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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姓名) |
박익(朴翊) |
본관(本貫) |
밀양(密陽) | ||
시대(時代) |
1332(충숙왕 복위1)∼1398(태조 7) |
자(字) |
태시(太始) |
호(號) |
송은(松隱) |
이력(履歷) |
청도를 빛낸 역사적인 사람들 박익 (朴翊) 송은선생의 불사이군 송은 박 익(松隱 朴 翊)선생은 고려 말 충실(忠臣)이며 팔은(八隱)이고 두문동 72현의 분이다 휘는 익(翊)이며 초명은 천익(天翊)이고 자는 태시(太始)며 호는 송은(松隱)으로 전국 밀양박씨의 종손(宗孫)이며 은산 부원군 영균(銀山府院君 永均) 의 장자이다. 1332년 (충숙 왕 복위 1년)에 밀양 삽포에서 태어 났다.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 29세의 약관으로 입지잠 (立志箴)을 지어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처음 뜻을 세워 반드시 성인.파 철인에 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소감 (少監)을 지내고 1386년 (고려 우왕12년 )에 동경판관(東京判官 )으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8월에 정성상정하였다. 그 후 한림문하(翰林文學)에서 예부시랑 (禮部侍郎)으로 옮겨 중서령 ( 中를令) 을 정하였다. 또 무에도 뛰어나 일찍 남정북벌 (南征4北伐 )하였으니 상장 박 익 (上將 朴 翊) 아장 강 준중 (亞將 姜 准仲 호는 通溪) 등 고기록 (古記錄)에 이 강 통계공(姜 通溪公) 유집(遺集)에 나타나 있다. 때에 위화도 회군을 강행한 이성계(李成桂)는 팔도도통사 최영(八道 都統使 崔瑩)을 몰아 귀양 보내고 우왕(禑王)을 강화도로 방출하여 신구 세력이 일편하여 친명으로 기울고 토지개혁등으로 이성계 (李成桂)의 세력은 날로 더하여 왕의 거취도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는 처음 친명으로 나아갔으나 야심이 노골한 이성계 (李 成桂)와 뜻이 맞지 않아 왕씨조를 위한 충성에는 선생과 뜻을 같이 하였다. 소위 삼은(三隱)이 있고 팔은(八隱)이 있는데 이분들이 모두 구왕조의 충성자인 것은 두말 할것 없다. 송경지 팔은집 (松京誌 八隱集)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송은맹오편 (松隱盲聲篇) 안에 이런 말이 있다. 포은(圃隱 ) 목은(牧隱) 야은(冶隱) 도은(陶隱)이 소매를 붙잡고 통곡하여 가로되 때가 이같이 되었으니 하늘이 시킨일이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나무랄 수 없지 않느냐 예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에는 주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 포은 (圃隱)이 죽음을 맹세하는 날에 공(公 : 松隱을 가리킴 )을 불러 울며 말하기를 "사는것은 임시요 죽는것이 영원한 것이니 비록 천명이라 할지라도 내가 홀로 죽어서 우리 왕이 계시는 뜰에 돌아갈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 이는 천익(天翊) 즉 선생과 재 (再 :冶隱) 와 색 (穡 즉 牧隱)이다 " 드더어 이성계 (李成桂) 가 등극하여 이씨왕조를 개국하려 하자 선생은 여말 72현과 더불어 개경 (開京)을 떠나 환고하여 주문불출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개국한지 4년째된 1395년 (이태조 4년)에 선생을 불러 등용 할려고 처음에는 공조판서(工曹判를), 예조판서(禮 曹判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연이어 내려 보내다가 1396년에는 좌의정(左議政)으로 하여금 불렀는데도 듣지 않았다. 당시 그 사자로 내려온 예관 (禮官) 권근(權近 號 : 陽村)이 선생을 찾아 갔다가 헛되이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기를 "그윽히 본적 박 천익 (朴 天翊 :선생을 가르킴)은 왕의 폐백의 중요함을 돌보지 않고 마치 죽음을 삶같이 여기오니 신은 혼자서 불러올 수가 없겠읍니다 " 그 때 선생은 왕의 페백을 보아도 봉사와 같이 하고 예관 권양촌 (禮官 權陽村) 의 말을 들어도 귀머거리같이 행사한 것이기에 그 이름을 송은맹오편 (松隱盲오_篇)이라고 한 것이다. 1398년( 이태조 7년 ) 11월 27일에 졸하였는데 그 전날 목욕전조(沐浴努爪)하고 사자사부(四子四婦)를 불러놓고 유서를 보이며 가로되 "내가 이세상에 나서 셋 조정을 섬겼으며 천은이 망극하여 신운도 매우 좋았다. 너희들은 문장이 있어 음덕을 심을만하다. 하물며 많은 자식이 있어 문호가 번창할 것이다. 그 밖에 무엇을 바라겠느냐 나는 왕씨에게 돌아가지만 너희들은 이씨세상에 있다. 이미 남의 신하로서 충성으로 힘쓰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에도 시대가 다르게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며너리도 한 마음으로 효성을 받쳐주니 변변치 못한 내가 복누림이 이 같은가보다 "하였다. 즉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가 다르니 너희들은 이씨세상에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라고 한 것은 시대를 사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선생의 사자란 융(融 :憂堂) 소(昭 :忍堂) 조(調 : 啞堂), 총 (총 :拙堂)등의 사우당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후에 현달하였다. 충숙(忠肅) 이라고 시호하였으며 밀양 소고야에 장하였고 밀양 덕남(德南) 청도 용강(龍岡), 단성 신계(新溪)에 향사하였다. 1835년(헌종 1년)에 청도 북지(北旨)에서 선생의 영정(影幀)이 나와 이를 청도 이서 용강(龍岡) 에서 선생의 영당 (影堂)을 건립하여 이를 봉안하고 춘추봉향을하고 있다. 또 선생의 문집을 원래 자인의 어느 과부집에서 약간의 시문파 만제문(輓 祭文) 등이 나와 이를 1832년 (순조 32년) 에 발간하였으며 여기에 삼은(三隱) 등 과 창수(唱酬)한 시가 많이 나왔다. 그중 한 수를 소개하면 "지난날 일들을 헤아려보니 영화란 이름이 욕이로구려 가슴속 품은 생각 말 할것없이 산으로 돌아감만 같지 못하네" 하니 포은(圃隱)이 답하여 옳되 "우리들은 그 무슨 인연으론지 공명으로 반생을 지났구려 이제는 푸른 송죽을 벗삼아 청산에서 흰 머리로 늙어 가세나 "하였다. (참고문헌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도주지, 도주문화)
