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명지 / 대전직할시시사편찬위원회 1994
2. '한밭'과 대전(大田)'의 어휘사적 풀이
(1) 지명어의 발생·변화와 사용습관
우리의 지명들은 일반적으로 고유지명이 있고 이 고유지명을 한자어(漢字語)식으로 개정한 한자(漢字)지명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한밭→대전(大田), 한절골→대사동(大寺洞), 돌다리→석교(石橋), 갓 골→변동(邊洞), 안 골→내동(內洞), 버드내→유등천(柳等川), 대실→죽곡(竹谷), 감나무골→시목리(枾木里), 숯골→탄동(炭洞), 못 골→지곡(池谷), 까치재→작현(鵲峴), 으능정이→은행동(銀杏洞),
한우물→대정동(大井洞), 잣뒤→성치(城峙), 가는골→세동(細洞), 활골→궁동(弓洞), 샘 골→천동(泉洞), 새탐말→신흥동(新興洞), 진 골→장동(長洞), 놋즌골→유동(鍮洞), 울바우→명암(鳴岩), 바리바우→발암(鉢岩), 검은들→흑석(黑石 : 琴坪), 배나무골→이목동(梨木洞),
용머리→용두동(龍頭洞)→, 닭재→계현(鷄峴), 가래울→추동(楸洞), 미리미→용촌(龍村), 느다리→판교(板橋), 소들→효평(孝坪), 가는내→세천(細川), 쑥내→애천(艾川), 말 뫼→마산(馬山洞), 숯뱅이→탄방(炭坊), 새 울→신탄(新灘), 쇠울→금탄(金灘), 새 골→조동(鳥洞), 남달미→목달동(木達洞), 방아미→침산동(砧山洞), 범골→호동(虎洞), 개대가리산성→견두산성(犬頭山城)
앞의 예와 같이 두 가지 지명이 존재할 경우에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먼저 발생하였고 한자지명(漢字地名)은 고유지명을 어느 시기엔가 뒤에 한자화(漢字化)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이전부터 우리말의 고유지명을 우리의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서 '한밭'이 보다 훨씬 오래 묵은 이 고장의 본 지명이며 '大田'은 후대에 발생한 한자(漢字) 지명인 것이다.
그러면 '한밭'과 '대전(大田)'은 어휘사적인 면에서 볼 때 어떤 대응관계가 잇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릇 '한밭'의 '한'에 대한 대응 표기의 한자(漢字)는 '대(大)'자이었다. 이처럼 '대(大)'자로 표기한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전통적인 관습임을 다음의 여러 가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 신라의 관직명을 「삼국사기」권 38 직관(職官(上))에 유리왕(儒理王) 9년에 관직을 17등급으로 나누어 제정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대사(大舍)'를 혹은 '한사(韓舍)'라고 호칭한다라고 하였다(十二曰大舍 或云韓舍)' 그럴뿐만 아니라 '대내마(大奈麻)'(十등급)가 '한내마(韓奈麻)'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신라 유리왕 9년이면 서기 32년에 해당하니 참으로 그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나) 지명 표기에서는 '한'의 대응 표기자가 오로지 '대(大)'임을 확인할 수 있다.
