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한국시학》지난 계절의 시 - 2024 봄호
적절한 비유와 전경화적 요소의 시(詩)
김 광 기 (시인)
현대시를 구성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낯설게 하기’를 처음 사용한 러시아 형식주의자였던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하며 그것은 시와 소설 등 그 장르적 특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시에 나타나는 전경화(前景化)적인 요소와 그대로 상통하는 것인데 언어를 비일상적으로 사용하여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일이며 상투적인 표현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느낌이나 지각이 일어나도록 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를 더욱 심화시키고자 하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적 구성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선행되고 있는 측면이 축약적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의 내용에 동반되는 시의 리듬과 비유, 그리고 플롯을 진행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적절함을 도모하는 언어적 축약일 수도 있지만 이것보다는 시적 의미를 심화시키고자 하는 의미적 축약, 혹은 상황적 축약을 시도하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다 하겠다.
현대시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은 아주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어 ‘낯설게 하기’가 비일상적으로 전혀 가늠키 어려운 영역 밖의 것이거나 의미 혹은 상황적 축약이 대비가 어려운 아이러니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해독이 어려운 시가 난무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의 구성적 요소를 면밀하게 살피고 심리적 철학적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 하나하나 분석해 들어가면 재미있는 퀴즈 풀이를 하듯 흥미롭게 시의 의미를 감지할 수 있고 시적의미의 심화를 위해 시인이 부단하게 노력한 경지임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외경스럽게 접근하지 않아도 적절한 비틀기와 전경화적인 요소로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며, 그러면서도 그 의미 또한 깊고 깊은 경지에 있는 시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한국시학》 지난 호를 읽으며 이러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햇살 등에 업고 돌아서는 모습
황홀했던 축제도 이제 끝이로구나
집착으로 살아온 나날
솟구치는 욕망으로 불태운 꿈이
해돋이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비틀거리는 해넘이로구나!
눈물도 아쉬운 시간
기억의 빈 칸을 조심스레 메꿔가며
더듬더듬 찾아가는 미망(迷妄)의 시간
남은 소원은 하나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될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바닷가에 몽돌로 남아
흘러간 세월의 추억이나 굴리리라
- 이영식, 「세월의 해넘이」 전문
위의 시 「세월의 해넘이」에서는 삶의 후반기에 들어선 화자가 인생의 절정이 지나버린 시기에 느끼는 삶의 기울어짐이 “해넘이”에 비유되고 있다. “황홀한 축제”와 같았던 삶을 보내고 그 끝자락처럼 느껴지는 현재의 삶에서 생각해보니 지난날 그렇게 “집착”했던 “욕망” 등이 “해돋이”처럼 시작되어 내내 한창일 줄만 알았더니 “어느새 비틀거리는 해넘이”처럼 저녁을 맞고 있는 삶의 내리막 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던 “미망(迷妄)의 시간”에 미처 채우지 못했던 아쉬움의 시간들을 조심스럽게 메꿔가며 화자는 마지막까지 열정만큼은 식지 않고 끝까지 타오르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하염없이 “바닷가에 몽돌”처럼 세월을 굴리는 응어리라도 될 것이라고 한다. 초연하지만 남은 생의 열정만큼은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굳건한 삶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초연한 삶의 끝자락에서도 굳건한 삶의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는 나날 속에서 삶을 이끄는 열정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역설이 “해돋이”와 “해넘이”의 대비로 펼쳐지며 많은 삶의 의미를 명상케 한다.
