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폰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1.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하르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정리한 <기독교의 본질>은 그의 종교적 관점을 평이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르낙은 유대적 전통 속에서 살았지만 전통과의 차이를 통해 표현된 예수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에 대한 전체적인 특징을 “영혼의 내면적 자유와 쾌할함”이라고 정의내리며 예수가 세속적인 것의 베일을 가로질러 그 속을 들여다보았으며 살아있는 신의 모습을 도처에서 확인했다고 평가한다.
2. 예수의 삶과 행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복음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자료(복음서)들은 첫째로 우리에게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에수의 설교에 대한 생생한 상을 제공해주며, 둘째로 자신의 소명을 돌보는 생활의 시작을 보고해 주고, 셋째로는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었고 그 제자들이 전파했던 마음의 감명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저자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차이점을 부각시킨 후대의 학자들과는 다르게, 두 사람이 ‘윤리와 책임’의 문제,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에서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고 보았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유대교와 예수 사이에 놓인 연속과 차이에 대한 구별이다. 유대교와 예수는 기본적 교훈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유대교)는 하느님이 자신이 정해둔 규례에 따른 의식을 감시하는 폭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 그들은 그 종교로부터 하나의 현세적인 구조물을 만들어냈지만, 예수는 살아계신 하느님과 영혼의 고귀함을 선포했다.”
4. 저자가 파악한 예수 설교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도래’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내용은 전통적인 유대적 사고와 예수의 독창적 생각이 뒤섞여 있다. 저자는 예수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하느님 나라가 ‘따르는 표적’이 더불어 오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견해가 예수의 진정한 소유물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종말론적’ 가르침을 했다는 주장을 유대적 전승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 반대하며 “예수는 윤리적 능력의 불꽃이 담겨있는 것은 아무 것도 배제하지 않았고, 자기 민족의 이기적인 기대를 강화하는 것은 아무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저자가 이해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어떤 현실적인 국가와 제도의 변화가 아닌 신과 인간 영혼의 합일이었던 것이다. 즉 죄가 사함을 받고 비참이 극복됨으로 인해 인간 실존 전 영역에 침투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가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5. 또 다른 핵심적인 내용은 ‘신과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이다. 저자가 이해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심판의 날이 아니라 ‘내적인 도래’였다. 어떤 정신적 숭고함, 즉 마음 속 깊이 묻혀서 오직 마음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힘의 본성이었던 것이다. 즉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민족이나 국가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여만 하며 그에게 하느님 나라는 능력이자 목표가 되게 된다. “그 종교(기독교)는 현상으로 이루어진 온갖 다채로운 세계를 자기에게 굴복시키고 그 세계가 유일하게 참된 세계라고 자처하려 하면 그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 곧 영원한 것이 시작되고 시간적인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인간은 영원의 편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6. 예수 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더 나은 의와 사랑의 계명’으로 정리할 수 있는 윤리적 삶에 대한 강조였다. 예수가 제시한 윤리적 삶은 종교적 관습과 윤리와의 결합을 단절시키고, 윤리를 외형적인 실천 단계를 넘어서 근본적인 마음의 태도까지 심층적으로 접근했으며, 윤리적인 것을 이질적인 것, 심지어는 공적인 종교와의 연관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 그렇게 예수는 종교와 도덕을 결합시켰으며 그것의 핵심적 원리를 ‘겸손’이라 강조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지상에서 가능한, 겸손 가운데 살아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실천인 것이다.”
7. 저자는 예수의 중요한 가치를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틀 속에서 이해된 신을 좀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켰고 윤리화시켰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신의 폭력 대신에 형제애와 헌신을 중시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이웃에 대한 섬김 속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주어졌을 때 참다운 새로운 종교의 변화가 시작됨을 강조하였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8. 현재 예수에 대한 주류적 관점은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이든, 정통적인 신학 분야이든, 대부분 유대적·종말론적 시각에서 평가되고 있다. 예수를 유대적 배경에서 배제시켜 그의 윤리적, 개인적, 영혼적 가치를 중시하는 주장은 이제 지나치게 편중되고 자의적인 연구라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예수에 대한 연구나 관점 또한 ‘자의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양한 자료나 관점에서 접근할지라도, 결국 예수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예수는 없다. 우리가 예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의 완벽한 실체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삶에서 인간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요소라도 그것을 줄 수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런 시도를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종교적 주류에서는 밀려났지만, 예수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 하르낙의 신학은 여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르낙은 예수를 통해 올바른 행위와 내적인 영혼의 변화를 촉구하며, 그 과정을 위협하며 강요되는 현실의 왜곡된 권력에 대한 저항의 힘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 2,000여년을 살아낸 기독교의 생명력은 "예수의 삶에서 인간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