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환생과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인간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아마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직관적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도 죽음 이후에 삶이 계속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 비전(秘傳)의 교리,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버질은 물론 아프리카 흑인까지도 이미 태고적부터 영혼이 옮겨간다던가 신체가 옮겨간다는 등의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또한 현대 사상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역시 죽음 이후에도 삶의 과정이 이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과학자 에드가 다케(Edgar Dacque)는 [원시세계, 영웅담, 그리고 인류]라는 저술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죽은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아울러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이나 지혜로운 인도인같이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와 과학을 지녔던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토대로 행동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헬레니즘과 유대이즘이 발달한 이후로 이러한 믿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심오한 경지를 터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윤회의 법칙은 팔리어로 바왕가 소따(bhavanga-sota)라고 부르는 소위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이 바왕가 소따라는 말은 논장(論藏 ,abhidamma -pitaka)에 언급되어 있고 특히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같은 주석서들에 그 설명이 나옵니다.
환생, 업 혹은 전생의 기억 등과 같은 다양한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바왕가 소따, 즉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이 지니는 근본적 의미를 서구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충분히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왕가(bhavanga) 혹은 바왕가 소따(bhavanga-sota)라는 말은 융을 포함한 기타 근대 심리학자들이 정신 혹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거의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는 불멸의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해 가는 잠재의식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이야말로 모든 윤회전생(轉生)의 필수 조건이며 그 안에는 모든 인상과 경험들이 축척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안에서 과거의 영상이나 기억된 모습들이 중첩되어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은 깨어 있는 의식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특히 꿈속에서 의식의 문턱을 넘어올 때 똑똑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재들이 이룩해 내는 업적들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신비적 경험인데, 마치 기도처럼 종교 생활과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 여기에는 문득 떠오르는 정지 상태의 기억들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정열들, 충동, 직관, 가정, 환상, 미신들의 원천들이 모두 담겨 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비합리적인 행위들은 거기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꿈의 원천도 그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융은 그의 저서인 <오늘날의 정신 문제들>에서 '창조적인 모든 것은 본능이라는 살아 있는 원천에서 나온다.'라고 하고, 또 다른 책에서는 '사람 마음으로 창조된 것은 무엇이나 실제로는 무의식적 (혹은 잠재의식적) 씨앗인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물론 본능적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유기적, 심리적인 요소를 일컫는 집합적인 용어일 뿐이며 그것의 속성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 소따(bhavanga-sota)가 있어야만 우리는 사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인지하고, 생각하고, 안팎으로 경험하고 행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딘가에 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극히 복잡한 신경계나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안에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앞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것이며, 다른 생물과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부모, 스승, 친구 등도 알아볼 재간이 없을 것이며,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며 (사고란 이전의 경험들을 기억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마음은 방금 태어난 갓난아이의 마음보다도, 아니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마음보다도 더 비어 있는 완전한 백지 상태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 소따는 이전의 모든 행동과 경험들의 침전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태고 적부터 전해 내려와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이어지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기타 존재의 진정하고도 가장 깊은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모두 이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라클라이투스는 '두 번 다시 같은 흐름에 들어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그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라고 말했는데, 그와 흡사한 말이 <밀린다왕문경(Milinda-Panha)>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육체적이건 의식적이건 잠재의식적이건 간에 모든 생명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며 계속적인 생성, 변화 및 변모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변치 않는 요소란 어떤 요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자아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러한 무상한 현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아의 허구성에 대해, 헝가리의 심리학자 볼게시는 <신경계에 주는 메시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최신 첨단 지식의 영향으로 심리학자들은 이미 실체라고 믿는 자아란 것은 본질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점, 자아라는 느낌은 단지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라는 점, 이 자그마한 크기의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수없이 많고 복잡한 요소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자아, 독립 자존하는 자유의지라는 생각을 우리는 버려야 하며 진짜 자아라는 것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자아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단지 이 자연계의 가장 이상스런 신기루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고정된 사물과 같은 정신 상태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느낌, 지각, 의식 등은 실제로는 단지 느낌과 지각, 의식의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지 그 안이나 밖에 개별적인 혹은 항구적인 실체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업(業)과 환생/ 냐나틸로까 대장로 지음/ 이진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