지독한 그리움은 뼈에서 나온다
갈비뼈 사이로 가을이 지나갈 통로
그 어디쯤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철없이 불쑥불쑥 올라오면
갑자기 유년의 첫사랑
아릿해져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탄 배가 사막의 모래폭풍
건너기 위해 바람의 시간에 맞춰
돛을 펼쳐야 한다
가끔 홀로 서서
눈물 흘리는 나무를 알고 있지만
과연 행복한가 라고 묻고 선 은행나무에게
참으로 부끄럽다
천지의 조화를 느껴야지만 자연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데
눈앞에 있는 하늘이
허상 아니라고 자신하지 못하겠고
발아래 땅은 지구 반대편 그가 무거워
머리 위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나
어쩌다 보이는 노랑나비
더 이상 춤추지 않기로 했나 보다
- 서정윤, 「나비의 춤에 대하여」 전문
이 시를 접하고 들어서자마자 첫행의 “지독한 그리움은 뼈에서 나온다”는 말의 의미가 시쳇말로 뼈를 때리는 울림을 준다. 그리고 다음의 시행을 따라 읽으며 “나비의 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비는 그리스어로 프시케라 하며 프시케는 ‘영혼’ , ‘심리’ , ‘정신’ 등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그리스신화에 프시케가 등장하여 그 의미가 여러 각도로 확장되기는 하지만 단지 용어의 의미만으로 연상했을 때에도 “나비”의 의미는 그저 단조롭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의 다음 행부터는 단조롭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상 속의 세계 어디쯤이거나 영혼의 울림 어디쯤에서 전달되는 묘한 아우라와 함께 읽히기 시작한다.
“유년의 첫사랑” 어디쯤에서 “사막의 모래폭풍” 속 “돛을 펼”친 것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 낱낱의 노란 잎들이 나비처럼 휘날리는 듯하다. 그런데 화자는 “참으로 부끄럽다” 한다. “천지의 조화”와 대비되는 “나비의 춤”이 연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에 있는 하늘이/ 허상 아니라고 자신하지 못하겠고/ 발아래 땅은 지구 반대편 그가 무거워/ 머리 위 부담스”럽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비는 “더 이상 춤추지 않기로” 한 것 같다.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의 세계가 막막하면서 무거운 현실의 세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눈빛으로 몰려다닌 한 떼의 걸음이
긴장된 생각을 풀지 못하고
강가를 따라가며 수런대고 있다
물은 유속이 점점 느려지고
바람은 구부정한 어깨 사이로 빠져나간다
건조한 입술에 싸늘한 기억이 고여 신음이 매달린다
등줄기 타고 내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눈동자들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는 몸싸움에도
서로가 속울음까지 훤하게 들여다보며
상처를 구석구석 매만져 주고 있다
간혹 얼룩진 꿈들이
겹겹이 목울음으로 잠겨 있다가
말라가는 풀숲에서 휘청거린다
철새 떼가 또다시 먼 길을 돌아와
둥지를 품어갈 때
억세게 다져오는 삶터에서
소란스러운 웃음으로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몇몇 사람들
강물에 엉켜진 마음 순하게 풀어내고 있다
- 김영자, 「억새」 전문
위의 시 「억새」를 읽다 보면 강가 어디쯤에서 휘날리고 있는 억새밭의 풍경이 떠올려진다. 그리고 억새밭과 강가 사이에 난 길을 외롭고 쓸쓸하게 걷고 있는 화자의 모습도 연상된다. 그는 “건조한 입술에 싸늘한 기억이 고여 신음이 매달”릴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고 “등줄기 타고 내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랄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는 몸싸움”을 할 정도로 격동적인 현실을 감내하지 못한 것 때문인 듯하며 “속울음”을 참으며 걷고 있는 심정을 “상처를 구석구석 매만져 주”듯 바람에 휩쓸리는 억새의 물결이 사락사락 달래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화자는 깊어가는 가을의 스산함 속에서도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철새들을 보며 위안을 얻고 있다. “억세게 다져오는 삶터에서/ 소란스러운 웃음”처럼 들리는 철새들의 날갯짓을 보며 화자는 마음속에 엉겨있던 사람들과의 갈등을 날려버리고 있는 듯하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자신의 심경도 순하게 흘러가기를 기원하고 있는 둣하다. 일상적인 듯하지만 낯설게 진행되는 시행의 플롯에서 명암이 도드라진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시를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삶의 역경을 풀어내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고즈넉하게 비친다.