박익(朴翊) 1332(충숙왕 복위1)∼1398(태조 7).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죽은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이 있다. 참고문헌 松隱集. 〈權五虎〉
박익(朴翊) 시대 : 고려시대 국적 : 한국 생몰년 : 1332(충숙왕 복위1)∼1398(태조 7) 정의 : 고려 말 유학자(儒學者). 생 애 호는 송은(松隱)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공민왕 때 동경판관(東京判官)·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공양왕 때 상장(上將)으로 강회중(姜淮中)과 함께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공을 세웠다.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송현(松峴)에 은거하여 스스로 장님이라 일컫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1395년 5차에 걸쳐 공조·형조·예조·이조판서와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였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의(忠義)를 지켰다. 그러나 유서에서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부자간에 시대가 달라졌으므로 아들은 다른 왕조에서 충의를 다하라고 하였다. 사 상 입지(立志)와 지신(持身)을 강조하여 정도(正道)에 힘쓰고자 하였다. 저 서 저서에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밀양시 역사속의 인물> 성명 송은 박익 한자 朴翊 시대 1332년(고려 충숙왕 1)~1398년(조선태조 7) 비고 문인 고려말의 충신. 휘는 익(翊) 일명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밀성. 벼슬은 예부시랑 겸 중서령(禮部侍郞兼中書令)을 지냈다. 신라 밀성대군의 후예인 문헌공(文憲公)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의 아들이다. 고려말 1332년에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때 벼슬에 올라 예부시랑 세자이부 겸 중서령에 올라 공양왕까지 3대를 섬겼고 충성을 다해서 나라를 도왔다. 이성계와 더불어 왜놈과 변경 호적을 여러번 정벌하여싸울 때마다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장상(將相)의 재목이라 지칭 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 국정이 날로 어지러워 지자 선생은 마음에 강개함을 품고 벼슬을 버렸으며, 이성계가 혁명을 하자 문을 닫고 72현과 같이 두문동에 은거해 계시다가 시를 지으며 아우 밀성군 천경과 더불어 밀양 시골집에 내려와 임금과 송도를 회포하며 후학에 힘썼다. 포은, 야은, 도은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부조현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며 하늘에 두 해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송죽같은 충절을 시와 글로써 읊조리며 이조(이씨조선)의 곡식(녹)을 먹지 않겠다고 충의로서 맹세하였다.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선생을 공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고, 또 이어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며, 2년 후에 좌의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아니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했다. 29세에 입지잠(立志箴)을 저술하여 학문을 배우는 바른태도를 논하였으며,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하여 사람의 마음과 몸가짐의 지표를 세웠다. 또 하도낙서와 성리학에 대한 학문을 깊이 탐구하였다.
◆ 신계서원(新溪書院)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에 있는 서원. 1839년(헌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익(朴翊)과 그의 제자 박융(朴融). 박소(朴紹). 박조(朴調). 박총(朴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신계(新溪)'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 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5칸의 정사(精舍), 5칸의 고사(庫舍), 신문(神門), 대문 등이 있으며, 묘우(廟宇)에는 박익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박융, 박소, 박조, 박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
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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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밀양지> 인물 박영균(朴永均) 고려(高麗)말 익재공신에 봉해지고 판도(版圖)판서(判書)를 지냈다. 은산군(銀山君)으로 추봉(追封)되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박영균(朴永均) 밀양인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이부상서(吏部尙書) 대화(大和)의 손자(孫子). 고려조(高麗朝)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와 3재상(三宰相)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 ||||
