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9) - 2023 .07. 15(토) |
10차 순례는 마산교구다. 마산교구에는 성지가 6군데 있다. 이번에는 이 중에 3곳을 간다.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이다. 이 중 앞의 두 곳은 거제도에 있고 뒤의 한 곳은 진주시에 있다.
일단 거제도에 가서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를 순례하고 다시 진주로 나와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를 순례하기로 하였다.
08 : 30 성당 출발. 휴대폰 길찾기를 하니 그 유명한 거가대교를 경유하는 경로인데 약 2시간 남짓 소요된다고 나왔다.
거가대교(巨加大橋) - 거제도 장목면에서 저도, 죽도를 거쳐 부산 가덕도와 강서구 천성동을 잇는 다리로 해상교와 육상터널 해저터널을 모두 이용하였다. 특히 터널 구조체를 만들어 바다에 가라앉히는 침매공법(沈埋工法)은 국내에서는 처음이요, 국제적으로도 당시는 세계 최장이었다고 한다. 건립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나로서는 오늘 처음 건넌다. 이는 거제도에 가본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날씨가 따라주지 못한다. 예보에는 중부지방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여 이번 순례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거제도 지방에는 그렇게 큰 비가 오지 않고 오후에는 갠다고 하여 결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관을 즐기기는 기대도 못할 뿐 아니라 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해저터널은 언제 건넜는지도 모를 정도로 훌쩍 지나갔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두 개의 사장교(斜張橋) 교각은 뻗어나가는 우리나라의 건설공법과 기술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1시간 30분이나 걸리던 시간이 불과 40분.
돌연 비슷한 시기에 개통된 여수 바다에 걸린 ‘이순신 대교’의 현수교(懸垂橋)의 위용도 느껴보고 싶어진다. 10시 40분 경 윤봉문 성지에 도착.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 거제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
성지의 주소는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1176-1 (도로명 주소는 지세포 3길 69-22) 관할 본당은 옥포 성당이다.
거제도 복음의 역사
거제도는 조선시대에는 유배의 섬이었다. 유배는 거리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다르다. 따라서 섬 중에서 중죄인을 가장 많이 유배를 보낸 곳은 제주도와 거제도이다. 우암 송시열 등 많은 고관 명현들이 거제도에 유배를 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거제도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와도 관계가 있다. 신유박해의 생생한 관변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의하면 신유박해 무렵 세 사람의 천주교 순교자 가족이 관비로 거제도에 유배를 왔는데 이윤혜와 윤종근과 유섬이이다.
이윤혜(李允惠)는 황사영의 처이다. 당시 신유박해로 빚어진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황사영은 순교하고 그의 처 정난주(본명 정명련) 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의 아들 윤종근(鐘近)이며, 마지막 한 사람은 전라도 사도 유항검의 막내딸인 유섬이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록에만 남았을 뿐 거제도 생활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거제도의 천주교와 관련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후 약 60여년 뒤인 1866년 병인박해 직전인데, 이때 나중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그의 복사였던 순교복자 구한선(具漢善) 다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부인 막달레나와 함께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그의 할머니로 인해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가족이었다. 병인박해 중 윤사우의 가족은 경남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가 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는 대마도로 갈려고 거제도에 들어왔다가 그만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거제도의 높은 산에 올라가면 대마도가 보인다. 거제도에서 버드내[柳洞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현 거제시 옥포 2동 국산리)에 정착한 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 오늘날의 동장)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그를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1852년생)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 요셉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가타리나가 태어났다. 나중에 부친이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윤봉문 요셉은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거제의 사도’로서 형과 함께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신앙 수계(守戒)에도 열성을 다했다.
