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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귀촌 알짜가이드 스크랩 서울 출신 귀농인 "7년 과수 농사 지어보니..."
강나루 추천 0 조회 105 09.10.21 0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출신 귀농인 "7년 과수 농사 지어보니..."
“마음은 편한데 아직 돈은 안 돼요”
오현주 기자
서울에서 살다 가평으로 들어가 포도농사를 짓는 손용석 이숙화 씨부부.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대부분의 여성들은 귀농을 반기지 않는다. 시골 생활이 힘들고 답답해서란 이유에서다. 귀농한 부부들을 보면 남자 쪽에서 먼저 들어가자고 한 경우가 많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따라 들어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여자 쪽의 마음이 바뀐다. 싫었던 적이 언제냐는 듯 시골을 좋아하는 걸 보게 된다. 간혹 가다가-매우 드문 일이지만- 먼저 들어가자했던 남자가 마음이 바뀌어 오히려 도시로 나가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경기도 가평에서 포도 복숭아 등 과수농사와 벼농사를 짓는 손용석 씨(53세) 부부가 그런 경우다. 손씨는 처음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했다. 그래서 시골로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후회한다. 이유는 남는 건 없고 빚만 늘어나서다. 반면에 그의 부인 이숙화 씨(48세)는 시골 생활에 만족한다. 다시 도시로 나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씨는 처음에 남편이 시골 가자고 했을 때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각자의 생각이 달라진 걸까.

지난 2006년 2월 말, 봄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손용석 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승용차로 양평- 홍천간 6번 국도를 탔다. 유명한 옥천냉면집 들어가는 지방도로 좌회전 들어가 37번 국도로 갈아탔다. 이 도로는 양평에서 청평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산세가 깊고 수목이 많아 휴양림 등 삼림욕 하는 곳이 많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올랐다. 차량들이 거의 없다. 중미산휴양림을 지나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패러글라이더와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산이 높고 코너가 많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사고를 당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헤어핀 같은 급 코너에서 속도를 내고 돌아나가다 핸들을 틀지 못하고 도로를 이탈해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이다.

손씨가 혼자 지은 판넬집. 용접만 할 줄 알면 이 정도 집은 혼자 지을 수 있다고 한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유명산 정상에 올랐다. 도로 좌우에 간이식당들이 대여섯 채가 있었다. 커피와 라면 등을 팔고 있었다. 반대편 내리막길로 천천히 내려갔다. 오른편으로 유명산과 설악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집과 길과 논밭이 숲 속에 파묻혀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을 내려가자 평지가 나왔다. 왼편에 전원주택 단지가 보였다. 다닥다닥 붙여지었다. 시골에서까지 저렇게 답답하게 살 필요가 뭐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평 방향으로 2,3분 달렸다. 왼편에 손씨가 가르쳐준 주유소가 나타났다. 맞은편 길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다일공동체 입구를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다일공동체...“밥퍼 주는 목사님”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가 운영하는 공동체이다. 최일도 목사는 1989년 청량리의 자그만 2층 다락방 같은 곳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윤락녀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노숙자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청량리에서 솥 하나와 버너 하나로 라면을 끓여대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수많은 불우이웃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있다.

최 목사의 희생과 고난의 길에 뜻 있는 이들이 자원봉사에 나섰고 후원에 동참했다. 그런 온정의 물결 덕분에 오늘날 최 목사는 다일교회 목사로서, 다일복지재단, 다일천사병원, 다일공동체 등 커다란 조직체를 운영하는 사회 저명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부인 김연수 씨는 수필가이다. 김씨는 수녀 출신이다. 최 목사는 개신교이다. 드물게 구교와 신교의 결합이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기자는 최일도 목사 부부와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최 목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5년 전, 그들 부부의 러브 스토리를 한 주부잡지에 소개한 적이 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최 목사가 격렬하게 항의를 해왔다. 수녀복을 입은 아내 사진을 게재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최 목사가 기자에게 직접 전해준 사진이지만 문제는 천주교 교단이었다. 최 목사는 당시 기자가 소속된 신문사까지 찾아와 잡지에서 자신의 기사를 빼달라고 했다. 무리한 요구여서 결국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 일로 한동안 최 목사와 소원한 사이가 됐다. 시간이 흐르고 중간에 김연수 씨가 화해의 역할을 해 서먹했던 사이는 회복됐다.

