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손 송덕조(宋德祖)
承旨公墓碣銘
我延安之宋自高麗大匡肅毅公諱卿封府院君因以爲貫有諱勛判書諱雲龍中郞將諱復隆尙書諱根贊成事諱有良入 本朝官禮曹判書卽公皇考也公諱守殷生有異質專心力學丱角中司馬大有聲譽正郞睦公致奇之以女妻公因贅居于安東府豊山縣晩雲里 天順戊寅登謁聖乙科特除通訓補龍宮縣監尋遷玄風治績俱著滿秩歷晋州及安東敎授未幾陞通政拜承政院右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舘修撰官遂退歸田園壽考令終今屛山敬老案可按而知也葬在蕨田領坤坐之原配淑夫人泗川睦氏墓在細峴丑坐生四男一女希景叅奉希平訓導希文校理以遺命承公祀希玉副尉女朴离孫叅奉男邦柱女尹瑾訓導男八柱女叅奉權箴校理男天柱國柱俱進士八柱女郡守權希仁國柱男遺慶叅奉連慶遠慶叅奉男汝源汝沃汝沃男尙賓以文學稱執徐亂從忘憂郭公于火旺尙賓男樀以孝友聞代弟殺身人比之伋壽褒融 贈都事構木絹 生進都事男仁輿令輿禮輿智輿禮輿男延祚餘不錄嗚呼公以家世簪纓之後仕 國朝休命之際宜其學問事功之有不朽於來者而旣經兵燹重値家亂生卒歲年俱不傳出仕履歷亦甚疎忽實爲孱孫無窮之慟舊無碣後孫之浩洛九等爲惧陵谷之慮謀伐石而表隧於法當螭首龜趺而事係鄭重有不敢遂俾德祖姑記陰謀採乘所載及從先祖思近叙公遺事畧書世系官職子姓如右
歲己未 十月 日立
十五代孫 德祖 謹記
幼學聞韶 金應周 謹書
승지공묘갈명(承旨公墓碣銘)
우리 연안(延安)의 송씨(宋氏)가 고려대광(高麗大匡) 숙의공(肅毅公) 휘(諱) 경(卿)으로부터 봉부원군(封府院君)함으로 해서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유(有) 휘(諱) 훈(勛)이 판서(判書)요 휘(諱) 운룡(雲龍)이 중랑장(中郞將)이요 휘(諱) 복융(復隆)이 상서(尙書)요 휘(휘) 근(根)이 찬성사(贊成事)요 휘(諱) 유량(有良)이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관(官)이 예조판서(禮曹判書)이니 곧 공(公)의 황고(皇考)이다. 공(公)의 휘(諱)는 수은(守殷)이니 나면서부터 이질(異質)이 있었다. 전언(傳言)하여 역학(力學)했고 관각(丱角)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니 성예(聲譽)가 대단(大端)했으니 정랑(正郞) 목공치(睦公致)가 기특(奇特)히 여겨 사위로 삼음으로 인하여 안동풍산만운리(安東豊山晩雲里)로 췌거(贅居)하였다. 천순무인(天順戊寅)에 알성을과(謁聖乙科)에 올랐다. 특별(特別)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보직(補職)되어 용궁현(龍宮縣)을 제수(除授)받았으며 얼마 되지 아니해서 현풍(玄風)으로 옮기니 치적(治績)이 모두 나타났으며 만기(滿期)가 되어 진주교수(晋州)와 안동교수(安東敎授)를 지내고 말기(末期)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우승지겸(承政院右承旨兼)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經筵參贊官春秋舘修撰官)을 배수(拝授)하고 드디어 전원(田園)으로 돌아와서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죽었다. 