1887년 겨울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로베르(Robert, 金保綠)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윤봉문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도왔다. 로베르 신부는 그를 공소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 해 거제도에서는 윤씨 형제가 가르친 15명의 주민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느닷없이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산발적 박해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등 돈을 벌려는 개인적인 탐욕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윤봉문은 다른 교우 두 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몸값으로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음에도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몰락 양반)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다. 당시 신분제도의 변화로 몰락한 양반층은 자신들이 지닌 학식을 백성을 수탈하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 도구로 썼다. 그러나 윤봉문 요셉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80냥을 주면 모두 풀어주고 돌아가서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에 넘어가서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이번에는 통영 도호부사의 체포령장을 가지고 포졸들이 다시 찾아와, 형 경문을 관아로 끌고 가 곤장을 치고 이틀 후 읍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처음에 윤봉문을 체포하고도 돈을 빼앗지 못한 통영 관리가 영장(營將)을 찾아가 윤씨 형제에 대한 체포령장을 받아냈다. 결국 윤봉문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과 재산은 약탈당했다. 영장 앞에 끌려간 그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영장은 경상 관찰사로부터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 받고 이를 집행했다.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다. 결국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2일) 진주 감옥에서 교살(絞殺)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전쟁에서 제일 억울한 일은 전쟁 끝난 상태에서 우발적 사건으로 인한 죽음이다. 1888년이면 병인박해가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후 신앙의 자유가 찾아온 시기다. 당시 조선교구에서는 본당이나 공소를 드러내 세우고 사제를 임명하던 시기였다. 악몽 같던 박해의 고통을 견디어낸 후 지방 관리의 폭압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윤봉문은 박해시대 최후의 순교자였던 것이다.
복자 윤봉문 성지 조성 과정
순교자 윤봉문 요셉이 죽자 시신은 진주 비라실(현 진주시 長在洞) 공소회장 장익금(張益今)과 윤 고마, 그리고 곽광수의 부친 곽영정(郭令正)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1887년 거제도를 사목 방문하여 윤봉문 순교자의 도움을 많이 받고 떠났던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교구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시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순교의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약 10년 뒤 1898년 거제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아들 윤학송 루카 등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榛木亭) 족박골(足泊谷)의 선산에 안장했다. (여기서 진목정(榛木亭)은 경주 산내의 진목정(眞木亭)과 다르다. 이곳 진목(榛木)은 개암나무이고 경주의 진목(眞木)은 참나무다.) 그 후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菊山)으로 고쳤고, 후에는 다시 ‘옥포(玉浦)’로 다시 변경되었다. 오늘날 ‘옥포’라는 지명의 변천과정이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24일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의 신앙인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후 거제ㆍ통영 지역의 본당들은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다.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진입로가 없어 포기했던 곳이었지만 인근 농로를 매입해 시의 도움을 받아 진입로를 만들면서 성지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탓에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인 성지 조성 부지를 찾아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헌신적인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울창한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을 우선 조성했고, 성지 정상 부분에 순교자 현양비(순교자 묘)도 건립하였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여 순교자 현양비 뒤편에 모셨다.
파묘 과정에는 교구장 안명옥 프라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와 총대리, 한창규 해부학 교수와 구형모 전문 발굴자, 기타 많은 사제와 교우들이 참관하였다. 이장을 위한 발굴 작업을 통해 순교자의 유골을 확인하고, 의학 전문가로부터 오른쪽 골반에 장독(杖毒)에 의한 골절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마산교구는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담당 전담신부를 배정하고 성지에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사제관과 수녀원, 피정의 집과 식당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라고 하나 아직은 허름한 임시 판넬 건물 몇 동이 있을 뿐이다.
성지 입구 - 성모상과 순교비
윤봉문 성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이해 주는 것은 순교자 윤봉문 성지 표지석이다. 그리고 게시판에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설명과 성지 순례 코스 안내도가 있다.
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종려나무가 길가에 도열하듯 줄지어 서 있어 이국적인 모습마저 든다.
저 만큼 안쪽에는 성모님께서 환영하고 서 계신다. 성모상 옆에 옛 묘소에서 옮겨온 윤봉문 요셉 순교비가 있고 그 옆에 역시 옛 묘소 묘지석이 옮겨져 있다.
순교자 묘비 측면에는 윤봉문 순교자가 포졸에 의해 압송되던 때 하직 인사라면서 남긴 말이 새겨져 있다.