이숙화 씨가 거실의 화초를 돌보고 있다. 이씨는 시골생활에 만족해 한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다일공동체란 팻말을 보고 잠시 최 목사와의 일들을 떠올렸다. 말만 듣고서는 손씨의 농장을 찾아가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시골집이란 것이 말만 듣고 찾아 나섰다간 낭패 보기 일쑤이다. 다행히 손씨가 트럭을 타고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의 차를 뒤따라갔다. 다일공동체 입구를 지나 마을을 관통했다. 다시 지방도를 타고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섰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길이었다. 어김없이 서양식 전원주택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논과 밭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안쪽 깊이 들어갔다.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산 밑의 집 마당에 손씨의 트럭이 멈추었다. 야트막한 집이다. 조립식 같았다. 집 옆에 자그만 비닐하우스가 붙어 있고, 산 쪽에 또 하나의 하우스가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비포장 길이 산 쪽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30~40가구가 모여 사는 자그만 마을이다. 주민들은 표고와 논농사를 주로 한다.
손씨는 “여기서 길이 끝나요. 이곳에 들어오면 돌아나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깊은 산골짜기였다. 서울에서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이런 촌구석이 있다니...할 정도였다.
손씨의 안내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거실에 두 개의 소파가 덩그마니 있었다. 창문이 있는 벽 쪽에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손씨가 포도즙을 컵에 따라 내왔다. 자신의 농장에서 수확한 포도라고 한다. 적당히 달고 맛이 좋았다. 잔 밑에 침전물이 많이 깔렸다. 부인 이씨는 결혼식에 갔다가 인터뷰 중간에 집에 돌아왔다.
“작년 농사는 잘 됐는가요”하고 안부 겸 물었다. 손씨는 작년에 처음으로 수확다운 수확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 전까지는 수확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묘목이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손씨 부부가 전지를 하고 있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손용석 씨는 7년 전인 1999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손씨는 서울 출신이다. 은평구에서 성장했다. 도자기회사를 다니다 그만 두고 성남에서 청과도소매를 했다. 그러다가 IMF를 맞아 장사가 안 되면서 빚더미에 올랐다. 손씨는 “빚 독촉을 받으니까 석 달 사이에 몸무게가 10kg가 빠지더군요”라고 악몽 같았던 당시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 사촌 처형이 ‘시골에 사과밭이 있는데 들어가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 왔다. 손씨는 도시에서 고생스럽게 살 바엔 차라리 도시의 연을 끊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시골로 들어가 농사지으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였다. 시골 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숙화 씨는 시골 출신이다. 이씨의 고향은 바로 설악면이었다. 사과밭은 이씨의 고향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이씨의 부모는 정미소를 했다. 어릴 적 이씨는 농사짓는 것이 싫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서울로 나갔다. 이씨는 “시골 살기 싫어서 서울 사람하고 결혼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손씨는 아내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장인 핑계를 댔다. 친정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했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이씨는 그제서야 하는 수 없이 들어갔다.
이씨는 들어와서 갈등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자 이왕 들어온 거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오기도 생기더라고 했다.

