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 본명은 이방원.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총명해,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1383년 문과에 급제한다.
정계에 진출해 명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아버지 이성계 장군을 따라 고려를 침략한 외적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 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 1392년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가 정몽주 세력에 의해 위기에 몰리자 정몽주를 암살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당시 이성계는 정몽주 살해에 반대했으나, 이방원은 이에 아랑곳 않고 이성계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참사시키는 대담함과 비정함을 보인다.
(일각엔 이방원이 일부러 이성계가 사주한 것처럼 보이려고 이성계 집을 찾은 정몽주를 노렸다는 설도 있음.) 어쨌든, 그의 “활약”으로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 몰락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곧바로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 받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정안군으로 책봉. 그러나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개국 공신에서 철저히 제외됐을 뿐 아니라, 태조의 둘째 부인인 현비(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된다. (이때 이성계는 현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무리수를 둔다. 이는 태조의 본처인 신의왕후 한씨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 정실 부인도 아닌, 후실의 둘째 아들을 세자로 둔데 대해, 왕위를 물려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엄청난 불만을 품는다. 게다가 태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는 정도전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조정 내 “반체제 세력”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정도전 일파에 의해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해산 당하고 정치적 몰락의 위기에 몰린다. 이때 이방원은 다시 한번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 1398년 숨겨 두었던 사병을 모아 형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킴. (제1차 왕자의 난) 그는 곧장 궁궐로 쳐들어 가 세자 방석을 붙들어 둔 뒤, 술판을 벌이고 있던 정도전과 그의 측근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정도전이 어린 세자를 끼고 전횡을 일삼다가 이방원 자신을 비롯한 정실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운다.
이방원은 이어 세자 방석을 폐위시키고 궁궐 밖으로 내쫓은 뒤 살해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방석의 형인 방번, 그들의 누이동생 남편인 이제까지 살해하고 후환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린다. 이로써 태조의 후실인 현비의 자손들은 (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제거된다.
정변 직후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준다. 이는 모두 방원의 계산에 의한 것으로, 그는 자신은 그저 왕위를 “올바른” 사람에 물려 주려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큰형인 방과를 “임시” 왕으로 즉위시킨 셈. (게다가 방과에겐 아들도 없어 임시직 왕으론 안성맞춤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군인이었음에도 불필요한 살상을 피하려 했으며 인정도 많아 “비정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허락 없이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 돌출 행동이 잦은 비정한 “정치인” 방원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닮아 착하고 우직한 방과를 더 좋아했다.
방원 자신은 새로운 정권의 실세가 돼, 정도전의 잔여 세력을 숙청하고 중요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포진시켰다. 그리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때 1400년 자신의 넷째 형 방간이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거병을 한다. (2차 왕자의 난) 그러나 이방원은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고, 방간의 군대를 패퇴시킨 뒤에 방간을 지방으로 쫓아내 버린다.
1400년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아 태종이 된다. (정종은 이후 상왕으로 물러나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는다. 정변과 숙청을 통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지만, 방원은 자신의 친형제들은 아무도 해하지 않았다. 대신 배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이긴 했지만.)
정치적 위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했으나, 수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얻은 왕위인지라 민심은 그에게서 돌아서 있었다. 거기에 순식간에 자식들과 사위, 충직한 신하, 심복들까지 모두 잃은 태조(태상왕으로 물러 앉음)의 분노는 도무지 잠재울 수가 없었다.
태조는 아들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으로, 1402년 자신의 고향 동북면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이끈다. (태조의 후실 현비의 친척인 조사의가 거병을 했다 해서 “조사의의 난”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반란군은 태종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싸우기도 전에 와해됐고, 이후 태조는 결국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고 조용히 지내야 했다.
이후 태종은 신하들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을 공신으로 꼽았다. 이들이 서로 이합집산하며 세력을 키울 경우 왕권이 무력화 될 것을 우려, 공신과 외척들을 하나씩 손보기 시작한다.
1404년 1, 2차 왕자의 난 때 핵심적 역할을 했던 최고의 공신 이거이를 역모 발언 사건에 연루시켜 지방으로 내쫓아 버리더니, 1407년에는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소한 발언을 꼬투리 잡아 처형한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연계시켜 이무, 윤목, 유기 등을 참수시키며 쉬지 않고 공신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1415년에는 불충을 이유로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사형시켰으며, 같은 해 태종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던 이숙번까지 축출하며 공포 정치의 대미를 장식한다.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킴으로써 왕권에 위협이 되는 공신 세력을 싹쓸이 해 버린다.
태종의 공신 축출의 표적은 순전히 자신의 본처, 원경왕후 민씨의 가족들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딸로 아녀자의 몸으로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남편이 왕에 오르는데 실질적 공을 세웠던 민씨.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엔 태종의 쉴 새 없는 여성편력, 자신의 형제들의 연이은 처형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민씨 가족들은 정권 초기 때부터 태종의 견제 의도를 눈치채고 숨 죽이고 살았으나 그럼에도 결국 죽음을 맞았다.
