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모두가 참여하는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누구라도 이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단 이 조건에 맞아야 합니다. 제목은 제가 정한 ‘삼삼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공식적 출판까지 염두에 둔 편집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참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실명으로 인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필명이나 가명으로 가려주기 바랍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문선명, 정명석, 이만희 등 공론화 된 이름의 경우나
한국 기독교회사의 교과서에 언급되는 역사사료에 있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왜 제목이 ‘삼삼한 이야기’인가는
제가 어느 정도 마중물 역할을 하면서 풀어가면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적 기법일 수 밖에 없으나 팩트는 중요합니다.
그 너머의 이야기는 참가하는 필자의 느낌이나 추정임을 알려주면 됩니다.
매우 중요한 시점이랄 수 있는 시기는, 남가좌동 혹은 신촌과 삼선교와 테맨 소극장 그리고 영동지하실을 거치던 무렵의 정명석을 잠시 스쳐갔을 수 있었던 분들도 이 갈릴리 마을의 공간에서 두루 살펴보시면서 참여해 주면 됩니다. 즉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 살아오며 남기고 싶은 참가자들의 삶의 체험이 진하게 묻어 있으면 됩니다.
‘탈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인칭 시점에서 써 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알림 역할을 하면서 존댓말 형식으로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삼삼한 이야기는 일반어법으로 전개해 갈 것입니다.]
-세월이 한 참 흘렀다. 그러나,-
시간을 셈해 보는 일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일기쓰기나 일상의 다이어리에 눈길을 두는 습성을 쉬 버리지 못하는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일기예보와 컴퓨터 화면에 자동적으로 맞춰지는 날짜에
저절로 흡수되는 ‘나이 듦’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중이라 더 그런가 보다.
저절로 유튜브에 올라오는 정보의 세상은 새로운 우주여행을 방불케 하는 문명인으로 끌어들인다.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라는 다큐 프로그램 이후 더 가세하는 언론들의 후속 보도와 각종 인터뷰에 등장하는 JMS.
이 언어와 상징이 가져다 주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그런지 심심찮게 JMS 측, 즉 그들 말로는 ‘기독교복음선교회’라는 교단의 공식 채널을 통해 방호용 목적으로 세상의 언론에 맞대응하며 JMS측 공개 화면과 증언을 내보내고 있다. 이제 대놓고 유튜브 영상에 올리고 있는 터다. 일반 기독교채널과 별로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들이 내놓는 컨텐츠를 보면, 정말 일반인들이 듣기에도 평범한 한 기독교 채널의 목사 설교와 거의 동일하다. 최근 그 JMS측 영상으로 올라온 얼굴을 보니 언뜻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나 기억이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쪽 증언자가 말하는 35년 이라는 세월동안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는 말이 새롭다. 거기에다 7년 혹은 8년을 더하면 40년이 훌쩍 넘었던 세월-난 그곳에서 거의 19년을 보냈다-을 나는 더 살아냈던 것 아닌가?
저 화면에 멀쑥하게 드러낸 저 얼굴.
꼭 믿고 싶은 것만 신앙 하는 저 얼굴에 스며든 저 세월의 흔적들.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선택적 믿음의 증언!
그래서 꼭 세상은 성안과 성밖! 다른 말로 하면 우물 안과 우물 밖 이렇게 갈라치기 된다.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면 JMS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다. 아직까지 영어 Chatbot에선 Java Message Service로 나오니 좀 당황스럽다. 기독교의 간판이나 언설 그 모든 자료들이 하나의 정보의 바다에서 어떻게 필터를 거쳐 나오게 될까.
