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래서 이 학교가 싫다는 거다. 어중이떠중이 같잖지도 않은 것들이 대학생이라고..."
호프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꽝'하고 터져 나왔다.
"아아.. 여러분을 환상적인 가요 스테이지로 모십니다. 준비됐습니까? 오--오... 오예!"
호프집이 싸움터가 될 것 같자 주인이 재치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사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일을 터뜨리면 무슨 난장판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호프집 주인의 아이디어에 동참하려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마치 힙합콘서트장처럼 호응을 하
며 분위기를 바꾸려는 중이었다.
"쳇.."
응식이 피식 웃었다. 머린 긴 남자도 어깨를 으쓱했다.
"붙을 분위기가 아니군."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응식은 머리긴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준건 돌려 받아야지!!"
휘익---불현 듯 응식이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한 대맞은 것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았다.
"느려!"
턱!!
남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응식의 주먹을 손으로 붙잡아 버린
것이다.
선영이 벌떡 일어 났다. 우리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응식도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야야, 태상아 적당히 해라. "
남자의 동료들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남자의 이름이 태상인 것 같았다.
태상? 태상...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같았다.
"네 이름이 박응식이라고? 형님, 저 박응식입니다. 박응식? 쿡쿡"
태상은 응식의 손목을 꾸욱 눌르며 응식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것은 조롱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무서워하는 사람은 딱 한 명 밖에 없다. 너같은 잔챙이하고는 비교가 안돼지."
응식은 그렇게 말하는 태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순간이었다.
응식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태상의 손아귀에서 주먹을 빼내었다. 그와 동시였다.
퍽!!
응식의 발이 그대로 태상의 명치부분을 걷어 올린 것이다.
선영이가 순형이오빠를 붙잡았다. 하지만 순형이오빠는 얼핏보기에도 주먹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
였다. 상대테이블에는 남자 세명이었다. 쓰러진 태상이라는 남자도 크게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쓰러지자 곧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아직도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음악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느닷없이 카운터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들. 음악 안 꺼?!!"
순식간에 호프집의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남자 세명이 응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응식은 물러서지 않았다. 호프집안에 있는 손님들중
누군가는 계산서를 챙겨들고 일어나고 있었지만 대부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
다.
"오빠..."
선영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순형이오빠의 팔을 끌었다.
순형이오빠는 연장자로써 뭔가 책임을 느끼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저기 술마시다 서로 감정이 격해진 것 같은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데..."
"넌 뭐야? 이 새끼야?"
세명의 남자 중 한 명이 테이블에 있던 500호프잔을 들어올려 그대로 순형이 오빠의 정수리에 내
려 찍었다.
퍽석--!
"악!!"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형이 오빠의 이마엔 어느새 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이 틈
틈히 살갗을 파고 들어 박혀 있었고 이미 얼굴은 피투성이었다.
"아악..."
순형이 오빠는 괴로운 듯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이 새끼들이!!"
응식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세 사람을 향해 달려 들었다.
"응식아 안 돼!!"
선영이 소리쳤다.
퍽!! 퍼퍽!!
호프집의 음악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술집이었다. 하지만 응식 혼자서 세 사
람을 상대하기엔 벅차보였다. 원래 그런 것인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인지 응식은 마음먹은대로 주
먹질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럭저럭 버텨 내는 것 같았으나 이내 균형이 깨지고 세사
람의 집단 폭행을 당하는 양상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이새끼!!"
"죽어 봐. 죽어 봐. 죽으라고!!"
응식은 몸을 꿈틀거렸다. 받아칠려고 헛팔질을 했지만 오히려 더욱 얻어 맞고 있었다.
"말려요!! 좀 말려요!!"
선영과 내가 다른 테이블에 달려 가서 아무남자에게나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엉거주춤
거릴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테이블 몇 개가 싸움박질하는 서슬에 우당탕거리며 쓰러지
고 바닥엔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위험하게 흩어졌다.
"좀 말려 주세요!! 좀..."
"그만해!! 그만하라구!!"
선영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균형이 깨어졌다. 응식의 얼굴에도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무서웠다. 남자애들이 저렇게 싸우는 건 본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머리칼을 붙잡고 서로 늘어지는 여자들의 싸움에 익숙할 뿐이었다.
호프집주인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을 부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짓밟았을까... 응식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상태로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바
닥을 시냇물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역시 머리가 찢어진 순형이오빠가 괴로운 듯 바닥에서
꿈틀 거리고 있었다.
"퉷. 가자."
태상은 굵은 침을 바닥에 뱉어내고 호프집을 나섰다. 선영이 달려가 응식을 부둥켜 안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정적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는 남자 둘을 부축하면서 호프집을 빠져 나와야만 했다. 웅성거리
면서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액션영화다 완전히..."
"죽인다. 와... 호프잔으로 머리 내려 찍는거 봤냐?"
"세상 무섭다니까.. 어휴,,"
화가 났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려달라고 할 땐 꼼짝도 않더니 사람 둘이 피투성이가 되
어 쓰러 졌는데 오히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차라리 이정우가 이럴 때 있었다면....
치잇....
응식과 순형이오빠는 나란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순형이 오빠는 다음 날 학교에 나왔으나 응식은
크게 다쳤는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선영이는 안절부절거리며 거의 울고 있었다.
"이거."
어느 새 다가온 정우가 내게 무언가를 툭 던졌다. 경기방언에 대한 자료정리였다.
"이게 뭐야?"
"리포트. 내 할 일은 다했다. 조 단합대회는 잘 했어?"
"어? 그게..."
정우는 책상에 엎드려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는 선영을 잠깐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왜 저래? 쟤."
"아무것도 아냐. 응식이가 싸우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거든."
"병원? 훗.. 크게 붙은 모양이군. 그러다보면 몸도 단련되고 좋지. 무슨 큰일이 났다고 울어?"
정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거리며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정우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야, 이정우."
"어?"
"넌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넌 많이 당해 봤다 이거니?"
"뭐?"
"넌 친구 없지? 일진이니 이진이니 아래위만 있어서 친구가 다친 기분을 모르지?"
정우는 말이 없었다. 지영은 팔짱을 떡 끼고 정우를 쏘아 보았다.
"내가 말이 좀 험해도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 말 새겨 들어라. 세상에 너처럼 자기 혼자 잘
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친구를 돌아볼 줄아는 사람도 있어. 그거 알아?"
"지..지영아..."
나는 지영이를 말렸다. 하지만 지영은 멈추지 않았다. 원래부터 정우에겐 악감정이 있는 지영이었
다. 그리고 본래 정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탁탁 걸고 넘어지던 지영이가 아니었던가?
