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상과 농민혁명
목차
1. 동학의 정치사상 (문덕, 신건상, 임지영)
2.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김옥태, 유병철, 윤경환)
3. 갑오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고도형, 이현숙, 장영신)
4.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김은정, 은소연, 이윤수)
5.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북한의 시각 (김창주, 유은희)
1. 동학의 정치사상
(1) 民權思想
동학의 민권사상이란 당시 민중의 가슴속에 맺힌 피압박계급의 항변을 요약한 것이다. 그들은 비록 혁명기를 통해서 일부의 교도들이 샤머니즘적 매력에 끌려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의 힘이 강대함을 알게 되었으며, 집권자의 압박하에서 자포자기하던 태도를 버리고 점차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근대적인 민권이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동학혁명은 다른 民亂과 구별되는 것이다.
(2) 國家觀
동학의 정치사상 특히 국가론도 조선조 유교사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의 宗旨를 설명하는 중에도 왕정을 부인하는 어구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왕권에 대한 충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동학의 道德政治論은 다분히 도교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동학이 종교이면서도 이토록 현세의 문제에 주안을 두는 것은 동학이 천계와 현실을 분리하여 보지 않고 양자를 동일한 실체로 보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의 개혁의지가 좌절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적으로 보면 이것은 교도들 자신의 내재적인 모순과 약점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구조의 전반이나 기존의 계층질서를 변혁할 의도로 공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을 요구할 뿐이다.
(3) 民族主義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동학창건 당시의 갑작스런 형성도 아니려니와 몇 가지 점에서는 한국사를 통하여 일관하는 유형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동학사상의 민족주의적 요소는 제국주의를 추구한 서구 및 일본의 세력이 어느 때보다 직접적 위험으로 등장한 근세기에 와서 민족주의의 맥락을 더욱 강화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의 민족주의 발생 원인은 주자학적 명분론과 사대사에 대한 반대가 반청 사상, 북벌사상에 편승되어 실학사상을 거침으로써 모화관념을 거부케 하고 뚜렷한 민족주의의 주장을 배태하게 한 내적 요인이 동학 성립 당시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외적 요인으로 서양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동학으로 하여금 민족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국내의 괴질의 유행, 농민의 참상 등 최제우의 동학 창건의 계기가 외세에 대항한 민족 자주정신에서 주로 싹텄으며 서학에 대한 동학의 「학(學)」이란 뜻으로 자기의 도를 동학이라 한 것도 이런 조국의 위기를 절감하면서 보국안민의 국난 타개를 위한 동학을 창조한 것이다.
(4) 영향
동학이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은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민중의식성장에 미친 영향이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서 반봉건혁명에 이르는 30여년간 동학은 민중의 편에서 자유 정의 진리를 절규하고 불의 비리 부정 등을 배격하므로서 근대의식의 확대를 전국에 확산 보급하였다. 그런 30여년 의 민중의식 성장 과정 가운데 동학사상의 주요 핵심은 侍天主와 人乃天의 교리적 차원과 함께 표출되었고 輔國安民, 除暴救民, 廣濟蒼生의 구국적 차원에서 우리 나라의 민중의식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접근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개화개열과 달리 우리의 근대화를 민중적 차원에서 촉진시켜 주었다.
