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계시된 사람에 대한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첫째로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둘째로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몸과 영과 혼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삼분설(三分說)’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사람이 이성적 영, 동물적 혼, 그리고 몸의 세 실체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교회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다메섹의 요한 등의 교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였다. 삼분설은 초대 교회의 어떤 이단자들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노시스주의는 사람의 영이 신적 본질의 일부분이므로 범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내리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혼만을 가지셨고 신적 로고스가 그의 영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한 다른 한 견해는 사람이 몸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二分說)이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중세의 안셈,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와 칼빈 등은 다 이 견해를 가졌고 그 후 개신교회들의 절대 다수가 이 견해를 취하였다.
이분설의 근거는 영이라는 말(루아크, 프뉴마)과 혼(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확실히, 성경에서 그 두 말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
첫째로, 성경은 인간 전체를 묘사할 때 어떤 때는 몸과 영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몸과 혼이라고 말함으로써 영이라는 말과 혼이라는 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5:3, 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둘째로,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묘사할 때 어떤 때는 영이 떠난다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혼이 떠난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사도행전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창세기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셋째로, 성경은 죽은 자의 회생(回生)을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영이 돌아온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혼이 돌아온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열왕기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넷째로, 성경은 죽은 자를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영들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혼들이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요한계시록 6:9, “죽임을 당한 영혼들[혼들].” 요한계시록 20:4,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다섯째로, 흔히 삼분설에 의하면, 영은 보다 더 고상한 기능을 하고, 혼은 보다 더 저급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성경은 동물에게도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나님께도 혼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11:5, “여호와는 (악인을) . . . 마음[혼]에 미워하시는도다.” 이사야 1:14, “내 마음[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이사야 42:1, “내 마음[혼]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예레미야 6: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혼]이 너를 싫어하고.” 예레미야 9:9, “내 마음[혼]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아모스 6:8,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자기의 혼으로] 맹세하였노라.” 또한, 성경은 사람의 종교적 활동들을 영에게만 돌리지 않고 혼에게도 돌림으로써 영과 혼의 기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누가복음 1:46, 47, “내 영혼[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성경에 삼분설을 가리키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그리고 보다 명확한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인성(人性) 전체의 성화를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히브리서 4:12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 .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깊은 곳을 꿰뚤어 감찰하심을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영혼의 활동은 무엇인가? 몸은 비생명적, 물질적 실체이며, 영혼과의 결합으로만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한다. 죽음은 몸에서 영혼이 떠나는 현상이며, 죽은 몸은 몸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영 혹은 영혼의 특질은 생명과 인격성이다. 사실, ‘영’이라는 원어는 ‘영’이라는 뜻 외에 ‘호흡,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또한 ‘혼’이라는 원어도 ‘혼’ 외에 성경에서 빈번히 ‘생명’을 가리킨다. 인간의 생명 원리인 영혼은 또한 인간의 인격적 요소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영혼의 활동은 마음(레브, 카르디아 καρδία)이라고 표현된다. 사람의 마음은 지식, 감정, 의지의 요소들로 구성되며, 그것에 양심이 덧붙여질 수 있다. 영혼은 어떤 외적 세력에 억압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
양심이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도덕적 분별력과 선한 경향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법정(法庭)이다. 로마서 2:14, 15, “양심 . . .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그러나 양심은 선하고 깨끗한 마음이지만 더러워질 수 있고 심지어 완전히 마비될 수도 있다(고전 8:7; 딤전 4:2).
마음은 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지식은 뇌와 감각 기관들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도 대개 몸의 감각 기관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몸과 분리된 영혼의 순수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결합 상태에서의 영혼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진다.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한다. 또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지 쉽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잠 15:13).