"너 친구라도 있어? 친구가 다쳤거나 친구와 헤어졌거나 친구를 잃었거나 그런 적 있어? 너한테
기억될만한 소중한 사람이 잘못되었을 때 기분을 알아?"
"알아야 하니?"
"참 나... 너한텐 네 주위에 있는 사람이 죽어야 겠다. 그래야 우리 기분을 알지. 그냥 다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 학교 찾아 온 네 깡패친구 둘 모두 죽어야 네가 우리 기분을 알지. 우리가 얼
마나 지금 참담한 지..."
정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쓴 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
"그래, 모르겠다."
"솔직하니 그건 맘에 드네. 넌 칼에 맞고 병원에 들락날락 거리는게 습관이 되서 모르나 본데 말
이야. 친구들이라고는 모두 너와 비슷한 인종들만 있어서 얼마나 가슴아픈지 모르나 본데, 응? 애
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우는 것가지고 너만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재단하지
마. 왜 사람들은 자기만의 잣대로 남들을 함부로 평가하는지 몰라.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
고..."
"그렇군."
"내 말 너무 고깝게 듣지 마. 사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나 말은 험해도 경우는 있는 사람이야.
너야 원래 산 게 그 꼴이니 우리하곤 다르겠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너만의 알량한
잣대로 우리를 재단하지 말아 줬으면 해. 친구나 애인이 다치면 슬픈 건 당연한 거야. 넌 그런 기
분 모르겠지만 말이야."
지영은 유치원생 다루듯 정우를 타이르고 있었다.
"적어도 응식은 너처럼 분위기만 잡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는 아니었어. 우리한텐 소중한 애라
고. 제발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니 멋대로 떠들지 좀 말아 줘. 듣는 사람 기분나
쁘니까."
"알겠다."
정우는 쓰디 쓴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하지만 지영은 그것도 흠을 잡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마지 못해 하는 대답 같은데?"
"야, 지영아. 그만해."
나는 지영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겼다.
"놔 봐. 내가 지금 틀린말 하고 있어?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잖아. "
"너 왜 자꾸 정우만 가지고 그래? 맨날 정우하고 부딪히잖아. 그만해."
"난 한번 사람이 싫으면 평생 가. 좋을 땐 좋아도 한번 이 사람은 아니다 싶으면 평생 싫거든. 하
는 짓마다 내 기분을 거슬리는 걸 어떡하라고?"
"지영아."
정우의 뒷 꼭지를 보면서 지영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우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
다.
"고등학교때 짱먹었다고? 그러면 우리가 지레 겁먹고 설설 기어야 되는 줄 아나보지? 목에 힘만
빳빳이 주고 아무것도 아닌게.. "
"지영아 제발..."
"글쎄 내말이 틀렸냐니까? 우린 지 병원 입원했을 때 걱정되서 병문안도 갔었잖아. 근데 쟨 아무
것도 아니래. 내가 틀린거야? 응? 내가 맞잖아. 저앤 친구라는 개념이 없어. 아니, 응식이한테 맨
날 당하더니 열등감이라도 있나보지?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
그 때였다. 정우가 뒤돌아 섰다.
"뭐가 잘 못된거지?"
정우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하지만 지영은 여전히 톡 쏘았다.
"뭐 말이야?"
"난 열심히 하려는데 왜 자꾸 적만 생기지?"
정우의 눈빛이 슬펐다. 목소리도 어쩐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우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 웃기고 있네. "
그러나 지영은 정우의 눈빛을 보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정우가 지영에게로 다가왔다.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 정우는 어느새 예전의 당찬 모습을 찾고 있었다.
"좀 가르쳐 줄래?"
"뭘?"
"내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좀 가르쳐 줄래? "
"뭐?"
"난 말이다. 정말로 열심히 살고 싶다. "
"그래? 그럼 열심히 살어."
"네 말대로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줄을 몰라. 어떻게 살아야 하니?"
그 말투조차 명령하는 것 같았다. 지영은 머리칼을 날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기가 막혀서.. 나한테 지금 따지는 거야?"
정우는 한참을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잠깐 내가 흥분했다."
"흥분 두 번만 하면 사람 잡겠네?"
이번에 정우는 지영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자기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교재를 펼쳐들고 책을 뒤척이는 시늉을 했다.
이런 일을 당하고 글이 눈에 들어올까?
공연히 상대하기 싫으니까 책을 보는 척 하는거겠지....
"하여튼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꼭 쉬는시간에 책봐요. "
"지영아, 좀..."
나는 지영을 말렸다.
정우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외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의 시각은 사실 우리 모두의 시각이기도 했
다. 다만 지영처럼 정우의 얼굴에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우는 오늘 잠깐이지만 어울리지 않게 슬픈 눈빛을 보여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제 정우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데...
나 같으면 학교에 나오기도 벅찰 것 같은데....
그럴텐데....
---계 속
*** 제가 이번주에 설에 다녀오는 관계로 14회는 주말이 되어야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비밀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틀을 갖춰 나갑니다.
정우를 조금만 더 고생시키고 폭발시키겠습니다.
호프집에서의 싸움은 제가 얼마전 목격했던 것을 조금 각색한 겁니다. 요즘애들 진짜 무섭더군요.
참고로 호프잔으로 머리를 내려 찍은 건 실제론 여자였답니다.
ㅡ.ㅡ
14.
세상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정의로 살아간다.
누구나 스스로에게는 떳떳하며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정의롭다.
하지만 나만의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꼭 정의가 될 수있느냐하는 문제에 부딪혔을때의 대답은 그것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 정의가 다른 사람의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타인을 배려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한단계 더 성장하게 된다.
정우의 모습이 그랬다.
'그래, 네 입장에선 네 말도 맞아. '
마치 그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아...'
라고 말하는 듯한 저 몸짓...
이제서야 정우란 아이가 똑똑히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지만 확실히 우리보다 더 성숙한 모습...
저 앤....
거대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우는 자리를 박차더니 가방을 들고 나가 버렸다.
"여자한테 말발로 안되니까 소심하게 삐져가지고..."
지영이 피식 웃으며 그런 정우를 야유했다.
하지만 나는 정우의 빈자리를 보며 알 수없는 불안감과 걱정에 휩쌓이고 말았다.
정우는 이상한 아이다...
조금만 더 알게 되면 금새 빠져 버릴 것 같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지영과 나, 선영이, 순형이 오빠는 응식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찾아 갔다. 의외로 응식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뭐야? 안 아퍼?"