두 번째는 동학이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이다. 동학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식을 성장시키는 역할도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부분은 그 혁명이 더욱 조직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한데 있다. 그 동안의 민란들은 지역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동학농민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이는 동학의 조직망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세력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 조직을 통해 농민들이 더욱 단단히 뭉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동학이 한국의 정치사상에 미친 영향은 첫째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민권이념이 봉건적 遺習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하나의 초석이 되었다. 둘째 동학이 많은 영향을 미친 혁명은 한국사에서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최초의 민족운동으로서 그 후에 계속된 민족항쟁에 하나의 패턴을 제시하였다는 점은 한국사에서 오래도록 유념해야 될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참고문헌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신복용, 평민사
http://ischool.snu.ac.kr
2.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주제의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제반모순에 따라 직접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하 조선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해결하려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래의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 확대되어 갔다. 개항이후 불평등 무역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 부농 층은 대일 미곡수출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더불어 영세 수공업자와 상인층도 외국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운동의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당시 농민전쟁의 진원지였던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즐포· 논산포 등의 포구 개항장에서는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또한 미곡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 하고자 하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호남지역에서 반계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의 동림서원(東林書院)과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 정약용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어있었다. 농민전쟁의 지도자였던 전봉준도 그러한 사람중의 하나로 기존의 군·현단위의 농민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 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 전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 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조직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반봉건의식과 척왜척양(斥倭斥洋) 이라는 반침략의 민족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2년 삼례집회와 1893년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을 벌였고 이때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 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그리고 이들은 교조신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금구집회를 (1893.3)소집 척왜척양과 당시 수령들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 되었던 것은 1894년 1월에 발생한 고부민란이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지나친 가렴주구를 행한 것이 불씨가 되어 발생한 것이었는데 만석보의 고율 수세를 비롯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둬들여 농민들을 착취했다. 이에 고부농민들은 1893년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두 차례에 걸쳐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지도자들이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통문결의가 보류되었고 이후1893년 12월 새로운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고 이듬해 1월 다시 고부군수로 조병갑이 재 부임하게 되자 사발통문의 결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후 1894년 1월11일 농민군의 고부관아 습격과 아전의 처벌 농민군의 무장, 불법수탈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아래의 새로 쌓은 둑을 무너뜨리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부는 민란의 수습책으로 고분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해 사건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으나 그 뒤 안핵사 이용태가 사후처리를 빌미로 해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의 폭압으로 인해 이후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을 통해서 살펴보면 동학농민전쟁 발발의 원인은 문호개방이후의 자본주의 침략으로 인한 농민경제의 타격, 외세에 대한 집권층의 타협과 굴복, 국제적 분쟁 및 제도개혁에 따른 정부재정의 곤란과 농민부담의 과중, 지배층의 분열과 농민생활을 외면한 정쟁의 연속, 농촌지식인의 경제적 몰락과 정치의식 및 지도력의 향상, 외세침략으로 인한 농민세계의 위기의식 팽배와 정치·사회의식의 성장, 더불어 자본제 상품의 침투와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로 몰락을 강요당하던 소상품 생산자와 소상인층이 농민층과 연대하였던 것등 당시 사회경제적인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학의 교세와 조직 또한 크게 뒷받침되면서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비사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브리테니커백과사전 <갑오농민전쟁>
3. 갑오농민전쟁의 전개과정
1) 동학 교세의 확장
삼례집회는 동학교 최초의 대중집회로 교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금지가 그 요구사항이었다. 간부들이 전라 관찰사에게 訴狀을 제출하였고, 이에 교조신원문제는 권한 밖이나 침탈은 엄단하겠다는 언약을 받고 해산하였다. (1892년 음11월) 이후에 교조신원을 伏閤上疏로서 국왕에게 호소하였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운동성격이 정치적 항거로 바뀌게 되고, 최시형은 보은에 2만 여의 교도를 집결시켰다. 이것이 보은집회이고, 정부는 호조참판 어윤중을 兩湖宣撫使로 삼아 동학도들을 회유하면서, 해산을 권고하였다.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자진 해산하였다. (1893년음3월)
2)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
§고부민란
탐관오리의 탐학이 만연한 가운데 전라도 지역중 고부군에서 가장 불만이 커졌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농민들은 전봉준을 통해 진정서를 2차례 올리나, 도리어 탄압을 받자 전봉준은 1000여명의 고부군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처벌하고, 창고의 양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1894년 1월)
§1차 농민 전쟁
고부민란후 동학도에 대한 횡포가 더욱 강화되자,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등과 제휴하여 봉기하고, 1만 3천여의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경군 800여명을 급파하였으나, 농민군은 長城의 黃龍村에서 원병을 대파한 후 전주에 입성했다.(1894년 3월)
3) 전주화약과 집강소의 설치
고부민란이후 동학농민군이 반봉건적인 성격을 뚜렷이 하여 그 세력이 전라도 전지역으로 파급되자 청국에 군사요청을 하는 한편, 회유하여 해산시킬 목적으로 휴전교섭을 제의한다. 농민들도 다수의 부상자가 있고, 농번기가 가까웠으므로, 귀향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봉준은 弊政改革을 조건으로 1894년 5월에 이른바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전주성에서 해산한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동학 농민군의 점령지에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관찰사와 전봉준과의 협의로 執綱所라는 민정기구를 설치하여 동학도들이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12조항으로 이루어진 폐정개혁도 추진하였다.