지금 병산경로안(屛山敬老案)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장사(葬事)는 궐전령(蕨田嶺) 곤좌(坤坐)에 지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사천목씨(泗川睦氏)니 묘(墓)는 세현(細峴) 축좌(丑坐)이다. 사남일녀(四男一女)를 두니 희경(希慶)은 참봉(叅奉)이요 희평(希平)은 훈도(訓導)요 희문(希文)은 교리(校理)니 유명(遺命)으로 공(公)의 제사(祭祀)를 받들다. 희옥(希玉)은 부위(副尉)요 여(女)는 박이손(朴离孫)이요 참봉(叅奉)의 남(男)은 방주(邦柱)요 여(女)는 윤근(尹瑾)이요 훈도(訓導)의 남(男)은 팔주(八柱)요 여(女)는 참봉(叅奉)권잠(權箴)이요 교리(校理)의 남(男)은 천주(天柱) 국주(國柱)니 모두 진사(進士)요 팔주(八柱)의 여(女)는 군수(郡守) 권희인(權希仁)이요 국주(國柱)의 남(男)은 유경(遺慶)이니 참봉(叅奉)이며 연경(連慶)과 원경(遠慶)이요 참봉(叅奉)의 남(男)은 여원(汝源) 여옥(汝沃)이요 여옥(汝沃)의 남(男)은 상빈(尙賓)이니 문학(文學)에 재주가 있었으며 임진란(壬辰亂)에 망우곽공(忘憂郭公)의 화왕산성(花旺山城)에 상종(相從)했다. 상빈(尙賓)의 남(男)인 적(樀)은 효우(孝友)로 소문(所聞)이 있었으며 대제살신(代弟殺身)해서 남들이 급수포융(伋壽褒融)으로 비교(比較)했으며 증도사(贈都事)이고 구(構)와 견(木絹 )이니 생원진사(生員進士)요 도사(都事)의 남(男)은 인여(仁輿) 영여(令輿) 예여(禮輿) 지여(智輿)이며 예여(禮輿)의 남(男)인 연조(延祚)이다. 나머지는 기록(記錄) 못한다. 오호(嗚呼)라 공(公)의 가세(家世)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후손(後孫)으로 나라의 운수(運數)가 크게 밝음에 벼슬을 해서 그분의 학문(學文)과 사업(事業)의 공(公)이 래세(來世)에 썩히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이미 병란(兵亂)을 겪었고 거듭 집안에 어려운 일을 만나 생졸세년(生卒歲年)을 모두 전하지 못하고 출사(出仕)한 이력(履歷) 또한 심히 소홀(疎忽)하니 실상(實狀) 잔약(孱弱)한 후손(後孫)들의 무궁(無窮)한 통한(慟恨)이다. 후손(後孫) 지호(之浩)와 낙구(洛九)등이 능곡(陵谷)의 염여(念慮)를 두렵게 여겨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에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의논(議論)을 하고 법(法)으로는 용두구판(龍頭龜板)을 해야하나 일이 정중(鄭重)함에 관계(關係)되는지라 감(敢)히 못하고 덕조(德祖)로 하여금 우선 음기(陰記)쓰라 하거늘 가슴에 실려있는 것과 종선조(從先祖) 사근공(思近公)이 공(公)의 유사(遺事)를 서술(敍述)한데서 채집(採集)해서 대략(大略) 세계(世系)와 관직(官職)과 자손(子孫)을 오른쪽과 같이 쓰노라
세기미십월 일 립(歲己未十月 日 立)
십오대손 덕조 근기(十五代孫 德祖 謹記)
유학 문소 김응주 근서(幼學 聞韶 金應周 謹書)
延安宋氏世譜跋(庚戌譜:1910년)