"이 정도야... 그냥 수업 땡땡이 칠려고 드러누운 거지.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냐?"
"뭐?"
어이없는 말이었다. 수업을 빠지고 싶어서 몸은 괜찮은데 입원했다고..?
정우는 그렇게 칼을 맞고도 며칠만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학교에 나왔는데..
아마 아직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을거야.
그런데 넌... 넌...
나는 지금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선영이는 속도 없이 다행이라는 듯 웃고 있었다.
"진짜 괜찮은거야?"
"괜찮아. 아...내가 술만 안먹었어도 그런 자식은 그냥 보내버리는건데..."
박응식...
나름대로 경우가 밝고 괜찮은 아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지영이 응식의 뒷통수를 탁하고 때렸다.
"야! 멀쩡하면 학교에 나와. 괜히 선영이 질질 우는데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
"울었어?"
"으응...."
"아우 닭살들...."
지영은 몸을 비비꼬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했다.
"아참, 너 정우하고 붙었다며?"
응식이 껄껄거리며 웃더니 지영을 보고 말했다.
"좀 세게 붙었지."
"네가 심했어."
난 지영을 타박하고 나섰다.지영이 나를 흘겨본다.
"심하긴 뭘? "
"혹시 그 두 친구중에 진짜로 죽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그래?"
"뭐? 김인범, 전형수? 어쩌긴 뭘 어째? 정우도 다친 사람 함부로 말안하겠지."
응식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지영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 지가 깡패처럼 굴러다니다보니 남들 다치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가 보더라구. 말하는게 얄미워서 좀 세게 몰아 붙였어. 제대로 대꾸도 못하더라. 힛힛."
"참 나.. 대단하다.. 너. 안 무섭냐? 걔 실제로 보니까 별거 아니긴 했지만 소문은 진짜 무슨 영웅같이 났었는데.."
"난 안무서워. 그런 애들.. 보나마나 학교에서 교실 맨 뒤에 앉아가지고선 애들 삥이나 뜯고 살았겠지. 무섭긴 뭐가 무서워?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내 밑인데.. 내가 회사 다닐 때 지는 기술배우고 있을걸?"
"하하. 지영이 너 진짜 대단하다. 강단 죽인다. 너."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대잖아. 네 말대로 소문이란 한다리만 건너도 과장되는 거구..
나 사실 지난 일요일에 소라하고 걔 병문안 갔었거든. 뭐 전설이니 뭐니하는 애가 그렇게 당할 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몸이 엉망이더라구. 일부러 맞아 주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던데.. "
"그렇다니까? 뻔하지 뭐. 뭐 있는 것처럼 말많은 놈들은 원래 그런거야. 소라, 넌 왜그래?"
한동안 지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응식이 나를 돌아 보았다.
내 화난듯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니야. 아무 것도."
"왜? 화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툭 튀어나온 심술이었다.
"소라야!"
지영이 급하게 날 불렀다. 나는 눈을 흘겼다.
"박응식. 너아먈로 말만 많은 애 아니야?"
"어...어...?"
"너야말로 큰소리만 치고 아무것도 안보여주는 애 아니야? 어제 뭔데?"
"야...너... 정우 편드는 거야?"
응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이도 선영이도 순형이오빠도 갑작스런 나의 태도에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말이야. 진짜 그런애들 학교에서 안 봤으면 좋겠어. 지네들 멋대로 살다가 오토바이 폭주뛰다 사고로 죽던가 사람치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들락날거리던가 내 알바 아니야. 그냥 난 저런 자식들 체질적으로 싫다고. 알아? 기소라!"
냉기가 흘렀다.
"네가 뭘알아? 네가!! 저런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람을 죽여놓고도 어디로 우우 몰려가서 지네들끼리 술판벌이면서 자축파티하는 놈들이 저런 인간들이야!!"
"응식아.. 그만..."
선영이 응식을 막았다.
"그만해...."
한동안 ... 침묵이 흘렀다. 그 무거운 공기를 갈라낸 건 역시 응식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소라야... 내 친구중에 유승호라고 있었어. "
느닷없이 가라앉은 응식의 말투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때 친구야. 고등학교땐 갈라졌는데... 녀석도 학교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다고..."
"그런데?"
"작년에 죽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내 심장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죽... 었다고...?"
"머리가 깨져서..."
"으..응식아..."
"나도 알아. 내가 유난히 별나게 군다는 것 정도는.... 그래도 그 쪽애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
"그 쪽애들?"
"정우같이 알량한 권력으로 애들 휘어잡는 놈들 말이야. 그걸 남자의 길이라고 착각하는거지. 애들 협박해서 삥이나 뜯고 우우 몰려다니면서 싸움판만 벌이고 다니는 주제에..."
"하지만 지금 정우는..."
응식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마찬가지야. 학교로 정우 찾아오는 애들 못봤어? 그렇게 어중이 떠중이 몰려 다니다보면 결국 정우도 그렇게 돼."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도 자기 길을 찾아간대. 한 사람은 요리사고 한 사람은 자동차 기술배워서 이제 그런 짓 안해!!"
"순진하군..."
"뭐?"
응식은 침상에서 내려 왔다. 그리고는 창가로 가서 바깥풍경을 한동안 바라 보았다.
"너 저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니?"
"응?"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마. 녀석들은 결국 중간에서 무너질거야. 아무리 결심이 굳다고 해도 세상이 녀석들을 불러내고 말거야. "
"쳇.. 다아는 척.... 몇살이나 먹었다고.."
나는 궁시렁 거렸다. 응식은 그러나 진지했다.
"쳇쳇쳇... 지도 술먹고 얻어맞는 주제에.. 에베베베..."
"너 자꾸 뒤에서 꿍시렁 거릴거야?"
응식이 화난 것 같은 표정에 얼굴엔 미소를 가득 띄고 나를 돌아 보았다.
장난인지 성질이 난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때 였다.
띠리리리리리------
"여보세요?"
내 전화였다. 지영이 나를 보고 야유했다.
"야야. 휴대폰 전자파가 병원기기에 얼마나 안 좋은데..."
"이게... 입원실은 괜찮아! 아, 여보세요? 네? 누구요?"
전화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 낯익은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네? 아...."
나는 가슴이 내려 앉아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 했다.
상대는 분명히 김인범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라는 곳으로 꼭 와주셔야 겠습니다. 정우를 살리는 일입니다."
"제...제가 무슨 힘이 돼요...?"