모(母) |
능성구씨 문정공 구위의 여(綾城具氏 文貞公 具褘의 女) 구위(具褘)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문과에 급제,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지이조사(知吏曹事) 등을 역임하고, 면성 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追贈). | ||||
배(配) |
성산배씨 이상 배현보의 여(星山裵氏 貳相 裵賢輔의 女) | ||||
배(配) |
창원박씨 보승랑장 박충민의 여(昌原朴氏 保勝郞將 朴忠敏의 女) | ||||
배(配) |
고흥유씨 판결사 유인기의 여(高興柳氏 判決事 柳仁杞의 女) | ||||
자(子) |
박융(朴融) 시대 : 조선전기 성산배씨 子 국적 : 한국 생몰년 : ?∼1424(세종 6) 정의 : 조선 태종 때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자는 유명(惟明)이며, 호는 우당(憂堂)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경북 밀양 출신이며, 박익(朴翊)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황희(黃喜)·이직(李稷) 등과 교유하였다. 1408년(태종 8) 과거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에 있으면서 태종에게 황해도 장연(長淵)의 강무장(講武場) 폐쇄를 간언하여 시행하였다. 집현전수찬·전한(典翰)·형조좌랑·이조정랑·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고, 경상도 경력(經歷)으로 부임하여 고을의 공자묘(孔子廟) 제기(祭器)를 수리 또는 제조하였으며,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간행 배포하였다. 그 후 전농소윤·성균관사예·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정몽주와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사 상 그는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면 사직은 망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치자(治者)는 무엇보다 민생질고(民生疾苦)를 밝게 살피고, 인사의 임용·출척(黜陟)을 공정히 하며, 권력의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절약하여 국가의 재정을 풍부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 서 저서에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청도를 빛낸 역사적인 사람들 박 융 (朴 融) 우당 선생의 인본사상 우당 박 융 선생 (憂堂 朴 融)선생은 태종, 세종조의 문인으로 자는 유명 (惟明)이며 호는 우당(憂堂)으로 송은 박 익(松隱 朴 翊)선생의 장자이며 전국 밀성박씨의 종손이다. 일찌기 포은 정 몽주(圃隱 鄭 夢周)선생의 문인으로 1408년(태종 8년)에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11년(태종 11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엔 오르고 뒤에 성균관 수찬, 전적, 전한(修撰, 典籍, 典翰)등으로 옮겨있다. 호당으로 들어가 매양 문사가 첨민하였다. 다시 돌아와 이조정랑 (吏曹正郎)의 요직에 있을때 1423년(세종 5년)에 흉년을 당하여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으로 나아가 각 군순령을 독려하여 여러 고을 백성들을 진제하였다. 다시 1424년(세종 6년)에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아가 권양촌(權陽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각지방의 향교제기를 정비하고 제법을 일신하고 청도향교의 중창에 힘을 썼다. 또한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아가서는 원운시(原韻詩)를 지었는데 여지승람 금산편(輿地勝覽 金山篇)에 실려있다. 1425년(세종 7년)에 다시 성균관 사예(成 均館 司藝)로 있을 때 그 전년에 경상도에 있을 때 각지방의 예속을 바로잡은 공로 로서 특히 촉석루(矗石機 ) 제영(題詠) 원운(原韻)의 청을 받아 원후운(原後韻)이 백여수나 되는데 이 원운(原韻)은 현재 개축한 촉석루 정면에 걸려있다. 이후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아가서 선치 하다가 1428년(세종 10년) 3월 15일 함안 객사(咸安 客舍)에서 졸하니 전군민이 시를 파하고 친아버지처럼 조상하였다. 선생이 문과급제할 때 고적 (考績)에 관한 책문은 당시 많은 응시자중에서도 두드러지게 훌륭하다고 하면서 지공거 이직(知貢擧 李稷)이 선생을 장원으로 뽑아 올렸다고 하니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참뜻인 민본사상(民本恩想)이 이 때부터 가장 중요시한 것으로서 그 전문이 문집에 실려 있다. 또 1411년(태종 11년)에 선생이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_으로 있을 때, 내관 황도(內官 黃稻)를 소환하고 창해도 장련(長連)의 강무장(講武場)을 폐쇄할 것을 태종대왕(太宗大王)에게 강력하게 충간 (忠諫)하였다. 그 이유인즉 "내관황도가 황해도 장련 강무장에서 개, 말을 조습(調習)한다고 사냥을 하니 황해도 백성들이 농사가 폐농이 속출하고 농민들의 원성이 높으니 이를 중지시침이 어떠하오리까 고하였다. 그러나 무인출신이요 사냥 취미가 많은 태종 (太宗 )은 이를 즉각 중지시 킬 용기가 없었던것 같았다. 태종이 말씀하기를 견마의 양식은 조로서 별도로 준비가 되어 있으니 농가에는 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할것이며 견마의 조습과 상무(尙武)의 정신은 국조이래의 일대방침이니 이를 쉼게 없앨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인 선생은 다시 직언하기를 "견마의 피해보다는 사냥을 하느라고 조습장(강무장)을 금벌하기 때문에 뭇 짐승들이 출몰하여 곡식을 낭패시키니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강무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지 않읍니까 " 하고 더욱 강변하였다. 