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 전쟁의 원칙 적용을 중심으로 -
이 원 희*
*충남대학교 국방연구소 연구위원,군사학 박사
E-mail:whlee222@hanmail.net
학술논문_전쟁사
Ⅰ. 머리말
Ⅱ. 전쟁의 원칙에 대한 이론적 고찰
Ⅲ. 정유재란의 발발과 칠천량해전
Ⅳ. 칠천량해전의 책임과 패인 분석
Ⅴ. 맺음말
290 군사연구 제139집
칠천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음력 7월 16일 거제 칠천도 부근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이다.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 수
군의 유일한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이 한 번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궤멸하기에
이른다.이 글은 칠천량해전의 패인을 전쟁의 원칙 적용 측면에서 분석하여 교
훈을 도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전쟁의 원칙은 2012년부터 한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목표,공세,집중,기동,
지휘통일,기습,사기,정보,방호의 원칙 등 9가지를 적용하였다.연구 결과,정
유재란은 예고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철저한 준비를 한 일본과 달리 선
조와 조선 조정의 전쟁준비 부실,수군 지휘체계에 대한 문제점과 원균의 통솔
력 부족 등이 패전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전쟁의 원칙 적용 측면에서 칠천량해전은 상하간 의사소통의 결여로
인한 전략의 부재와 명확한 목표의 미설정,적에 대한 정보수집 노력의 부족,
주간이동으로 인한 공격기도 노출과 격군 감소로 인한 함대의 기동력 저하,경
계소홀로 인한 적의 기습 허용,군기 및 사기의 저하 등 총체적인 결함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칠천량해전은 최근 동북아 안보상황이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고,유비무환의 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제어 :원균,이순신,임진왜란,정유재란,칠천량해전,전쟁의 원칙
국문초록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291
Ⅰ. 머리말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명량’이 관객수 1,700만 명을 훌쩍 넘기고 미국,캐
나다,중국 등 해외에서도 개봉되어 많은 관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약 10년 전 KBS
1TV에서 <불멸의 이순신>1)이 방영되면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재조명으로 누리
꾼들 사이에 뜨거운 공방이 일어나기도 하였고,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는
대하드라마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전란의 참혹상과 조정 수뇌부의 고뇌
와 판단,국난 극복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나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 장수였던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은 마치 빛과 그림자
의 관계2)와도 같다.주지하다시피 원균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임
진란 초기 왜적의 침입에 맞서지는 못할망정 전선과 무기들을 불 지르고 도망치려
했던 겁장(怯將)’에,‘이순신을 시기‧모함하여 백의종군케 한 악장(惡將)’이며,‘술과
기생첩의 유희로 소일하다 결국 칠천량해전의 패전으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졸장
(卒將)’이라는 등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3)그러나 최근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여 원균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카(E.H.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
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4)이며,역사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미래의 교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 글의 연구목적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래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
자,이 한 번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하게 된 칠천량해전의 패전 원인을 전쟁의
원칙 적용 측면에서 분석하여 교훈을 도출함으로써 미래에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않
도록 대비하기 위함이다.모름지기 전쟁에는 반드시 승패가 따르는 법이다.역사적
1)<불멸의 이순신>은 이순신 장군의 삶을 그린 소설 칼의 노래 를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
이다.KBS방송에서 총 290억 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하였으며,2004년 9월부터 2005년 9월
까지 매주 주말 총 104회가 방송되었다.
2)이순신에게 빛을 많이 비추면 상대적으로 원균에 대한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
3)이재범, 원균을 위한 변명 (서울:학민사,1996),pp.18~19;박경식, 이순신과 원균 갈등과
리더십 (서울:행림출판,2005),p.57.
4)E.H.Carr,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까치글방,2014),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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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볼 때 승리한 전투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실패한 전투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
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승리한 수많은 해전과 달리 원
균이 패배한 칠천량해전과 관련된 연구자료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통해서
도 잘 알 수 있다.
연구범위는 전쟁의 원칙에 대해 알아 본 다음,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배경과
전투경과를 살펴보고,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패배한
원인을 전쟁의 원칙 적용 측면에서 분석해보고 이 패전의 결과와 영향은 어떠했는지
를 알아보고자 한다.
연구자료는 임진왜란 당시의 사료인 선조실록 , 수정선조실록 , 난중일기 ,
징비록 등을 기초로 하였으며,그동안 제시된 칠천량해전과 관련된 연구 논문 및
책자 그리고 칠천량해전 기념공원의 전시자료 등도 참조하였다.
Ⅱ. 전쟁의 원칙에 대한 이론적 고찰
1. 전쟁의 개념과 본질
전쟁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와 국가,또는 교전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
움’5)또는 ‘주권을 가진 국가 간의 조직적인 무력투쟁 상태로써 선전포고와 더불어
개시되고 강화조약으로 무력투쟁이 종결될 때까지의 상태’6)로 기술되어 있다.현재
한국군에서는 전쟁이란 ‘상호 대립하는 2개 이상의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
에 있어서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행사하여 자기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요하
려는 행위 또는 그러한 상태’7)로 정의하여 사용하고 있다.
클라우제비츠(CarlvonClausewitz)는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행동’8)이라고 정의한 후,이러한 전쟁에는 원초적 폭력성이 있고,개연
5)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3177100(검색일:2014.12.4).
6)김광석, 용병술어 연구 (경기 고양:병학사,1994),p.498.
7)국방대학교, 안보관계용어집 (서울:국방대학원,2003),p.114.
8)카를 본 클라우제비츠,류제승 옮김, 전쟁론 (서울:책세상,2007),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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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우연성을 지니고 있으며,정치에 종속되는 등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
장한다.손자는 ‘전쟁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국민의 생사와 국가 존망이 걸린 일
이니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兵者國之大事死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9)고
하면서 부전승(不戰勝)과 전쟁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쟁의 원인,주체,목적,수단 등을 알아보면 전쟁에 대한 개념을 좀 더 명확히 이
해할 수 있다.주지하다시피 전쟁의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그 원인은 전쟁
의 수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다.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케네쓰 월츠(KennethN.