인간이 움직이면서 남긴 것들-그것을 통해 대면하는 것들-그것을 반성적 생각으로 걸러야 하는 것들-----기독교 예수의 후예들----기독교 신자들-----기독교 광신자들---- 기독교 신학자들---
종교라는 현상에서 문화. 그리고 문명. 그리고 삶과 인간세.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성경의 구절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숫자 계산에 지금 시점을 다시 점검해 본다. 저절로 그 시절로 내 몸과 마음을 빨아들이는 이 기재는 무엇일까? 세간의 주목을 이끈 일이 사회적 반향을 크게 일으킨 탓이다. 즉,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의 ‘제이엠에스(JMS)’편 프로그램과 연이어 폭로되는 피디수첩 그리고 그것이 알고싶다 등의 탐사보도 사회적 프로그램이 바다 건너 한 순간 잊어버렸던 충격을 다시 쓰나미처럼 삶의 현장의 방파제를 덮쳤던 탓이다.
하필이면 2023년 달력 12장이 매달려 있다가 두세 번 뜯겨가는 중에….
상식이라는 방파제.
법과 제도와 인륜이라는,
태양과 지구가 억겁의 궤도를 돌리며 21세기의 문명을 일구어 낸, 그 체계의 방파제.
모든 사건에는 다 원인과 그 동력이 부여되는 법이다. 이 세상의 움직임이 그러하지 않은가. 인간의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을 일으켰고 그 연쇄적인 순간의 움직임들이 지금의 현상들의 원인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다 수긍할 것이다. 지금 괴물로 등장한 한 사람. 사람이라고 하는 정의(定義) 목록에 양심이 절대적 요건 혹은 항목으로 들어있지 않는 한, 그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저 한 물건이 있다고 치자. 그 물건 혹은 그 자-놈 자(者)자를 붙여본다.
한 때에는, 내 시간과 공간의 원근법이 작용될 시점에서는, 가슴 졸이며 일체의 끈이 나를 옥죄어 오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던 그 자이다. 참으로 제3자, 삼인칭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 자가 된 사건이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
인물이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두 명의 캐릭터가 지금 떠오른다. 이 두 등장인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분명히 공통인수=공통분모=메시아라고 하는 정명석이 덜커덕 걸려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등장인물의 또 다른 색깔이 공통적으로 두드러진다. 두 번째 서열이라는 등급의 색깔이다. 마치 그 옛날의 역사교과서에나 실렸을 법한 진골이냐 성골이냐의 골품제도 혹은 인도의 캐스트제도 같은,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등급을 떠올리게 하는 서열을 말한다. 아니 더 가까운 곳에 실례가 있었다. 바로 북의 공산당이 말하는 권력 서열 말이다. 그 먼 북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쉽게 주변에서 바라보는 권력의 중심축을 도는 중력의 실체만 느껴도 서열은 매겨지지 않는가? 그 실권을 차지 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모양새를 보면 모든 것이 동시성이다. 삼십개론이라는 프레임으로 모두를 교화 시키던 시절. 제일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다. 동시성. 역사의 동시성이라는 말로 암울했던 시절을 꿰찼던 때.
일언이 폐지하고. 인간 욕심의 왜곡되는 변화과정이 문명이라는 범주까지 포함된다면 그 문명을 거부해야만 한다. 한없이 변화하는 자기 이익의 유전자. 이기적 유전자의 총체적 모양에서 정ㅈ은이라는 자가 벌이는 또 다른 모습을 안ㄱㅎ이라는 자의 1999년 이후의 자리에서 본 사람들은 이해가 갈 것이다. 여기에 양심 혹은 정의, 사랑과 평화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상이 있었을 따름이다. 아차, 문명도 동물의 세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놓쳤다.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필자의 욕망일 수 있다. 어떻든 지금 정ㅈㅇ이라는 자가 내부에서 자기세력의 끈을 공고히 잡아 당기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미 이 사태의 동기는 정ㅈㅇ이 하늘같은 대선배로 여겼던 안ㄱㅎ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겠다.
-군말을 했다. '삼삼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마중물 역할을 하도록 머릿말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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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떠나는 순간 이렇게 선하고 좋은
착한 사람들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것이 제일 아쉬웠었습니다.
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선배님을
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극단적 상황에서 나오는 인간의 밑바닥 모습들이
어떨지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