드디어 태종대왕은 간관 (諫官 )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강무장 책임자인 내관 황도를 소환하니 장련 (長連)의 강무장은 폐쇄되고 말았다. 후에 태종이 물러나고 상왕으로 있을 때 즉 세종 3년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사냥을 좋아하는 상왕을 뫼시고 해주 강무장에 나가 오랜 날짜를 전후 20여회에 걸친 강무훈련을 마친 다음 야외 대연회가 벌어졌다. 그때 상왕은 수행해 온 정승 조말생(趙 末生)을 불러놓고 "내가 여러곳의 강무장을 돌아보았지만 여기만큼 기분이 좋고 훌륭한 수렵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역대의 왕이 사냥에만 마음이 말려 국사를돌보지 않으면 곤난하며 또 그만큼 백성들의 인체가 올것이다. 이 넓은 강무장을 없애고 나무를 베어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면 농업소득이 늘고 농가피해를 없앨 수 있다 "고 하니 영특한 아들 세종대왕은 상황의 이 말씀을 즉각 실천에 옮겨 해주 강무장은 그 후 폐쇄된 것은 물론이며 세종 ( 世宗)은 그로부터는 강무장 사냥도 일체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을 볼 때 간관(諫官)인 우당선생(憂堂先生)의 충언을 받아 받아들인 태종과 그것을 따린 아들 세종의 명군정치가 과연 황금기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겠다. 선생의 묘소는 밀양 운정(雲汀)이었으나 실전하여 밀양 소고야의 선부 송은묘소 앞에 제단을 갖추었으며 밀양 덕남원 (德南院)에 향사하였다. 후손들은 청도 밀양 등지에 대문중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인의 족보I 인명대사전, 도주문화)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憂堂先生文集 (古上 810.819 박67둁) 朴融 (?∼1424) ; 字 惟明, 號 憂堂, 本貫 密陽.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高宗12(1875). 3卷1冊 ; 28.1x19.1cm. 四周雙邊. 半匡 ; 20x15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전기의 문신 박융의 시문집이다. 박융은 1408(태종 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사예, 집현전수찬 등을 역임했으나 1411년 정언으로 있을 때 직무에 태만한 죄로 면직되었다. 1423(세종 5)년 이조정랑으로 기용되어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을 거친 뒤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며 덕남서원(德南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문집은 그의 후손 박성묵(朴星默)이 1875(고종 12)년 편집, 간행하였다. 제문은 스승 정몽주(鄭夢周)에 대한 것이고, 계(戒)는 자손을 훈계한 [거가계(居家誡)]이다. 「대고적책(對考績策)」은 1408년 과거 시험 때 작성한 것으로 관리들의 성적을 조사하여 나쁜 것은 물리치고 좋은 것은 추장(推奬)하는 고적유명책(考績幽明策)을 상세히 논한 것이다. 수령(守令)의 책임으로부터 출척(黜陟)의 의의와 방법 벌칙 등을 열거하면서 무엇보다도 민심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수령은 육사(六事)의 임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방목은 1408년의 식년시 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것으로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同進士) 23명의 이름과 관직(官職), 율과(律科) 급제자 1명의 이름 및 시험관들이 열거돼 있다. 序 ; 鄭 . 目錄. 卷之 1. 詩(9首). 文 ; 祭先師圃隱鄭先生, 居家誡. 策 ; 對考績策. 卷之 2. 附錄 ; 行狀(李鐸遠), 行略後?(李錫夏), 墓壇碑銘(柳尋春), 事蹟(朴廷相), 實錄(朴時默), 奉安文, 常享文(李鍾祥). 卷之 3. 附錄 ; 世系事實, 榜目. 識 ; 李文稷. 跋 ; 趙冕夏.
박천익·박융·박소·박조(朴天翊·朴融·朴昭·朴調) 밀양인 松隱朴先生遺集(奎12023), 朴天翊·朴融·朴昭·朴調·朴??(朝鮮)著. 1冊(俄張) 筆寫本 31×19.7cm. 四周單邊 半郭:20.8×16.4cm. 有界 10行 18字. 片版心:魚尾없음. 朴天翊(1332∼1398)의 詩文에 4子의 諸作을 附錄한 것이다. 그의 號는 松隱, 密州人이다. 高麗朝에 禮部侍郞兼中書令世子貳傅까지 지냈다. 麗末 諸賢中 特히 圃隱 鄭夢周와는 知己之交를 가졌다. 李成桂가 즉위하자 諸賢들과 더불어 벼슬을 버리고 松峴에 隱居 스스로 장님이라 일컬으며 살았다. 1395년(太祖 4)을 비롯, 5차에 걸쳐 工判, 刑判, 禮判, 吏判, 左議政 등으로 幣聘하였으나 귀머거리요 소경이라 自稱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不食李粟」의 뜻을 지켜 나간 것이다. 太祖는 天翊의 不事二君의 忠義를 이해하여 그를 관용하고 論罪하지 않았다. 太宗朝에 忠肅이라 追謚했다. 이른바 麗季八隱의 한 사람이다. 네 아들은 다음과 같다. {1} 朴融(1347∼1424), 兒名은 鯉夢, 字는 粹翁, 號는 憂堂, 吏曹正郞을 지냈다. {2} 朴昭(1347∼1426), 兒名은 린夢, 字는 晦翁, 號는 忍堂, 縣監까지 지냈다. 融과 同胎生. {3} 朴調(1350∼1431), 字는 愼翁, 號는 啞堂, 禮曹正郞까지 지냈다. {4}朴??(1353∼1439), 字는 暝翁, 號는 拙堂, 戶曹正郞을 거쳐 吏曹參判까지 지냈다 본래 天翊의 5代孫 甁齋主人 朴河澄이 5人의 遺事를 編錄하고 거기에 그들의 詩文을 정리, 수록한 바 있있던 것으로 여겨지나(三足堂金大有撰 松隱遺事題辭 參照) 文獻 繼續 등의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도 이미 이 5인의 詩文은 散佚된 것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後孫이 다시 天翊 五父子의 詩文을 諸家文集등에서 철拾하여 집안에 보존하여 오다가 松隱詩文舊本에 合輯한 것으로 보이며, 문장과 附錄文字에는 그대로 落缺이 많다. 