물 한 잔 내리는 것도 힘들어 체기라더냐
곡지혈을 누른다느니 호들갑은
깊은 아픔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막장을 끊어내고서야 알았다
불수의근들이 오래도록 견뎌온
깊은 아픔들로 내가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 저 범람한 둑 가에서
물버들 한 그루 산발로 울고 있다
하우스 비닐을 생과부 건처럼 쓰고
꺽꺽 울고 있다
저 사람들 망연자실
흐르는 뻘을 보는 것은
맨 종아리가 시려서가 아니다
한쪽 어깨가 드러나서가 아니다
탁류에 버티고 서서
대신 울어줄 곡비가 울기까지
망연자실만이 통증을 누르기 때문이다
곡이 들려야 비로소 슬픈
깊은 슬픔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 정희성, 「곡비(哭婢)」 전문
조선시대 장례 시에 곡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곡(哭)하는 노비를 두는 경우가 있었다 한다. 왕실 국장인 경우에는 궁인을 시키기도 했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집안의 노비를 시켰으나 노비가 없을 경우에는 민가의 여자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정희성 시인의 시 「곡비(哭婢)」에서는 “물버들 한 그루”가 곡비로 등장하고 있다. 감히 아프다는 말로는 형언키 어려운 “깊은 아픔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화자는 “막장을 끊어낸” 아픔, “불수의근들이 오래도록 견뎌온/ 깊은 아픔”을 대신해 “범람한” 냇[川]둑 가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곡비로 삼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인 내장근인 불수의근(不隨意筋) 막장을 끊어낸 아픔의 심정이 ‘아프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정신적인 고통의 감내가 지치고 지치듯 물버들을 흔드는 바람 소리 같은 울림으로 전달되는 듯하다. 하지만 화자는 “곡이 들려야 비로소 슬픈/ 깊은 슬픔을 딛고 있”는 것과 같은 슬픔마저도 잊고 있는 듯한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를 통해 더 아리고 아린 통증이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
달을 낳기로 했다
둘 만으로는 불안하여 아이를 갖겠다는 어느 시인처럼
둥근 달을 배슬어 낳기로 했다
내 열망이, 눈물이 나의 밥알이 다 흩어지기 전에
달을 낳기로 했다
이슥한 밤 흙손을 씻고 돌아서려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린다
밖엔 히스크리프를 부르는 검은 바람소리 밖에 없는데
사람 소리까지 들린다
1%의 호기심과 99%의 두려움마저 달항아리에 담은 밤
눈을 감고 소리를 잠재운다
오늘의 땀과 꿈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이 밤은 두려움마저 황홀하다
첫 아이를 낳던 그 새벽처럼
- 나고음, 「달을 낳다」 전문
나고음 시인의 「달을 낳다」를 읽고 있으면 환상 속의 세계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히스크리프’가 등장해서인지 음산한 고전소설 속 풍경을 거닐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이 낳고자 한 ‘달’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며 읽게 되지만 시행의 부분 부분마다 드러나는 낯선 비유의 행간을 섣불리 건너가지 못한다. 언뜻 하게 되는 생각으로 ‘달’은 자식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세월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보름달 같은 딸은 아닐까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런 ‘달’을 화자는 “낳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극의 전환을 이루는 “이슥한 밤 흙손을 씻고 돌아서려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린다”는 시행이 들어선다. 분위기는 폭풍의 언덕과도 같은데 전반을 지배하는 “두려움마저 달항아리에 담은 밤”에 “눈을 감고 소리를 잠재운다” . “황홀”한 고요함 속에서 “첫 아이를 낳던 그 새벽” 같은 희망의 기운이 여명처럼 밝아져 오는 듯하다. 어떤 어려움과 고달픔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달을 낳”기로 한 뒤부터 찾아오는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샘솟고 있다. 그러고 보니 화자가 말하는 “달”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절대적인 기운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는 전경화적인 요소의 시어나 시적 환경, 시의 플롯 등이 “낯설게 하기”로 진행되어 시적 상상력을 키우고 그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이상의 작품들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켜 그 공감의 폭을 더욱 키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교가 심해서 시가 심각하게 난해해진다면 독자와 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고 시적 기교가 부족해서 구현하고자 하는 바가 참신하지 않다면 공들여 쓴 작품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없으니 시인들은 그 조절의 문제를 숙제로 삼지 않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