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조정이 청국에 군사를 요청하자, 일본은 濟物浦條約을 근거로 같이 파병하였고, 마침내, 무력으로 신정권을 수립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일본을 몰아내고자 재궐기하여 삼례에 10만 여명이 집결하게된다. 이때는 충청도의 北接도 가세하여 南北接 20여만의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게 된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계속하면서 별도의 독립제19대대를 파견하여, 조선정부군을 앞세워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최후의 결정전은 공주의 우금치전투였다. 6·7일간에 4·50여회의 공방이 계속되었지만, 현대식 무기에 밀려 농민군은 전라도로 후퇴한 뒤 재기를 노렸으나, 12월 30일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되므로써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사 특강 , 강대민, 경성대학교출판부, 1998
고쳐쓴 한국근대사 ,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4
4.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민족운동·농민운동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이 큰 역사적 의의로서 주목된다.
첫째,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농민들의 대표적인 반중세·반봉건운동이었고, 반침략·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다.
둘째, 동학농민혁명은 당시의 양반신분제도와 당시가지 수천년 묵어온 사회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국역사에서 1894년의 사회신분제의 폐지는 양인·천민의 하위신분층의 농민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의하여 먼저 아래로부터 혁명적으로 사회신분제를 폐지해 나가자 그 후에 갑오경장 개화파들이 이를 받아서 법령으로 사회신분제를 폐지한 것이었다.
셋째, 동학농민혁명은 당시까지 수천년 지속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를 완강하게 저지하던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켰다. 한국민족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핵심인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 선결의 과제였는데 이 문제를 개화세력이 한 것이 아니라 동학농민세력이 이 일을 수행하였다.
넷째,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민에 의한 근대개혁을 실시하였다.
다섯째, 동학농민혁명은 개화파 정부의 갑오경장의 아래로부터 추동력이 되어 대개혁을 단행하도록 하는 근원적 힘이 되어 주었다. 개화파집권후의 갑오경장의 대개혁은 동학농민들의 것을 번역하고 수정하여 단행한 것이었다.
여섯째,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각계 각층 광범위한 국민들의 정치적·사회적 각성을 크게 촉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는 전국민에게 심대한 충격을 주었고 이 충격이 한국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크게 계발되고 고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곱째, 동학농민혁명은 그후 항일의병의 저변의 토대를 튼튼히 만들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동학농민군 병사들이 그후 의병군의 병사가되어 기회있을 때마다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 동학농민혁명은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채 좌절되었지만,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세계역사에서 근대와 현대는 바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않는 자주 독립국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동학농민혁명은 올바른 역사발전의 방향을 제시했다.
동학농민군들은 인간평등의 실현, 사회비리의 척결, 외국 침략의 구축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봉기했던 것이다. 비록 그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안으로는 갑오경장을 일으켰고, 밖으로는 또 청일전쟁을 일어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은 수천년간 이어오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이요, 혁명을 좌절시킨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이후 계속되는 일일제침략에 맞서는 항일 독립정신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한말의 국민계몽운동과 민족차별폐지운동을 통해서 더욱 힘차게 추진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민족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축으로 역동하였다.
해방이후 한국의 위정자들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였다. 이것에 동학농민혁명의 민주화정신은 이것을 극복하고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으며 5·16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때도 가장 앞장서서 투쟁하게 했다.
특히 10·26이후 12·12군사쿠데타를 벌이면서 신군부가 집권하려하자 이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펼쳤다. 이것은 정의와 충성심이 강한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과 직결되는 것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총칼로 살얼음판을 만들었던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것은 민주인사들의 피와 눈물로 싹이 트고 열매를 맺어 87년 6월 항쟁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의 민주정신은 이 나라를 민주화시키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가는데 크게 이바지하게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서막이요 그후 계속된 민족·민주운동의 구심점으로 나라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지주가 되었다.