謹按古隋唐二國隋有經籍志唐有藝文志皆以譜牒施行于世又按昔日吳中宗族自一祖而視之則均是子孫云其惟我宋氏之謂乎伏惟我宋系出延安而當麗季始祖諱卿封延安府院君 贈諡肅毅公肅毅公生諱勛官至吏儀判書判書公生二男長諱光彦官至大司成次諱雲龍官至中郞將中郞將生諱復隆官至政堂文學文學公生諱根官至贊成贊成公生諱有良官至禮曹判書判書公生三男長諱保殷進士移居成川次諱嗣殷官至大司諫大司諫五世孫諱簡封延春君延春君生諱德榮爲國殉節 賜額忠愍祠圖像畵閣封延昌君諱德潤香于顯忠祠兩代豊功盛烈豈不壯哉豈不偉哉又有獻賀者其後裔孫諱之安生諱永祖監役子諱洛善洛九兄弟弁進士洛善子建植春植兄弟亦進士世居貫鄕而令儀令譽不見而是圖豈不讚哉伏惟我大司諫之季承旨公諱守殷落南于安東而子諱希文官至校理校理公生諱國柱進士進士公生諱遺慶官將仕郞參奉遊退溪李先生門以文學見稱於世至孫諱樀兄弟爭死有伋壽褒融之行而一鄕一道之縉紳章甫不勝嗟惜公議峻發一體呼籲於 王章之下而特蒙奉訓郞義禁莩事之贈旣有諸先輩撰序傳文及碣銘文字具載一冊爲其子孫者豈不欽歎也哉以若予之管見不可以盡錄也夫譜牒事在昔丁卯一門碩德長老分往復于貫鄕詳其生卒錄其官爵顯達又錄其墳墓在所族議門論一軆峻發始成譜牒二卷粤在庚戌鎭安宗人及海嶺尊老僉員完定是議爲吾宗者莫不心悅誠服雖曰家貧路遠不辭貧不憚遠而鳩其財收其單書其行列之次第知其鄕里之遠近花樹之情話孝悌之良心欣然而生油然而出又成譜牒四卷其非諸宗之尊祖惇宗睦族之誼豈至於斯也耶素以散在海嶺地接千里歲回一甲其間落落不識其老小之顔範無慰其誰某之存沒此無他故矣道路之悠遠也往來之稀疎也千萬于襮今春三月延安宗人之郁氏千里裹裝萬加思量光臨于鄙從侄洛九之家云譜牒積年未遑之事也詳言修譜之體禮次言各派之安音而將欲有合譜之意細論昔日祖先之營辦履歷且論中古海嶺之收單修譜而不佞環顧一門累經歉荒之歲而俾無鳩財之路難於其人而不堪譜廳之任故細細預告於書右宗兄許亦以不合之意詳悉而旋旆矣回示中辭意坐立不同無論程限之遠近勿較財力之多小云爾則不侫等不勝感動一日齊會公議則咸曰貫鄕僉宗中合譜之議如是而下示若有不合則向所謂自一祖而視之則均是子孫之說烏在耶聽其彦而樂其事遂至修譜上而尊祖先之黙祐下而敦宗族之厚誼豈不休哉不侫素以蔑識敢忘其拙遂以爲記是
歲六月上澣 裔孫 之浩 德祖 幷謹跋
연안송씨세보발(경술보 : 1910년)
삼가 살피니 옛 수당이국(隋唐二國)이 있으니 수(隋)나라에서는 경적(經籍)의 지(志)가 있고 당(唐)나라에서는 예문지(藝文志)가 있으니 모두가 보첩(譜牒)이 세상(世上)에 시행(施行)되었다 우안(又按)한 즉 석일(昔日) 오중종족(吳中宗族)이 일조(一祖)로부터 볼 것 같으면 균시자손(均是子孫)이라고 일렀으니 그는 오직 우리 송씨(宋氏)를 이름이로다. 오직 엎드려 생각하면 우리 송씨(宋氏)는 계통(系統)이 연안(延安)에서 나왔으면서 여계(麗季)를 당(當)해서 시조(始祖) 휘(諱)경(卿)이니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이며 증시(贈諡) 숙의공(肅毅公)이요 휘(諱)훈(勛)을 낳으니 관(官)이 이의판서(吏儀判書)요 판서공(判書公)이 이남(二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광언(光彦)이요 관(官)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차(次)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으며 휘(諱) 복융(復隆)을 낳으니 관(官)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문학공(文學公)이 휘(諱) 근(根)을 낳으니 관(官)이 찬성(贊成)에 이르렀으며 찬성공(贊成公)이 휘(諱) 유량(有良)을 낳으니 관(官)이 예조판서(禮曹判書)요 판서공(判書公)이 삼남(三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보은(保殷)이니 진사(進士)며 성천(成川)으로 이거(移居)하고 