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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제목: 추수감사절 표지판 읽기
(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설교를 위한 묵상
절기는 시간의 길 위에 세워진 표지판이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내용은 우리가 가야 할 여행의 목적지이며 동시에 그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설교에서 나는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두고 이 절기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추수를 마치고 하늘에 감사제를 드리던 제천행사의 풍습은 인류의 오랜 전통이다. 추수감사절은 기본적으로 이런 농경문화의 유산이다.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확보하는 일은 하늘의 은총에 기대는 바가 크기 때문에 감사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늘의 하나님이 농사와 함께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시며 동시에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나라 통치에 초대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면 어떨까? 그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추수감사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번 설교에서 이 부분을 주목하고자 한다.
먹거리의 근원은 역시 땅이다. 그러므로 가을추수와 수확에 대한 감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회의 추수감사절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농경의 절기가 구원의 역사와 겹친다는 점이다. 유월절은 초실절과 겹치고 오순절은 맥추절과 겹친다. 그리고 추수절 또는 수장절은 초막절과 겹친다. 유월절이나 오순절 또는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도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관련이 깊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 넷째 목요일이다. 그들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의 미국 정착을 기념하는 측면이 있다. 아마 그렇게 오래된 일이 있은 후에 역사는 다른 전통의 층위를 쌓아서 이 절기에 더 깊은 의미를 담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추수감사절은 농경의 감사제인 추석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는 추수감사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내가 설교 제목을 ‘추수감사절 표지판 읽기’로 정한 까닭은 이 절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사실 기존 신자들의 경우에 이 절기는 이미 오랜 신앙생활의 전통을 이어가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통의 관성은 앞으로도 어느 정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행성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미는 만유인력 가운데 지속적으로 공전운동을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절기도 그 의미를 새롭게 하는 노력으로 활력을 띠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추수감사절은 농사와 수확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출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민족적 정체성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으로 오면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특히 마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추수 때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심판의 시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맡은 소임과 사명을 평가받는 날을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그렇다면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의 표지판은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릴 심판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거리에 세워진 표지판이 어디까지 가려면 얼마의 거리가 남았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고 운행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존재이며 역할을 맡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 약속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태양으로부터 발산되어 온 빛과 열이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며 그 중에 어떤 것은 지구의 전기장을 피하여 극지방에 오로라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새로운 역사는 우주의 새로운 파장이 되어 생명을 공급하기 위하여 지구로 날아온다. 그런데 지구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천사장 미가엘을 가로막은 것처럼 그 생명의 파장을 가로막아 사람들이 생명으로 회복되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참고, 다니엘 10:13).
그런데 열심 있는 성도들은 두 날개를 활짝 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생명의 파장을 받아들인다. 그 결과로 그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며, 혼돈에 질서를, 공허한 땅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땅에 있는 존귀한 사람들인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정체성이며 희망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과 사명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지음을 받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우리는 그 하나님이 이 낡은 세상을 새롭게 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며,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 나라를 상속하여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지난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성경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를 들고 나와 연극으로 기념했다. 예를 들면, 나는 청년 시절에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교사들과 함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 그 후에 교회들에서 나는 청년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공연은 어떤 이야기를 다시 보여주고 기념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의 존재 근원과 희망이 담겨 있다. 그 공연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절기 때 우리는 바로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존재 근원과 희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 여기에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를 제작하는 일은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노아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지금의 기독교회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성경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일에서 충분한 의미를 발견해 내는 사람들은 새로운 파장을 일으킬 동력을 얻을 것이다.
사실 모든 공동체에는 기념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조상들의 이야기를 기념한다. 그것은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이야기를 기념한다. 이슬람교회는 마호메트의 이야기를 기념한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과 포로기의 경험을 기념한다. 유월절이나 부림절이 그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 청교도들의 이주 이야기를 기념한다. 절기는 공동체의 기원을 알려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견고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복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임을 다진다.
그러면 기독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기념하는가? 우리를 유대인과 구별하게 하고, 우리 조상들과도 구별되게 하는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기념하는 것이 우리들이 일년을 보내면서 회상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각각 성탄절과 고난주간과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과 대림절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절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결국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그림이 중요하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절기 동안에 기념하는 이야기의 절정이며 가장 크고 근본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거대 서사)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도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의 경륜에 부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이 초기교회 이후에 교회에 들어온 헬라 철학과 이교도적인 생각이라고 규정한다.
십년 전에 나는 ‘이교도에 물든 기독교’(Pagan Christianity, 2008, Frank Viola)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을 연구하면서 오늘날의 교회와 비교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각 영역에서 비판적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우리 기독교회가 기념하는 메타 내러티브 그 자체를 점검하고 다시 세우려고 노력한다. 이전의 이야기가 창조와 타락, 그리고 그 결과로 심판과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그 최종적인 목표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새로운 이야기의 최종적인 목표는 이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이 세상과 함께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톰 라이트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이야기는 부활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결정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책임있는 관리자로서 나서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영지주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는데, 이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 여기지 않고 저 세상에 완전한 천국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함께 기독교인의 인구가 감소하고 교회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우려해야 할 일은 우리가 기념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부합하지도 않고 세상을 이끌만한 역동성과 비전을 가지지도 못한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한 바른 평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자신들이 가진 편협한 생각을 주입하거나 그런 생각을 강화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뿐이다. 이것이 역사와 현실이 보여주는 현상이다.
