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十歲 仁祖大王八年(쉰 살이 되던 해, 인조대왕 8년/1630)
因回祿之灾營別業於石峴(인회록지재영별업어석현)/화재로 인하여
석현 마을에 별장을 짓고
林夢灘墰林東野堜柳靑原持敬元知州斗杓金市西璇柳參奉坪荷月堂姜時彦金牧使孝誠互爲來往
(임몽탄墰임동야련유청원지경원지주두표금시서선유참봉평하월당강시언금목사효성호위래왕)/
夢灘 林墰, 동야(東野) 임연(林堜), 청원(靑原) 유지경(柳持敬), 지주(知州) 원두표(元斗杓), 시서(市西) 김선(金璇), 참봉 유평(柳坪), 하월당(荷月堂) 강시언(姜時彦), 목사 김효성(金孝誠)은 서로 왕래하며
一觴一詠有酬唱錄 見遺集(일상일영유수창록, 견유집)/한 잔 술에 시 한편씩을 지음으로써 <수창록>을 남겼다. 遺集을 보라,
<해설>
o 回祿(회록)은 화재, 불이 나는 재앙
o 임연은 남간행록을 보면 동야 임연으로 진주목사를 하였다.
o 원두표는 자는 建, 호는 탄수, 탄옹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1624년 전주부윤을 지냈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36년 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부사로 남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다. 1642년 형조참판에 이어 강화부유수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나주목선생안에 보면 원두표는 1630년 10월4일 부임하여 1631년 9월6일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知州는 호가 아닌데 이름 앞에 넣은 것이 석호공 별장에 현직 나주목사가 방문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o 김선(金璇)은 자는 而獻, 호는 시서, 본관은 광산(光山), 상호군(上護軍) 부성(富成)의 아들이다. 선조 원년에 나서 20년에 鄕試에서 特上으로 뽑혔다. 38년에 비로소 司馬하고 光海때 당숙(唐叔) 우성(佑成)이 李爾瞻에게 아부하여 기세를 떨치면서 인목대비가 폐모된 뒤에 李元翼이 홀로 正論을 주장하다가 이첨(爾瞻)등의 반대로 화(禍)가 박두하였다. 호남의 多士들이 上疏하여 元翼을 구원하려 했으나 저지를 당했고 이첨(爾瞻)등은 호남인의 상소가 선(璇)이 주장한 것이라 하여 역율(逆律)로 치죄(治罪)하려던 것을 요행히 화(禍)를 면했다.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친구들은 科擧에 응시 할 것을 권유했으나 불응하고 參奉, 찰방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나이 75에 졸(卒)하니 저서(著書)로 초당한람(草堂閑覽)이 있고 나주성내 계간사(羅州城內谿磵祠)에 향사(享祀)했다.
o 유평은, 한기(韓기)의 忠節錄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부인 나주 정씨는 왜병에 몸을 더럽히지 않는 다고 子婦와 두 딸 함께 절벽에 투신하여 물에 빠져죽으니 때는 선조(宣祖) 30년(1597) 9월18일이었다. 왜병에게 잡혔던 아들은 천행으로 탈출하여 수소문 끝에 모친이 40일전에 節死 하였다는 말을 듣고 死地에 가보니 산사람과 같았다, 정씨(丁氏)의 정절(貞節)은 그 마을 에 마땅이 정려(旌閭)하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타향(他鄕)에서 절사(節死)한 관계와 한문(韓門)의 힘이 부족하여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했다. 광주목사 이후원(光州牧使 李厚源)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되 이 절정문(節呈文)은 이 고을에 사는 전별제 신택(前別提 申澤)과 이정태(李鼎泰)와 참봉 유평(參奉柳坪), 생원 여응백(生員 呂應伯)등 87인의 정장(呈狀)으로 나주 정씨(羅州丁氏)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고 인조(仁祖) 22년(1644) 광주 목사 민응협(光州牧使 閔應協)도 진사 박충렴(進士 朴忠廉)등 101인의 정서(呈書)를 감사(監司)에게 보고한 바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참봉 유평은 나주 인근에서 살았으며, 당시 지역 여론을 몰아가는 오피니언 리더격으로 이해된다.
o 강시언의 자 姜弼周는 효종7년 1656년 별시에서 병과1위를 하였다. 그러나 거주지는 미상이라 한국역대 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은 그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석호공의 글로 보면 나주 아니면 나주 인근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o 금성읍지 선생안에 보면 金孝誠은 현감으로 1649년 1월15일 부임하여 동년 6월22일 이임하였다. 그런데 행록에는 목사로 기록된 것을 보면 기록의 오류를 감안할 수 있다. 목사 원두표 후임 목사가 鄭孝誠으로 1631년 11월에 부임하여 1633년 8월26일 사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목사 정효성을 목사 김효성으로 잘못 기재한 것 같다. 국역 남간집 p45에서도 정효성 목사에게 부치는 5언 율시가 있다.
o 류지경(柳持敬)은 호는 죽헌, 본관은 문화, 헌의 아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고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에 원종훈이 되었으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扈駕 하였고 水師에 이르렀으며 부조의 은전이 내리었다.
o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표현 見遺集/유집을 보라 라는 표현이다.
남간공의 유집은 분명 현존하는데, 석호공의 유집은 전해지지 않는다.
유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 것이 행록에서 나타난다.
후손들이 관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집이 분실되어 버린 것이다.
❍ 弟南磵鎭日侍立迭爲詩話時人爲之語曰(제남간진일시립질위시화시인위지어왈)/동생 남간은 특별한 일이 없는 예사로운 날에 형 옆을 지키며 번갈아 시로서 말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보고,
誰無父母兄弟孝友之篤行當以羅石壕兄弟爲準則也(수무부모형제효우지독행당이나석호형제위준칙야)/“누가 부모형제가 없겠느냐.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함은 마땅히 나석호 형제를 그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설>
o 鎭日(진일)은 특별한 일이 없는 예사로운 날, 진종일, 온종일,
첫댓글 강시언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출생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호은(湖隱).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강계판관을 지낸 강계오(姜繼吳)이다
강시언(姜時彦)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깊었다.
항상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하고 문장과 기절(氣節)이 뛰어나 주위의 추앙을 받았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가 난이 평정되자 군량을 관아에 바쳤다.
정묘호란 때에도 이흥발(李興浡)의 격문을 보고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으나, 끝내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 후 호를 ‘호은’으로 고치고 은거
夢灘 林墰: 휘(諱)는 담(墰)이고 자(字)는 재숙(載叔)이며 , 나주(羅州) 회진(會津)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좌승지(左承旨) 임붕(林鵬)이고,
할아버지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임복(林復)이며,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임서(林㥠)이고, 어머니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귀성 부사(龜城府使) 임식(林植)의 딸이다.
선조(宣祖) 29년 병신년(丙申年, 1596년) 9월 18일에 태어났다. 14세에 박 남곽(朴南郭, )공에게 수업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생원(生員)에 선발
경상, 충청관찰사를 비롯하여 형조, 예조, 이조판서, 숭정대부를 역임하였고, 동야(東野) 임연(林堜의 동생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