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중증장애인 휠체어에 실려 봉사활동 펼치는 서상복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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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걷지도 눕지도 못하고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훈훈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정상인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하다니 이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하지만 대구에 가면 믿기 어려운 이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대구문화예술공연봉사단 서상복 단장(45) | |
그가 이끄는 봉사단 회원은 30여명으로 국악이나 트로트가수, 에어로빅, 사물놀이, 재즈댄싱 사회자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회원들은 의외로 모두 정상인. 각자 맡은 분야가 다양하다 보니 레퍼토리 또한 다양해서 행사의 재미가 훨씬 더하다고 설명한다. 98년 12월에 창단하여 5년째 접어든 이 봉사단은 양로원이나 희망원, 재활원 등 위문공연과 체육행사, 축하연 등 지금까지 모두 120여 차례의 공연을 펼쳐왔다. 매일 도움만 받다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다는 그는 단장으로서 단체의 대소사를 꼼꼼하게 챙기며 정상인보다 더 열심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 20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도움을 받고 살아오면서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체험하고 깨달았다. 전국 어딜 가나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의 홍수 속에서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의 기막힌 현실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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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끔찍한 전신마비자. 목뼈가 부러지면서 그가 얻은 별칭이다. 1급 척수 장애인으로 밤하늘의 별도 열린 창문을 통해 누워서 보아야 하고 밝은 햇빛마저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바깥 구경을 할 때만 그에게 비춰진다. 1979년 9월 20일. 희망에서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그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날이다 | |
형님의 도움으로 철공소를 차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의 꿈에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그날도 그는 하루 일을 마감하는 시간에 쫓겨 급히 오토바이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을 줄이야.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오는 음주운전 승용차에 부딪쳐 몸은 공중을 날아 길가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정신이 들었을 땐 중환자실 병상이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뿐 팔 다리 머리 손 어느 한 곳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젊디젊은 21살 팔팔한 나이로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중벌이었다.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이던 찬란했던 날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무엇 하나 이루지도 못한 채 그는 비상을 꿈꾸는 날개마저 영영 떨어져 버렸다. 그 누구보다도 마음껏 활보하며 야인처럼 바깥세상을 살아온 그였기에 처참하게 망가진 현실이 견딜 수 없어 죽고 싶도록 괴로웠지만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전신마비자가 되고 말았다. 사고 나기 전부터 사귀어오던 결혼을 약속한 여인은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1년 동안 정성을 다 바쳐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회복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악화만 되니 더 이상 그 여인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서 떠나 줄 것을 간청했으나 여인은 울면서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여인은 결국 그의 곁을 떠났다. 억장이 무너지는 충격의 후유증으로 6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어두침침한 방에 누워 폐인처럼 살고 있을 때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형님의 소개로 아마추어 무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가 뭔가를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가 미치도록 그리웠고 혼자라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필사적으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시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 85년 5월 어느 날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방안에만 처박혀 지내다가 맞이한 6년만의 첫 외출이니 그것을 감히 어찌 잊으랴. 휠체어에 실려 방문을 빠져 나오는 순간 찬란한 햇빛이 그를 반겨 주었고 잃었던 미소를 되찾아 주었다. 다시 보는 저 시냇물, 얼마만인가! 살아 움직이는 잡초들, 엉키고 서로 보듬어 살아가는 들꽃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너무 기뻐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험장 맨 뒤에 누워 어렵게 시험을 봤으나 낙방하고 이듬해인 86년에 합격, 87년 6월 ‘HL5FJK’ 호출부호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개국하여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갈수 있었다. 척수장애인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아마추어 무선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새장의 새처럼 방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갇혀 지내야 했던 그가 바깥세상을 향한 첫 날갯짓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무선 설비를 조작하는 데 힘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단절 되었던 외부와 교신하면서 느끼는 희열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기에 충분했으며 대학 축제와 아마추어 가족 야유회, 송년의 밤 등을 참석하면서 차츰 사회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88년부터는 교통사고, 산불, 응급환자 발생의 무전연락을 받고 해당관서에 신고하는 한국 응급구조단 무선봉사대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번은 팔공산 동봉 정상에서 50대 아주머니가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져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을 마침 한 햄 회원이 보고 SOS를 요청해왔다. 이 극적인 장면은 당시 KBS 긴급 구조 시간에 방영되어 전국의 안방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는 날개가 비록 꺾였지만 날개 없이도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훨훨 날 수 있는 연습을 그렇게 시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오래전부터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를 해오던 여인이 그에게 결혼을 자청해 왔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95년 9월 많은 친지와 자원봉사자, 동료 장애인 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할 때 아내가 “내가 당신 한사람을 도와주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장애인을 도울 수 있겠어요. 앞으로 한국장애인봉사협회를 알차고 참된 협회로 키워나가며 다른 장애인 가정에 모범이 되는 가정을 함께 꾸려 나가요”라며 던진 말은 그를 감동 시켰고, 이들 부부는 지난 과거를 보상받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이들의 꿈결 같은 신혼생활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육체의 장애로 10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 믿으며 즐거웠던 일들만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합의 이혼을 했다. 