“신앙의 형제들이여 나는 죽으러 간다. 이는 오직 내 고향 거제를 위해서다.”라는 구절이다. 이를 보면 윤봉문 순교자는 거제를 많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묘지석의 내용은 이 비가 천주교 순교자 윤봉용 요셉의 비이며 1888년 2월 22알 진주 감영에서 순교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데 윤봉문을 윤봉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아마 당시는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성지 안내도를 보면 순례코스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입구 성모상과 순교비에서 오른쪽으로 올라 요셉홀, 경당을 거쳐 로사리오의 길을 따라 순교자의 묘에 이르고, 내려갈 때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야외제대가 있는 잔디밭으로 내려오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그 역방향이다. 곧 야외제대에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순교자 묘에 이르러 로사리오 길을 통해 경당, 요셉 홀을 거쳐 내려오는 길이다. 우리는 첫째 코스를 택했다.
오른쪽 길을 택하여 조금 올라가니 요셉 홀이 나타난다. 요셉 홀은 조립식 건물로 경내 식당이었다. 혹시 시간도 절약할 겸 식사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원래 예약을 해야 하지만 오늘은 진주 어느 성당 주일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단체 순례를 와서 점심준비를 하고 있으니 12시까지 기다리면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예약을 경당으로 향했다. 길가의 수국이 아름답다.
경당
성지 성전인 경당이 나타난다. 경당 건물 역시 매우 소박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주 출입구에는 십자가와 함께 경당이라 표시되어 있고 성지 표지판이 붙어 있다.
경당 안은 더 소박했다. 흔한 십사처도 없나 하겠지만 너무 좁아 십자가의 길을 할 공간도 없다. 제대 앞에는 승리의 빨마 가지가 들어있는 윤봉문 순교자 초상화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좌석도 장궤용 탁자나 긴 의자가 아니라 검은색 접이식 간의 의자인데 가지런히 놓여 있어 그런대로 보기가 좋다.
미사가 11시 30분에 있다기에 시간이 남아 있어 순교자 묘로 올라간다. 길은 편백과 대나무 숲속으로 이어진다. 편백과 대나무가 섞인 숲도 있다. 마치 인종이 달라도 화합하여 살아가는 다인종 사회와 같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 현양탑 - 순교자 묘
주일학교 성지 순례단 학생들과 함께 돌계단을 통해 순교자 현양탑에 올랐다. 이중(二重)의 둥근 돌 기단 위에 원형의 구멍이 난 직사각형 구조물인데, 이는 감옥에서 죄수를 구금하는 형구의 하나인 칼 형상이다. 이것을 비스듬히 세우고 뒤에 오석 버팀대를 받친 것이 현양탑이다. 직사각형 구조물과 받침대 사이에는 역시 오석이 있고 안에는 유골을 담은 오동나무 관이 들어있다. 그래서 순교자 현양탑이 그대로 순교자의 묘가 되는 것이다.
전면 직사각형 구조물에는 십자가가 세 개나 붙어 있는데 가운데의 것은 예수님이며 좌우에 있는 두 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두 죄수라고 한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 좌우의 두 죄수 중 하나는 예수님께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당장 자신을 구원해보라고 조롱하였고, 하나는 조롱하는 죄수를 비난하고 예수께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수에게 자신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똑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회개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천당과 지옥이 갈라진다. 도둑도 이리할진데 순교자는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을까?
채근담에 “온 세상에 알려질 만큼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뽐낼 긍자(矜)’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하늘까지 가득 찬 죄도 ‘뉘우칠 회자(悔)’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蓋世功勞 當不得一箇矜字 彌天罪過 當不得一箇悔字)”는 말이 있다. 이처럼 아무리 큰 공이라도 뽐내는 순간 그 공은 사라지고, 아무리 큰 죄라도 회개하는 순간 그 죄는 사해지고 구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순교자 묘 바로 옆에 전망대가 있다. 데크로 만든 널찍한 공간 위 한쪽에 십자가를 음각한 순교문 형상의 포토존이 서 있고 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윤봉문 요셉이 그 문 옆에 서 있다. 포토존에서 내려다보니 지세포 항이 바로 앞에 잡힐 듯이 가깝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묘에서 우리가 왔던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운치 있는 대나무와 편백의 십자가의 길을 걷다보면 한 여름의 열기가 가신다. 14처는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는데 해설판도 따로 세워져 기도하기에 편하다.