그리고 「舊本云云」의 注記가 있다. 이 책은 印本을 필사한 것이 아니고 出刊을 위한 底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책머리에 洪命周가 쓴 序文이 있고 이어 수록된 五言詩(贈圃隱韻등 8수), 七言詩(戱贈上人, 自嘆詩등 16수), 松隱·桃隱등과 和唱한 附詩 7수, 輓詩 3수(金孟誠, 鄭道傳, 趙浚), 七律 1수(戱贈道欽)등의 詩는 주로 次韻하거나 冶隱·牧隱·卞季良등 당대의 名士들과 和酬한 것들이다. 文은 箴 2편(立志箴, 持身箴), 重刊禮記集說箋略, 祭圃隱文, 遺書의 4편이 실려있다. 「附錄」은 冶隱·春亭·皇甫仁 및 四子등이 松隱에 대해서 쓴 畵像贊, 請謚狀, 墓表文, 奉安文 등으로 되어있다. 첨부된 四子의 문집들도 같은 종류의 詩文들로 구성돼 있다. 「憂堂遺藁」; 五言詩 2수(過松峴先考遺墟感懷 등), 七言詩 9수(詠杜鵑 등), 附詩 2수, 文(居家章 등) 3편. 「忍堂遺稿」;五言詩(官箴 등), 七言詩 13수(政堂白戱, 寒食등), 附詩, 輓詩 및 文(戒辭章 등) 2편.「啞堂遺藁」;五言詩 4수(自寬韻등), 七言詩 10수(留金陵官憶舊都有感등), 輓洪晩隱등 輓詩 2수 및 祭文.「拙堂遺稿」;五言詩 7수(適過松京路有感등), 七言詩 15수(謫居自懷등), 附詩 4수 및 文 愼心愼官章 1편. 天翊의 詩는 淸朗古高하다. 麗季의 世道人心의 險難한 것이 싫어서 이미 산속에 숨어살 뜻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圃隱·桐隱 등과의 贈答詩에서 알아 볼 수 있다. 麗朝가 滅亡한 뒤의 시에는 高麗忠臣으로 자처하는 감회가 짙고 詩情이 더욱 簡古하다. 「立志持身箴」은 儒家思想에 입각한 誠立向正道를 勸勉하는 뜻이 피력되어 있다. 「祭圃隱文」은 「大夫以義, 丹性不貳, 返于故里, 桑梓耀日」만 남고 나머지는 「餘火缺」이라 注記되어 있다. (憂堂 融의 蔡圃隱先生文도 末尾가 탈락되어 있다) 그의 遺書에는 「吾歸王魂, 汝在李也, 旣爲人臣, 忠則竭力, 先天後天 父子異時.」라는 말이 보인다.4子의 詩는 篇數가 많지 않으며 부자 또는 형제간에 次和한 作品이 중심 되어 있다. 融의 詠杜鵑은 乃父의 作에 和作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詩를 읽어 보면 天翊의 유언에 「先天後天 父子異時」한 情感을 느껴 볼 수 있다. 融의 「居家章」은 勤儉節用과 兄弟友愛에 勉勵하기를 타이른 글이다. 聰의 「愼心愼官章」은 벼슬은 謹愼하여야 하며 奉公盡職해야 함을 말한 短篇의 문장이다. 天翊의 遺言 중에 「一桂三蓮, 一國爭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天翊 네아들 중 3子는 同榜及第하였던 것 같다. 5父子는 麗末鮮初에 있어 절개와 문장으로 한 때 널리 알려졌던 이들이다. 4子의 詩文은 天翊의 그것보다 遜色이 있는 것 같다.
<국조 문과 방목> 박융(朴融) 태종(太宗)8년(1408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유명(惟明) 호(號) 본관(本貫) 밀양(密陽)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박익(朴翊) 생부(生父) 조부(祖父) 박영균(朴永均) 증조부(曾祖父) 박간(朴幹) 외조부(外祖父) 박충민(朴忠敏) 처부(妻父) 장**(蔣**)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정랑&(吏曹/正郞&) | ||||
자(子) |
박소 현감(朴昭 縣監) 성산배씨 子 호(號)는 인당(忍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태종(太宗)때 생원(生員). 안음현감을 지내면서 청백(淸白)한 치적(治積)이 있었다. 안음에 공(公)의 청백선정비가 세워졌다. 문집(文集)이 있다.
<밀양시 역사속의 인물> 성명 인당 박소 한자 朴昭 시대 1347~? 비고 문인 조선 태종때의 청백리. 본관은 밀성. 이름은 소(昭). 자는 회옹(晦翁). 호는 인당(忍堂). 1347년 7월 28일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1390년에 안음현감(安陰縣監-함양군 안의면)에 제수되어 청백, 선정 업적으로 백성들이 함양군 안의면 광풍루(光風樓) 옆에다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를 세워 그를 추모 하였다. 현감으로 재직하며 지은 거관자경시(居官自警詩),자관시(自寬詩),계사(戒辭)등의 글이 문집(忍堂集)으로 전해온다. ◎거관자경시(居官自警詩) 착하고 악함은 마음가짐에 있나니, 어진 사람 앞에서는 악함도 도리어 어질어 지는도다. 모든 것을 어질게 하고저 하면 마땅히 덕망을 펼쳐야하며, 포악함을 저지르면 스스로 망신을 초래하느니라. 한갓 착하기만 하면 위엄이 없을수도 있고, 사정을 두면 진실을 잃기쉽느니라. 무슨 약속이든 잊지말라. 성내고 급하게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법이니라. ◎자관시(自寬詩) 백성이 배부르고 내가 굶주린다 하여도 내 굶주림은 도리어 배부른 것같고, 백성이 굶주리고 나의 배가 부르다 하여도 내 배불임은 굶주림과 다름이 없도다. 옛부터 굶주리고 배불림은 세상에 흔한 일인데, 누가 천심(天心)을 쫓아 배부르고 굶주림을 고르게 할꼬.그의 유허비(遺噓碑)는 밀양시 초동면 모선동에 있다. | ||||
자(子) |
박조 예조정랑(朴調 禮曹正郞) 성산배씨 子 <밀양지> 인물 박조(朴調) 자(字)는 신옹(愼翁), 호(號)는 아당(啞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관(官)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 조(朴 調) 밀양인(密陽人) 자(字) 신옹(愼翁) 호(號) 아당(啞堂) 관(官) 예조정랑(禮曹正郞) 향(享) 단성 신계서원(新溪書院)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
배(配) 영산신씨(靈山辛氏) 신희(辛憘)의 여(女) 신희(辛憘) ? ~ 1370 ~ ? 영산人 상장군공파 12세손. 수(壽) ?세 9세 중정대부(中正大夫) 성열(成烈)의 증손(曾孫)이다. 11세 곡강(曲江) 사천(斯천)의 5째 아들이다. 관(官) 사정(司正) *기록(記錄)이 없음. | ||||
자(子) |
박총 호조정랑(朴聰 戶曹正郞) 성산배씨 子 <밀양지> 인물 박총(朴聰) 자(字)는 명옹(暝翁), 호(號)는 졸당(拙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효행(孝行)으로 이조(吏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 ||||