1) 옛지명에서
韓 山→大 山(三國史記 地理3 1145)
漢 山→大 山(大東地志 1864)
한여흘→大灘(龍飛御天歌 제14장, 제33장 1445)
2) 전래지명(傳來地名)에서
한 내→大 天 한 골→大 洞
한머리→大頭里 한다리내→大橋川
한 뫼→大 山 한 재→大 峙
한절골→大寺洞 한 밤 이→大栗里
한뿔이→大角里 한 갓 골→大枝洞
한 실→大 谷 한 티 골→大峙洞
한새골→大鳥谷 한 박 실→大朴里
한가래기→大加里 한 우 물→大井洞
위와같이 지명에서도 고유어 '한'은 '대(大)'로 대응 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1445) 권8 제67장에서 '한비'를 '대우(大雨)'라 하여 역시 '대(大)'가 고유어 '한'에 대응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난 옛학자들이 모두 한글이 태어나기 전의 옛날에 한자의 음을 차용하여 적은 '한(韓)', 한(漢), 간(干), 한(翰), 감(邯), 건( )'은 모두 '한'이며 이 '한'은 '大'의 뜻과 같다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ㄱ) 我國方言 謂種蔬者爲園頭干 漁採者爲漁夫干 造泡者爲豆腐干 大抵爲干故也(李 光 : 芝峯類說)
(ㄴ) 漢山卽黔舟山 方言稱大曰漢猶言大山(金井浩 : 大東地志 廣州沿革條, 1864)
(ㄷ) 東韓八自以爲大且多故謂大謂한者卽韓之稱也(作者未詳 : 東言考略 古談條)
(ㄹ) 한극학회발행 큰사전(1957)에는 '한' : 명사위에 붙어서 '큼'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가위, 한글, 한길(大路), 한가람(漢江), 한숨(大息)'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라) '밭'에 대한 대응 표기 한자
'밭'에 관한 한자의 대응 표기를 찾아보면 '대■ : 竹田(용비어천가 제 33장), '삼받개:삼전도(三田渡)'(용비어천가 제14장) 등과 같이 '밭=田'으로 대응 표기되어 나타난다. 이 밖에도 '받■다■리며:치전(治田)'(여씨향약(呂氏鄕約)), '받뎐:전(田)'(훈몽자회(訓蒙字會) 1527)와 같은 기록에 의거하여 '밭'을 '전(田)'으로 옮겨 적었음이 확인된다.
앞에서 우리는 '한'과 '밭'을 한자(漢字)로 옮겨 적은 글자가 '대(大)'와 '전(田)'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한밭'이란 전통적인 한자(漢字) 표기는' 대전(大田)'임에 틀림없다. 그 근거를 우리는 앞에서 여러 가지 옛 문헌에서 제시하였으니 더욱 확실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에 분포하여 있는 '한밭'이란 지명들이 한결 같이 '대전(大田)'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실례를 들면
·포천군(抱川郡) 청송면(靑松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상주군(尙州郡) 외서면(外書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단양군(丹陽郡) 어상천면(漁上川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등과 같이 '한밭'에 대한 한자지명(漢字地名)은 모두가 '대전(大田)'일 뿐이다.
3. 「한밭」과 「大田」의 형성발달(形成發達)
(1) 지명(地名)의 명명법(命名法)
'옥계동(玉溪洞)'은 옥계(玉溪)가 있기 때문에 그로 인(因)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삼천동(三川洞)'은 세내가 합하는 곳이기 때문에 명명(命名)된 지명이다. '석교동(石橋洞)'은 그 곳에 '돌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다. '유등천(柳等川(柳川))'은 그곳에 '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천명(川名)이다. 마찬가지로 '대전천(大田川)'은 '대전(大田)'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가운데나 아니면 변두리를 흐르는 내란 뜻으로 명명(命名)된 천명(川名)이다. 또한 고문헌(古文獻)에 나타나는 '대전장(大田場)·대전시(大田市)' 역시 '대전(大田)'이란 지명(地名)이 먼저 형성(形成)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시장명(市長名)이다.
(2) '대전(大田)'의 호칭(呼稱)
고유지명과 한자지명(漢字地名)이 공조(共存)할 때는 지금과는 달리 약 반세기 전까지만 하여도 주로 고유지명을 불렀다. 말하자면 '유등천(柳等川)'(혹은 유천(柳川))을 아직까지도 '버드내)<벌들내)라 부르고 있듯이 '대전천(大田川)'도 '한밭내'로 불렀을 것임에 틀림없다. '대전(大田)'을 아직도 '한밭'이라 부르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생각하여도 그렇다.