1-5처까지 이어진 대나무들은 크게는 높이가 20~30m에 육박하는데, 굵고 곧게 뻗어 있어 순교자의 올곧고 꿋꿋했던 신앙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6처부터는 편백나무 군락지가 제14처까지 형성돼 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은은한 편백나무 향기가숲속의 신선한 공기에 실려 마치 주님의 선물과도 같이 순례자들을 감싼다.
숲길만이 아니라 걷다보면 개울도 있고 폭포도 있어 변화를 준다.
대리석 조각 십사처
로사리오의 길
십자가의 길 반대편에 로사리오 길이 있다. 건물 안에서 드리는 묵주기도보다 이렇게 자연 속에 묻혀 드리는 기도가 훨씬 좋다. 로사리오(Rosario)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성모님을 통하여 접근하는 가장 깊은 묵상이며 체험이다. 성모님은 1858년 루르드(Lourdes)에서, 1917년 파티마(Fatima)에서 각각 발현하시어 로사리오를 열심히 바치라고 당부하셨다. 이에 근거하여 교회는 로사리오 축일을 지내고 로사리오 성월을 정하여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고 있다.
미사 참례
미사 시간이 되어 급하게 경당으로 돌아오니 이미 미사가 시작되었다. 봉사자 자매님이 기다리다가 빨리 들어가라고 하여 서둘러 뒷자리에 앉으니 독서자의 독서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사는 성지 전담 신부님께서 집전하는데 참례자라고 해야 순례객 10여명에 불과했다. 참으로 단촐한 미사다.
미사 강론은 성지 특성상 성지 소개와 안내가 중심이 된다. 이 성지의 중심 인물인 복자 윤봉문의 순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논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곧 복자 윤봉문의 순교가 세속으로 볼 때는 억울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많지만 신앙인으로 볼 때는 영광의 순교자로 하느님의 마지막 선택을 받았으니 과분한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는 순교 당시 로베르 신부가 언급했던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순교의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라는 구절과도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편한 성지 시설의 개선 문제인데 성지의 시설은 교구차원에서도 무턱대고 많은 투자를 하기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시설을 확충할수록 거기 따르는 활용 문제와 관리 및 운영상의 비용 문제가 지속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성지 운영도 일종의 마케팅이니 많은 신자들의 지속적 관심과 활용이 없다면 애물단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일부 성지의 예를 들면서 지적했다. 내실이 없이 겉만 호화로운 시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요셉 홀에 다시 가서 일행과 만나 식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의 액수를 지불하고 윤봉문 성지의 순례를 마쳤다.
가까운 곳에 옥포 대첩 공원이 있으나 시간 여유가 없어 들리지 못하여 아쉽다. 대신 마산교구 출신 순교자의 시복시성 기도문을 떠올리며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로 향했다.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 한 떨기 외로운 백합의 향기 |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는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교리당을 짓고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가 동정부부로 지내기를 원하여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시에 그의 가족은 몰살당하다 시피하고 초남이의 그의 집은 파헤쳐져 못이 되었다.(破家瀦宅파가저택) 가족의 피해 상황을 다음과 같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순교
▲부인 신희 - 순교
▲장남 유중철 요한 - 순교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 순교
▲차남 유문철 - 순교
▲제수 이육희 - 순교
▲조카 유중성 - 순교
△맏딸 유섬이(暹伊, 9세) - 거제도 관비
△삼남 유일석(6세) - 흑산도 관노
△막내 유일문(3세) - 신지도 관노
앞의 순교한 7명의 합장묘가 현재 전주 치명사산 성지에 있다. 그런데 더욱 애처로운 것은 10살도 안 된 어린 자녀 3명이 당시 국법인 연좌제에 의해 멀고 먼 각각다른 섬에 관노비로 유배된 사실이다. 곧 유항검의 첫째 딸 9살 섬이는 거제도로, 셋째 아들 6살 일석은 서해 흑산도로, 막내아들 일문은 남해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대체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 아니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닌가? 비록 국법에 따랐다 하더라도 너무나 비인간적이어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실제 유배지에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밝혀주는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다. 추정컨데 가족의 보호를 받아도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어린 나이에 노비가 되어서 정상적인 삶을 이어갔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세 아이들 중의 한 아이에 대한 사적이 세상에 알려졌다.