참고문헌
동학농민혁명과 광주·전남 이상식편저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94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신복룡지음 평민사 1985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문정문화사 1993
5.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북한의 시각.
1)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관계문제
동학과 농민전쟁과의 관계는 종교로서의 동학이 가진 '환상적인 종교미신적' 부분은 농민전쟁과는 연결되지 않았고 그 반봉건·반침략적 성격만이 연결되었다고 보고있고 농민전쟁군이 동학의 사상 그 자체보다 그 교단이 가진 조직을 이용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조선전사]에서 "농민출신의 동학 하층교도들은 상층교인들과는 달리 동학자체의 신앙보다도 기아와 빈궁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염원이 더 강렬하였으므로 그들의 대중적인 종교운동은 반봉건적 투쟁과 연결될 수 있었다"고 하여 동학교도를 상층부와 하층부로 구분하고 그 하층부가 일반 농민과 함께 농민전쟁의 주력이 되었다고 본다.
2) 농민전쟁의 주체세력문제
초기 갑오개혁을 주도한 온건개화파와 농민군 사이에 합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무위로 되고 갑오농민전쟁은 그대로 농민군만의 주도로 추진되었고 또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북쪽 학계는 농민군 지휘부와 그 하부 군졸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농민으로 통칭하면서 농민군과 이른바 혁신관료층과의 동맹의 가능성을 말하고, 김옥균의 혼이 갑오농민전쟁군을 지휘한다는 말이 펴졌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이 갑신정변과 같은 맥락에 있는 부르주아민족운동임을 강조하고 있다.
3) 집강소운동의 역사성문제
[조선근대혁명운동사]가 보는 집강소의 성격은 중앙의 조선왕조 정권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의 지방에서의 농민군 자치적 권력기구로 보면서, 일부 지방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민참정권 획득이라는 점에 그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조선전사]에서는 "집강소는 봉건관료기구인 감영과 지방관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건에서 활동하였으나 사실상 지방자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집강소는 농민전쟁이 승승장구하면서 지방봉건통치를 마비시킨데 토대하여 농민군이 세운 지방자치기관이었으며 그 존재와 활동은 농민들의 수중에 장악된 군사력에 의하여 담보되었다"하여 중앙 정부는 물론 지방 감영과 군현이 온존하는 조건 아래서 농민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유지된 지방자치기구로 보고 있다. 그리고 집강소를 통해 실천하려 했던 개혁강령이 농민전쟁의 실패로 정착되지는 못했으나 농민군에 의해 집강소가 설치된 그 사실 자체가 곧 역사발전의 증좌라고 설명한다.
4) 토지의 평균분작문제
「폐정개혁 12조」에 나오는 "土地는 平均으로 分作케 할 事"를 小作地·借耕地를 고루 가지게 하려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토지소유 자체를 고르게 하자는 요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 "토지를 평균으로 분작하는 문제는 그것이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요구가 기본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하여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토지소유권을 고르게 하자는 요구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조선전사]는 "12조에서는 양반관료들과 지주들에 의한 토지의 집중과 농민의 파산이 격심해진 조건에서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땅을 고르게 경작하려는 농민들의 숙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봉건제도 개혁에서 근본문제로 되는 토지문제 해결에서 균등경작을 제기하였을 뿐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철폐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다"하여 토지의 농민에의 분배를 요구하는 단계에는 못 갔던 것으로 보고 있다.
북쪽 학계가 토지의 평균분작문제를 두고 당시 농민들의 토지소유의욕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철저한 농민적 토지평균소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사상사적으로 1920년대 후반기에 가서야 옳은 의미의 사회주의적 토지소유사상이 확립된다는 문제와 연관된 것이어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보다 [조선전사]에서 후퇴하였다.
{ 1962년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했고 1988년 남쪽에서 출판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와 1980년 [조선전사]를 참고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