녀(女) |
손혁 군수(孫奕 郡守) 성산배씨 女 | ||||
녀(女) |
손억 감찰(孫億 監察) 성산배씨 女 손억(孫億) 밀양인 조선 때 司憲府 監察(사헌부감찰)을 지냈다. 武安面(무안면) 5. 정곡리(鼎谷里) 나뭇골(木洞) 솥질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 지명은 적촌(赤村), 복을(伏乙) 또는 복걸(伏乞)이라 했다. 마을 안쪽 골짜기에 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나뭇골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하며, 복을, 복걸이란 말은 이 마을 안쪽에 복을촌제(伏乙村堤)가 있었다고 하여 보살리라고 하다가 한자음으로 차음된 것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에 천부락지혈(天釜落地穴)이 있다고 하여 지관들이 가끔 다녀 가는 곳이기도 하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중랑장(中郞將) 손중견(孫中堅), 문장(文壯) 손약수(孫若水), 감찰(監察) 손억(孫億), 우후(虞侯) 손수종(孫壽宗) 등 4대가 소거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의현감(安義縣監)이었던 류종귀(柳宗貴)가 안의(安義)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하며, 지금 그 후손들은 주로 운정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 ||||
녀(女) |
조공현 생원(曺功顯 生員) 성산배씨 女 | ||||
형제(兄弟) |
제(弟) 박천경 밀성군(朴天卿 密城君) <밀양지> 인물 박천경(朴天卿) 고려(高麗) 말에 등제(登第)하여 관(官)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 ||||
문헌(文獻) |
1. 고려 고분벽화 조선일보 : [이규태 코너] 2000. 9. 23일. 24796호 40판 7면 고려 말의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이색(李穡)등 십은(十隱)으로 우러름을 받았던 송은(松隱)박익(朴翊)의 고분에서 마치 사실화 같은 벽화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여태까지 발견된 고분벽화 가운데 선이나 색조가 가장 선명하여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복식이나 풍속, 그리고 당대의 문화변천을 아는 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분의 동벽서벽에 여섯 여인과 두 남자가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가는 그림인데 여기 여인들이 입고 있는 엉덩이까지 덮는 장삼(長衫)이 똑같음을 볼 수 있다. 주의를 끄는 것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여인들의 장삼은 좌우 옷깃이 복판에 와 마주치는데 이번 벽화의 장삼은 왼쪽 자락이 가슴과 배를 덮어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맺고 있다는 점이다. 저고리 자락의 왼쪽이 위냐 오른쪽이 위냐는 문화의 변천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들에 나오는 인물 41명 가운데 왼자락 위가 25명이요, 오른자락 위가 16명으로 상대적으로 왼자락 위가 많다. 한데 집안 등 고구려 전기의 고분 벽화에는 북방민족의 영향으로 왼자락 위가 많은데 장수왕의 평양 천도 후의 평양 인근 고분들에서는 한나라 영향으로 오른자락 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 천도 후의 고구려에서는 북방 오랑캐(胡族) 복식을 탈피 문명국이던 중국의 오른자락 위의 복식을 본떠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 말의 복식도 오른자락 위이어야 했을 텐데 이번에 발견된 벽화에서는 한결같이 왼자락 위로 되어 있다. 그동안에 어떤 문화적 변수가 작용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그 변수로 고려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한동안 지배했던 몽골(元)의 민족 복식이 북방 민족의 그것인 왼자락 위라는 사실이다. 이 벽화 발견으로 논란이 될 소지를 제공한것이 이전의 복식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의 두루마기와 모자다. 머리를 꿸 구멍만 내서 입는 원시 복식인 관두의에 소매만 단 둥근깃(團領) 두루마기를 입고 몽골인들의 카우보이 모자 같은 좁은 테에 화분을 뒤집어놓은 듯한 발립을 쓰고 있다. 이 차림새야말로 몽골 냄새가 물씬한 것으로 미루어 복식문화에 몽골 영향이 의외로 컸음을 입증해주는 벽화이기도 한 것이다.
2. ▣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원과 나라를 빛낸 조상들 ▣ 종파(宗派), 8세손 언부(彦孚)가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 졌고 밀성부원군 언부(彦孚)의 차남 의신(義臣 : 고려 인종(仁宗)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 역임)의 아들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 : 의신의 맏아들) 이 있고 후손에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 의신(義臣)의 현손)도 있다.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영균(永均)의 아들 박익(朴翊) 또는 천익(天翊), 자(字)는 태시(太始),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1332년에 태어나 고려조(高麗朝) 공민왕(恭愍王) 2년(1352년)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문과에 급제해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 (世子貳傅 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翰林文學)이 되었다.