2013년의 일이었다. 전(前)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이었던 하성래(아우구스티노)님이 자신의 문중 선조인 거제 도호부사를 지낸 하겸락(河兼洛 1825~1904)의 문집을 정리하다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고명딸 유섬이(柳暹伊)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하겸락 선생의 문집은 《사헌유집(思軒遺集)》인데 이 문집 권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 가운데 들어있는 〈부 거제(附巨濟)〉 편에는 유섬이의 삶을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제 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은 유섬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 곧 제문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이듬해 2014년 5월 마침내 거제군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 산방산에서 유섬이의 묘인 ‘유처자묘(柳處子墓)’가 발견되었다. ‘柳處子墓(유처자묘)’라는 4자가 새겨진 비석을 찾음으로 유섬이의 묘가 밣혀진 것이다. 참으로 극적인 결과였다. 문집 중 유섬이와 관련된 부분의 전문을 다음과 같다.
부거제(附巨濟)
철종 임술년 1862년 2월에 외직으로 나가 거제부사에 제수되었다. 거제도는 남쪽 해변의 한 섬고을이었다. 견내량 나루 앞에는 무이루(撫吏樓)가 있었다. 옛날에 우리 종선조(從先祖)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년) 선생이 누각에 올라 지은 제영(題詠)이 걸려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형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판각하여 걸었다. 거제부에는 71세 된 유처녀(柳處女)가 있었다. 정조는 사학(邪學 천주교)을 엄금하고 범법자는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 그 자녀는 관비로 보냈다. 조정의 유명한 벼슬아치 중에도 역시 죄를 범하여 불행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류(柳)는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나 역시 명족(名族), 이름난 가문이라 들었다. 아버지가 사학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7세(실제 9세)였다. 거제 읍치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도 가르쳤다. 유(柳)는 평생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날마다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관노(官奴) 무리가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하였다. 나이 13~14세 되어 시집보내고자 하는 중매쟁이가 있었으나 류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부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반드시 관노(官奴)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奴)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婢)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내 어찌 당하리오. 다시 시집가라고 내 귀를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 하였다. 수양모를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였다. 어미 역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보호하였다. 나이 16~17세가 됨에 그 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强暴)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하여,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하였다. 류는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며 나이 40여세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서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고을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유처녀’라고 불렀다.1863년 계해년(癸亥) 철종14년 7월 내가 체임(遞任)하여 돌아가려할 때 형리가 “류처녀가 71세로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국법에 역적죄로 사망하면 검시하여 순영에 보고토록 되어 있기에 보고한 것이다)
슬프다! 천지만물이 음양의 짝이 있지 않음이 없거늘, 억울하도다! 유처녀는 외로운 여인으로 짝을 만나지 못하고 그 몸을 정결히 하며 이 세상에서 71세를 살았도다. 그 곧고 깨끗한 정절, 원한 맺힌 기운이 구천에 사무친다. 만약 류처녀가 남자가 되었더라면 입신출세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움은 해와 달을 꿰뚫고 진실함은 쇠와 돌을 뚫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여자의 몸이 되어 참화를 입은 집안에 태어남이여!그 정(情)과 그 절개 차마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아전을 보내 그 장사할 기구에 무엇이 미비한가 물으니, “관(棺)을 만들 나무와 염(斂)할 포목뿐 아무것도 없습니다.”하여 내가 장사치를 것을 마련하였고 다시 아전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이 되도록 장사를 치르게 하고, 또 병교(兵校 관아 관리)와 함께 가서 묻을 자리를 살폈는데, 물기가 없고 무너지지 않을 곳을 잡되 암석이 있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깊이 묻으라 하고, 특별히 “칠십일세류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 아홉자를 묘 옆 바위에 묘표(墓表)로 새겼다.
위의 내용을 보면 유섬이가 순교자 유항검의 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기록이나 전언(傳言), 연대로 볼 때 유항검의 딸이 분명하다. 그리고 9살인 그가 거제도에서 살아남아 70평생 동정녀로서의 외로운 삶을 이어간 내력이 밝혀져 또 한번 감동을 자아낸다.