특히, 사람이 구원받은 후 성화(聖化)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중생한 영 자체의 문제이거나 몸의 문제가 아니고, 몸과 결합된 영혼 즉 영육의 통일된 인격의 문제이다. 로마서 7:25,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중생한 자의 심령은 본성의 남은 부패성과의 끊임 없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성도는 조금씩 선한 인격으로 변화된다. 성도는 영적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각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교회 역사상,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해 세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세상에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보았다.89) 이것을 선재설(先在說)이라고 한다. 이 견해를 취하는 자들은 보통 각 개인의 영혼이 이전 세상(前世)에서 범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선재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성경에 반대된다. 말라기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더욱이, 선재설은 인류의 단일성과 원죄의 교리에 충돌한다.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더욱이, 사람은 전세(前世)에 대한 아무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범죄에 대한 기억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선재설은 명백히 잘못이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출생되었다고 보았다.90) 이것을 유전설(遺傳說)이라고 한다. 유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에는 자손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이 조상에게서 유전됨을 암시한다. 창세기 46:26, “이는 다 야곱의 몸(야레크, 넓적다리, 허리)에서 나온 자며.” 히브리서 7:9, 10,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오스퓌스, 생식기관의 자리)에 있었음이니라.” (2) 성경에는 자손들이 죄 중에 출생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 영혼의 기원과 그것의 죄악성이 부모에게서 나옴을 보인다.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 외에도, (3) 자녀의 출산은 사람에게 맡겨졌다. 창세기 1:27, 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4) 성경이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해 침묵한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고린도전서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창조의 6일 이후 중지되었다.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 . . 마치니.” (6) 가정의 정신적 특성들은 자손들에게 유전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 듯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유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개인의 영혼의 전달 방식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 부모가 자녀 영혼의 창조자인가? 혹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물질처럼 분할(分割)되는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선재(先在)하였는가? 그 어느 대답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영혼들의 창조자가 아니다. 또 인간의 영혼이 물질처럼 분할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또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2) 인류가 첫 사람 아담 안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은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아는 공통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독립적 인격이며, 성경이 원죄에 대해 말할지라도 선조들의 누적된 죄책(罪責)의 전가(轉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서 마리아의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을까?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은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다고 본다.91) 이것을 창조설(創造說)이라고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동방교회의 견해이었고, 서방교회도 제롬과 힐러리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이 견해를 수납하였다. 중세교회도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취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자들 대다수는 이 견해를 가졌다.
창조설을 지원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민 27:16도 같음).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42:5,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영]을 주시는 하나님.” 스가랴 12:1, “사람 안에 심령[영]을 지으신 자.”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예레미야 38:16, (시드기야 왕의 말)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아사)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한다. 욥기 31: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시편 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사람의 몸뿐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몸만 창조하셨고 그들의 영혼들은 부모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창조설에도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창조설은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영혼을 창조하실 수는 없으나 깨끗한 영혼을 창조하여 즉시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갖는 죄인이 되게 함으로써 죄악의 간접적 책임자가 되시는 것은 아닌가? (2) 창조설은 원죄(原罪)의 진리와 조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창조된 영혼은 어떻게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게 되는가? 특히, 원죄의 부패성은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것이 단지 자녀들의 몸에만 전달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자녀들의 영에도 전달된다면, 언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3) 가정의 정신적 유전도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선재설(先在說)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성경 진리들에 배치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유전설(遺傳說)과 창조설(創造說)은 둘 다 상당한 성경적인 또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창조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의 출생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 부모의 역활이 신비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사람은 몸과 영혼의 두 요소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창 1:27; 5:1; 9:6; 고전 11:7; 골 3:10; 약 3:9).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부여하셨고”라고 진술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것을 말하며 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지식과 지혜가 있음을 증거한다. 과연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의 지식과 지혜를 잘 나타내 보였다(창 2:19, 20).
도덕성이란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이 본래 가졌던 거룩과 의(義)이다. 흔히 이것을 ‘본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전도서 7:29는 증거하기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하였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도덕적 중립 상태에 있었다는 추측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지켰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 동안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이었다. 첫 사람은 얼마 동안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인 지식과 도덕성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여전히 지혜롭고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참지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사람은 본래의 그 거룩과 의를 다 잃어버렸다. 사람은 지금 심히 죄악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식과 의의 회복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3:10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4:24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증거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한다. 또 고린도전서 11:7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하고, 야고보서 3:9는 “이것[혀]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단지 지식과 도덕성뿐 아니라 그 외의 요소들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사람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점들일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성, 인격성, 양심 등을 포함하며 영혼의 활동 기관 혹은 표현 기관으로서의 몸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특히 창세기 9:6에 살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것으로 정죄한 것을 보면,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또 창세기 1:26-28이 하나님의 형상과 생물 통치권을 연관시키는 것을 보면, 생물 통치권도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성, 의지의 자유 등 자연적 재능들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의 욕망들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 정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뿐이며 도덕성은 제외된다고 본다.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래의 의뿐이라고 본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 의지의 자유, 및 종교적, 도덕적 성질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의 본래의 상태 즉 타락 전 사람은 성숙한 인격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 시절이 없는 성인이었고,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었다. 그들은 지정의를 조화 있게 조절하는 인격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동안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과 평강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몸은 완전하고 아름답고 건강하였음에 틀림 없다. 그들의 몸에는 허약과 피곤과 질병과 고통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범죄한 이후 형벌로 내려진 것들이었다. 또 비록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몸은 죽지 않을 수 있는 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몸으로 에덴 동산에서 얼마 동안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건강한 몸으로 생물들을 다스리는 그의 직무를 잘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 사람의 본래의 상태는 최종적으로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의 의(義)는 이미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상태는 예비적 시험 단계이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그 시험하신 첫명령(창 2:16, 17)에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더 큰 존귀와 영광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다시는 범죄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본래의 상태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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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