 명받아 파라과이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1995.8) 귀국을 하였다. 미국 입국 비자를 준비하던 중 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점을 UTS에서 인정이 된다기에 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 해외선교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졸업논문으로 ‘국가복귀를 위한 파라과이 선교전략’으로 수료를 하였으며, 파라과이 선교활동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UTS입학을 위해 선교본부에서 초청장 등의 서류를 보내왔으나 미국 비자를 발급 받지 못하여 입학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봉태 부협회장은 내게 교구장으로 일하는 것에 대해 내 의향을 물었고, 당시 세계선교본부장은 내게 국가메시아로서 출국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 차에 원리연구회 순전단 활동을 함께하였던 김영배(선정관광고)선생으로부터 선정학교에서 윤리교사 채용 공고를 안내 받았다.
세계선교본부장에게는 10여년의 가족과 떨어져 지나왔는데, 다시 기약이 없이 선교사로서 출국을 하는 것은 가족에게 부담이 되기에 잠시 가족을 추스르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의견을 드렸다. 그리고 선정학교의 교사 모집 이야기를 말씀드렸고, 선문학원이사장의 추천으로 2세 섭리의 교육현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선정고등학교에서 모집을 하였으나 학교에서는 통일교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를 해서 선정여자중학교에서 교직 시작을 하였다. 2년 후에 선정고등학교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21년이라는 기간 동안 청소년 활동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교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국민윤리 교사 자격증이 있었고, UTS 입학을 위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여 새로운 진로를 결정하여야 할 때에 선정학교에서 국민윤리 교사채용을 하였으며, 또한 그 상황을 알려준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일이다. 과히 하늘의 특별한 은총이며, 인도하심이라는 소명감을 갖고 보낸 생활이었다.
4. 남기고 싶은 말
1) 아쉬움과 미련
내가 평소에 지향하는 것은 부족함을 채워가며, 주변에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며, 비우고,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활이다. 지난 세월은 나름 소명, 사명, 정명정신으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좀 더 열정적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흘러간 시간을 원망하거나 후회는 없다. 주어진 일을 놓고, 열과 성의를 다하였으며, 나름대로 작지만 ‘할 말이 있고, 보여 줄 것이 있었으며, 흔적을 남기는 활동’을 해보았다. 오히려 과분한 은혜에 대한 감사함과 지나 친 축복에 송구스러울 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1971.12.21) 때 보은교회(성17회)에 입교를 하였고, 성화학생 7일 수련, 충북교구 7일 수련, 전국성화학생총회, 성화학생 21일 하계전도, 7일 금식, 사업 활동 등 성화학생으로서 기본적인 활동에는 동참을 하여 성화 17회 수료(1973.2)를 하였으며, 그러한 활동과 함께 대학진학이라는 하늘의 특별한 은총도 입었다.
1973년부터 원리연구회 활동을 시작하여 원리연구회 21일 수련, 21일 하계전도, 농촌봉사활동, 희망의 날 및 구국세계대회 활동, 건국대학교 원리연구회장, 원리연구회 중앙회 임원 활동을 하며 건국대학교 복귀라는 소명, 사명을 갖고 심혈을 기울여 보았고, 원리연구회 2기 수료(1977.2)를 하였다. 원리연구회와의 인연은 내 생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일신석재(1979년)에서 회사 생활을 3년 하였고, 6000가정 축복(1982.10)으로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동원이 되었으며, 1983년 5월에 원리연구회 순회전도단(7기)을 수료하였다.
원리연구회 장안 학사장(1984년), 춘천 학사장 겸 경원 학군장(1985) 등 원리연구회 공직으로 3년을 활동하였고, 해외선교로 태국(1986년 11월), 필리핀(1987년 2월), 칠례(8월)를 거쳐 파라과이(1988년 1월)에서 세계 최초의 국가 복귀라는 꿈을 갖고, 한때 참부모님의 중심 섭리국으로 부각되는 등의 해외선교로 10여년을 활동하였다.
새로운 비전, 새로운 도전, 새로운 2세 섭리의 부푼 꿈을 안고, ‘환경의 파수꾼, 통일의 선봉장, 세계화의 주역’을 부르짖으며 동아리 성화반을 조직하여 선정 중•고교(1977년)에서 교직생활 21년 동안의 활동을 펼쳐 보았다. 작으나마 그 활동의 결실을 참가정에 문신출 학생에게 연결하고 정년(2018.2)을 하니 대내 그룹을 벗어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보낸 세월이 어언 40여년이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아내는 지난 세월에 대한 못 다한 여운이 남아있고, 앞날에 대한 미련이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늘 아내에게 미안하고 아직도 돌려주어야 할 채무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남은 세월에 작은 조건의 탕감으로라도 청산하고픈 바램이다.