"오시지 않으면 정우는 정말 죽을지도 모릅니다."
"씨... 저 혼자 가야돼요?"
"아닙니다. 데리고 올 분이 있으면 데리고 오셔도 됩니다."
김인범은 찾아 올 곳을 얘기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전화야?"
"그..김인범이라는 사람인데..정우가 죽게 생겼다면서..."
나는 대충 기억나는대로 주절거렸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가지 마!"
지영이 소리쳤다.
"죽던지 말던지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별 웃기는 전화아냐? 언제부터 우리가 ..."
"것봐라. 세상이 가만 안둘거라고 했지? 거기다 정우 주위에 있으면 우리도 같이 어려워져."
응식도 지영을 거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말 때문에 난 오기가 생기고 말았다.
"나 혼자 갈거야!!"
"야! 기소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우는 그런 애가 아니야.. 아닐거야... 그 때 분명히 그랬어. 한번만 지면 영원히 이긴다고...
정우는 보란 듯이 그럴거야. 너희가 아무리 깔보고 업신여겨도 정우는 결국 이 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씨이...
띠리리리--
"여보세요."
"기다려. 기소라. 너 혼자 보낼 순 없잖아."
순형이 오빠였다. 나는 병원 현관앞에 그대로 멈췄다. 다행이었다. 같이 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나와 함께 온 사람은 지영과 응식, 그리고 순형이 오빠였다. 선영이는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한테 연락을 받으면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뭔가 전혀 감이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등학교때부터 이어진 주먹다짐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약속장소는 작은 커피숖이었다. 김인범이 우리를 맞았고 먼저 연락을 받고 도착한 세진도 보였다.
김인범이 우리를 정중하게 맞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새벽 한 시까지 어느 나이트 클럽에 가야 합니다. 지금은 저녁 9시고 이 곳에서 나이트 클럽까지는 봉고차가 와서 실어갈 겁니다. 시간은 약 두 시간 정도 걸릴겁니다. 그 때는 모두 눈을 가려야 합니다."
"뭐야?"
분위기가 이상했다. 응식이 눈쌀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들은 민간인들이고 민간인들에게 함부로 상해를 입힐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몸에는 손끝하나 대지 않을 겁니다. 다만 여러분이 하실 일은 정우가 망가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끝까지 지켜 보시면 됩니다."
이건...무슨 소리야...? 우리는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정우가 다치고 난 후 며칠 조용하다
했더니 뜬금없이 이런 일이...
김인범은 말을 이었다.
"이정우는 지금 전형수와 함께 나이트 클럽에 있을 겁니다. 정우 스스로 들어 간 거죠."
스스로? 그럼 낮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게....
"잠깐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
응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긴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정우는 잠깐 성인 조직에 몸담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일은 그저 탈퇴식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우리가 왜 가야 하는 겁니까?"
순형이 오빠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불안감마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첫째로는 정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까지 끌어들여 정우에게 강한 수치심을 안겨 주겠다는 것이고 ..."
인범은 잠시 말을 끊었다.
"두 번째는 정우, 나, 그리고 전형수가 모두 의식불명이 되면 여러분들이 우릴 병원으로 데리고 가라는 뜻입니다. "
"뭐..뭐라구요?"
"병원비는 그 쪽에서 줄 겁니다. 그리고 병원까지 역시 봉고차에 태워서 여러분을 모실 겁니다. "
"도..도대체..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릴 하는거에요?"
"저도 일이 이렇게 될줄 몰랐습니다. 정우가 안되면 제발로 찾아간다고 그러긴 했지만 정말로 그럴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아니, 내일 새벽이군요.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정우가 개처럼 네발로 기고, 제 팔다리가 부러지고, 형수의 살갗이 터져 나가는 모습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절대로 잔인하다고 중간에 고개를 돌리시거나 눈을 감으면 안됩니다. 우린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이것 보세요..."
김인범... 이 아저씨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지금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구?
무섭단 말이야....
무서워....
--계 속
*** 이번회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겠습니다. 클라이 막스로 가려면 숨을 골라야 겠지요?^^
디음회는 너무나 비참한 형수, 인범, 정우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소라의 이야기 언제끝내냐구요?_-_
빨리 2부 정우의 이야기가 시작했으면 좋겠다구요?
정우 좀 더 고생시키구요..ㅡ.ㅡ+
15.
우리는 도통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까치라는 사람이 우리를 봉고차에 태우고 눈을 가렸다.
그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우리들의 숫자에 조금 놀란 모습이었다.
까치는 봉고차의 음악을 크게 틀고 꽤 오랫동안 차를 몰았다. 나
중에 들은 말이지만 음악을 크게 트는 것은 혹시 우리 중 누군가가
눈을 가린상태에서의 차 움직임을 기억해 낼 수도 있다는 우려 때
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애초의 말과는 달리 나이트와는 어쩐지 거리가
있어 보였고 사무실처럼 생긴 곳이었다.
사무실에서 우리는 각서를 써야 했다. 사무실에는 미끈하게 잘 빠
진 젊은 남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민규라고 했다. 나
이도 그렇게 많아보이지 않았는데 이 곳에서는 꽤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김인범이라는 친구... 꽤 머리를 잘 돌렸군? "
김민규는 인범을 보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각자 하얀 16절지 종이 두 장씩을 내어 밀었다.
"각서입니다. 여기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그 어느 것하나 밖
에 나가서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
김민규는 정중했다. 흔히들 깡패들이라면 그저 사람들 어르는 협
박범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어떤 신사보다
더한 품위가 김민규에게서 흐르고 있었다.
"본인이름과 주소, 휴대폰, 집전화번호를 쓰고 지장을 찍으시면 됩
니다. 두 장 모두. 앞으로 오늘 있었던 일이 빌미가 되어 문제가 발
생할 경우 이 각서를 근거로 하여 여러분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
니다. 그리고 허위로 기재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질 경우 역시 이
각서에 근거하여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러고보니 각서에는 '허위사실을 기재할 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
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김민규란 사람이 신사다운 건 다운
것이고 그가 내뿜는 분위기는 차라리 공포스러웠다. 김민규는 무언
가를 깜빡했다는 듯 손가락을 딱 하고 튀겨 내었다.
"아참, 지금이라도 돌아가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일단 각서
를 작성하고 나면 안 됩니다."