3. 만취(晩翠) 밀성박공(密城朴公) 묘갈명(墓碣銘) 박병목(朴炳穆) 본(本) 밀양(密陽) 자(字) 순직(舜直) 호(號) 만취(晩翠) 고종(高宗) 계유(癸酉) 9월 19일생 경진(庚辰) 정월(正月)에 졸(卒) 향년(享年) 68세 생부(生父) 박한준(朴漢俊) 생모(生母) 진주강씨(晋州姜氏) 강만형(姜晩馨)의 여(女) 양부(養父) 박한장(朴漢章) 양모(養母) 광주안씨(廣州安氏) 안붕원(安朋遠)의 여(女) 배(配) 서흥김씨(瑞興金氏) 김이동(金以東)의 여(女)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후(后) 자(子) 박희병(朴熙秉) 호(號) 소당(笑堂) 박희옥(朴熙玉) 박희철(朴熙澈) 여(女) 이용석(李龍錫) 최장영(崔長永) 병인(丙寅) 1986년 곡우절(穀雨節)
4.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 이우성(李佑成) 저(著) 본관(本貫) 여주(驪州) 호(號) 벽사(碧史) 거(居) 밀양(密陽) 부북면(府北面) 퇴로(退老)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편 박익(朴翊) 본(本)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이고 자(字) 태시(太始)며 호(號) 송은(松隱)으로 전국 밀양박씨의 종손(宗孫)이며 은산 부원군 영균(銀山府院君 永均) 의 장자이다. 1332년 (충숙 왕 복위 1년)에 밀양 삽포에서 태어 났다. 시호(諡號) 충숙(忠肅) 511 517 577 604 | ||||
문헌(文獻) |
1.<밀양지> 인물
2. 송영사(松嶺祠) ○ 본 관 : 밀성(密城) ○ 파 : 은산군파(銀山君派) ○ 소재지 : 동부면 영북리 ○ 관리자 : 박희균(朴熙勻) ○ 유래 또는 업적 밀성박씨(密城朴氏) 시조공 언부 은산군파 20세 박증신(朴增愼)이 입거제(入巨濟)하였으며 송영사(松嶺祠)는 충숙공 박익(朴翊) 주벽(8세)외 50위 조위를 모신 사 당이다. 제사일 : 음력 10월 15일 중정일(中丁日) 벌초일 : 음력 7월 15일 거제군지(巨濟郡誌)
3.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박익(朴翊) #경상도(慶尙道) 청도(淸道) *용강영당(龍岡影堂) 제향. 박 익(호송은 절의 시충숙 본밀양). 祭享. 朴 翊(號松隱 節義 諡忠肅 本密陽).
#경상도(慶尙道) 단성(丹城) *신계서원(新溪書院) 제향. 박 익(호송은 고려 충신 시충숙 본밀양). 박 융(호우당 익자 군수 본밀양). 박 소(호인당 융제 현감 본밀양). 박 조(호아당 소제 정랑 본밀양). 박 총(호졸당 조제 효행 증참판 본밀양). 祭享. 朴 翊(號松隱 高麗 忠臣 諡忠肅 本密陽). 朴 融(號憂堂 翊子 郡守 本密陽). 朴 昭(號忍堂 融弟 縣監 本密陽). 朴 調(號啞堂 昭弟 正郞 本密陽). 朴 聰(號拙堂 調弟 孝行 贈參判 本密陽).
4.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밀양(密陽) ● 덕남사(德南祠) 박 익(호송은 고려 충신 시충숙 본밀양). 박 소(호인당 융제 현감 본밀양). 朴 翊(號松隱 高麗 忠臣 諡忠肅 本密陽). 朴 昭(號忍堂 融弟 縣監 本密陽).
5.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단성(丹城) ● 신계서원(新溪書院)
6.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 용강영당(龍岡影堂)
7.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二十) ● 절의열전(節義列傳) 박익(朴翊) 밀양(密陽) 호(號) 송은(松隱)
8. 박익(朴翊)(1332~1398) 본관 밀양(密陽) 자(字) 태시(太始) 호(號) 송은(松隱) 松隱先生文集 단계문고 松隱先生文集 국립 | ||||
문헌(文獻) |
송은집 ( 松隱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松隱先生文集 판심제 松隱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39年刊 권책 4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3?6.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28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
저자 성명 박익(朴翊) 생년 1332년(고려 충숙왕 복위 1) 몰년 1398년(태조 7) 자(字) 太始 호(號) 松隱 본관(本貫) 밀양(密陽) 시호(諡號) 충숙(忠肅) 초명(初名) 천익(天翊)
가계도 조부(祖父) 박간 이상(朴幹 貳相) 부(父) 박영균 판도판서(朴永均 判圖判書) 모(母) 능성구씨 문정공 구위의 여(綾城具氏 文貞公 具褘의 女) 본(本) 박익(朴翊) 배(配) 성산배씨 이상 배현보의 여(星山裵氏 貳相 裵賢輔의 女) 자(子) 박융 전한(朴融 典翰) 자(子) 박소 현감(朴昭 縣監) 자(子) 박조 예조정랑(朴調 禮曹正郞) 자(子) 박총 호조정랑(朴聰 戶曹正郞) 여(女) 손혁 군수(孫奕 郡守) 여(女) 손억 감찰(孫億 監察) 여(女) 조공현 생원(曺功顯 生員) 배(配) 창원박씨 보승랑장 박충민의 여(昌原朴氏 保勝郞將 朴忠敏의 女) 배(配) 고흥유씨 판결사 유인기의 여(高興柳氏 判決事 柳仁杞의 女) 제(弟) 박천경 밀성군(朴天卿 密城君)