2) 회갑을 맞는 아내에게 바치는 내 마음
바람 잘 날 없는 당신에게
돌이켜 보면 당신과 만남이 1981년도이니 어언 40여년이 다가 오는 것 같네요. 꿈 많은 시절에 떨어져 있을 때의 그리움을 제외하고는 함께 보낸 세월 중에 기억해 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 별로 없음에 많이도 섭섭하였을 것이고, 자신으로도 그 점에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지요. 며칠 전에 김봉태총장 사모와 몇 명이 모여서 어려웠던 학사 이야기를 나눌 때 당신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돌이켜 보면 견디기 힘든 씁쓸한 추억이겠지만, 먹을 것도 없는 학사 상황에다가 음식을 할 줄도 모르다 보니 학생들도 힘들었고, 당신에게도 정말 미안했던 학사장 생활이었습니다. 그 후 10여년의 해외생활에 자식 3명을 키우며 고생으로 보낸 세월도 마음에 빚으로 남아있지요.
돌이켜 보면 자신으로는 지난 세월에 주변에 과분한 은혜도 받았고, 많이도 신세를 졌지만, 당신에 대하여는 평생을 두고도 갚을 수 있을까 하는 큰 빚을 진 것만 같다오. 하지만 아직도 갚아가기는 커녕 짐만 더 지우는 듯한 처지이다 보니 그저 남편이라는 자가 한심스럽고 원망 또한 많겠지요.
분에 넘친 은총 속에 나름 바쁘고 은혜롭게 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이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었고, 정년 후에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친척들을 찾아보고 여행을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지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황이 다양하겠지만, 가족과 10여년을 떨어져 해외에서 보낸 자신에게는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이것이 가장 소중하고 큰 바람이었답니다.
김봉태총장의 김명희 사모께서도 “총장님과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갔었고, 언제나 하는 말씀이 공직 끝나면 실컷 여행 다니자 했는데 혼자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게 야속하다.”고 하시더군요. 그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는 있으니 감사하다.”라고 말을 해도 되는지는 조심스럽네요. 옛 선조들이 “여행도 젊어서 즐겨야 한다.”는 말이 다 일리가 있음을 이제야 느끼게 됩니다.
참부모님은 내가 직접 관계하기에는 너무 멀고 높게만 보였고, 일반 목회자들과의 관계도 없이 오직 원리연구회 활동으로 김봉태 총장과의 관계만 오랜 인연을 갖고 지내온 세월이었지요. 이제는 그 분도 안계시고,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큰 자부심을 갖고 격려를 해주셨던 작은 아버지(임성송 목사), 또한 지금교회에 박태성 목사도 안계시니 중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내외적으로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현실이다 보니 신앙마저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구정을 앞둔 날(음12.28)이 생일이라 제대로 생일 축하모임을 못함에 늘 아쉬워했던 당신이었지만, 평생에 한번이라는 회갑이야말로 오래도록 기억을 하고 싶은 생일로 많이도 기대가 되는 날이었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어려운 상황에 오랜 기간 정성껏 마련한 거금을 들여 호주여행이라는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냥 평범한 생일과 같이 지나침에는 많이도 섭섭하고 아쉬워 할 당신의 모습을 많이도 생각하여 왔었지요.
나도 한 때는 그럴 마음이 있었으나, 어쩌다 현실이 뒷받침이 안 되다 보니 많이도 안타깝고 미안한 생각으로 오늘을 맞게 되었네요. 회갑을 맞는 당신에게 감동을 줄 선물도 없고, 그러다 보니 건네 줄 따뜻한 말 한마디가 없음이 많이도 안타깝네요.
회갑 선물이라고 당당하게 전해주지 못하고 보물 찾기라도 하듯 숨겨 놓고 부안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만 일전에 김명희사모께서 갑작스런 돈을 건네주시기에 너무 당황이 되여 사양의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아내의 회갑에라도 보태라.”는 말씀에 김봉태총장님과 사모님의 공동 축하금으로 여기고 고맙게 받았지요. 아마도 총장께서 생존에 계셨어도 당신에게 그 정도의 축하는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아껴주고 격려해 주셨던 김봉태총장께서 당신의 회갑을 앞두고, 사모님을 통하여 당신에게 축하를 해 줄 수 있는 그런 일이 갑자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치고는 정말 뜻깊은 인연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함께 작지만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감사한 회갑으로 위안을 주시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억지를 부려도 봅니다. 어제는 구정을 앞두고 두루 평안을 기원도 할 겸 신창수이사의 행복선원을 들렀고, 선물을 고르는 일로 얘기를 나누다가 어차피 필요할 것 같아 염치스럽게도 당신의 축하케익 부탁을 해 보았지요. 이사님도 그렇게라도 축하를 전할 수 있음에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지요.