그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진이 쓱쓱 각서를 쓰기 시작했다. 세진
이야 정우를 좋아하니까 그렇다쳐도 우린 어쩐지 손해보는 기분이
었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다. 세진이 먼저 볼펜을 들어 올
리자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
다. 지장까지 찍고 나자 김민규는 그도 역시 도장을 꺼내 쾅쾅 양
쪽 모두 찍고 그런 후 다시 두장을 엇갈리게 해서 모서리를 걸쳐
찍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면서 김민규는 한 장씩
을 우리에게 주었다.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차피 각서란 계약서가 아니니까 이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항상 곁에 두고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각서를 작성한 이상 이제와서 돌아가겠다고 하시면 안됩니
다. 그리고 여기 각서에 적힌 집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여러분
의 늦은 귀가에 대해서는 그럴듯하게 둘러 대겠습니다. 나중에 집
에 돌아가실 때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드
리면 긴장해서 다 잊어먹으니까요."
무언가 일처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서로 얼굴을
돌아볼 뿐이었다. 설마... 우리가 잘못되는건....
"김인범이라고 했나?"
김민규가 고개를 돌려 인범을 바라 보았다. 인범은 당당하게 말했
다.
"그렇다."
"민간인을 데리고 온 건 잘했다. 나도 송장 치우기는 싫으니까..."
인범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우
리는 다시 눈을 가리고 어딘가로 안내되어 나갔다. 도착해서 안대
를 풀어보니 그 곳은 대리석바닥이 맨들맨들한 넓은 실내광장같은
곳이었다. 물론 무대를 꾸미고 조명을 달고 셋트를 설치하면 나이
트클럽 비슷하게도 보일테지만 지금으로써는 아무래도 나이트 클럽
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광장에는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철제의자를 끌어다 앉아 있었고
김민규보다 더 높아보이는 사람이 간이무대위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간이무대위로 안내되어 다른 소파
에 일렬로 쭈르르 앉았다.
물론 인범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김민규가 소파에 앉은 사람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사장님, 준비 다 됐습니다."
"두 놈도 불러 와라."
사장...? 사장이라는 이 사람.. 무게가 있었다. 아직 상처라고는 전
혀 입지 않은 정우와 전형수가 끌려 나왔다. 아니 끌려 나왔다기
보다는 그 애들이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정우는 우리를 보더니 흠칫했다. 김민규가 나섰다.
"안심해라. 이정우. 이 사람들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을테니까... "
정우는 그러자 김인범을 돌아 보았다. 김인범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야 할 것 같아서..."
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정우가
낮에 굳은 결심을 하고 찾아간 사람은 김인범이었다. 몰랐는데 정
우는 앉아서 기다리는 성미가 아니라고 했다. 원래 찾아 다니는 성
격이었는데 지영이 쏘아붙인게 정우의 결심을 앞당긴 셈이었다. 김
인범은 아직도 어느정도 그 쪽 세계와 정보가 통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정보가 정우는 필요했던 것이다.
김인범은 정우의 생각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우
선 전형수에게 연락하고 이 쪽 사장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읽어내린 김인범은 우선 전형수와 이정우를 약
속 장소로 먼저 보내고 우리에게 연락한 것이다.
그로써는 민간인의 눈이 필요했다. 정우가 다쳐 누웠을 때 정우
의 휴대폰에서 빼낸 우리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민간인이 지켜보는 자리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협박용이고 두 번째는 살인은 하
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 예
외도 있지만 적어도 정우에게 그 예외는 통용돼지 않을 것 같으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다면 본래는 정우를 죽이려 했던 것이었을
까....?
어쨌든...
지금 우리는 그저 이상한 공포심에 가슴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민규야."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사장님."
"애들은 몇 명이냐?"
"사업장에 나가 있는 애들을 제하고 23명입니다."
"비디오는?"
"캠코더로 찍고 있습니다."
"지금 새벽 1시니?"
"예, 사장님."
"3시까지 갈 곳이 있다. 30분 뒤에 일어나야 겠구나. 그 이후부터 이
곳처리는 너한테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김민규는 고개를 숙였다. 사장은 간이 무대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넌 누구냐?"
사장이 가리키는 사람은 전형수였다. 전형수는 사장을 노려 보았
다.
"이정우와 함께 그날 나이트를 깨러 왔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 전형수의 뒤에 나타나더니 알루미늄 방망이로
전형수의 등어리를 후려쳤다.
"컥!!"
전형수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몸을 추스
리며 사장을 노려 보았다.
사장은 피식웃었다.
"눈빛은 좋군. 그런데 착각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너희들은
나한테 빌러 온 거야. 그런 영웅같은 눈매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
하는데... 그렇지 않나? 김인범?"
김인범의 턱관절이 씰룩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럼 존칭부터 해야지. 이정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정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장성태 사장님."
"훗-- 전형수라고 했나?"
"예...에."
전형수는 대답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눈을 감았다.
"넌 뭣하러 왔는지 모르지만 별 볼일 없는데? 이정우와 김인범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알량한 의리 때문에 자진해서 온 것이라 해도
난 널 건드릴 관심이 없어. 설사 그날 치고 들어 왔던 고등학생들
중에 네가 있었다고 해도 결국 이정우의 지휘를 받았겠지?"
전형수는 대답이 없었다. 누군가 다시 전형수의 무플관절을 뒤에
서 차올리며 강제로 무플을 꿇게 했다.
"대답해!!"
"그..그렇습니다."
"알았다. 너의 수위는 정해졌다. 김인범?"
"예."
"어떻게 보면 이정우보다 네가 더 괘씸한 녀석이다. 요리사가 꿈인
가?"
"예."
"좋아. 한 때의 정이 있으니 너는 조금만 어루만져 주지. 이정우?"
"예."
"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하극상도 정도가 있어야지. 살인까
지 이어지면 어떡하지?"
사...살인...? 나는 심장이 뛰었다. 멀쩡하게 생긴 정우가 살인자란
소리야?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인가? 정말?
정....말?
"사회에서 재판을 받아도 살인은 형량이 무겁지. "
"정우는 정당방위여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우가 먼저...웈!!"
전형수가 또 무언가를 말하려다 알루미늄방망이에 머리를 맞았다.
떵-- 하는 소리가 징그럽게 울렸다.
사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한 너의 형량은 사형이었다. 사형이 아니었다면 미리
경고를 주지도 않아. 경고자체가 하나의 응징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죽일 놈에겐 왜 누구한테 죽는지 가르쳐 준다. 친절하게도
조심하라고 경고도 해 주지. 너 같은 하극상의 처리는 회사내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니까..."
회사...? 사장은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아니, 담배가 아니라 시
가라는 것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저 사장이란 사람에겐
그다지 폼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이 많았었는데 말
이야. 이렇게 네발로 걸어들어 오다니... 성질은 아직 죽지 않았군.