태종은 자신의 사후 외척이나 공신들의 득세를 우려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세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 거의 모든 부정부패와 불충까지 용서해 주었고,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이들이 이후 득세해 왕권을 농락할 것을 우려, 없는 죄까지 만들어 몰락시켰다. 어쨌거나, 이런 태종의 공포 정치에 의해 신하들은 철저히 태종의 손에 농락당했고, 신하들은 행정 업무에만 집중한 채 그 어떤 권력 싸움도 벌이지 못하게 된다.
(하륜-- 1347-1416. 퍼런 태종의 공포 정치 치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극소수의 공신 중 하나. 일찍이 이색 학원에서 수학, 정도전 일파와 가깝게 지냈으나 태조 정권 때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해 지방관리를 전전했다. 이방원과의 만남 이후 반란을 기획,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막후 역할을 한다. 태종의 정권 아래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며 각종 국가 대소사를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셀 수 없는 비리를 저지른데다 각종 불충 사건에 까지 연루됐으나 태종의 철저한 신임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가 태종을 등에 업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을 때 그의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 민제가 “그리 방자하게 굴면 머지 않아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이에 하륜은 “생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라 바른 일을 가다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기도 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과연 그의 말대로 많은 죄를 저지른 하륜은 끝내 살아남고, 숨 죽이며 조신하게 살던 민제 일가는 처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태종은 과거제 개혁, 관료제 개편, 전국을 8도로 재편하는 등 수많은 개혁을 밀어 붙였다. 그리고 외척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으며, 대마도를 전격적으로 정벌해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켰다.
왕권 강화가 최대의 목표이긴 했으나 유교적 법도를 현실화 해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대간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과 대신들의 모든 정책 결정을 일일이 남기는 “실록”이라는 기록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실록은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한 것으로, 이는 전세계 유래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자세한 기록 문화 유산이다.
(조선왕조실록-- 총 1893권으로 이뤄진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모두 담은 문화 유산. 태종 대부터 왕은 반드시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과 함께 관리를 만나야 했으며, 왕은 사관의 기록을 절대 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관은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어난 일을 그대로 적을 수 있었다. 왕이 죽으면 모두 모아 철두철미하게 검토하고 연대에 따라 다시 정리해 실록으로 편찬했다. 검토는 3번이나 반복됐으며 검토가 끝난 원고는 모두 폐기됐다.)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다. 첫째 양녕대군을 세자로 삼았으나 양녕의 수년에 걸친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에 지쳐 첫째를 폐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운다.
어린 충녕이 베테랑 대신들에게 농락당할 것을 우려, 1418년 세자 책봉 2개월 만에 상왕으로 물러나고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조선 4대 국왕, 세종) 그리고 자신은 군사권을 그대로 쥐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한다. 이에 대신들은 세종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왕권에 대항하지 못했고, 결국 세종은 안정된 정치 환경에서 자신의 목표를 마음껏 이룰 수 있었다.
(세종- 1397-1450. 조선의 4대 국왕(재위 1418-1450). 조선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 했던 천재 군주로 유교 학문에 통달한 것은 물론, 과학, 예술 분야에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해 매일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는 경연을 벌였는데, 세종의 높은 식견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현실주의를 지향하던 사람으로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학문은 모두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쳤으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질 않는 학문이나 예법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특히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호칭이나 용어에 문제가 있다고 하나의 역사서를 수십 번 다시 편찬할 정도였다. 이런 세종의 정치 풍토 아래 조선의 독자적인 약학, 음악, 천문, 자연 과학, 군사 무기 등에 관한 최고급 저서들이 기록됐다. 그리고 고유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여 조선의 문화적 독창성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세종은 지나친 사대주의 외교와 잘못된 화폐정책으로 백성들 생활을 곤궁으로 몰아넣었고, 거기에 수령고소 금지법까지 제정해 백성들을 핍박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태종과는 정반대의 정치 스타일을 보여, 일체의 정치 보복도 가하지 않았으며, 처벌과 압박으로 신하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고 용서하는 자세로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했다.)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2.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3.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
4.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김.
5.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둠.
6. 과거 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7.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체,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킴.
8.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함.
9.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임.
10.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킴.
11.왜인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
12.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김.
13.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킴.
14.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
<민무구 형제의 옥>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 사건이다.
<옥 발생 후의 진행>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공신녹권을 빼앗음-직첩을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에 유배시킴-1413년 자진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옥사 종결
<육조식 개편>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 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 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거북선 개발에 대한 추측>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 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 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 따 설치되었다.
<한양으로의 천도 내력>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 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о³°``″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³о☆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조선사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 본명은 이방원.
멘터
추천 0
조회 681
08.01.26 00:05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