첫해에 검정콩 하얀콩 팥 들깨 참깨...등등 있는 대로 심었다. 이씨는 콩을 수확해서 털고, 키질하고, 선풍기로 날리고... 몸을 사리지 않고 농사일을 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였다. 농사일을 몰라 주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친정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심는 건지를 가르쳐주었다. 이버지 친구분들, 동생 친구들도 도움이 됐다. 이 지역은 공기 좋고 물도 좋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커 과수의 맛이 좋다고 한다.
-농사를 처음 짓는데 할 만 하던가요?
“하니까 되더군요. 들어오기 전에 농업기술센터나 귀농교육 하는데 가서 듣고 배웠어요.”
관행으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유기농의 시대가 올 것이니까. 사과밭은 2,500평이다. 2년 동안 손을 안댄 묵은 밭이었다. 나무들은 병들었다. 손씨는 사과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손씨가 직접 충북 옥천의 묘목시장에 가 한 주에 300원씩 주고 600주를 사다가 심었다. 복숭아나무도 심었다. 복숭아 묘목은 포도보다 훨씬 비쌌다. 한 주에 1만 원씩이나 했다. 100주를 심었다. 두릅과 오갈피나무도 1,200주 심었다. 올해부터 엑기스를 낸다. 벼농사도 열마지기 정도 한다.

손씨의 집 내부. 거실이 널찍하다. 가구가 거의 없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포도나무를 심고 충북 괴산의 자연농업 연찬을 들었다. 기본연찬 117기이다. 자연농업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천연자재를 만들었다. 자연농업은 관행보다 일이 훨씬 많다. 관행은 농약 한 번 치고 한참 후에 다시 치면 된다. 그에 비해 자연농업은 천연자재를 여러 차례 나눠서 쳐줘야 한다. 자재 만들기도 처음에는 쉽지 않다. 준비물도 많다. 항아리도 사고, 흑설탕도 사고, 현미식초도 사야 한다. 칼슘이나 아미노산을 만들려면 가락동시장에 가 생선찌꺼기나 달걀껍질을 구해 와야 한다.
“자연농업은 여자의 힘이 없으면 하기 힘들어요. 들에 나가서 쑥을 따다가 담가야 하는데 그거 남자들이 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내가 많이 도와줍니다.”
토양관리는 자연농업에서 하라는 대로 한다. 한방영양제 뿌리고, 천연칼슘, 천연녹즙도 뿌리고 한다. 제초를 하지 않고 풀을 그대로 두고, 자재를 뿌려대는 손씨를 보고 마을 주민들이 미쳤다고까지 손가락질한다고. 유명산 포도작목반 총무일을 보는 손씨는 현재 저농약 인증을 받기 위해 서류를 준비하고, 농사일지를 쓰고 있다.

손씨는 성남의 시골집을 처분해 마을의 빈집에 세 들어 살았다. 현재 사는 집은 3년 전에 지었다. 판넬로 지었다. 건축비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구해다 지었다. 동네에서 헌문짝을 주워다 달기도 했다. 33평이다. 방 두 개에 주방 그리고 널찍한 거실 등 간단한 구조다. 난방은 나무와 기름보일러를 같이 쓴다. 춥지는 않다고 한다. 건축 허가 내기 까다로워 관리사로 지었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고. 판넬 집은 용접만 할 줄 알면 혼자서 얼마든지 짓는다고 한다. 손씨는 한때 배관 일을 배워두어 그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숙화 씨가 포도나무 줄기를 벗겨주고 있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시골 생활이 어떻습니까?
“기회만 되면 도시로 나가고 싶어요. 여기선 돈이 안 돼요, 빚만 집니다.”
5년 동안 수확은 없고 돈만 들어갔다. 묘목 사고, 거름 사고, 생활비 하면서 있는 돈 다 까먹었다. 보험, 적금 등 도시에서 부었던 기본적인 생활비가 여전히 들어갔다. 차량유지비와 통신비 등도 만만치 않았다. 한 달에 1백만 원 이상 나갔다. 그 동안 2억 원을 까먹은 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골 들어오면서 신갈의 아파트를 7천만 원에 처분했다. 지금 그 아파트가 올라서 2억7천만 원이 됐다. 그러다가 작년에 비로소 포도와 복숭아농사로 2천여만 원의 돈을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내년 가을까지 살아야 한다. 이자 갚고, 올해 농사에 쓸 거름 사고, 생활비 하다보면 또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시골에서는 돈을 잘 빌려준다. 그거 넙죽넙죽 받아쓰다가 산더미 같은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밖에서는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었다. 들어와서 살아보니 알게 됐다고 한다. 이숙화 씨는 “농사는 생일 한 번 잘 차려 먹으려고 일 년을 고생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라고 거들었다.
“도시에서는 늘 돈을 만지잖아요. 그러다보면 돈이 불어나지요. 시골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돈을 모을 수가 없어요.” 손씨의 말이다.