피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부딪히는 성격말이야. 비록 인범이 저녀석
이 잔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사형은 곤란하게 됐지만 ..."
침묵이 흘렀다. 사장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윽고...
"이정우. 넌 폐기 될 것이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 각오는 돼
있나?"
"되어 있습니다."
"훗- 재미없군. 어쩌다 네가 이렇게 바보같이 된 건지 모르겠군.
네 몸뚱아리가 불구가 된다 하더라도 지켜야 할 인생관이라도 생긴건
가?"
정우는 조용히 있었다. 누군가가 알루미늄배트를 들어올리려는 찰
나 사장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아. 정우에겐 아껴라. 저 놈은 그 정도 예를 차려줄 만한 놈이
지. 자, 이정우. 그럼 묻겠다. 1급장애인으로 만들어 줄까? 2급장애
인으로 만들어 줄까?"
"제가 선택할 수 없는 걸 알고 있습니다. "
"팔다리를 모두 작살을 낼 수도 있다. 어느 화가처럼 입에다 붓을
물고 그림정도는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마음의 준비
가 되어 있나?"
"되어 있습니다."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야 원, 정말 재미없군. 민규야."
"예. 사장님."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니?"
"예. "
"한 녀석은 폐기, 한 녀석은 적당히 얼러 주고, 한 녀석은 안마만
하고 돌려 보내."
사장은 그렇게 얘기하고 자리를 빠져 나갔다. 이제 이 자리는 철
저히 김민규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눈빛이 살아 있는 놈부터 찜질을 해야 겠구나. 이정우 저녀석은
치는대로 맞아 줄 것 같은데 저 녀석은 미리 힘을 빼 놓아야 겠다."
김민규가 가리킨 건 전형수였다. 철제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 중
두명이 자리에서 일어 나 전형수의 곁으로 다가 왔다. 전형수는 여
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감았다.
전형수에게 다가 온 두 남자는 각각 각목과 알루미늄 방망이를 들
고 있었다. 각목을 든 남자가 툭툭 형수의 머리를 쳤다.
김민규가 한마디 했다.
"시작해."
그 순간이었다.
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각목이 허공을 가르고 전형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떡------!!!
"헉..!"
나는 나도 모르게 입바람을 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전형수의
머리에서 너무나 끔찍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끄윽..."
전형수도 그대로 엎어지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이상한 소
리를 내었다.
알루미늄 방망이를 든 남자가 품에서 면도칼을 끄집어 내더니 말
없이 전형수의 이마를 세로로 주욱 갈라 내었다. 그러자 각목을 든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전형수의 이마를 그대로 각목으로 후려 갈겼다.
쩍!!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키엑..."
전형수는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넘어갔다. 마치 이마가 피를
뿌리는 것처럼 핏물이 순간적으로 쐐액 솟아 나왔다. 각목을 든 남
자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고통으로 낑낑거리는 전형수의 머리를
구둣발로 짓누르며 말했다.
"역시, 피를 봐야 패는 맛이 난다니까... 이마를 째서 양은 좀 작지
만 말이야."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면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더니 내가 꼭 그짝이었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조차 감기
지 않았다.
"끼잉... 끙....으읔..."
전형수의 목에서 병든 강아지같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차라
리 그럴바엔 기절하는게 낫지 않을까? 아니, 기절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전형수의 신음소리는 자신이 연기를 하고말고 할 상황이 아
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참으려고 해도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앓는 소리.... 지금 전형수
는 고통으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 본격적으로 해 볼까?"
알루미늄방망이를 든 남자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너무 무서워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전형수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바닥에 짓눌려 있는 상태였
다.
"키잉... 끅...."
정우야...정우야.... 난 정우를 보았다. 한 쪽 구석에 밀려 나와 있는
정우는 전형수의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김인범은 차
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는데 정우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
보고 있었다.
바보.. 저 바보... 저런 바보.....
김민규가 소리쳤다.
"뽀개 버려. 골통!"
그 순간이었다. 알루미늄방망이를 든 남자가 그대로 전형수의 머
리를 날렸다.
떵-----!!!
"끅...."
전형수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전형수가 맞은 곳
은 머리가 아니라 턱이었다. 저 정도의 힘으로 머리에 맞았다면 뇌
진탕으로 죽엇을 것이고 턱에 맞았다면 완전히 턱뼈가 으스러졌을
것이었다.
전형수는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김민규가 말했다
"저 정도면 전형수에겐 멋진 선물이지. 구경 잘했나? 이정우, 김인
범."
김인범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너무 걱정 할 것 없다. 세게 보여도 죽지는 않을 정도로 치고 있
으니까. "
"알루미늄으로 치면 뼈가 으스러집니다. 차라리 부러지게 치는게
낫지 않습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군. 김인범."
"뭐라고?"
"이정우는 어차피 우리가 죽일 녀석이었다. 그걸 감지한 네 놈이 장
난을 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아닌가? 어떤 수모도 감수하겠으
니 이정우를 놓아달라고... 이정우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아닌가?"
김인범은 할말을 잃은 듯 했다. 말할 수 없는 처참한 표정을 짓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 자리는 우리가 하극상을 일으키고 회사경영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이정우를 우리식으로 단죄하는 자리다. 오늘만 넘어가면 우리
는 두 번다시 이정우를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너흰 오늘 확실히
깨지면 되는거야. 그런 것인줄 알았는데 뭐 잘 못 된 거라도 있나?
김인범."
김인범.... 굳게 쥐었던 주먹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김민규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너희들이 반격을 한다면 가능성은 없지만 이 곳을 너희들
만의 힘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엔 우리
와 진짜 전쟁을 치뤄야 할 것이다. 자신있나?"
"어...."
김인범의 말이 헛돌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어..없...."
쿵-!
김인범이 숨을 들이키는 가 싶었다. 그 거대한 몸집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속으로 무언가를 가득
삼키는 모습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나와."
인범이 몸을 일으킬려고 했다. 김민규의 화난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 장난하나? 넌 네 발로 기어 나와."
김인범의 몸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김인범은 더 이상 저항
하지 않았다. 양팔을 앞으로 내고 엉금엉금기어서 광장 한 가운데
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잠깐만."
그 낮고 차가운 목소리.... 분명히 정우의 목소리였다. 정우의 눈동
자는 어느새 김민규를 쏘아 보고 있었다.
"인범의 몫까지 내가 맞겠습니다. 제 친구들은 놓아 두십시오."