어제 다니엘기도회에서 어떤 연사는 저출산의 문제를 동성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이 통계를 전혀 살피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교에 대한 공동기도에서도 포용과 공존의 정신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두려움과 배타적인 생각만이 드러났다고 나는 판단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특성을 분명하게 붙드는 것은 좋지만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개신교회의 주류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똘레랑스 이전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기념해야 할까? 우리는 기나긴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예수님과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각종 묵시문학의 판타지들을 종합하여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우리가 절기 때마다 기념하고 후손들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우리가 성경 이야기에서 읽어내서 비추어야 할 그 거대 서사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이 세상과 인간의 존재목적과 가치를 밝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갈등을 해소하고 위기극복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이 보여준 바로 그 정신이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면 그 이야기가 곧 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며 희망과 번영으로 인도하는 표지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야기들을 왜곡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우리를 위축하게 하는 오염된 생각과 사상이다. 그런 사상은 영혼사후천당사상의 형태로 나타나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토론과 사유를 위험한 자유주의적인 신앙이라고 매도하는 분위기는 즉시 극복되어야 할 구습이다. 하지만 현재의 예배 관행과 기독교 문화 가운데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인 점은 지금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여러가지 생각을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자기 시대에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글을 썼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유대인의 족보를 소개했으며, 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를 소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예수님을 다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인류를 위해서 보내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요한은 아예 태초부터 있는 말씀인 로고스를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모두 당시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메타 내러티브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을 새로운 아담으로 소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새로운 인류역사가 시작된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바울이 쓴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포된다. 이것은 창조 이야기를 배경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은유와 판타지들은 창세기의 이야기와 출애굽기의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우러져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와 전통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각 세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새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것이다.
추수감사절에 기념되어야 할 이야기는 심판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다. 이는 요한계시록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악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과 의인들의 심판으로 구분된다. 포도나무의 추수와 곡식의 추수가 그것이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이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심판주로 소개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추수는 농사의 시작인 씨뿌리고 돌보는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된다. 그것은 처음과 끝이며 창조와 새 창조, 즉 최후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경영하신다. 그 경영은 자기 나라를 돌보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이며 결단이다.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이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구별하여 별도로 인식할 수는 없다. 그 둘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시는 대상이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맡아 관리하는 대리인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이런 설교 목적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것이다:
1. 추수감사절의 의의
2. 시편 126편에 담긴 감사와 희망
3.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
4. 하나님의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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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수감사절의 의의
다음 주일은 금년도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본래 가을추수를 마친 후에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추수절은 수장절(收藏節)이라는 이름도 가집니다. 곡식을 거두고 저장하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추수절은 장막절이나 초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년도 초막절을 9월 29일부터 10월 6일까지 지켰습니다. 그리고 10월 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을 추수를 기념하여 추수절이나 수장절을 지키면서도 그 기간에 초막절을 지키는 까닭은 절기에 기억하고 기념할 일이 다만 농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데서 건지실 때 광야를 지나면서 초막에서 살던 과거를 기억하려고 초막절을 추수절과 함께 지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추수절은 농사의 수확에 대한 감사와 함께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을걷이를 마치고 하늘에 감사를 올리는 축제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여(夫餘)의 영고(迎鼓)와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그리고 동예(東濊)의 무천(舞天)이 그것입니다. 이 절기에 우리 조상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으로 즐거워하며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신라시대에 추석이라는 명절이 시작되었으며 오늘에 이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절기는 추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독교회는 미국 기독교회의 영향을 받아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 넷째 목요일입니다. 그날 미국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대서양을 건너와서 미국에 도착하여 고생하면서 추수의 기쁨을 인디언들과 나눈 것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탄생을 기억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은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그 근본 정신은 가을걷이에 대한 감사와 자기 민족의 근본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추석이라는 절기를 지킴으로 가을걷이의 기쁨을 가족과 친지들과 더불어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청교도의 전통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있는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절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농부로 자주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심으시고 자라나게 하시며 추수하십니다. 하나님의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을 일주일 앞두고 시편 126편을 묵상하면서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2. 시편 126편에 담긴 감사와 희망
시편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시온의 백성을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게 하실 때 꿈꾸는 것 같았다는 것이지요. 너무 좋아서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넘쳤다고 합니다. 이웃 민족들도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고 놀라워합니다.