Waltz)는 인간,국가,국제체제라는 3가지 분석수준에서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였
다.10)또한 한스 모겐소(HansJ.Morgenthau)나 케네쓰 월츠와 같은 세력균형 이론
가들은 다극체제 또는 양극체제일 때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 하였지만 오간스키(A.F.K.Organski)와 같은 세력전이(勢力轉移)이론가들은 도
전국이 패권국을 따라잡는 세력전이가 일어날 때 체제가 점차 불안전해지고,도전국
이 국제질서에 대한 불만족 국가일 때 전쟁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하였다.11)
전쟁을 단순히 국가 간의 무력충돌로 본다면 당연히 전쟁의 주체는 국가가 되겠지
만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같은 정치단체나 탈레반과 같은 무장단체,종교
단체 등도 전쟁의 주체로 포함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이는 ‘보다 나은 평화’(리델 하트),‘정치적 갈
등 해결’(퀸시 라이트)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클라우제비츠는 ‘나의 의
지를 적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2)
전쟁의 수단은 과거에는 무력을 포함한 군사력을 의미하였으나 모든 자원이 동원
되어 총력전이 수행되는 오늘날에는 그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 정치,경제,심리,기
술 및 외교수단까지 포함하고 있다.이를 종합해 보면 전쟁이란 ‘상호 대립하는 국가
또는 정치적 집단이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호 충돌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9)노병천, 손자병법 (서울:양서각,2005),p.19.
10)케네쓰 월츠,김광린 옮김, 인간ㆍ국가ㆍ전쟁 (서울:소나무,1988),pp.8-9.
11)이원희, 예비전력의 이론과 실제 (대전: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2015),p.4.
12)군사학연구회, 군사학 개론 (서울:플래닛미디어,2014),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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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의 원칙
국가간의 전쟁은 피아(彼我)국력의 물리적 역학작용에 의해 그 승패가 결정되고,
이 물리적 역학작용은 그 속에 내재하는 어떤 보편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통설이다.13)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원리란 전쟁의 원칙을 말하며,전쟁의 원칙은 전
쟁수행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즉 군사작전의 계획,준비 및 실시간에 적용되어야 할
지배적인 원리를 말한다.14)이러한 전쟁의 원칙은 숱한 불확실성 속에서 전쟁을 수
행해야 하는 지휘관들에게 마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준다.따라서 작전계획의
수립은 물론 작전 실시간에도 전쟁의 원칙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고 이를 적용하도
록 노력해야 한다.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원칙은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
한 노력의 일부분일 뿐 이를 무조건 적용만 한다고 해서 결코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론 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불확실성 속에서 국가의 운명을 거는
도박에 비유하면서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강조한
다.손자도 전쟁에 원칙은 있으나 그것을 전쟁에 적용하는 것은 군주와 장수의 지혜
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기정(寄正)일체,즉 전쟁에서 원칙과 변칙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서 사전에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
장해 주는 어떤 불변의 법칙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전쟁의 원칙도 시대별,국가별로 서
로 다르게 적용되어 왔다.따라서 유능한 장수는 전쟁의 원칙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국군은 <표 1>과 같이 통상 9~12개의 전쟁 원칙을 군사교리에 적용해 오고 있
다.2002년에 합참에서는 기존의 전쟁 원칙을 군사작전의 원칙으로 용어를 변경하였
고15),2012년부터 육군에서는 목표,공세,집중,기동,지휘통일,방호,기습,정보,사
기 등의 9가지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13)육군교육사령부, 군사이론 연구 (대전:육군교육사령부,1987),서언.
14)합동참모본부,합동교범 군사기본교리 (서울:합동참모본부,2002),pp.57-62.
15)위의 책,pp.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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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전쟁의 원칙 변천과정
연도 원 칙 비고
1963 목표 공세 집중 절약 기동 지휘
통일 경계 기습 간명 · · · 9
1965 목표 공격 집중 절약 기동 지휘
통일 경계 기습 간명 · · · 9
1983 목표 공세 집중 · 기동 통일 경계 기습 · 정보 창의 사기 10
1996 목표 공세 집중 · 기동 통일 경계 기습 간명 정보 창의 사기 11
1999 목표 공세 집중 절약 기동 통일 경계 기습 간명 정보 창의 사기 12
2002 목표 주도권 집중 통합 기동 지휘
통제 방호 · · 정보 · 사기 10
지속성
2012 목표 공세 집중 · 기동 지휘
통일 방호 기습 · 정보 · 사기 9
출처 :최용성, 전쟁의 원칙과 승패 (서울:양서각,2013),p.19.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전쟁의 원칙은 대략 7~10개 정도로서 미국,
일본,영국,중국,구소련,한국,북한 등 7개국 중 4개국 이상이 목표,공세,집중,기
동,기습,사기,협동 등 7가지의 전쟁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이들은 국가의 특성에
관계없이 강조되는 것으로서 이 요소들이 바로 군사행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Ⅲ. 정유재란의 발발과 칠천량해전
1. 정유재란의 발발과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체
임진왜란16)은 크게 초기전쟁기(1년),강화교섭기(4년),정유재란기(2년)의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임진왜란은 전쟁 발발 20일 만에 수도 한양
16)‘조일 전쟁’또는 ‘조중일 전쟁’,‘임진전쟁’,‘7년 전쟁’등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은 지금으로
부터 420여 년 전인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까지 7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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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령되고 두 달 만에 평양까지 함락되었으며,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을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조선은 초기 1년 동안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는데,육상전투에서는 일본군에 비해 부대 규모나 무기 등에
서 현저한 열세를 보이며 연패를 거듭하였지만 해전에서는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일본군이 서해를 통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였다.또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항전하였다.
임진년 초기 1년 동안 많은 인명 손실과 식량 부족 등으로 일본과 명나라 모두 전
쟁 지속 능력이 떨어지자 1593년부터 소규모 전투위주로 진행되어 소강상태를 유지
하였다.이때부터 중국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
며 4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화교섭을 시도하였지만 1596년 결국 모든 협상은 결렬되
기에 이르렀으며,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 봄에 다시 조선을 침입함으로써 정유
재란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강화교섭기간 동안 일본 수군은 해전을 회피하면서 자신
들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수군 병력의 증강,군선(軍
船)건조,조선 수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전술의 개발,이순신 제거를 위한 반간계
(反間計)17)의 시행 등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18)
그렇다면 조선의 전쟁준비 상황은 어떠했는가?1596년 11월 6일,황신의 비밀서계
가 도착하면서 일본의 재침 사실은 확실해졌다.이 서계는 일본의 침입목표가 전라
도라는 것과 수륙병진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기 때문에,조선의 조정에서는
재침에 대한 방어대책으로서 각 지역의 거점 산성을 중심으로 한 ‘청야전술(淸野戰
術)’19)과 수군을 이용한 ‘해로차단전술(海路遮斷戰術)’20)두 가지를 수립하였다.
17)‘적의 첩자를 이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계책’으로 36계 가운데 33번째 계책이다. 손자병법
제13편 <용간>편에도 첩자를 이용하는 5가지 방법(鄕間,內間,反間,死間,生間)가운데
하나로 반간을 들고 있다.
18)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서울:청어람 미디어,2004),pp.168-175;이민웅,“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배경과 원균함대의 패전경위”, 한국문화 제29집(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
소,2002),pp.150-155.