일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킥!"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
"하하하.."
정우를 정점에 두고 모두가 웃고 있었다. 김민규가 허리에 양팔을
올리며 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입술을 열었다.
"그런 건 의리가 아니다. 네 친구가 네 얼굴만 보고 자진해서 병신
이 되겠다는데 친구를 지켜 봐 주어야 하지 않겠나? 김인범은 널
위해서 희생하려는 것이다. "
"그것하고 내가 먼저 맞겠다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김민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어리군. 내가 왜 널 마지막으로 찜찔려는 줄 아나? 이게 뭐
영화같은 데서 나오는 클라이막스를 위해서인 줄 알아? 전형수나
김인범에 대한 배려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민규는 말을 이었다.
"네가 터지는 모습을 네 동료들에겐 보여주지 않으려는 거다. 물론
순서를 바꿔서 너부터 타작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친구들이 먼저
쓰러져 기절해 버리면 네가 아무리 비참하게 당한다 하더라도 너의
비참함을 그들은 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지 않겠나?"
"........."
"그런데 넌 김인범에게 너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거냐?
그건 완전한 착각이다. 의리도 아니고 상황도 전혀 파악이 안되어
있는 소리야. 넌 마지막으로 쓰러져야 한다. 그게 널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네 동료들에 대한 남자로써의 예의다."
정말 그런걸까...?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난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옆을 돌아 보았다. 순형이
오빠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세진
의 양볼에선 눈물이 비오 듯 흘러 내렸고 지영과 응식도 아무 말
못하고 얼어 있었다.
김인범이 정우의 어깨위에 조용히 손을 올려 놓았다.
"나도 내 앞에서 네가 깨지는 건 원치 않아."
인범은 씨익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이정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정우의 아랫입술
이 이빨사이로 말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일까...? 어떤 결심을 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결심을 했다고 해
도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는 무의미한 결심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한 두명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우가 쓰러져 정신을 잃은 전형수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전형수...."
그리고 정우는 인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만큼만 맞아라."
"너무 끔찍한 농담인데?"
인범은 그렇게 말하는 정우를 보며 미소지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
람은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았다.
정우의 입가가 실룩였다. 정우의 눈동자는 김민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격해도 된다고 했나?"
확 달라진 말투였다. 조금전까지 극존칭을 쓰던 정우가 반말을 한
것이다. 김민규의 눈썹이 씰룩였다.
"반격을 한다면 우리와 정면충돌하겠다는 말이다. 설사 너희들이 오
늘을 무사히 도망쳐 나가더라도 영원히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김민규도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
려는 모습이었다.
정우가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때릴려거든 나만 때려라. 더 이상 다른 사람
을 건드리면 너희들 모두를 내 발아래 짓밟아 주겠다."
이건....?
뭔가... 이상한 소리였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어차피 정우는 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을 해도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우는 자신만 때리던지 너
희들 모두 죽던지 선택하라는 이상한 선언을 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담에야 정우의 이 해괴한 선언이 협박같이 들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김민규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 웃기는 녀석을 다 보겠군. 호언장담도 정도껏 쳐야지. 그건 당
당함이 아니라 무모함이잖아?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더니
네가 그 꼴이군. 막상 상황을 눈으로 보니까 두려워 진 건가?"
하지만 정우의 눈빛은 사그러 들지 않았다.
김민규가 소리쳤다.
"우린 네 놈들 모두 박살을 내야겠다. 어쩔테냐? 김인범까지 박살
내면 네가 어쩔건데?"
정우는 김민규를 가만히 노려 보았다. 김민규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이래서 어린 놈들을 대하면 재미가 있지. 아직 순수한 면도 보이고
말이야. 대신 맞아 주겠다? 하! 눈물나는 의리군. 어차피 너희들은
모두 실려 나갈테니 하찮은 의리는 집어치워 주지 않겠니? 애송
아."
정우가 말했다.
"나는..."
이상한 일이었다. 상황은 분명히 정우가 불리했다. 그런데 이건 뭔
가 거꾸로 된 것 같았다.
"친구들의 고통만큼만 느낄 것이다."
이상하고 또 이상한 선언이었다. 맞는다고 해도 전형수와 김인범을
때리는 정도로만 맞아 준다는 이야기 같았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어떻든 난 폐기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치기어린 발상이었다. 대체 누구마
음대로 맞을 선을 정한단 말인가? 김민규도 너무나 당당하게 그렇
게 말하는 정우를 반쯤은 미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10대특
유의 알량한 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것은 나도 우리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말이다.
김민규가 말했다.
더 이상 정우의 말을 들어 볼 것도 없다는 투였다.
"쳐라."
김민규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곧바로 김인범을 향한 구타가 시작되
었다.
핏물이 철퍽철퍽 사방으로 튀었으며 오래지 않아 김인범은 질퍽한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 졌다. 쓰러진 김인범의 다리뼈를 부러
뜨릴려고 누군가 쇠막대기를 들고 김인범에게 다가 갔다.
"거기까지다."
그들을 막은 것은 정우의 한 마디였다.
무표정한 얼굴.. 억양없는 말투...
"그 이상 인범을 건드리면 너희들 여기서 죽는다."
"저런 개자식이!!"
정우의 한마디에 드디어 화를 폭발시킨 사람은 김민규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잘난척 떠들어 대는 정우를 더 이상
지켜 볼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정우가 너무 튀는 것 같았다. 분명히
지금의 상황은 정우에게 불리했다. 머리속이 비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올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어떻게서든 피해다녀도 모자랄 판에 정우는 오히려 상대
방을 자극하고 있었다.
"쿨럭...쿨럭..."
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인범이 쿨럭거리며 핏물을 토해 냈다.
"커헉... 끅... 킬킬킬..."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인범이 갑자기 웃고 있었다.
"너희들 이제 다 죽었다.... 킥킥킥.... 컥... 쿨럭..쿨럭..."
김인범도 같이 미친 것일까? 몸은 고통으로 움츠러 들었지만 입가
에 맺힌 건 분명 상상만해도 즐겁다는 통쾌한 웃음이었다.
바보들... 진짜 바보들이었다.
전부 제정신이 아냐!!
상대방은 김민규까지 24명이었다. 거기다 손에손에 흉칙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셋이 힘을 합쳐 싸워도 턱없이 부족할텐데 사실상 싸
울 수 있는 사람은 정우 한명 뿐이었다.
거기다 정우조차 친구들이 맞은 것 만큼은 맞아주겠다는 터무니없
는 말을 해 놓은 상태였다.