차(次)의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이 대사간(大司諫)이요 대사간(大司諫)의 오세손(五世孫) 휘(휘) 간(簡)이니 연춘군(延春君)에 봉(封)해지고 휘(諱) 덕영(德榮)을 낳으니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하여 충민사(忠愍祠)에 사액(賜額)하고 충신액(忠臣額)에 공로(功勞)를 세운 그림을 그려 붙였으며 연창군(延昌君)에 봉(封)해진 휘(諱) 덕윤(德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配享)되니 양대(兩代)가 풍성(豊盛)한 공로(功勞)와 성대(盛大)한 충열(忠烈)이 어찌 장대(壯大)하지 아니하며 어찌 위대(偉大)하지 아니할까. 또 하례(賀禮)를 드릴 일이 있으니 그 후예손(後裔孫)에 휘(諱) 지안(之安)이 있고 휘(諱) 영식(永植)하니 감역(監役)벼슬이요 자제(子弟) 낙선(洛善) 낙구(洛九) 형제(兄弟)가 모두 진사(進士)며 낙선(洛善)의 아들인 건식(建植) 춘식(春植) 형제(兄弟)가 또한 진사(進士)이며 관향(貫鄕)에 세거(世居)하여서 영의(令儀)와 영예(令譽)를 나타내지 아니해도 이에 그려볼 수 있으니 어찌 찬탄하지 안으리요.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우리 대사간(大司諫)의 아우 승지공(承旨公) 휘(諱) 수은(守殷)이 낙남(落南)해서 안동(安東)에 살았으며 자(子)의 휘(諱)는 희문(希文)이니 관(官)이 교리(校理)이며 교리공(校理公)이 휘(諱) 국주(國柱)를 낳으니 진사(進士)요 진사공(進士公)이 휘(諱) 유경(遺慶)을 낳으니 관(官)이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이니 퇴계이선생문하(退溪李先生門下)에 유학(遊學)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세상(世上)에 칭송(稱頌)을 받았고 손자(孫子)에 이르러 휘(諱) 적(樀)은 형제(兄弟)가 죽음을 서로 다투어서 급수(伋壽)와 포융(褒融)의 행실(行實)같아서 일향(一鄕)과 일도(一道)의 벼슬한 이와 선비들이 차석(嗟惜)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공의(公議)가 준발(峻發)하여 임금님 앞에 일체(一體)로 호소(呼訴)를 해서 특별(特別)히 봉훈랑의금부도사(奉訓郞義禁莩事)의 증직(贈職)이 있었으며 제선배(諸先輩)의 찬(撰)과 서(序)와 전문(傳文) 및 갈명(碣銘) 문자(文字)가 일책(一冊)에 모두 실려 있으니 그 자손(子孫)된 자(者) 어찌 찬탄(贊嘆)하지 않으리요 나 같은 관견(管見)으로 가(可)히 기록(記錄)을 못다할 것이다. 저 보첩(譜牒)의 일은 예전 정묘년(丁卯年)에 한 문중(門中)에 덕성(德性)이 대단(大端)하고 장로(長老)가 되는 분(分)이 관향(貫鄕)에 왕복(往復)하시며 그의 생졸(生卒)과 관작(官爵)의 현달(顯達)과 분묘(墳墓)의 소재(所在)를 자세하게 기록(記錄)을 했으며 족의(族議)의 문론(門論)으로 한결 준절(峻切)하게 발론(發論)을 해서 비로소 보첩(譜牒) 이권(二卷)을 이루었으며 지낸 경술년(庚戌年)에 진안종인(鎭安宗人)과 해서(海西) 영남(嶺南)의 존노첨원(尊老僉員)이 의논(議論)해서 완정(完定)을 하니 우리 종족(宗族)이 된 자(者) 마음을 즐거워하며 