19)청야전술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
는 전술로 견벽청야 전술로도 지칭되었다.
20)해로차단전술은 수군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해상에서 격퇴하자는 적극적인 방안을
말한다.이를 위해 조정에서는 수군의 병력 충원,거제도의 점령 및 수비,그리고 인사 조
치 등 몇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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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 하에서 나타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조선 수
군 지휘부의 분열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정
두희의 “이순신 연구”에 의하면 난중일기 에서 원균에 대한 언급은 모두 84번이나
된다고 하며21),이순신은 임란 초기 2년여 동안 약 30회에 걸쳐 원균과의 불편한 관
계와 이에 대한 심정을 일기에 남겼다고 한다.22)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불편하고
갈등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일본의 재침에 대해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이순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두 가지 사건,즉 일본의 반간계23)와 ‘부산 왜영 방화사건24)’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반간계는 이순신으로 하여금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를 짓게 만들었고,왜영
방화사건에 대한 이순신의 장계는 조정에 허위보고를 한 것으로 판단되어 선조로 하
여금 이순신을 처벌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동안 이순신의 파직과 처벌은 원균의 모함 때문이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어 왔
으나 통제사를 원균으로 교체한 것은 당쟁의 일환으로 자기 측의 장수를 추천했던
자리다툼이라기보다는 일본의 반간계와 부산 왜영 방화사건이라는 미묘한 상황,그
리고 그릇된 정보로 원균을 과대평가했던 선조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결국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서울로 잡아들이
라는 명령을 내리고,원균을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이순신은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군량미 9,914섬,화약 4,000근,총통 300자루 등의 목록과 현품을 원균
에게 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이때가 2월 26일이었다.25)
21)정두희,“이순신 연구(임진년 이후 그의 전략과 정유재란에 관한 재검토)”, 한국군사사 논
문선집(임란ㆍ호란편) (국방군사연구소,1999),p.364.
22)이민웅,앞의 논문(2002),p.156.
23)조선 조정은 1597년 1월 12일에 가토가 150여 척을 이끌고 도해했다는 소식과 함께,‘좋은
기회를 놓쳐 매우 애석하다’는 고니시의 말을 기록한 황신의 서장을 받았다.결국 이 사건
은 선조의 의심을 폭발시켰고,이순신에 대한 처벌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이
민웅,앞의 논문(2002),pp.191-192.
24)‘부산 왜영 방화사건’은 병신년(1596년)12월 12일,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 왜영에서 적 가옥
1,000여 호,화약창고 2개,군량미 2만 6,000여 섬,적선 20여 척이 불탄 사건을 말한다.이
사건에 대해 부하들의 군공을 청하는 이순신의 장계가 1597년 1월 1일 조정에 도착하였고
바로 다음날인 1월 2일,이순신의 장계와는 달리 이 사건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부하 군관
정희원과 그의 심복인 수군 허수석의 작품이라는 이조좌랑 김신국의 보고서가 도착함으로
써 이순신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25)노병천,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 (서울:21세기 군사연구소,2005),pp.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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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칠천량해전의 전투경과
가. 원균의 출전회피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한 것은 1597년 2월 25일 전후로 추정된다.이때부터 본격적
인 해전이 시작되는 6월 중순까지 그의 행적과 조선 수군의 준비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전장상황은 이전과는 많
이 바뀌어 있었다.달라진 내용으로는 일본 수군 병력과 함선 수가 많이 증가되었고,
세끼부네(關船)위주의 소형군선으로 약하게 건조되었던 임진년 초기의 전선과는 달
리 대선인 아다케부네(安宅船)위주로 건조하여 약점이 많이 보완되었다.또한 전술
도 조선 수군과의 5년간에 걸친 해전 경험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법을 연구하고 이
를 역이용할 수 있도록 야간기습작전과 포위협격전술을 개발하였다.그리고 일본군
들은 부산포로 가는 해안지역에 많은 감시병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
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따라서 일본 수군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이 하던 예전
과는 달리 일본군들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26)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을 통하여 원균에게 일본군
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토록 지시하였다.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자
신이 과거 전라병사로 근무하면서 주장하던 것과 달리 수군이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서는 먼저 육군과 협력하여 안골포 등지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적의 함대가 조선 수
군을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수륙합동작전을 주장하였다.이러한 원
균의 주장은 과거 이순신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
율이나 비변사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오직 출전을 회피하기 위한 핑
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원균과 권율의 상반된 주장은 육군과 수군의 파워게임 또는 수군지휘부의 분열을
뜻하는 것이었다.이 양자의 이견에 대해 비변사는 현지의 작전지휘 총책임자는 어
디까지나 도원수,도체찰사로서 원균은 이들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고 선조에게 보고
하여 재가를 받기에 이르렀다.27)
26)노양규,“승리는 만들어지는가?”, 군사평론 제348호(대전:육군대학,2002),p.115;이민웅,
앞의 책(2004),pp.168-175;이재범,앞의 책(1996),pp.133-134를 재정리.
27)최석남, 구국의 명장 이순신 상ㆍ하,(서울:교학사,1992),pp.235-239.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299
나. 안골포ㆍ가덕도 해전
원균은 계속적으로 출전을 명령하는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독전에 못 이
겨 6월 18일에 대소 1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가덕도 앞바다로 출동하였다.28)이때
부터 작전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칠천량해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원균은 한산도를 출발하여 6월 19일 안골포와 가덕도 등지에서 소규모
해전을 치렀으나,안골포에서 일본 군선 2척을 빼앗은 것 이외에 별다른 소득도 없
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은 채 부산까지 진격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오고 말
았다.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된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면서 꾸
짖고 재출전을 명령했다.권율이 전투를 앞둔 장수인 원균을 장벌(杖罰)한 것은 그가
출동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라는 선조의 명령과 조정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 절영도 외양해전
조선 수군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으로 두 번째 출격을 하기에 이른다.그 시기
는 7월 4~5일경으로 추정된다.이번 출동에는 원균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도원수
등의 명령대로 세력을 나누어 다른 한쪽 함대가 출동하였다.29)7월 5일에 칠천도의
외줄포에 정박하였다가 7월 6일 정오에 외줄포를 출발,영등포를 통과하였으며 옥포
에서 밤을 지낸 후 7월 7일 새벽에 옥포를 출항하여 말곶으로 향했다.삼도수군은
말곶에서 부산 방향으로 향하는 도중 다대포에서 적선 8척을 발견하여 이를 공격했
다.적이 뭍으로 올라가 상륙 도주하였으므로 빈 배를 불태운 후 7월 7일 저녁에 절
영도 외양에 도착했다.3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 수군의 대함대가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밝은 대낮
에 이동을 했다는 점이다.일본군의 척후병들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일본군은 예전에 이순신이 은밀하게 이동하던 것에 달리,대낮에 함
대가 움직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부산을 공략하려는 것을 간파하였을 것
이다.따라서 안골포·웅포·가덕·김해·죽도 지역에 분산된 함선들을 모두 부산으로 집
결시키도록 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28) 선조실록 권89,선조 30년 6월 丁亥.