모두들 소영웅주의에 빠진 것 같았다.
김인범이 다시 킬킬거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정우를 몰라... 킬킬... 상식을 벗어 난 남자가 바로 이정
우다.. 100명이건 1000명이건 이정우에게 쪽수는 의미가 없어. 큭큭
큭..."
"이런 씨발새끼가... 째진 아가리라고..."
누군가....
인범의 머리를 구둣발로 그대로 걷어 올렸다.
퍽--!!
"키엥..."
인범의 머리가 180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목에서는 고양이가 죽
는 것같은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고 터져 나간 입에서 또 한웅큼
핏줄기가 천장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어이, 너..."
인범은 그대로 바닥에 뻗었다. 정우가 인범의 머리를 차 올린 사람
을 눈으로 가리켰다.
"분명히 거기서 더 건드리면 죽는다고 했지?"
정우가 흥분하고 있었다.
불안했다. 이건 아니다...
안 돼... 말려야 돼.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일 뿐이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정우야!!"
정우의 주먹이 말려들어가는 걸 보고 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없
었다. 더 비참하게 맞기전에 말려야 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야... 약속했잖아....."
그래 약속했잖아.... 병원에서 약속했잖아. 네가 다시 주먹질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막아주기로...
그 약속 기억나니...?
나는 간절하게 눈으로 말했다.
나와 눈빛이 마주친 정우의 주먹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그래..정우야...한 번만 참아... 그래도 살아야지... 너 혼자서 뭘 어떻
게 할려구 그래... 살아야지... 살아야 돼... 지금 부딪히면 정말 너
죽을 것만 같아...
내 감정도 격해졌다. 사물을 분간할 수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새끼!!"
그 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정우의 등을 향해 각목하나가 쉬익 소
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것이 신호였다.
"이 새끼가 죽을려고... 개 같은 새끼!!"
흥분한 사람들은 정말 정우를 죽일 것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정우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그들의 몽둥이와 발길질을 감당해
내야 했다.
"잠깐 기다려라."
김민규가 흥분한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패면 이 녀석이 반성을 못하잖아. 봐라 눈이 살
아 있지?"
화난 눈빛으로 김민규를 쏘아보는 정우의 얼굴을 김민규는 발로 지
긋이 눌렀다.
"이런 녀석은 잘 다스려야 하지. 어차피 넌 폐기대상이니까 자비는
바라지 마라. 응?"
철컥-!
김민규는 품에서 칼을 끄집어 내었다. 접이용 칼이었는데 칼날은
손가락한마디 정도였으나 날카로웠다.
"친구들 만큼만 맞겠다? 그럼 친구들만큼만 당해볼래? 응?"
그렇게 말하며 김민규는 칼날을 세워 정우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이대로 이맛살을 갈라내어서 머릿가죽을 벗길 수도 있다. 이 젖내
나는 애송아."
정우의 눈빛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김민규와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
는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시건방지게..."
누군가 쇠몽둥이를 정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정우는 본능적으
로 몸을 피했으나 서슬퍼런 쇠몽둥이 끝에 얼굴이 걸려 볼이 찢어
지고 말았다.
쉬익-----
"어? 이새끼 피해?"
정우는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펼치고
있었다.
갈등하면 안 돼..너 혼자 어쩌겠다는 거니...?
난 제발 정우가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 개새끼 골통을 쪼개 버린다!!"
정우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릴 찰나였다. 누군가 각목으로 뒤에서
정우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빡---!!
그와 동시였다. 알루미늄방망이를 든 남자가 정우의 옆구리를 후려
갈겼다.
퍽--!
"훕..."
이번엔 정우도 정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삼키는 숨
소리가 급박하게 들렸다.
"어디 또 까불어 봐."
빠악---!
뻑-!
살갗이.....
터지고 있었다. 정우의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쇠몽둥이 끝
에 걸려 찢어졌던 살가죽이 펄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풀썩..!
정우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 졌다. 바닥에 쓰러진 정우의 머리를 각
목으로 누군가가 힘껏 내려 찍었다.
떡----!!
"이 새끼 기절했는데요?"
"약하다. 한 대 더 쳐라."
뻐억---!!
정우의 머리는 정말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내려친 각목이 부러져 어
딘가로 튕겨 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김민규의 음성이 들렸다.
"이 새끼는 완전히 작살내야 돼. 해머하고 톱 가지고 와."
해....머...? 톱....?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쩌실 겁니까?"
누군가가 해머를 들고 와서 김민규에게 건넸다.
"완전히 관절을 끊어 버린다. 양 발 모두. 그리고 오른 쪽 팔은 전
리품으로 회수한다."
"사지중에 왼 팔 한쪽만 남겨 놓는 겁니까?"
"그렇지. 오늘부로 이 놈은 완전히 폐기처분된다. 이 새끼 몸 좀 돌
려. 작업하기 편하게.."
무슨 소리야...?
안 돼...이건 .. 이건 안 돼...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건 안 돼... 정말 안 돼...
그 때였다.
세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났다.
"이정우!!"
울음이 가득 배인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맞는건데?"
24명의 남자들이 모두 세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진은 울부짖었다.
"왜 그렇게 맞는데? 넌 전설이잖아. 넌 신화잖아!! 네가 마음만 먹
으면 100명이던 1000명이던 문제 없잖아!! 왜 그렇게 맞는 건데?
왜 그렇게 맞는 건데?!!!"
세진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무너지듯 주저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나도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영은 이미 괴로운 듯 눈을 감은지 오
래였다.
김민규가 고개짓을 했다.
"너, 너 너희 둘이 민간인들 빼 내. "
"예."
두 사람이 우릴 이 곳에서 끌어 내려고 다가 왔다.
"자, 자 쇼는 끝났습니다. 집에 가야지요?"
세진의 귀엔 그들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여전히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은 절규였고 분노였다.
"다 쓸어 버려!! 모두 짓밟아 버리라구!! 모두 다!! 모두 다!!"
"이런 썅년이 빨리 안나가?"
"이정우!! 다 죽여 버려!! 다!! 전부 다!!!"
"개같은 년이!!"
두 사람은 우릴 거칠게 내 몰기 시작했다. 세진은 그들에게 뺨을
맞았고 나 역시 발길질을 당하며 입구쪽으로 내밀리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분명히 나는 보았다.
정우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였다.
정우야.... 너 어떡하니...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세진이 말 대로야.
모두 ...
밟아 버려....
모두...
----- 제 1부 소라의 이야기 끝.
다음회부터 제 2부 정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근데 2부는 조금 기다리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