그런 아픔과 절망을 딛고 그는 지금 대구지방 검찰청 학교폭력 예방 지도위원회 선도 강연위원으로서 대구 경북지역 중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또한 대구문화예술공연봉사단을 창단하고 군부대와 교도소, 양로원, 장애인단체, 대구 시민을 위한 음악회 등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위문공연을 하는 등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노력한 덕분에 그는 ‘98 좋은 한국인 대상’ 수상과 함께 ‘99봉사부문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그는 지금 대구시 동구 미곡동 218번지에서 어머니(76)와 단 둘이 살고 있다. 팔공산 기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고향지킴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그가 인터넷을 하고 컴퓨터로 한글을 친다. 두 손가락도 아니고 한 손가락도 아니고, 옆으로 누운 채 팔을 뻗어 주먹을 살짝 쥔 모습으로 오른쪽 엄지 마디 등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다. 일명 엄지등 타법.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는 또 하나 일을 벌여 대구경북(T,K) 연예기획 대표로도 뛰고 있다. 정상인도 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컴퓨터로 기획서 짜고 견적서 넣고 가서 지시만 하면 되니까 업무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다. T,K 연예기획 대표로 활동하면서 그는 팔공산 철학관 ‘백산운세정보’ ARS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말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까 역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인생상담이다.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다음이나 세이클럽에 카페를 만들어서 무료로 상담도 해주고 있다.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요즘 결혼해 살다가 혼자된 분들을 위한 재혼모임 사랑나눔회 단체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단체 미팅을 주선하여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해서 짝을 맺어 주는 일도 하고 있다. 무료로 운영하다 보니 장난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은 3만원씩 가입비를 받고 있다. 3개째 접어든 지금까지 확보한 회원은 모두 200여명으로 그중 7쌍이 교제 중에 있다. 회원이 새로 들어오면 자세한 프로필을 만들어서 전 회원들에게 나눠주고 다음카페나 세이클럽에 가서 올라온 내용 상담해주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그리고 대구문화예술 공연봉사단 단장으로서 공연 요청이 들어오면 참석 인원과 규모에 맞는 기획을 짜고 거기에 맞는 출연자 섭외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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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성격 자체가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이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체질이다 보니 끊임없이 뭔가 일을 벌이는 스타일. 몸을 움직이지 못해 누워서만 지내는 지금도 옛날 성격 그대로다. 행사를 맡으면 장소 섭외부터 마무리까지 그가 다 주관한다 | |
다치기 전에는 아무도 못 말리는 문제아였다고 털어놓는다.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었는데 다치고 나서 한번만 자신에게 건강한 기회를 주면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남은 평생을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아서 낫기 전에라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까 칭찬이 쏟아졌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까지 왔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루하루가 늘 부족함을 느낀단다. 그 아픈 몸에 툭하면 감기 몸살까지 겹쳤는데 91년부터 대외활동을 하면서 그나마 잔병치레를 덜하고 있다. 그가 사는 곳은 계단으로 올라가서 2층이다. 그러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까. 밖에 나갈 때는 씻고 먹고 입는 모든 것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는 빈 수저 하나도 들 수가 없다. 목이 말라도 누가 입속으로 넣어 주지 않으면 물 한모금도 스스로 마실 수가 없다. 그의 손발이 되어주는 사람은 7순의 어머니.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어머니가 두세 시간마다 누워있는 그의 자세를 바꿔 돌려 눕혀줘야 한다 하지만 그는 몸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별로 못 느낀다. 그런 어려움은 정신적으로 극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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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 대표로 활동하면서 대학축제나 지역 축제 등 큰 행사에 기획서나 견적서를 넣으면 가격경쟁력이나 내용면에서 다른 상대보다 훨씬 뛰어난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탈락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이 견디기 어렵다 | |
심지어 장애인의 날 행사까지도 그 날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그가 짜낸 기획서나 견적서가 경쟁사보다 분명 뛰어난데도 특별한 이유 없이 빠졌을 때 기운이 쭉 빠진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믿고 뭔가를 맡겨 줄때는 힘이 솟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일단은 자기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보람 있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너무 큰 것만 바라보지 말고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정상인들을 상담해 주면서 느낀 점은 “사람들이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하고, 너무 쉽게 쾌락 쪽으로 빠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밥 굶고 사는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이성문제, 물질적인 문제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푸념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5남매 중 넷째. 형님 집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2층 한쪽에 리프트가 있다. 몸이 불편한 그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실려 외출 하는 날을 위해 설치해 놓은 전용 휠체어 리프트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 없이 컴퓨터를 ‘나홀로 독학’으로 배워 자기 홈페이지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서 운영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의 주변에는 장애인이 없다. 같이 활동하는 사람은 모두 정상인이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어 주먹을 쥔 엄지 등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각박하고 혼탁한 세상을 밝고 훈훈하게 만드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방안에서 누워 전화로 컴퓨터로 인터넷으로 세상사람들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서상복 단장의 삶은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한줄기 희망이었다 몸은 비록 중증 장애인이지만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정상인들의 인생상담을 해주는 그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 기사는 피플코리아의 허락없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피플코리아에 실리는 모든 기사의 저작권은 오직 피플코리아에 있습니다. <피플코리아/김명수기자 www.people365.pe.kr> 2003년 03월 02일 09시 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