29)이민웅,앞의 책(2004),p.200.
30)이순신,노승석 옮김, 난중일기 (서울:도서출판 여해,2014),p.445.
학술논문_전쟁사
300 군사연구 제139집
절영도에는 이미 적선 1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절영도 외양에서 조선 함대는
전투를 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함대는 전투를 회피하였다.이 와중에 심한 파도와 조
류에 휩쓸려 전선 20여 척이 표류하여 대부분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다.유성룡은
이 절영도 외양해전에 대해 “왜적들은 우리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우리 배 가까
이 왔다가 갑자기 배회하면서 피하여 가기만 하고 교전하지 않았다.”31)고 기술하고
있다.
함대는 7월 7일 밤 귀로에 올라 가덕도 북안을 떠나 칠천량의 외줄포에 도착한 것은
7월 9일 새벽이었다.삼도수군은 절영도 외양해전에서 20척의 전선을 망실하고 사·
격군도 감소하여 전투력과 기동력은 더욱 약화되었다.원균의 승첩보고를 기다리던
도원수 권율은 패전의 급보를 받자 7월 11일 원균을 고성(곤양)으로 불러 올렸다.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
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
촉했다.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
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32)
라. 칠천량해전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회피하다가 곤장을 맞고 마지못해 출전한 원
균은 돌아오자 또다시 곤장을 맞은 것이다.원균은 자포자기한 나머지 홧김에 술을
퍼마시고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그러자 제장들은 원균을 볼 수도 없었고,삼도수군
의 이동계획이나 방어계획,또는 척후선이나 고지 감시병을 배치하여 적에 대한 경
계도 할 수 없었다.33)
경상우수사 배설은 그전부터 원균이 패전할 것이라고 생각해 여러 번 간(諫)했으며 이
날도 칠천도는 얕고 협소해서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 진을 치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전혀 듣지 않았다.배설은 자기가 거느린 배들과 은밀히 약속하고 엄중
히 경계하면서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가 적병이 내습하는 것을 보자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군사는 홀로 보전되었다.34)
31)유성룡,이재호 옮김, 징비록 (서울:역사의 아침,2007),p.292.
32)위의 책,p.293.
33)최석남,앞의 책(1992),pp.258-259.
34)유성룡,이재호 옮김,앞의 책(2007),pp.293-294.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01
유성룡의 징비록 에 의하면,배설은 삼도수군의 정박지인 칠천도의 외줄포가 적
의 수군 기지에 몹시 근접해 있어서 위험하므로 빨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고 원균에게 건의한 듯하다.그러나 원균의 입장으로서는 도원수에게 절영도 외양해
전에서 패전한 책임을 추궁 당했을 뿐 아니라,부산으로 재출격하라는 엄명을 받으
며 곤장까지 맞은 처지였으므로 함대를 더 이상 후퇴시킬 수는 없었다.
한편,적은 척후선,육지 정찰병,밀정 등을 삼도수군의 정박지인 외줄포에 보내어
삼도수군의 동태를 세밀히 정찰함과 동시에 절영도 외양해전에 참전했던 적선 1천
여 척을 외줄포를 공격하는 데 2시간이면 가능한 안골포,웅포에 집결시켰다.웅포,
안골포로부터 외줄포까지의 해상 직선거리는 20여km에 불과하다.연이어 매를 맞은
원균이 7월 14일,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칠천량해전은 시작되었다.원균함
대는 이날 새벽에 출항하여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후 일본 함대와 교전을 시도하였
으나 일본 함대는 회피하는 전술을 통해 원균함대를 지치게 만들었다.그러다가 원
균함대는 거센 풍랑에 휩쓸려 전열을 갖추지 못하고 일부 전선이 표류하게 되었다.
원균이 함대를 수습하여 겨우 회항하여 정박하기 위해 가덕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35)
이런 상황에서 가덕도36)에 물을 구하러 상륙했던 400명의 조선 수군은 일본 육군
의 매복공격을 받고 모두 살해되었다.가덕도에 일본군이 있다는 사실을 안 원균은
7월 15일 밤에 모든 병력을 칠천량으로 이동시키고 머물렀다.37)칠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써 임란 초기부터 우리 함대가 자주 정박하던 곳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38)일본군의 전선 1천여 척이 안골포,웅포에 집결 완
료한 것은 7월 15일 오전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통제사 원균과 함께 행동한 선전관
김식의 장계를 보면 적의 전투 척후 함대 5~6척이 7월 15일 저녁에 외줄포를 공격
하여 조선 전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16일 새벽 4시경에 적 수군은 외줄포에 정박한 우리 수군을 서너 겹으로 포위하여
공격했다.이틀 동안 계속된 악천후 속의 항해 때문에 피로와 기갈에 지쳤던 조선
35)이민웅,앞의 책(2004),p.201.
36)조경남의 난중잡록 에는 가덕도가 아니라 영등포에 상륙하여 인명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
와 있다.
37)도현신, 이순신의 조일전쟁 (경기 남양주:행복한 미래,2012),p.271.
38)이순신, 임진장초 선조 25년(1592)7월 15일 계본;이민웅,앞의 논문(2002),p.167에서 재
인용.
학술논문_전쟁사
302 군사연구 제139집
함대는 전투의 가장 기본원칙인 경계마저 제대로 하지 않아 일본 함대의 접근과 포
위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습격을 당한 것이었다.39)이렇게 시작된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그동안 준비한 포위협격전술과 등선백병전을 구사하며 조선 수군을 공
격하였다.
16일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오전 8시경에 칠천량 남단 근처에서 탈출하려는 조선
함대와 이를 막으려는 일본 함대간의 격전으로 전개되었다.여기서 조선 함대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탈출했는데 하나는 진해만 쪽으로 향했고,다른 하나는 거제도 해
안을 타고 서남쪽 한산도를 향해 나아갔다.40)조선 수군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과
싸우면서 한산도로 후퇴하기 위해 견내량의 북단 입구까지 갔으나 이곳은 이미 일본
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이를 돌파하지 못한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려 적진포
로 향했지만 이 곳 역시 일본군이 상륙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북방에 위치한
춘원포로 향했다.결국 삼도수군의 주력은 고성땅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그 곳에서
전멸하게 된다.통제사 원균도 부하들의 항전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독전하
지 못하고 육지에서 일본군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림 1> 칠천량해전 상황도
출처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서울:청아람 미디어,2004),p.206을 재정리.