대신 시골은 맘은 편하다고 한다. 일도 누가 하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한다. 옷도 격식을 차려 입을 필요가 없다. 일하는데 편한 옷이면 아무 옷이나 입는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누가 봐주는 사람도 없다.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일도 많이 하지 않는다. 손씨는 “비가 오면 안하고 겨울에 두서너 달 놀고, 일 년에 6개월 일하나?”하면서 아내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씨는 “6개월은 더 해요”라고 대답했다.
또한 공기 좋고, 물 좋고, 농약 오염 안된 먹거리에다, 밭일 하다보면 오장육부 튼튼해지고...건강 챙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 시골이라고 한다. 쌀과 부식 같은 건 해결된다.
“시골은 돈을 갖고 들어와야 돼요. 적어도 수확을 할 수 있기까지 3,4년은 먹고살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 망가졌을 경우 복구비가 있다면 귀농은 해 볼만 합니다.”

유명산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손씨는 시골 온 지 3년째 되니까 서울이 가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오히려 반대다. 이씨는 1,2년은 오기로 버텼다. 친구가 없어서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온 김에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시골에 맞게 자신을 바꾸었다. 이씨는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외향적으로 바꾸었다. 이씨는 “적응을 하려면 마음을 굳혀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씨는 부녀회장 일도 맡아서 한다. 김장도 담가주고, 독거노인도 도와주고, 재해가 나면 기금 모아 재해지역으로 전달하러 가기도 한다. 손씨는 “집에 안 붙어 있어요. 마을 일 보러 매일 나갑니다”라고 했다.
이씨는 “내가 들어오자고 했으면 (남편에게) 혼났을 겁니다. 당신이 좋아서 왔는데 이 고생이 뭐냐고 한소리 들었을 거에요.”라며 웃었다. 이씨는 남편이 도시로 나가자 해도 이제는 안나간다고 했다.
손씨 부부는 여름에는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하다가 낮에는 땡볕을 피해 쉰다. 다시 저녁 무렵 밭에 나가 밤 9시까지 일을 한다. 집에 들어와 씻고 저녁밥 먹으면 그대로 잠에 떨어지는 생활이다.
손씨 부부는 남매를 두었다. 큰딸은 스물아홉으로 서울에서 자그만 자영업을 하다 접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스물다섯 살짜리 아들은 군 복무 중 허리를 다쳐 쉬고 있다. 자녀들은 시골이 춥고 낯설다고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놀러도 잘 오지 않는다고.

다일공동체 입구를 표시해놓은 표지판.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손씨 부부의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손씨는 오전에 전지를 하던 중이라고 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포도밭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을 겸 일어섰다. 부부의 트럭을 뒤쫓아 마을 한켠에 있는 손씨의 포도밭으로 갔다. 양지바르고 약간 경사진 곳에 있었다. 겨울의 포도밭은 어느 과수원보다 황량하다. 나무가 짙은 회색에다가 형태가 비틀려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전지를 해줄 밭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부가 3~4일이면 전지를 다 마칠 수 있다고 한다. 이씨가 나무의 오른편에서 줄기를 걷으면 왼편에 선 손씨가 전지가위로 줄기를 절단한다. 그렇게 부부는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간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듯하다.
이씨는 병충해 피해를 피하기 위해 포도나무 껍질을 벗겨주었다. 손씨는 “이것도 자연농업에서는 그대로 둔다고 하는데...”하면서 자연농업과의 차이를 얘기했다.
포도는 귀농인이 하기에는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과수라고 한다. 복숭아보다 힘든 작목이라고. 손씨가 들려주는 포도 수확 과정은 대충 이러하다.

