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칠레에서의 9.11과 아옌데 [펌]
노정협/ 김 남 기 2023년 9월 11일
- 미국의 군사 쿠데타 사주로 칠레에서 벌어진 또 다른 9.11
9월 11일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9.11'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이자, 자신들이 다른 나라에서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사한 날이기도 하다. .. 이 천인공노할 테러는 50년 전, 칠레에서 벌어졌다. 이는 바로 미국이 사주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다. ....(중략)
당시 칠레는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으로, 미국 구리 산업 양대기업인 '케니코트', '아나콘다'가 장악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칠레 정치에 뛰어든 살바도르 아옌데는 미국식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은 에두아르도 프레이 후보를 지원하여, 아옌데 후보를 낙선시켰다. 이후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칠레의 반공 그룹들을 지원하는 한편, 군사원조 1억 6,300만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칠레를 브라질* 다음가는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은 칠레군 장교 약 4,000명을 파나마에 있는 미군 학교에 보내 게릴라 소탕전술 훈련도 시켜줬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76~77쪽.)
(* 브라질에선 주앙 골라트라는 사민주의 성향의 대통령이었는데, 1960년대에 미국은 이 정권을 전복시켜 친미 반공국가를 만들었다.)
아옌데는 1970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고, 공약으로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옌데는 마침내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두 경쟁자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1971년 7월부터 그는 케니코트와 아나콘다 그리고 세로광업(Cerro Mining)을 국유화했고, “칠레 경제 수출의 80%가 외국계 거대기업 손에 들어가 있는 사실을 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또한 아옌데는 외세의 기업들(미국의 구리 기업 등)이 42년간 40억 달러 이상의 이윤을 냈고, 그들 때문에 민중이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음을 강조했다.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2015, 77~84쪽.)
아옌데 정부는 민중을 위해 각종 진보적 정책을 실행했다. 아옌데의 개혁으로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이 8% 이상으로 치솟았고, 물가상승률은 37%에서 15% 이하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으며, 국민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초기 개혁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칠레 민중들은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빅터 피게로아, 정인환 옮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서해문집, 2016, 193~194쪽.)
아옌데 정부는 과거 친미정권 시절에 소외 받던 민중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였고, 실제로 그런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하고자 했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어린이들에게 무상급식과 아침식사, 우유를 제공했으며, 원활하지 못했던 전기,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이것이 아옌데 정부가 칠레 민중에게 대대적으로 지지 받은 이유 중 하나다. 칠레 역사상 민중을 위해 이토록 헌신한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게 있어서 아옌데는 죽어야 하고 제거돼야만 할 대상이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였는데, 칠레의 구리 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은 비축한 구리를 대량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 또 칠레 아이들에게 필요한 분유 수입에 경제제재를 가해, 아이들을 영양실조에 빠지도록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미국은 분유회사들을 협박해 칠레에 분유를 수출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또한 친미우익 부유층들을 동원하여, 제재로 부족한 물자들을 사재기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물자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나아가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하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시키고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했다. 그 결과 1972년 10월 미국이 계획했던 바와 같이, 칠레 운수업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MBC 신비한티비서프라이즈’ 2013년 7월 14일 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1973년 3월 칠레 총선에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이 선택한 것은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1998년 기밀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칠레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쿠데타를 사주한 인물은 당시 미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다. 미국은 약 900억 원(당시 화폐가치)을 자금으로 쿠데타 준비세력에게 지원했고, 쿠데타를 실질적으로 실행케 했다.(‘MBC 신비한티비서프라이즈’ 2013년 7월 14일 방송.)
그렇게 해서 결국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를 주도한 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로, 그는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이였다. 마침내 아옌데 대통령이 있는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은 쿠데타군에 의해 포위됐다. (* 피노체트는 칠레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대대적인 진보세력 척결 및 학살을 자행했다. 그의 악행으로 칠레 민중은 17년 이상 군사독재 속에 공포에 살아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문 당했다.)
쿠데타 당시는 놀랍게도 전투기가 궁을 폭격하고 탱크들이 출격했으며, 군대가 진입했다. 아옌데와 지지세력은 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 저항했으나,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에 의해 쉽사리 진압되고 말았다. 마침내 아옌데는 자결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음은 당시 아옌데가 한 마지막 연설이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옌데가 죽고 나서,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쿠데타를 주도한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의 축구 경기장과 군대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은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구금됐다. 피노체트 정권은 공식적으로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며 시작했다(비공식적인 수치는 이보다 더 높다).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는 외국인 색출작업도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상관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여당의 평당원, 노동조합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의 독재 17년 동안 3만~6만 명이 군부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죽거나 고문당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들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이나 수감 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은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선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 보복을 가했다.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을 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유명한 진보시인 파블로 네루다,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피노체트는 칠레에서 ‘진보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했다. 교육계에도 진보성향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은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 역시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했던 구리산업은 민영화되고 다른 광업 부문들도 외국 기업에 개방했으며, 여러 지하자원들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품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공장 대부분은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하고, 임금도 급락했다. 이렇게 칠레가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아옌데 집권 당시 수준을 회복한 것은 30년 후인 2000년이 되어서였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 미국인들이 기억하지 않는, 미국이 자행한 9.11 테러다. ...미국이 칠레에서 벌인 쿠데타는 대다수 칠레인들에겐 '미국 9.11테러'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끔찍한 9.11테러였다. 무고한 민중 수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감옥에 구금되어 고문과 구타에 시달렸다. 반대파의 시신은 헬리콥터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기까지 했다.
사실 미국의 이런 테러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미국이 지원한 친미 독재자들은 CIA가 주도하는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무수한 민중들을 죽이고 구금하게 했다. ... 지금도 여전히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자신들의 이윤축적을 위해, 비슷한 짓을 자행하려 하고 있다. ....(하략)
필자 ;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출처; http://mlkorea.org/v3/?p=14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