이 시에서 큰 기쁨으로 노래하는 사건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된 사건입니다. 성경을 보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을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 포고령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 시온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고 기념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해방의 기쁨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예배당을 임대하여 사용해 왔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째 예배당으로 이곳 상왕십리 무학봉 기슭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0년 5월 27일 우리 교회는 은행에서 빌려온 대출금을 모두 상환함으로써 임대료를 내는 교회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숙원이 해결된 기쁜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희망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에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면 그만큼 가족애가 든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절이 되어도 가족을 찾지 않으면 그 가족은 이미 문제가 생겨서 그 유대가 끊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온의 포로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들에게 시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리잡은 땅이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민족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70년이 흘렀어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임대생활을 면한 것을 기뻐하고 기억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26편에서 시인은 갑자기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런 짧은 외침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편 126:4, 개역개정판
포로에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기념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좀더 분명하게 옮겼습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사로잡힌 우리가 다시 한 번 번영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126:4, 표준새번역판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이 일하심이 필요하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환경은 다시 열악합니다. 예배당을 다시 세워야 하고 성벽도 재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원은 부족하고 사람들은 낙심해서 마음이 흩어졌습니다. 다시 예배당을 세워서 감격했지만 또다른 강대국이 나라를 짓밟았습니다. 페르시아 후에는 헬라제국이, 그리고 헬라제국 후에는 로마제국이 쳐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편 126편을 암송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절도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우리는 우리 교회의 이름으로 된 예배당도 있습니다. 그런데 둘러보니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던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예배당을 뛰놀며 시끌벅적하게 행사를 하던 청소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남방의 시내들은 네게브 사막에 있는 와디를 말합니다. 와디라고 부르는 이 사막의 시내는 건기에는 말라 있다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데요, 갑자기 내린 빗물이 사막을 지날 때에는 수시로 그 흐름이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보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흐름을 바꾸시면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그처럼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바꾸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3.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바람의 기도만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이런 다짐의 말을 되뇝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하나님은 남방 시내들의 흐름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바꾸셔서 시온을 포로들을 돌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70년 동안 자리잡은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일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며,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 일에 나선 사람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고했고 마음을 졸였고 두려움과 방해와 비방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편 126편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절실한 고백이며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간구,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담긴 노래이자 기도입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나는 일이 있더라도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야 남방 시내들을 돌려 땅을 개간하게 될 때에 씨앗을 뿌려야 거둘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서 예배당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는 다시 우리가 씨를 뿌려야 할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보이는 소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다음 세대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것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것이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 일어날 일을 바라는 우리의 소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신무학아파트의 재건축이 시행되는 날 어엿한 예배당 건물을 가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교회들이 성동구와 우리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들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형편과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온의 포로들을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시금 주님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비록 상황은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의 수고는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보상되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기대와 믿음입니다.
우리가 인사하고 고백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남방의 시내들을 돌리듯이 상황을 바꾸어 주실 것을 믿고 오늘도 우리의 밭을 일구고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추수
그런데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도 추수 때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어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름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3장). 요한계시록을 보면, 흰 구름 위에 앉으신 분이 예리한 낫을 들고 곡식을 추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14장). 그리고 예리한 낫을 든 천사가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어 진노의 포도주틀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14:17~20). 이것은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은 알곡처럼 주님의 곡간에 들이게 되지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알곡은 누구이며 가라지는 누구입니까? 잘 익은 곡식은 무엇이며 진노의 포도주틀에서 짓이겨 그 피를 온 땅에 흘리는 형벌을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기준은 심판하시는 주님께 있을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리한 낫을 들고 추수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바로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그 심판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그 뜻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유명한 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 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Meta-narrative)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로 통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경영하시며 새롭게 완성하시는 대장정입니다. 그 대장정을 저는 지난 주 설교에서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큰 계획이며 원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명하신 계명 속에 배어 있으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요약적으로 정리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뜻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며, 헌물이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진실과 자비와 경건이라고 예언자 미가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에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성경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정리했습니다(로마서 14: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의롭습니다. 즉 당당합니다. 떳떳합니다. 그는 책임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강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에 모든 사람과 조화롭고 화평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기에 그는 범사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락입니다. 이런 것 외에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가라지는 누구입니까? 누가 진노의 포도주틀에 들어가 심판을 당합니까? 그들은 악인입니다. 가라지는 속이 빈 곡식입니다. 마땅히 채워져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를 그는 저버립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경작할 때 그의 땅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배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섬기거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마다 그의 삶은 공허와 혼돈이 찾아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물을 모았어도 그 재물 때문에 도리어 망가지는 사람을 보면 사람에게 재물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의 뜨거운 맹세는 시간의 변화와 함께 식어가고 마침내 파경에 이른 남녀를 보면,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먼 훗날에 있을 심판을 맛보기 전이 이미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지옥보다 못한 삶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수는 가을이라는 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미 봄에 뿌린 어떤 씨앗의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추수 때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우리가 지금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그런 생각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입니다.
저는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을 ‘추수감사절 표지판 읽기’라고 정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절기가 농경사회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역사적 경험을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위해 공통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시간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절기를 지킬 수 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추수가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과 조상들의 전통과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를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상황을 바꾸어 주실 때에 그 기회를 놓치기 않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눈물을 흘리더라도 뿌려야 할 씨앗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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