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원치 않을 때 재빨리 임신 가능성을 ‘잘라 버리는’ 방법이 있다. 이미 미국과 특히 유럽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이다. 간단히, 수정란의 자궁벽 착상을 방해하는 ‘응급 피임약’을 복용하거나 착상 초기에 낙태를 유도하는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응급 피임약은 ‘모닝 애프터 필(morning-after pill)’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고, 후자는 일명 먹는 낙태약이라 불리는 항황체호르몬제제 ‘RU-486(미페프리스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처럼 간단한 약물 복용으로 모체에서 영원히 분리해 내는 대상은 다름 아닌 수정란, 생명이 시작되는 ‘인간 배아’다. 물론 이 같은 피임법이 몇 가지
손꼽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여성의 존엄성과 심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약물 오·남용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고 존재한다.
작년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이 RU-486 시판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을 때 낙태 찬성론자들과 의약 전문인들, 정치인들의 반응을 보건대, 이는 기우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12년 전부터 이 약이 사용돼 온 것과 달리, 이 약품의 수입 여부를 두고 수년간 공방에 시달려 온 미 정부 당국이 RU-486의 수입, 시판을 허용했을 때 미국의약협회(AMA)와 낙태 찬성론자들은 ‘처방전 없이도 이 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해 온 것이다. 낙태 찬성론자들과 의약협회의 주장은 ‘모닝 애프터 필(이하:모닝필)’을 둘러싸고 좀 더 교묘해진다. 성교 후 72시간 내에 복용하는 이 약의 효능은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이는 낙태가 아니라 ‘임신을 예방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작년 10월 로마 가톨릭 교황청 생명 학술원은 이탈리아 약국에서 모닝필을 시판하기 시작하자 수정란도 인간의 생명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모닝필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모닝필의 효과는 ‘화학적인 인공유산’이나 마찬가지”라며 이 약의 처방 및 복용 행위 모두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유럽과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되는 응급피임약의 확산을 저지할 뾰족한 수는 없는 듯 하다. 특히 ‘노레보(Norlevo)’라 불리는 약은 작년 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발매 승인을 한 데 이어 올해 아프리카 13개국도 발매를 승인했고 근래에는 중남미에까지 이 같은 추세가 옮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이같은 상황을 비켜갈 수 있을까. 우리 나라에서는 작년 미국에서 RU-486
시판이 허용된 뒤 기독교 및 천주교 생명윤리단체들이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연대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별 다른 수입 조치가 없어 활동이 무마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모 약품회사에서 노레보 수입을 추진하고 있어 종교단체들의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5월 약품회사로부터 수입허가 신청을 접수한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정부 기구 일부와 의료인 집단, 몇몇 시민단체에
타당성 여부를 조회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세계 곳곳에서 응급 피임약이 사용되는 것이 현실. 그러나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가치질서’에만 기대고 있는 국내 행정 당국 및
종교계, 낙태 반대론자들의 입지도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김배경 기자
sanso@kidok.co.kr
괜찮은 글 같아서 퍼왔습니다.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과 경구피임약의 차이점에 대해서 잘 설명되어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