39)조경남, 난중잡록 정유년(1597)7월 16일;이민웅,앞의 논문(2002),p.167에서 재인용.
40)이민웅,앞의 책(2004),p.204.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03
Ⅳ. 칠천량해전의 책임과 패인 분석
1. 패전의 결과 및 책임의 한계
1597년 7월에 실시된 칠천량해전은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을 통하여 조선 수군이 처
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참패를 당한 해전이었다.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비롯
해 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출전한 전선
중에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탈출한 12척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본 함대에게 파괴되
거나 탈취당하는 참패로 끝났다.41)이순신의 탁월한 지휘 하에 지난날 일본 수군들
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조선 수군은 하루아침에 지휘관도 전선도 없이 전멸하고
만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전은 조선,일본,명나라의 3개국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
게 된다.일본 수군 입장에서는 그동안 조선 수군에게 당했던 패배를 모두 설욕하는
쾌거였으며,이는 일본 수군 장수들이 칠천량해전에서만 조선 수군 160여 척을 탈취
하거나 불태웠고,그 외에 연안의 진포마다 남겨진 전선을 소각하였다는 보고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42)명나라는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이 패함으로써 해상에서
일본 수군을 막는 울타리가 없어지자 본토가 위협받게 되었다고 판단하여 수군 파병
을 결정하게 되었다.조선은 남해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으며,충청·경상·전라 3도가 수습하기 어려
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선조는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
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선조실록 은 임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패전 책임의 소재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삼도수군이 전멸한 데 대한 민중의 소리가 거세지
자 비변사는 부득이 삼도수군을 전멸시킨 원균을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선조
는 “원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이산해,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43)
라고 했다.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선조가 자신의 과오를 신하에게 전가한 것은 몹
41)앞의 책,p.205.
42)有馬成甫, 朝鮮役水軍史 (1942),p.236.(소서행장 등의 보고 문서);이민웅,앞의 책(2004),
p.210에서 재인용.
43) 선조실록 ,선조 31년 4월 병진.
학술논문_전쟁사
304 군사연구 제139집
시 온당치 않은 무책임한 비겁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정일은 “임란과 원균”을 통해 칠천량 패전의 책임은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조정에 있고,둘째는 당시의 수군 제장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44)최석남은
구국의 명장 이순신 에서 원균이 삼도수군을 전멸시킨 하수인이라면 삼도수군을
전멸시킨 원흉은 바로 전제권자인 왕 선조라고 주장한다.
선조실록 을 편찬한 편찬위원장인 총재관은 처음에는 서인 이항복이었으나 후에
는 북인 기자헌이었다.이항복이나 기자헌은 모두 이순신을 수사로 천거한 남인 유
성룡의 반대 당쟁인들이었다.이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균을 “탐학하기가 그 유례
가 없는 자이며 크게 군심(軍心)을 잃었다”라고 평했으며,이순신을 “충용하고 재략
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판정한 것은 매우 옳은 정론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권
자인 선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순신을 깎아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이순
신을 깎아내려야만 원균의 대죄를 덮어줄 수 있고,원균의 대죄를 덮어 주어야만 삼
도수군을 전멸시킨 원흉으로서의 자기 죄를 얼버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45)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때 칠천량해전의 책임은 보는 이에 따라 정도의 차
이가 있고 책임의 우선순위는 바뀔 수 있으나 전제권자인 선조,수륙작전을 총지휘
했던 도원수 권율,칠천량해전을 직접 지휘했던 원균에게 그 책임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2. 전쟁의 원칙 적용 측면에서의 패인 분석
앞에서 우리는 전쟁의 개념과 전쟁의 원칙에 대해 알아보았다.칠천량해전시 삼도
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전쟁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동일한 조선 수군으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였는
데,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강력한 함대로 편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칠천량해전
에서 왜 패배하였을까?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변화하는 전장상황 속에서
지휘관이 전쟁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4)이정일,“임란과 원균”, 충무공 이순신 연구논총 (서울:연경문화사,1991),p.307.
45)최석남,앞의 책(1992),p.278.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05
물론 현대에 적용하고 있는 전쟁의 원칙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임란 당시의 전투상
황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으나 역사적으로 전쟁은 지속되어
왔고 승패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분석해
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본고에서는 2012년부터 적용하고 있는 한국군
의 9가지 전쟁 원칙을 적용하고자 한다.46)
가. 목표의 원칙
전쟁의 원칙 중에서 목표의 원칙은 가장 기본적이며 지배적인 원칙으로서 모든 군사작
전은 명확하고 결정적이며,달성 가능한 목표에 지향되어야 한다.이 원칙이 중요한 것
은 작전목표를 명확히 설정함으로써 부대의 전역량과 노력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통제
하여 승리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작전계획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선조실록 과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구가들의 말을 종합하면,7·8월이 되면 장마
가 되어 육군의 작전이 어렵고,가을이 되면 파도가 심하여 수군이 진병할 수 없으니
전국의 군병을 총동원하여 땅이 굳은 4·5월에 수륙이 병진하여 일거에 부산의 적을
섬멸하자는 작전이다.그러나 도원수 권율은 이러한 원균의 ‘수륙합동작전’에 반대하
면서 그의 지휘 하에 있는 육군은 움직이지 않고 수군의 출전만을 독촉하였다.
손자병법 제8편(九變)에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도 승리를 위해 듣지 않을 경우도
있다(君命有所不受)는 말이 있다.47)원균은 조정의 간섭을 과감히 물리치지 못했고,
부산 출전에 장애가 되는 가덕도,안골포 등에 대한 수륙합동작전을 도원수 권율에
게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출전을 기피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볼 때 원균은 확고한 출전 목표를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조정
과 도원수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츨전했을 가능성이 높다.수륙합동작전이 수용되
지 않은 상황 하에서 조선 수군 단독으로 적 수군 격멸이냐 이동 차단이냐 등의 목
표를 재설정하고 전투를 수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 차단이라는 확고한 목표아래 일본으로부터의 병력 및 물자수송을 해상에
서 저지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46)각 전쟁의 원칙에 대한 설명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군사교범 및 연구자료 등을
통해 필자가 요약 재정리한 것이다.
47)노병천,앞의 책(2005),p.122.