2월 말경에 전지하고 껍질을 벗겨준다. 벌레가 안 생기게 유황합제를 뿌려준다. 순이 올라오면 따준다. 한 순에 포도 두 송이를 단다. 중간에 약을 친다. 천혜녹즙을 바닥에 뿌려준다.
5월에 꽃이 핀다. 적화해준다. 한 마디에 2,3개 꽃이 피면 하나는 따준다.
송이를 솎는다. 알을 솎아줘야 한다. 너무 촘촘하면 알이 터진다. 80알이 달리게 한다. 무게로는 약 400~450g이다. 8월에 포도 덩쿨 손을 잘라주고, 열매를 달 때까지 이파리 사이의 곁가지를 쳐준다.
비가림 너머로 포도 순이 올라가면 그늘이 져 안된다. 잘라준다. 포도가 익으려면 한 송이에 12잎은 있어야 한다. 수확 때 줄기가 길게 내려온다. 이것도 따준다. 9월 중순부터 보름 정도 한다. 10월에 수확한다.

손씨가 귀농할 무렵 운악산 포도가 높은 가격을 받았다. 손씨는 포도를 하면 수익이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시작했다. 그러나 직판을 하지 않는 이상 서울 가락동 시장 등으로 넘기면 남는 것이 없다고. 물론 벼농사나 밭농사보다는 수확이 높다. 대신 판로가 쉽지가 않다고.
지난해 여름, 이숙화 씨는 생각 끝에 자판을 벌이고 팔아보았다. 하루 20만~30만 원어치가 나갔다. 잘 나가는 날은 1백만 원어치도 팔렸다고 한다. 한 달 못되는 기간에 다 팔렸다. 별로 고생스럽지도 않았다고 한다. 손씨의 포도는 영동 지역의 포도가 끝물일 때 시작이다. 그래서 가격을 일정하게 받는다. 5kg에 15,000원이라고. 이씨는 올해도 자판을 할 계획이다.

7년 전 가평으로 들어간 손씨 부부. 이씨는 마을부녀회장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www.naturei.net 2006-03-05 [ 오현주 ]

손씨는 귀농 당시 땅을 사두지 않은 걸 후회한다. 현재 가진 땅이 없다. 포도밭도 빌린 것이다. 손씨는 “귀농하면 무조건 땅을 사두라”고 주의를 주었다. 땅값이 해가 다르게 뛰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저히 사지를 못한다고. 농사는 실패해도 땅은 남는 것이고, 땅값은 계속올라 재테크가 된다는 것이다.
“이곳도 요즘 평당 30~40만 원 씩 해요, 춘천 고속도로가 뚫린다고 하니까 갑자기 오른 겁니다. 그런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 도저히 답이 안 나와요.”
손씨는 이어서 “작목도 정하고 시작하세요. 요즘 그런 거 가르쳐 주는 데가 많아요. 그리고 작게 시작하세요. 크게 벌리지 말고 서서히 늘려 나가세요”라고 충고해주었다.

손씨는 지금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조용한 곳에서 무농약으로 열심히 농사를 지은 자신의 과일이 사람들로부터 제일 맛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농사를 그만 둘 생각이다. 처음엔 10년만 지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길어질 것 같기는 하다고. 그리고나서 도시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저는 목장을 갖는 게 꿈이에요. 나중에 나이 들어 시골 들어가 전원생활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그게 IMF 때문에 좀 당겨진 겁니다. 노년에 여유롭게 살려 했는데...”

손씨는 시골 생활에 대한 꿈이 경제적인 문제로 어긋나 아쉬움이 남는다는 눈치였다. 기자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부부가 사이좋게 나머지 밭의 전지를 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설악면을 빠져 나왔다. 다일공동체 입구를 지나면서 ‘최일도 목사는 하늘의 복을 타고난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잡은 곳의 땅값이 꽤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최 목사의 개인 재산은 아니지만....
2006-03-05 13:04:55 ⓒnature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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