유섬이는 가족이 몰살된 후 9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먼 섬 거제도에 유배를 왔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음씨 좋은 할머니를 만나 수양딸로 민간에서 자라게 된 것은 불행 중에도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이렇게 배려해 준 지방 수령도 덕 있는 관리로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도 관비의 역을 눈감아 준 것은 얼마나 큰 은덕인가?
용모 반듯하나 신분이 천한 여자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조선 왕조와 같은 신분사회에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오죽했으면 꽃다운 나이일 때는 욕망을 채우려는 남자들을 피해 배식구와 용변기만 있는 토담집에서 혼자 살았으며, 또 나이 40이 넘을 때까지 몸에 칼을 지니고 살았을까?
사실 이 위의 기록이 있기 전에도 이 지역에서는 유씨 처녀에 대한 구전 설화와 가요까지도 전해진다. 예컨대 그녀에 의해 ‘회양적(산적의 일종)’이라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고 하며 “서울이라 류(柳)처녀가 거제 음재(음지에) 귀양 와서 대구야 청청 일년이야,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 라는 노래도 있다고 촌로(村老)들은 증언했다.
‘회양적’을 구워 먹도록 했다는 전설로 미루어 그녀의 만년은 분명히 이웃에 봉사하고 베푸는 삶이었다고 짐작된다. 살아있을 때는 지역 주민의 칭송을 받았고 죽어서도 후임 지방 수령의 찬사와 추모를 받은 것 또한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는 그녀가 부녀자로서의 덕과 돈독한 신앙심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동정녀 유섬이의 높은 자존감의 발로요 동시에 하느님의 가호가 아닐 수 없다.
유섬이 묘에 도착하니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더 가서 한 주민의 마당까지 가서 차를 돌려 나와 노변에 주차하고 묘를 향했다. 묘는 길옆 언덕길에 걸쳐진 데크 길을 오르면 대형 십자가가 안내자인듯 서 있고, 바로 뒤에 나무로 짜인 나지막한 분묘 하나가 나온다. 묘 앞에는 작은 성모상이 있고 역시 작은 자연석 돌로 된 비석이 있다. 그리고 새겨진 글자는 ‘柳處子墓’ 4자로 해독이 가능할 정도로 뚜렷하다. 앞의 문집 자료에는 ‘七十一歲柳處女之墓’ 라고 9자를 새겼다고 했는데 이 비석 말고 다른 비석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전주 치명자산 성지에는 유항검 가족의 합장묘가 있다. 그런데 묘 옆에는 작은 돌맹이가 하나 있고 그 앞에 동정녀 유섬이 묘토석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에 의하면 2019년 1월 치명자산 성지 봉사자들과 강학회원들은 거제도 유섬이의 묘를 순례하고 묘토석(묘지의 흙과 돌)을 수습하여 이곳 치명자 산 유항검 가족 묘역에 가져 와서 합토하였다. 묘토석 옆의 작은 돌은 그때 가져 온 것이다. 약 220년 만에 마음이나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격이다.
끝으로 하겸락(河兼洛 1825~1904)의 문집에 들어있는 거제 유처자 제문을 소개한다.
제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
영령이시여
정결한 옥 같은 자태. 촌철 같은 마음
일찍이 형옥을 당하여 이 지방에 노예로 와서
관비의 명부에 올리고
관부의 잡부가 되었도다.
혼인할 나이가 되어도
행동을 단속하며 깊이 고심했네.
저 봄 수풀을 보면
시절의 경물 기운이 얽히고 설켜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꼬꼬 닭이 울고 떼 지은 사슴이 달리다가
각기 짝을 이루어 새끼 낳아 기르는구나.
우리에게 형기(形氣)가 있음은
음양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원의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슬퍼하지 않은 적 없건만
새와 쥐가 한 보금자리에 살아
사물의 병폐를 만들고,
봉황과 올빼미가 짝을 지어
또 그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선조에게 의로운 뜻 바치는 게 낫지 않으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보이니
누가 감히 어긋난 마음으로 보랴.
문을 에워싼 광적인 자들
혀를 내두르며 숨 죽였다.