학술논문_전쟁사
306 군사연구 제139집
나. 공세의 원칙(주도권 유지)
공세의 원칙이란 ‘적극적인 행동으로 전장 주도권을 확보하여 아군의 의지대로 전투를
이끄는 것’을 말한다.48)여기서 주도권이란 ‘전장에서 아군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여
아군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반 작전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말한다.49)
원균은 비록 용맹성은 있으나 전장을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 승리 여건을 조성하
는 전략과 용병술이 부족하였다.주도권을 가지고 전투력을 공세적으로 운용하기 위
해서는 전투해야 할 시간과 장소를 선정하고 이곳에 운용될 상대적 전투력을 적보다
강하게 편성해야 한다.앞의 전투 경과에서 보듯이 원균은 강한 적은 사전에 약화시
켜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전장상황을 읽고 전투를 나의 의지대로 이끌고 가는
지략이 부족하였다.
절영도 외양해전에서 보듯이,심한 파도와 조류,장거리 이동 때문에 조선 수군이
전투하기에 부적합한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치고 빠지는 전술,즉 ‘힘빼기 작
전’에 끌려감으로써 패배를 자초하였다.더욱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크고 견
고한 판옥선과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무기체계도 조총보다 우세한 총통을 탑
재하고 있지 않았던가?칠천량해전에서 이러한 강점을 살려 원거리에서부터 적 함
선을 격파하는 등 공세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경계 소홀로 기습을 당하여 적의 포
위협격전술과 등선백병전을 허용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마디로 칠천량해전은 주도권을 갖고 본인의 의지대로 전투를 공세적으로 이끌
어 가지 못하고 조정의 지시와 도원수 권율의 강압에 못 이겨 출전한 순간부터 적에
게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집중의 원칙
집중이란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세한 전투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50)전투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타지역에서 전투력을
절약해야 하고,집중은 기동수단에 의해 달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절약의 원칙’,‘기동
48)최용성, 젊은이를 위한 전쟁의 이해 (서울:양서각,2005),p.247.
49)최용성, 전쟁의 원칙과 승패 (서울:양서각,2013),p.39.
50)여기서 우세한 전투력이란 절대적인 우세가 아니라,상대적인 우세를 말하고,결정적인 시
간이란 적에게는 가장 불리하고 아군에게는 가장 유리한 시간을 의미하며,결정적인 장소
란 적에게 가장 취약하거나 적이 전투력을 집중하기 곤란한 지역을 말한다.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07
의 원칙’등 다른 전쟁의 원칙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전쟁의 원칙은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있고 서로 보완적인 부분도 많은 상호 불가
분의 관계에 있다.군이 전투수행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병력,장비,물자 등을 확
보하고 충분한 훈련을 실시하여야 한다.또한 전투력의 집중은 전쟁의 승패와도 직
결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전투력의 어떤 부분도 유병화(遊兵化)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순신이 원균과 통제사 임무를 교대할 때에 군량과 화기 등 군수품은 어느 정도
준비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지만,중요한 병력 충원 문제는 이순신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51)겨우 징발된 병력은 대부분 연해지역의 농어민
이었으므로 전투경험이 없었고,이 때문에 해전에 투입하려면 해상훈련이 필수적이
었다.52)이처럼 병력과 훈련이 부족한 상황 하에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정차원에서의 대책은 없었고 새로 부임한 원균에게도 시간은 부족하였던 것
이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영도 외양해전에서 사·격군의 감소는 전투력의 약화,
기동속도의 둔화로 이어져 전투력을 집중하는 데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쳐 칠천량해
전의 패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라. 기동의 원칙
기동이란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적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병력,화력,물자 등을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기동의 생명은 속도에 있으며,
속도는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승리를 획득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병법 에서도 병자귀속(兵者貴速)53)이라고 하여 전략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
로 속도를 강조하고 있다.원균의 함대가 패배한 원인 중의 하나는 함대 이동속도의
둔화문제를 들 수 있다.이는 기본적으로 배를 운용하는 사·격군의 수와 상호연관이
되는 부분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했을 때의 전선 1척당 사·격군은 대체로 190명이
51) 이충무공전서 권9제3장,pp.148-163.
52)이민웅,앞의 책(2004),p.197.
53) 손자병법 에서는 출기불의(出基不意)(상대가 뜻하지 않는 때에 나아간다),공기무비(攻基
無備)(방비하지 않는 곳으로 공격한다),병자귀속(兵者貴速)(전쟁에서는 속도가 중요하다)을
강조하면서 시간,공간,속도를 전략의 중요한 3요소라고 강조하고 있다.
학술논문_전쟁사
308 군사연구 제139집
었는데,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한 후 전선 1척당 사·격군은 94명으로 격감했다.규장
각 도서인 전라좌도 흥양현발포진진지(全羅左道興陽縣鉢浦鎭鎭誌) 에 따르면 전
선 1척당 사·격군의 수는 176명으로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54)
<표 2> 사ㆍ격군의 수
구 분 사군(射軍) 격군(格軍)=노군(櫓軍)
인 원
사부55)(활을 쏘는 군인) 15명
화포장(함포를 쏘는 군인) 10명
포수(조총을 쏘는 군인) 34명
타공(키를 잡는 군인) 9명
농로군(노를 젓는 군인) 108명
계 59명 117명
출처 :최석남, 구국의 명장 이순신 (서울:교학사,1992),pp.252-253.
위에서 보듯이 사군과 격군56)의 비율은 1:2이다.이와 같이 격군의 수가 사군의
수보다 두 배나 더 많은 것은 전선의 기동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격군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곧 함대 속도가 둔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군
들에게 활과 포를 쏘는 기술이 필요한 것처럼 격군들에게는 노를 젓는 기술이 필요
하고 이것이 숙련되어야 한다.따라서 사군과 격군이 서로 교대되어 임무를 수행한
다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호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원균함대의 병력들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급조된 부대로서,적은 수의 격군으로
부산포로 쉬지 않고 항해하였고 해상 기상상태의 불량으로 함대의 일부가 표류되었
으며 적에게 쫓기는 이틀 동안 노를 저었으니 기동력도 최저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마. 지휘통일의 원칙
지휘통일의 원칙은 ‘군사력을 운용함에 있어서 전투력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
여 노력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이를 위해서는 지휘의 통일,노력의 통
54)최석남,앞의 책(1992),pp.252-253.
55)사부는 활을 쏘아 적군을 사살하는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칠천량해전 기념공원 전시자료
에 의하면,함선의 크기에 따라 전선에는 18명,거북선에는 14명,정탐선에는 10명이 각각
배치되었다.