지난 세월을 버텨 온 것에는 추억으로 좋았다고 생각하고, 지금에 생활은 더 좋구나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의 일에는 더 좋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만들어 갑시다. 내 사는 것을 남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그러한 삶이되기를 염원해보며, 건강과 평안함이 늘 함께 하세요.
2021년 2월 9일(화)
회갑을 맞은 당신에게
남편 김동근 드림
3) 나의 가족, 우리 가정
나는 연애를 할 줄도 모르고, 경험도 없다. 통일교회가 아니었으면 삼포(연애, 결혼, 자녀)인생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뜻이 무엇이라고 아내(임향욱)는 6년이라는 나이차도 마다하고 애 띤 나이에 1981년 5월에 나를 남편으로 만나 1982년 10월에 축복을 받았고, 축복 가정 3년 임지활동을 마쳤다. 아내들의 동원은 남편과 가족을 다 버리고 전도활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섭리적 의의를 갖는 동원이었다.”(《말씀선집》 제43권, 160쪽) 아내와 나는 이 거룩한 대열에 동참하였다. 원리연구회 학사장 사모 3년, 그리고 해외선교 기간은 10여년을 한국에 남아 홀로 자녀들을 돌보며 지내는 등 좋은 시절을 고생으로 보냈다.
한국에 홀로 남은 아내는 신혼의 달콤함을 뒤로하고 한 놈은 업고, 보따리는 안고, 양손으로 한 놈씩 잡은 채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을 하랴 시댁인 보은과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와 할머니를 챙기려 친정 부안을 오르내렸다.
환고향 섭리에 참여도 하였고, 특히 감사한 것은 나도 챙기지 못하였던 보은에 계신 어머니를 원리수련에 초대도 하고, 1988년에 독신 축복을 받게 하였다. 아내의 삶은 말 그대로 일인다역의 분주한 생애였다.
아내 덕분에 속세에서 금메달이라는 아들 하나(1986년), 딸 둘(1989년, 1990년)을 두었다. 첫째는 생후(1989.7.26) 120일 만에 선교를 떠나(1986.11.26.) ‘선교둥이’라 칭하였다. 둘째는 1988년 서울 올림픽(1988.9) 때 “전 세계 선교국 지도자들은 한국에 와서 선교국의 참가 선수들을 지원하라.”는 말씀에 의하여 파라과이 교회 지도자들과 방한을 하였다가 ‘님도 보고, 뽕을 따다.’보니 ‘올림픽 둥이’가 생겼다. 막내는 1990년 2월 한국에서 개최된 부모님 고희 행사에 세계선교사들의 참가로 방한을 하여 얻은 고희선물이다.
해외 선교 기간은 가족과 떨어져서 보내다 보니 어린 시절에 아빠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게 되어 정적으로 거리감을 갖게 된 것 같다. 또한 소명감이라는 미명하에 주어진 일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가족들과의 기억에 남을 추억이 별로 없고, 공적이라는 틀에 얽매이다 보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함이 많아서 아쉽고, 늘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우리 집은 선문가족이다. 아들은 선문대학교(정보통신학과), 아내는 통일신학교(보육학과), 나도 선문대 신학대학원(해외선교학)을 수료하였으니 큰 틀에서 같은 선문대학교 동문이다. 그리고 두 딸은 참어머니와 참자녀들이 졸업한 선정중학교의 동문이고, 나는 선정중•고등학교에서 21년의 교직생활을 하여서 소중한 학연으로 이어진다. 이 의미 깊은 인연(因緣)을 뜻을 중심삼고 천연(天緣)으로 더욱 고양(高揚)시킬 것이다.
‘우연에 관심을 두면 인연이 되고, 인연에 공을 들이면 필연이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 삶의 여정을 우연이라는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을 인연이라고 쓰고, 하늘의 소명으로 필연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 길은 하늘의 은총이고, 은혜이었으며, 감당하기 벅찬 축복이었다.
첫댓글 손기문님 댓글
김동근선생님! 자서전 잘읽었습니다. 우리가 갈현교회시절 목회자와 식구로 만나서 정담을 나누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수십년이 흘러 이제는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리고 깊이패인 주름에 세월에 무상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싯점에 동근선생님의 자서전을 보니 수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젊디 젊은 청춘을 남미선교에 불태웠던 위대한 열정에 존경에 예를 표합니다. 갈현교회시절 말이없고 과묵하셔서 아내에 대한 사랑의표현은 볼수없었는데. 오늘 글을 통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모쪼록 온가족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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