성심(誠心)으로 따르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으니 비록 가빈(家貧)하고 노원(路遠)하더라도 불사빈(不辭貧)하고 불탄원(不憚遠)하면서 재력(財力)을 구(求)하고 수단(收單)을 해서 그 항열(行列)의 차례를 알며 향리(鄕里)의 원근(遠近)과 화수(花樹)의 정(情)을 알게 해서 효제(孝悌)의 양심(良心)이 혼연(欣然)히 생겨 유연(油然)하게 솟아나서 또 보첩(譜牒) 사권(四卷)을 이루니 그 제종(諸宗)들의 존조돈종(尊祖敦宗)하고 목족(睦族)의 정의(情誼)가 아니었으면 어찌 이에 이르리요 본시 해서(海西)와 영남(嶺南)땅이 천리(千里)를 접(接)해 있으며 세월(歲月)이 일갑(一甲)이 지나도록 그 사이에 낙낙(落落)해서 그 노소(老少)의 안면(顔面)도 알지 못하고 그 수모(誰某)가 생존(生存)해있고 몰세(沒世)한 것을 모르니 다른 연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로(道路)가 아득히 멀며 왕래(往來)가 드물고 소홀(疎忽)한 때문이러니 천만(千萬) 뜻밖에 올해 봄 삼월(三月)에 연안종인(延安宗人) 지욱(之郁)씨가 천리(千里)의 행장(行裝)을 싸가지고 만번(萬番)을 사려(思慮)를 해서 저의 종질(從姪) 낙구(洛九)의 집에 광림(光臨)해서 하는 말이 보첩(譜牒)은 여러 해가 되어도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이라 수보(修譜)의 체례(體禮)를 자세하게 말하고 다음으로 각파(各派)의 안부(安否)가 드러났으나 그러나 장욕합보(將欲合譜)의 뜻이거늘 세세(細細)하게 석일(昔日) 조선(祖先)께서 경영(經營)하고 경비(經費)를 판출(辦出)하는 이력(履歷)과 중고(中古)에 해서(海西) 영남(嶺南)이 수단(收單)해서 수보(修譜)할 것을 의논(議論)해서 논정(論定)을 했으나 칠칠치 못하게 일문중(一門中)을 둘러보니 여러 해 동안 흉년을 겪은 터라 해서 구재(鳩材)의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보청(譜廳)의 일을 책임(責任)질만한 사람이 없는 고(故)로 세세(細細)하게 서우(書右)에 예고(豫告)를 종형(宗兄)에게 하니 역시 합당(合當)하지 못함을 자세히 알고서 돌아갔는지라 회시(回示)가 오는 중(中)에 사의(辭意)가 앉은 이와 섰는 이가 같지 아니하고 노정(路程)의 원근(遠近)을 논(論)함이 없이 물교(勿較)하고 재력(財力)의 다소(多少)를 말한 즉 불영등(不侫等)이 감동(感動)을 이기지 못하여 일일(一日)에 모두 모여서 공의(公議)를 한즉 모두가 말하기를 관향(貫鄕)의 여러 종중(宗中)에서 합보(合譜)의 의논(議論)이 이와 같이 지시(指示)를 내렸으니 만약(萬若) 합의(合議)를 아니한즉 지난달 소위(所謂) 일조(一祖)로서 보실 것 같으면 고르게 같은 자손(子孫)이란 말씀이 어찌 있으리요 그 말씀을 듣고 즐겨 그 일을 해서 드디어 수보(修譜)하게 되오니 위로는 존조선(尊祖先)의 묵우(黙佑)를 입고 아래로는 돈종족(敦宗族)의 후의(厚誼)가 되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불영(不영)이 본시 멸식(蔑識)으로 감(敢)히 졸세(拙劣)함을 잊고 드디어 기(記)를 하노라
시세육월상한(是歲六月上澣) 예손(裔孫) 지호(之浩) 덕조(德祖)는 아울러 삼가 말을 하노라.