56)격군은 ‘노군’또는 ‘농노군’이라고 하며 노를 젓는 일을 맡았다.큰 판옥선에서는 5명이 조
를 이루어 하나의 노를 저었다.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09
일이 필요하다.지휘의 통일이란 단일 지휘관에 의한 일사분란한 지휘체제하에서 부대
의 모든 노력이 통합되어 공동목표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고,노력의 통일이란 서
로 다른 지휘계통에 있는 부대들 간에 상호 협조와 협력으로 공동목표를 향해 노력이
지향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57)
칠천량해전 패배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수군 지휘계통에 대한 문제점을 들
수 있다.임란 초기 작전지휘권의 특징은 수군작전시 조정에서는 수군지휘관에게 작
전권을 부여하지 않았고,중앙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수군작전은 육군지휘관의 작전
지휘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8)즉,임란시 조선 수군의 작전권은 통제사가 아
닌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속해 있었다.이것은 결국 해전을 모르는 문신들에게 수군
을 지휘할 권한이 있었음을 의미한다.이를 볼 때 칠천량해전 직전까지 계속된 도체
찰사와 도원수 등의 해로차단전술과 통제사의 수륙병진전술의 대립은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59)선조도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도원수가 지나치게 통제사의 출전을 독
촉했다고 지적하였지만,그 자신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수군의 군령권을 부여한 책
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 조선 수군지휘부의 치명적인 약점 중의 하나는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의 막료였던 제장들 간에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원균과
이순신 두 수장의 반목과 상쟁이 결코 두 수장의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합동작
전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며 막하 장령들에게까지 집단적
인 반목과 상쟁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60)지휘체계가 일원화되도록 하는 것이 통수
권자의 역할이라고 볼 때 상호 불화가 있는 이순신과 원균을 분리시키지 않은 선조
의 책임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다.그리고 정탁이 ‘위급한 시기에 장수를 바꿀 수 없
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조정은 정유재란 직전에 이순신을 원균으로 교체함
으로써 조선 수군지휘부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61)
원균은 운주당에서 전략전술을 논하던 이순신과 달리 이곳에 애첩을 두고 향략을
일삼음으로써 상하간 의사소통의 길을 차단하였고,전투상황 하에서 배설의 건전한
의견도 묵살하는 등 장졸들의 전투의지를 붕괴시키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이와 같
57)최용성,앞의 책(2005),p.266.
58)강정현,“임란시 수군활동과 지휘통제”, 해양전략 제96호 (1997),pp.74-83.
59)이민웅,앞의 책(2004),p.197.
60)이재범,앞의 책(1996),p.84.
61)이정일,앞의 책(1991),p.312.
학술논문_전쟁사
310 군사연구 제139집
이 운주당을 통한 상ㆍ하간 의견수렴 미실시,전투실시간 예하 지휘관의 건의 묵살
등은 효과적인 전투력 발휘를 제한하였다.62)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칠천량전투의 패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수
군통제사로서 전투를 직접 지휘했던 원균의 지휘책임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있다.통
제사 부임 이후 초기 이순신 부하들에 대한 위계질서 확립 및 화합문제,부산으로의
출전시기와 이동경로의 선정,이동간 기도비닉 유지와 경계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점,항해간 함대 전투력 보존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점,그리고 칠천량에서 습격을 받
은 이후 해전에서 함대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점 등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통제사
로서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바. 기습의 원칙
기습의 원칙이란 ‘적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장소,수단,방법으로 타격하는 것’이며,비
록 적이 알았더라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면 기습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기습은
적에게 심리적 마비와 공황을 유발시켜 전황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계
기를 만들어주며,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군의 의도를 적에게 노출하지 않고 기습을 달성하
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비밀과 속도는 기습을 낳는 양대 요인이라고 한다.63)그
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원균함대는 주간에 이동함으로써 적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97년 7월 5일 부산방향으로 이동시에도 관측이 용이한 주간에 협수로
를 통과함으로써 적에게 이동상황을 노출시키고 있었다.이는 기습의 선결조건인 방
호는 물론 기동,집중,공세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행동이다.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
의 이동시기와 이동로,이동방향에 대한 정보를 통해 조선 수군의 계획을 미리 예측
하고,칠천량에 정박 중이던 원균함대를 역으로 기습하였던 것이다.
62)일부 학자들은 오히려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막장들이 원균에 협조치 않아 원균을 고립시
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재범,앞의 책(1996),p.88.
63)카를 본 클라우제비츠,류제승 옮김,앞의 책(2007),p.174.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11
사. 사기의 원칙
사기란 ‘군 복무에 대한 군인의 정신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클라우제비츠는 “물질력이
칼집이라면 정신력은 칼날”이라고 하였다.지휘관은 평소 강인한 교육훈련과 효과적인
지휘통솔을 위하여 부대원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전투경험이 없는 부대나 작전에 실패
한 부대에게는 비교적 달성이 쉬운 임무를 부여하여 승리하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심어
주어야 한다.
도원수 권율의 지휘통솔 방법은 장졸들의 사기 고양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비록 왕과 조정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투를 앞둔 수군 최고의 지
휘관에게 곤장을 가하고 무조건 출전하라는 식의 군권을 행사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이렇게 장수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예하 병졸
들로부터 그 장수가 신뢰를 받지 못하도록 하면서 어떻게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도원수 권율의 강압적인 출전 지시를 받은 원균은 절영도 외양해전을 치르고 귀환
한 지 3일도 되지 않아 함대를 이끌고 다시 출동하였다.한번 출동했다가 돌아오면
보통 20~30일 간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이순신함대를 비롯한 당시 수군들의 일반적
인 현상이었다.이것은 전투원의 사기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격군들의 피로 해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64)
칠천량해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수군 중에 도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그 원인
은 강화교섭기간 동안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이 전염병 등으로 격감했고,새로 뽑은
병력은 전투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해전 훈련을 시킬 만한 시간도 부족하였기 때문
이다.65)주지하다시피 군기와 사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순신이 도망병에 대
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처벌했던 것은 그만큼 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어떠한 이유에서든 전투 중 도망병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이
를 막지 못한 지휘관의 책임이고 통솔력과도 관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정보의 원칙
정보는 모든 작전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
한다.정보의 획득과 운용은 지휘관의 책임이며,적시 적절한 정보는 건전한 판단과 결
64)제장명,“정유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4),p.89.
65)이민웅,앞의 책(2004),p.208.
