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TTA-NIPÂTA 3-38,39(72,73)(百獸王壓制威服백수의 왕 사자가....)
72.
튼튼한 이빨을 가진 사자가 뭇 짐승을 누르고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며 범접 못할 외딴 곳에 처하듯 무소처럼 홀로 가라.
73.
자(자애). 비(연민). 희(기쁨). 사(평등), 사무량심을 때로 익혀 해탈을 얻으며 모든 세간의 이욕에 물들지 않아 무소처럼 홀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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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As a lion strong by his teeth, after overcoming (all animals), wanders victorious as the king of the animals, and haunts distant dwelling-places, (even so) let one wander alone like a rhinoceros. (38)
73.
Cultivating in (due) time kindness, equanimity, compassion, deliverance, and rejoicing (with others), unobstructed by the whole world, let one wander alone like a rhinoceros. (39)
七二
獅子牙堅百獸王壓制威服如其行
棲息坐臥邊境所應如犀牛任獨行(三八)
*牙아: 어금니
威服위복: 위력으로 굴복시킴
棲처: 깃들다. 거처하다
邊境: 변두리. 邊境所: 외딴곳
七三
慈悲喜捨四無量時時習行得解脫
一切世法無染著應如犀牛任獨行(三九)
*四無量心: 사람을 대하는 네 가지 이타적 태도
慈(자애), 悲(연민), 喜(기쁨), 捨(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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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법정과 석지현의 ‘궁핍하고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라고 되어있는 부분을 사자의 속성과 어울리게 의미를 다르게 잡았습니다. 영어본에 kindness(자비), equanimity(평정), compassion(연민), deliverance(해탈), rejoicing(기쁨) 부분을 한역본에는 사무량심으로 묶었네요. 너무 용어에 매달리지 말도록 합시다. 어차피 말이 갖는 의미는 개개인의 경험 바탕 위에서 재해석되는 것이라서 통일을 갖는 것은 불가능할 터이니까요. 백수의 왕이 거처하는 곳은 다른 잡다한 짐승들이 범접할 수 있겠어요? 고귀한 정신, 높은 덕이 처하는 곳은 아무래도 외딴 곳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하기야 스스로 고독한 외딴 곳을 찾지 않아도 속된 무리들 스스로 자리를 비켜서겠지만 말입니다.
요 앞 편에 ‘바람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물방울을 맺지 않는 연잎처럼’이라 글을 써놓고 이 아름다운 싯귀에 마음 붙들려 손을 놓고 한참을 서성댔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군더더기인지 싶어 낯이 확 뜨거워지데요. 그래서 ‘묵언’이라 찍어놓고 도망 나왔습니다.
사성제四聖諦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도’에, 즉 ‘열반’에, 혹은 스피노자의 ‘지복至福’에 이르는 최초의 출발점으로서의, 또는 그 조건으로서의 ‘苦’와 그리고 苦의 원인이 되는 ‘욕망’으로서의 ‘集’을 놓고 보면, 그들의 위상이 달라지지 않나요? 즉 ‘고’나 ‘집’의 위상이 ‘열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불가에서 자주 쓰는 말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와 같이 생사와 열반, 번뇌와 깨달음이 한 세트로 병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집멸도 사성제도 하나의 세트로 묶여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열반의 ‘도道’가 ‘성스러운 진리’라면 고통이나 욕망이나 그 모두가 ‘성스러운 진리’의 반열에 같이 자리 잡는다는 논리이겠지요. 번뇌와 보리가 그렇듯이 인간의 욕망과 해탈은 바로 한자리이며 동전의 양면일 뿐입니다.
욕망과 고통이 없는 무풍지대, 그 진공의 터에 어찌 해탈이며 열반이 들어설 수 있겠어요? 해탈이며 열반은 고통이나 욕망이 있고서야 비로소 제 몫이 생산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희구하는 열반의 그 씨앗이 바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욕망이라는 것이랍니다. 바람이 걸림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물이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지복의 조건으로서 고통과 욕망마저도 ‘성스러움’의 옷을 입혀 긍정하고자 했던 그분의 속내가 슬며시 드러나지 않나요?
그렇다면 맞서 대적해야할 우리 인간의 숙명으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인간의 정념을 어떻게 경영하여 최종의 지복과 자유에 닿을 수 있을까를 문제 삼았듯이 ‘제대로 욕망하기’로 길을 잡는 것은 어떨까요. 붓다가 끊임없이 일러주는 욕망의 지멸止滅 속에 담긴 내면의 뜻을 인간이 아니라 신성의 문법으로 읽어내는 안목 말입니다. 즉 그동안 내가 학습한 그리고 몸으로 체험한 모든 관념의 틀로 형성된 욕망, 그 욕망의 대상들을 펼쳐놓고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2021. 6. 21. 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