1905년 병산서원 원임록
祭文 : 花川書堂의 儒生 李秉樞, 宋德祖, 金復容, 權永慶, 權準獻, 金泳在 等
田園文集卷之八
祭文 花川書堂儒生李秉樞宋德祖金復容權永慶權準 獻金泳奠
於乎天眷河南篤生賢哲顯允厓爺陶門正嫡光光德業吾道準極層璠疊璵厚基積殖忠孝謹拙乃其家學休光懿範孰不艶服先生又起克彰前烈容姿簡穆記性剛慈粵自灑掃坯樸已具公車名利判然外內永矢同岡樂我所好花山矗矗洛水漪漪於焉徜佯十世菟裘歲晏田園松菊經濟日用寓目左右書史樂閩關鍵朱退門路古調疏越陶柳詩社書腴潤膚磨礱德器孚尹旁(方+方)達耿光日著晩沾一命處以山野實地逡巡素守冞(㓁+木)高國有敢言亟擬抗疏喉司見沮柰此時措斂以施家一門雍和肖兒承出大賢華冑蔭典州縣榮養備至誠切淸愼不喜以懼同堂石老山林耆耈道議鄕確理義周摰有來乞筆輻溱東西橵于金石匉訇光耀遹追先志弄丸經紀宗黨如雲小大綢繆有此簡靜奚施不當矧玆本院皐比尸盟春秋淸暇衿佩盈堂隨才說法曉彼迷曚一經題品遠邇爭工竢之百祀垂庇無疆樑頹河北又哭先生後生安仰嶺日戎戎衣冠偶立驀地滄桑聚首雷哭視天夢夢敬薦泂酌庶鑑輿衷
田園文集 : 田園 柳道獻의 문집. 8권 4책. 석인본. 序文은 없으나 후손 永佑와 承佑가 지은 발문이 있다. 발문에서 간기가 보이지 않아 몇 년에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사후에 그의 유문을 정리함과 동시에 각 가문에 흩어진 글들을 조사 수집한 다음, 그 내용을 교정하고 수정하여 8권 4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한 때 의금부도사에 임명된 바 있었지만, 일생을 향촌의 처사로 보냈다고 할 수 있으며, 문집 전반의 내용을 통해 볼 때 그의 박학다식하고 뛰어난 문장력은 당대에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 1의 시는 輓詞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韓始東·李濬九·李泰重·金相欽·李晩昌 등과 교유한 것과 개골산, 보경사의 내연폭포, 관어대 등의 유람 사실을 알 수 있다. 권 2는 그가 주고받은 편지 73장으로 구성되었다. 그 가운데 1897년에서 1909년 사이의 것이 45통이다. 권 3은 자신이 읽은 伍子胥·竇建德·歐陽修·仲長統의 樂志論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부분과 重修記 및 각 문집의 서문으로 구성되었다. 권 4는 각 문집의 발문과 제문으로, 권 5는 고유문과 상량문 및 비문, 비명, 묘갈명으로, 권 6은 묘갈명, 권 7은 묘갈명과 행장으로 편집되었다. 권 8은 부록으로 본인 상사시의 제문과 만사 및 행장, 묘갈명, 묘지명 그리고 跋로 이루어졌다.
柳道獻(류도헌)에 대하여
1835년(헌종 1) 9월 29일∼1909년(융희 3) 10월 15일.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현민(賢民)이고, 호는 전원(田園)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하회(河回)이다. 증조부는 유종춘(柳宗春)이고, 조부는 유상조(柳相祚)이며, 부친은 유진한(柳進翰)이다. 생부 유진익(柳進翼)과 생모 이휘승(李彙承)의 딸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이휘존(李彙存)의 딸 진성이씨(眞城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황하진(黃河鎭)의 딸 평해황씨(平海黃氏)이다. 족부(族父)인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어렵거나 의심나는 것을 반드시 질문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한 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처사로 은거하면서 경사(經史)와 백가서(百家書)를 탐독하였다. 한시동(韓始東)‧이준구(李濬九)‧이태중(李泰重)‧김상흠(金相欽)‧이만창(李晩昌)‧이염재(李念在)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1878년(고종 15) 경상도 유림들과 ‘서원을 복구하여 설립하라’는 명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3년(고종 30)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더욱 삼가고 영광으로 삼지 않고, 후학들을 장려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교영(柳喬榮)이다.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심영(柳沁榮)‧유가영(柳家榮)이다. 삼종제(三從弟) 유도필(柳道弼)의 아들 유동윤(柳東胤)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묘는 병산(屛山)에 있다. 저서는 『전원집(田園集)』이 있다.
