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결국 예수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따라서 그분이
어느 한 곳에 배타적으로 계신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운영하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하느님 체험을 조직화하려 시도하는 모든 이가 왜 알게 모르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원적 사고에 가두고,
따라서 은총과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는
언제나 '약간' 불안해 하게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무릇 단체들이란 '우리'와 '그들'을 분명하게 나눠놓고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더욱 공고히 결속되게 마련이다.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죄의식에 바탕을 둔 종교, 울타리를 단단히 지키는 자들, 그리고
수치심은 소속된 부대원들을 한 줄로 세우는 데는 퍽 효과적이다.
물론 성경이 그토록 여러 방식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온 땅에 오직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이 '무한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면,
이 같은 접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쓸모 있음 과 쓸모 없음을 나누는 경계는 어디인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갈라놓는 울타리는 무엇인가?
흠 없이 깨끗한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소년 시절 '볼티모어 교리문답' 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한다.
첫째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정답은 이랬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다."
그런데 나머지 교리문답 전체가 방금 한 대답은
사실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 교회 안에, 가톨릭 안에 계시는 분이었다.
성체를 모신 제단에,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계시고
교회법을 잘 지키는 '착한' 사람들에게만 응해주시는 하느님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풀어주는' 하느님보다 '동여매는' 하느님을 선호해 왔다.
예수가 우리에게 그 두 가지 힘을 모두 주었는데도마태 16,19 (1) 말이다.
어찌 된 까닭인지 우리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원하지 않는다.
덕분에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하여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놓치고 만다.
예수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당신의 일인데도,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언제나 많은 장애를 극복하셔야 했다.로마 3, 9 이하
그런 장애물들을 설치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했듯이,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깎아내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루카 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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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 16,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 루카 3,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