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파트 놀이터에 나와 앉아있는 어머니들의 머리수를 세어보면 어린이들의 수와 일치합니다. 그 말은 모두가 나와 자기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회입니다. 유괴니 성폭력이니 아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만 나쁜 것이 아니고 어린이들도 문제입니다. 인터넷 음란물을 보고 흉내를 내느라고 고학년이 저학년에게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조금 크면 나아지느냐, 그때부터는 공부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애들도 힘들고 엄마, 아빠도 힘이 듭니다. 성적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와 씨름합니다. 엄마는 자식과 씨름합니다. 이게 언제쯤 끝날 것이냐, 이게 싫어서 조기 유학을 보내자니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생기고 가족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정말로 우리 사회의 부모와 자녀는 어디서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분 쉼은 오직 주님 품에서 얻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 품에서 쉴 곳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건강하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어디에도 공부를 못해서 굶었다는 아이는 본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굶어 죽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 예요. 내일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최선을 다하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의 신앙교육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식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모를 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식이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자랑하는 부모님은 봤지만 자식의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는 부모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은근히 염려합니다. 저러다가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지는 않을까? 그것을 환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성 프란시스가 마을에 들어오면 엄마들이 자기 아들을 집안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 프란시스의 얼굴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자기도 수도사가 되겠다고 할까봐서 입니다. 당시에도 기독교 문명이었지만 성직가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부모들이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고 그 어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하나님에게 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내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라고 서원을 하고 하나님이 응답으로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무엘, 하나님이 들으셨다, 라고 짓고 그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라게 한 것입니다. 만일 그의 엄마 한나가 자식을 마음대로 쑥쑥 낳을 수 있는 여자였다면 결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못 낳기 때문에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박한 순간에 가서야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생명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살려주면 내가 무엇을 하겠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마틴루터도 그렇게 해서 성직자가 된 경우가 아닙니까? 그는 원래 법학도였는데 자기 친구와 등산을 갔다가 자기 보는 앞에서 친구가 번개 맞고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마틴루터가 죽음의 공포에 붙들려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나를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견은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견은 묻지 않고 ‘살려주시면 무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일꾼들을 모집하시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어느 목사님 사무실을 찾아가서 보니까 그분 책상위에 이런저런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있어서 ‘목사님 이게 다 뭡니까?’ 여쭤봤더니 그분이 ‘교인들이 나 쓰라고 준 물건인데 처치곤란이라 여기 쌓아놨습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도 당신에게 서원한 사람들 처치곤란으로 그렇게 쌓아놨는지 모릅니다. ‘이게 다 뭡니까?’ ‘살려주면 목사 되겠다고 한 사람들이네....’
하나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살려주면 뭐하겠다는 식으로 절박한 순간에 가서야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게 뭐가 있다고 거래를 할 수 있습니까? 그냥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게 낫습니다. 뭘 드리겠다,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안 원하시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귀한 것 드리는 것처럼 이거 드릴 테니 뭐해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냥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믿고 구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이요 지혜로운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가 감당 못할 일을 하는 것보다는 순간의 ‘하나님 내가 잘못 했습니다’ 회개하고 살려 달라, 도와 달라, 구하세요. 어차피 우리의 삶은 주님 것입니다. 내가 드렸기 때문에 주님 것이 되는 게 아니고 어차피 주님 것이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재물도 명예도 다 주님이 주신 것인데 우리가 세삼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생색을 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제서야 ‘어이고 고마워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네고, 거래를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어차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받아쓰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고 주실 줄로 믿는 것이 그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드린 사무엘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쓰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로움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자신이 그 어린 소년이 특별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자기 엄마가 하나님께 자기를 서원하고 성전에 맡겼으니까 거기에 있는 것이지 사무엘이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려해서 무엇을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자기의 사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에게 무엇을 드리겠다, 이렇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시고 그것을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영적인 천재 였던 것 같습니다. 모짜르트가 음악의 천재였어요. 