회은유고(晦隱遺稿)
輓詞
又 延安宋德祖
舍生取義日 獨守舊朝鮮
先生從此拜 回首仰靑天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殉國하여 조선을 지키려는 晦隱翁을 우러러 받든다는 내용이다.
회은유고(晦隱遺稿)
晦隱 柳道發의 문집. 8권 4책. 예서필사본. 柳道發의 曾孫인 柳時雄과 柳一夏의 跋文을 보면 柳道發의 曾孫인 柳時洛이 遺稿와 散佚된 遺稿를 坊坊曲曲 찾아다니면서 蒐輯하여 1991년에 간행하였는데, 한문과 국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自盡할 결심으로 고향의 先祖 祠堂을 拜謁하고 친구들에게도 그 뜻을 알리며 집안사람들에게는 자기 死後에 해야 할 일을 일일이 당부하고 詩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挽留하는 아들의 말을 물리치고는 斷食을 시작한 지 17일 만에 殉國하였다. 그의 문집을 보면 일반적인 문집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특히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 많이 보이는 墓表나 墓碣銘, 神道碑銘 등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死後에 수많은 사람들의 挽詩와 祭文이 畸形的으로 많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庚戌國恥 이후에 殉國한 사실이 嶺南地方을 포함한 각 지역 儒林들의 龜鑑이 되고 당시의 世態에서 綱常의 標準으로 삼을 만한 좋은 사건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류도발(柳道發) 1832~1910(순조 33~융희 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승수(承搜), 호는 회은(晦隱)이다.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류진휘(柳進徽)와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자정 순국한 류신영(柳臣榮, 1853~1919)이 아들이다.
西厓 柳成龍의 10세손으로 타고난 자질이 純粹剛毅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기대를 모았고 7세에 글을 배웠는데 여느 아이들과 달리 함부로 행동과 말을 하지 않았다. 효성이 特出하여 모친의 종기를 정성으로 다스려 完快시켰고 부친이 成均館에 유학함에 일체의 가사를 몸소 主管했다. 부친이 北關의 任地에서 별세함에 고향으로 返葬했고 이어 부인상도 당했다. 주위에서 再婚을 권유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몸가짐이 謹嚴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궁핍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주었다. 한번은 醴泉을 지나가다가 병든 아이를 안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乞人에게 추운 겨울에 나온 이유를 묻고는 客主에게 돈을 대신 주어 乞人을 거두어주게 했다. 비록 배움의 기회가 많지는 않았으나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밤마다 先祖의 문집 가운데에 있는 格言 등을 외우곤 했다. 晩年에 比安縣 新平面 德巖里로 이사하고 세상을 피해 남모르게 숨는다는 뜻을 취해 晦隱이라고 自號했다. 기해년 여름에는 인근마을에 强盜가 칼을 들고 들이닥쳤는데 저자가 나서서 이들을 술과 안주로 정성껏 대접하고 알아듣게 타이르니 이들이 감동하여 아무 일없이 넘어갔다. 하루는 아들에게 젊어서 공부하지 않으면 늙어서 無聊하게 된다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경술년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自盡할 결심으로 고향의 先祖 祠堂을 拜謁하고 친구들에게도 그 뜻을 알리며 집안사람들에게는 자기 死後에 해야 할 일을 일일이 당부하고 斷食한 지 17일 만에 殉國하였다.
저서로는 『회은유고(晦隱遺稿)』가 전한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와 「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11년 2월 22일에 장례를 지냈으며,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에 이장했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사당인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