어둑어둑한 작은 문에 벌어진 틈새 하나로
햇빛 뚫고 들어와서 내 마음 비추면
바늘 잡고 밝음 곳을 향해 밤낮 쉬지 않더니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렀네.
두 눈썹이 사르르 바람에 떨리고
백발이 온통 머리를 뒤덮더니
옥녀(玉女)의 이가 흔들리고
신선의 마른 몸,
고희의 나이에 초연히 세상을 마쳤다.
뛰어나고 특별한 정절,
청사에 보기 드물기에
예전에 내가 고을에 부임하여
대략 기리고 가엾게 여겨
상여 갖춰 정성스레 묻고
바위 다듬어 묘표 새기니
온 고을 사람들 이목에 잘 보이게 하고
무궁히 밝게 드러나 보였다.
다만 지금 뒤이어 추모하는 감회 더해
제물을 갖추어 보내고
제문 바쳐 위로하거늘,
곧은 혼령 어둡지 않으리니
부디 하늘에서 굽어보소서.
시간은 벌써 오후 2시. 하지만 이미 점심식사를 한 터에 시간이 넉넉하다. 그래서 지척에 있는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기념관을 가보기로 하였다. 청마 기념관 방문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 - 목 없는 묘라니? |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는 진주 문산성당 소속 시봉공소 경내에 있다. 주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987(사봉면 동부로 1751번길 46-6)
복자 정찬문 그는 누구인가?
정찬문(鄭燦文) 순교자는 1822년 10월 13일(음)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에서 양반인 진양 정(鄭)씨 가문에서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순교자는 고려말 대사헌을 지낸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었다. 정온은 조선이 건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려고 낙향했던 인물이다.
그는 진주시 대산면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칠원(漆原) 윤씨와 20대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41세때에 입교하여 부인과 함께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시작했던 몇 년간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잠시 잠잠했던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6년 혹독한 병인백해가 일어나서 정찬문 순교자가 천주교 신자인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놀란 문중에서는 찬문은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재심을 청원하는 한편, 정찬문을 회유하여 배교하도록 하였다. 양반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정씨 집안에서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인이 나타났으니 문중의 체면은 매우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갖은 협박과 질책이 가해졌지만 순교자는 배교를 거부했다.
감옥으로 끌려가서도 순교자는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25일 동안 심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당시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권유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가혹한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1866년 12월 20일(음) 진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이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부인 윤씨는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면서 남편을 격려했다. 이러한 아내의 덕분으로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그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친척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考覆, 중죄인을 재심함)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머리 없이 몸체만 수습해 와서 고향 진주 동면 중촌 허유 고개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無頭墓)’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습했는데,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성지 조성 과정
정찬문 순교자의 묘는 조성만 됐을 뿐,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세상으로부터 잊혀갔다. 그런데 진주 문산성당 7대 주임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가 1947년 12월 9일 가을 판공성사 차 굼실〔隅谷〕공소(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갔었는데, 그때 공소 회장 정 바오로로부터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정도 신부는 순교자의 사적을 기록한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정찬문 순교자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다. 치명일기는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877분의 명단과 약전(略傳)을 기록한 책으로 1895년에 발간되었다
1948년 3월 29일 그날도 서정도 신부는 본당 청년회원들을 데리고 엠마오 행사를 겸해 순교자 묘소 탐색에 나섰다. 마침 순교자의 후손(從曾孫)인 정경진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 하나를 찾아 파보았으나 무두묘(無頭墓)가 아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본당 신부와 여러 교우들이 돌아가고 차편이 없어 몇몇 청년들은 남게 되었다. 그때 무촌리 중촌에서 태어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당시 85세의 광산 김씨 ‘텃골 할머니’ (1864년 8월 15일생)가 청년들에게 다가와 “왜 엉뚱한 무덤을 팠을꼬? 찾는 무덤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며 어릴 때부터 서학 하다가 목 잘려 죽은 무덤이라고 들었다며 허유고개의 한 무덤을 알려주었다.