어렸을 때 벌써 교향곡을 작곡하고 한번 음악을 들으면 그것을 외우고 그것을 그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천재 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무엘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인 엘리 제사장도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엘리제사장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엘리는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신적인 문제라든가 착각이라든가 어떤 환청을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아직은 그것을 우리가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차 우리가 연구하고 또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 영적인 현상이 어디서부터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이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 중에도 그들의 어떤 영적인 체험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정신적인 문제, 어떤 환각, 환청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지혜롭게 구별을 해주지 않으면 교인들의 신앙을 돕는다고 하다가 오히려 정신적인 문제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의 경우에 이 소년 사무엘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듣는다고 했을 때,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의음성인지 아니면 사무엘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인지 이것은 어른이 분별을 해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고 그의 스승, 멘토인 엘리가 함께 있는 성막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비록 자기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더라도 소년 사무엘을 위해서 올바로 판단하고 분별해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 사무엘의 경험이 진짜 영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배려하셔서 미성년자들은 사실 이런 것을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렵지요.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든 성령을 체험하는 일이든 은사를 체험하는 일이든 심지어 하나님이 그들을 주의 종으로 부르는 일도 아이들이 혼자 있을 때 일어나는 것보다는 어른들이 감독하고 지도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건전합니다. 자식이, 어린이들이 어른이 경험하지 못한 은사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홀로 내버려 두어서 그들이 홀로 이런 경험을 하게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 책임 있고 믿음의 연륜이 있는 어른들이 감독을 하고 지도하는 가운데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아이들이예요. 아무리 사무엘이라고 하더라도 아이입니다. 아이는 어른과 같지 않습니다. 그게 장점일수도 있지만 단점인 경우도 많아요. 인생 경험도 없고 사리를 분별하기 어렵고 사람의 악함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아마 그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하나님의 은혜지요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은, 사무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영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성직자들이 많지만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잘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엘리가 하나님의 이상을 보지 못했다고 한 것처럼, 성직자, 제사장이지만 자기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사무엘은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에게 일을 맡기시고 장차 이루어질 일을 말씀해주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을 경험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야 됩니다. 사도로 부르시든, 선지자로 부르시든 목사, 복음 전하는 자, 교사, 선교사, 이 모든 것은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임의로 내가 목사가 되겠다, 선교사가 되겠다, 라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부르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부르심에 합당한 능력을 주셔야 되고 은사를 주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사에게 안수를 주는 것은 임의로 안수 베풀어 달라 해서 안수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소명, 은사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수를 하기 때문에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안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순서가 거꾸로 돼서 임의로 안수를 베풀고 해서 주의 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무엘처럼 특별한 부르심과 은사를 받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귀한 선물을 남용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 필요한 환경에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에게는 엄마를 닮은 것도 아니고 스승인 엘리제사장을 닮은 것도 아닌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엄마에게도 이런 은사가 없고 엘리 제사장에게도 그런 은사가 없어요. 그 주변에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은사가 없는데 사무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엄마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엘리 제사장이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식을 가르치고 환경, 교육이 다 중요하지만 자녀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자식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부모고 갖고 있지 못하고 선생도 갖고 있지 못했는데,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선물, 이것을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식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꼭 부모를 닮아야 되는 것이 아니예요. 부모처럼 돼야 되는 게 아니예요. 부모처럼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은 자기의 길을 찾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날 록펠러라는 이름이라든가 카네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업가들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그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았어요. 자기 길을 찾아갔어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자식 후손이 반드시 그 부모가 간 길을 가야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갈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부모가 간섭할 수 없는, 자녀가 부모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 이예요. 사무엘이 부모와 떨어져서, 집에서 떨어져서 혼자 성전에 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까? ‘사무엘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할레루야!
그리고 두 번째는 사무엘이 비록 아이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사무엘에게 당신의 말씀을 강요하지 않고 사무엘이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어요.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고 자녀에게 우리의 뜻을 고집하고 강요하기 보다는 그들이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무엘은 그의 스승보다도 훌륭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보다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학생이 스승보다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민족의 소망이지요. 그래서 더 나은 교회,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종으로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어린 사무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세요.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이 자기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하나님에게 자기를 ‘저는 주의 종이오니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우리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여겨야 돼요. 우리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드려야 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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