학술논문_전쟁사
312 군사연구 제139집
심을 가능하게 한다.정보는 신속성과 정확성이 중요하며,잘못된 정보 앞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작전계획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순신은 자신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수집이 우선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탐후인(探候人,정보수집요원)과 탐후선(探候船,
척후선 겸 정보수집 전선)을 두어 활발하게 운용하였고,함대를 편성할 때는 꼭 척후
장(斥候將)이라는 직책을 활용하였다.또한 백성들을 정보요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
다.66)이순신이 수행한 유격전은 정탐병뿐 아니라 조선의 민초에게서 입수한 적의
동태를 기반으로 한 것이 많았다.최대한 정보를 활용하고 적을 공격할 때는 막강한
화력을 이용해 일시에 최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이순신 전술의 요체였다.67)
모든 지휘관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
려고 노력한다.적진으로 출전하면서 원균이 이를 무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쉽
게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탐후인,탐후선 등
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손자병법 에도 ‘지피지기 백전불태(知
彼知己百戰不殆)’68)라고 했는데 원균은 오히려 적이 관측하기 쉬운 주간에 해안선
가까이의 협수로를 통해서 이동함으로써 적에게 이동 정보를 제공하고 조선 수군의
작전기도를 완전히 노출시켜 버린 것이다.
자. 방호의 원칙(경계의 원칙)
경계는 ‘적의 기습을 방지하고 우군부대에 대한 적의 첩보수집활동을 거부함으로써 아
군의 전투력을 보존하고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취하는 제반활동’을 말한다.미
래전에서는 미래 전력을 움직이는 시스템을 방호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경계의 원칙보다
방호의 원칙이 더욱더 중요시 될 것이다.69)방호란 ‘적의 위협으로부터 인원,장비,시설,
정보 및 정보체계 등 아군의 전투력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
한 조직적인 활동’을 말한다.70)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전쟁의 기본원칙인 경계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던 것으
66)박경식,앞의 책(2005),pp.66-67.
67)김태훈, 이순신의 두 얼굴 (서울:도서출판 창해,2004),p.149.
68)노병천,앞의 책(2005),p.60.
69)이민룡,“미래의 전쟁양상과 전쟁원칙”, 군사논단 제52호(2007년 겨울),p.41.
70)최용성,앞의 책(2013),p.175.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13
로 판단된다.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가 “척후병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인가?”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말이다.71)원균은 척후를 두기는 고사
하고 적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출정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계속된 함대 이동으로 피로에 지친 수군들이 식수를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상륙했
으나 경계와 정찰을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매복 중인 일본군에게 400명이나 살해당
하였다.또한 7월 15일 칠천량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에도 전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경계마저 소홀히 하여 일본 군선들이 접근하여 포위할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습격을
당한 점 등을 살펴본다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방호대책이 우선적으
로 강구되어야 함을 잘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정유재란은 이미 예고된 전쟁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
에서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철저한 준비를 한 일본과 달리 선조와 조선 조정의
전쟁준비 부실,수군 지휘체계에 대한 문제점과 원균의 통솔력 부족 등이 패전의 주
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정유재란기 원균함대는 절영도 외양해전에서 일본 수군으로부터 농락을 당하고
가덕도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으며 칠천량전투에서 조선 수군 궤멸이라는 참패를 당
하였다.필자는 그 패인을 전쟁의 원칙이라는 군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이를 요
약하면,칠천량해전은 전쟁의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상하간 의사소통의 결
여 및 전략의 부재,적에 대한 정보수집 노력의 부족,주간이동으로 부산방면 공격기
도 노출,경계소홀로 인한 적의 기습 허용,군기 및 사기의 저하 등 총체적인 결함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역사의 평가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객관적 사료에 의해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분
하여 정확히 평가하여야 한다.역사에 대한 비평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를
71)박경식,앞의 책(2005),pp.68-69.
학술논문_전쟁사
314 군사연구 제139집
수 있기 때문이다.이순신과 원균은 오랜 기간 갈등을 겪어 왔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하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장수들임에는 틀
림이 없다.만약 차이가 있다면 인품과 리더십,전략 및 전술적 식견 그리고 공적의
크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측면에서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원균
이 세운 전공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그러나 그간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
다고 하더라도 조선 수군 전체를 개인의 결정적 과실과 통제의 잘못으로 전멸시킨
그 과오(過誤)는 이를 상쇄하고도 남기에 오늘날까지 지탄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접수일 :2015.3.9,심사완료일 :2015.4.27,게재확정일 :2015.5.14>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1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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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
군사연구 제139집 317
(Abstract)
Analysis on the Cause of Defeat in the
Chilcheonryang-Engagement
- Focused on the Application Aspects of the Principles of War -
Lee,Weonhee
Chilcheonryang-EngagementwasafiercebattlebetweentheChosunandthe
JapanesenavalforcesthattookplaceneartheChilcheonryang islandonJuly
16th,1597(the30thyearofKingSeonjo'sreign)bylunarcalendar.Itwasthe
onlybattlethattheChosunnavywasdefeated.Itevenputtoroutthebattle
duringtheImjinWar.Thispaperaimsatanalyzingthecauseofdefeatinthe
aspectofprinciplesofwaranddrawingalessonfrom it.
Thelackofcommunicationbetweenthecommanderandthesubordinateand
inappropriate application of the principles of war caused the defeat in
Chilcheonryang-Engagement.Therewerenostrategiesandanyeffortstogather
informationaboutthewar,neglectingtheguard'sinformationabouttheenemy
and its movements.The communication failures,day-time mobilization and
attacks,andnegligenceofsurveillanceledtothedefeatandrelaxationofmilitary
disciplineevencauseddemoralizationofthesoldiers.
Keywords:WeonGyun,LeeSun-sin,KingSeonjo,ImjinWar,Jeongyou-Jaeran,
Chilcheonryang-Engagement
첫댓글 우리 이배사 카페에 칠천량해전의 패인에 관한 분석자료가 하나도 안보이기에, 제가 잘아는 장달수님께 부탁하여 논문하나를 올려달라고 청하였고 ,이배사 카페에 올려봅니다.
격군님이 보시고 불필요하다 싶으면 삭제해도 됩니다.
칠천량해전의 패인 정독으로 잘 읽어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금토패문님 반갑습니다.정독하기가 쉽지않은 일인데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처음 뵙는 분 같습니다.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시간도 모자라고 힘들지만 배움에는 충만감이 생기고 재미있습니다.
공부하시는 분이 이배사에 오셔서 더욱 감사하고 환영합니다.ㅎ
네^^기쁜마음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하하.꾸부닥
잘 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우와...벽파진님도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ㅎ
잘보았습니다...
원균께서 "출전을 못하니 백의종군을 하겠나이다"라고 상소를 올리고
전사하셨을 경우 임금에게 忠과 나라에 대한 忠을 모두 이루셨을 터인데
임긍과 권율장군으로 부터 곤장을 맞으며 전선으로 나아간 것은
임금에게 충을 보이기 위함이였는데
불행히도 역사는 그 마음 그 충정을 무능이라 논하네....
한백록 장군님 잘지내시죠?
'천'카면 예천과 춘천이죠.ㅎ
6.2일날 진해 해군사관학교 학술회의 참관하러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