이튿날 교우들은 할머니가 일러준 허유고개 비탈길가에 가서 파보니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급하게 매장을 한 흔적이 완연했다. 이리하여 정찬문 순교자의 무두묘가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문산 본당 서정도 주임신부는 절차와 예를 갖추지 않고 순교자의 무덤을 파헤친 청년들의 성급한 행동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서 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본당 수도자들,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하였다. 그리고 너무 길가라서 순교자의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고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이때 발굴 현장에 입회하고 목격한 증인들은 정 바오로 굼실공소 회장, 후손 정경진 등을 비롯하여 10여 명이나 된다. (문산 본당 80년사 참조) 그후 진주 옥봉동 본당 주임 정상규(요한) 신부는 옥봉동 본당, 칠암동 본당, 문산 본당, 장재동 본당, 사천 본당을 중심으로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현안위원회(회장 김영도)를 구성하고 부지 754평을 확보하여 순교자 묘역 이장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중순 새로 조성된 현재의 사봉 공소 안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 관리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건평 60여 평에 철골 1층 구조로 건립된 사봉 공소는 순례자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한편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사봉 공소
오후 4시 40분쯤 사봉 공소에 도착. 언덕 밑에 주차를 하고 경사진 길을 오르니 예수 성심상이 팔을 벌리며 우리를 환영해 주신다. 2005년도에 다시 지었다는 시봉 공소 성전이 우뚝 솟아있다. 공소 성전은 아쉽게도 잠겨 있다. 건물 옆으로는 널찍한 잔디 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 큰 나무들이 서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한쪽에는 성모님이 서 계시고 다른 한쪽에는 야외 제대가 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사방이 조망되어 내려다보는 경치가 그럴 수 없이 좋다. 마치 경주의 감포 공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바로 말하면 조망하는 경치는 감포 공소보다 못하나 아늑한 맛은 더 낫다.
정찬문 순교자 무두묘
순교자 묘는 숲 속에 있다. 묘는 큼직한 석곽형인데 정면에는 두 개의 빨마 잎이 교차되는 가운데에 십자가가 음각으로 새겨지고 그 위에 붉은 글씨로 순교자 정찬문 묘라고 쓰여 있다. 묘 앞에는 탁자형 돌 제단이 엄정하게 놓여있다. 제대 왼쪽에는 대형십자가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순교비가 있다. 순교비 앞에는 성지 표지판이 있는 촛불함에 순교자 정찬문의 사진이 큼직하게 놓여있다.
성모 승천 동산
성모승천 동산은 순교자 정찬문 묘 뒤쪽에 있는 언덕이다. 이곳에는 최재상 마티아 신부가 제작한 승천하는 성모상이 있어 필자가 붙여본 이름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이름은 아니다. 1월1일 성모님 대축일이 있고 또 8월 15일에 성모승천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아도 성모승천의 의미는 교회에서 각별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모승천상도 큰 의미가 있다.
이 길도 고행의 길인가 언덕 밑자락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서있다. 하지만 오르는 길은 진흙이 묻지 않는 편안한 길이다. 그리고 오르는 길 입새에는 성모상 안내표지석이 서 있다. 꼭대기에는 이제 막 하늘로 오르는 모습의 성모상을 볼 수 있다.
떠나면서
언덕 위에 자리한 사봉공소는 정말 풍광 좋고 아늑한 곳이다. 고요한 숲속에서 명상하고 피정하기에도 좋다.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 감이 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있어 그런지는 모르나 성전 문이 잠겨 있고 안내자 한 사람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좋은 곳에 한 사람쯤 문을 열고 나와 안내나 해설도 하고 신자끼리 대화도 좀 나누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전주 숲정이 성지를 갔을 때 친절한 안내자가 생각난다.
전부 바쳐 전부 얻는
남루한 나의 생애에도
가녀린 풀 향내 스며들까요?
하늘 품은 가슴들이 쉬어 가던 고개에는
여름 뜨거이 기울고 있습니다.
전부 바쳐 전부 얻는 신비
속살 투명한 바람들이
깃발 펄럭이며 대지에 내립니다.
내가 눈 떠서
사랑을 마음껏 아파할 수 있다면
아득히 해 지는 음향 속에서도
촛불 하나 그윽이 밝을 것입니다.
무덤들 가에서는
백일홍들 진하게도 피었다 지며
영원의 문 틈에 꽂히고 있습니다.
- 허유고개에서(김영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