기사전거 : 行狀(柳台佐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충숙왕 1 1332 임신 至順 3 1 7월 27일, 密陽 ?浦里에서 태어나다. 공민왕 9 1360 경자 至正 20 29 〈立志箴〉을 짓다. ~ ~ ~ ~ ~ ~ ~ 과거에 급제하다.○ 翰林, 文學, 少監을 거쳐 禮部侍郞 世子貳傅 兼中書令에 이르다. 우왕 12 1386 병인 洪武 19 55 判官으로서 勸農防禦使가 되어 경주에 부임하다. 紫金魚袋를 하사받다. 우왕 13 1387 정묘 洪武 20 56 일을 마치고 개성으로 돌아오다. ~ ~ ~ ~ ~ ~ ~ 이성계와 함께 島倭촵邊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다.○ 정치가 문란할 기미를 알고 동생 朴天卿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 密陽으로 돌아가다. 공양왕조 ~ ~ ~ ~ ~ ~ 개성에 돌아와 예조판서가 되다. 태조 1 1392 임신 洪武 25 61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개성의 杜門洞에 은거하다. 이때 ?八隱?으로 일컬어지다. ~ ~ ~ ~ ~ ~ ~ 고향 密州에 돌아가 松溪에 은거하며 ?松隱?이라 自號하다.○ 太祖가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장님으로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다. 태조 4 1395 을해 洪武 28 64 工촵刑촵禮촵吏曹判書로 연이어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다. 태조 5 1396 병자 洪武 29 65 左相으로 불렀으나 역시 응하지 않다. ○ 〈詠杜鵑〉 詩를 읊어 뜻을 나타내다. 태조 7 1398 무인 洪武 30 67 11월 27일, 松溪에서 졸하다. ○ 淸道 素古山에 장사 지내다. ○ 좌의정에 贈職되다. 정종 1 1399 기묘 建文 1 - 卞季良의 계청으로 ?忠肅?(事君盡節曰忠 剛而能莊曰肅)의 시호를 받다. 정종 2 1400 경진 建文 2 - 墓表를 세우다.(黃喜 撰) 순조 33 1833 계사 道光 13 - 密州 德南書院에 제향되다. 헌종 5 1839 기해 道光 19 - 丹城에 新溪書院이 창건되어 제향되다. ~ ~ ~ ~ ~ ~ - 문집이 간행되다.(洪命周촵趙斗淳의 序) - - 1935 을해 - - - 문집이 重刊되다.
기사전거 : 行狀(柳台佐 撰) 및 文集의 附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후손가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839년경 후손 朴世臣 등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초간본》 1832~35년간 玆仁의 후손가에서 저자의 유고가 발견되고 또 淸道의 후손가에서 影幀과 諡牒 및 碑表 등이 발견되자, 후손들이 德南祠촵龍岡祠에 제향하는 일과 영정 봉안 등의 일을 추진하였다. 이때 후손 朴世震 등이 李?에게 遺稿의 撰次촵勘校를 의뢰하고 이어 四子의 문집인 「憂堂遺稿」촵「忍堂遺稿」촵「啞堂遺稿」촵「拙堂遺稿」를 부편하였으며, 洪命周의 序文을 붙여 1책으로 편찬하였다. 金大有의 〈書遺事後〉에 의하면, 5대손 朴河澄이 저자의 四子의 遺事를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저본이 된 유고인지는 불명하다. 이 본은 현재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新溪書院이 창건되자 그 營建實記와 奉安文 등을 첨부하여 4권 1책의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현존하는 초간본이다. 이 본에는 四子의 문집은 제외되고 1837년에 지은 趙斗淳의 序가 첨부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연세대학교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62년경에는 新溪書院 影幀奉安文 등의 글이 새로 추각되었다. 이 본은 고려대 도서관,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5년에는 후손 朴在時 등이 초간본에서 빠진 시문과 부록문자를 수합하여 3권 1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10행 18자로 된 중간본에는 저자의 시 4제가 첨부되고, 諸人의 贈遺 2편과 부록으로 松京志八隱事蹟 등 관계 기록 및 神道碑銘, 杜門洞書院 常享文 등의 서원관계문자가 새로 추가되었다. 卷末에는 仙巖藏板의 刊記와 宋浚弼이 지은 跋이 실려 있다.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초간본으로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서와 발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4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洪命周촵趙斗淳이 지은 두 편의 序와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詩 16題와 文 5편이 실려 있다. 시는 오언절구촵오언율시촵칠언절구촵칠언율시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시에는 次韻 또는 原韻詩가 첨부되어 있다. 文은 箴 2편, 箋 1편, 祭文 1편, 遺書 1편인데, 그중 〈立志箴〉은 29세 때 작품이라 하며, 祭文은 정몽주에 대한 것이다. 또 遺書는 四子에게 남긴 유훈이다. 권2에는 牧隱 등 諸人이 贈遺한 글로서 輓촵?像贊과 墓所文촵墓表 등의 글도 실려 있다. 여기에는 후인의 小註가 부기되어 있다. 권3은 附錄으로 문집 간행 시에 지은 글들이 실려 있다. 柳台佐가 지은 〈行狀〉을 비롯하여 1835년 李?가 지은 實蹟, 1834년 李秉遠이 지은 遺事와 德南書院촵龍岡祠의 봉안문 등이 실려 있다. 권4는 續集으로 1839년 新溪書院 창건과 봉안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끝에 李家淳이 1836년에 지은 〈文集舊本序〉가 있는데 여기서 舊本은 家藏되어 오던 유고와 遺事 기록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 : 吳世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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