비록 표기지명(表記地名)으로는 '대전(大田)'이라 적었으되 실제적인 호칭은 '한밭'이라 하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바로 '대전천(大田川) 일운(一云) 관전천(官田川)'이다. 이 '관전천(官田川)'을 '관밭내'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한둘 들어보자. '한밭'(대전(大田))이라 불리는 지명이 전국에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바 다른 곳에 있는 '한밭'은 아직도 하나의 마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가령 청풍군(淸豊郡) 원남면(遠南面)의 '한밭(대전(大田))과 단양군(丹陽郡) 어상천면(漁上川面)의 '한밭'(대전(大田))은 하나의 마을로 거기에 '큰밭'이 있었기 때문에 '한밭, 한밭들, 대전(大田)'이라 불렀는데 1914년에 '대전리(大田里)'가 되었다. 또한 구충주군(舊忠州郡) 동양리(東良面)의 지역에도 '큰밭'이 있으므로 '한밭, 대전(大田, 황전(黃田)'이라 불렀는데 1914년에 역시 '대전리(大田里)'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밭'을 황전(黃田)'으로 표기하고 그것을 '황밭'이라 부른 예(例)와 '한밭'을 '관전(官田)'(관밭)이 당시에 구어(口語)로는 '한밭'이라 불렀던 사실을 증언(證言)하는 바라 하겠다.
(3) 가장 보편적으로 호칭된 지명 '한밭'(대전(大田))
이른바 시장명(市長名)은 가장 보편적으로 부르는 지명(地名)이다. 매 5일마다 서는 '닷새장'의 이름 그것은 가장 널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토착지명(土着地名)이다. 이 시장(市長)의 이름이 '대전장(大田場)'(한밭장) '대전시(大田市)'(한밭저자)이었던 것이니 이 고장의 전통지명적(傳統地名的)인 한자(漢字) '대전(大田(한밭))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지은 '이 고장 찬가'의 제목이 '대전팔경(大田八景)', 혹은 '대전팔경가(大田八景歌)'이었다. 그 중에도 특히 지명학(地名學)의 대가(大家)였던 지헌영(池憲英) 선생의 '아! 대전(大田)아'는 이 고장을 찬양한 현대시이다. 그는 여러 세대를 발암리(鉢岩里(지금의 선화동))에서 거주한 대전(大田) 토박이의 후손으로 그의 논문과 작품에서 오직 대전(大田)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한 고장의 전통지명(傳統地名)이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우리는 택호(宅號)를 참고할 수 잇다. 가령 '숲말(임리(林里))택(宅)'이란 말은 들었어도, '태전택(太田宅)'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어휘사적(語彙史的)인 면(面)에서 살펴본 결과로도 이 고장의 전통적인 고유지명은 '한밭'이며 그 한자지명은 '대전(大田)'임에 틀림없다.
4. '태전(太田)'의 발생이유(發生理由)
우리는 '태전(太田)'이 발생한 원인(原因)을 두 측면에서 우선 가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첫째 가설 : '대전(大田)'의 오기(誤記)일 가능성
지명(地名)을 기록(記錄)하는 과정에서 점하나를 더 찍거나 안 찍거나 혹은 덜 찍으므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오기(誤記)의 결과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실례를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이조실록(李朝實錄)에서 들어본다.
① 사비(泗 ) → ② 사자(泗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③ 비풍(比豊) → ④ 북풍(北豊(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소비포(所比浦) → 소북포(所北浦(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삼국사기 ①)
(삼국유사 ②)
(삼국사기 ③)
(세종실록 지리지 ④)
의 경우처럼 '대(大)'자(字)에 점하나를 더 찍으면 '견(犬)' 혹은 '태(太)'의 오기(誤記)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위의 옛 문헌의 예와 같이 부주의로 점하나를 더 찍으므로써 발생한 '대(大)→태(太)'의 오기(誤記)인가 아니면 반대로 덜찍으므로써 발생한 '태(太)→대(大)'의 오기(誤記)인가?
만일 1904년까지 '태전(太田)'으로 전해오다가 갑자기 '대전(大田)'이 나타났다면 '태(太)→대(大 : 大田)→(大田)의 오기(誤記)를 주장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1904년까지 '대전(大田)'이 전통적으로 상용되었고 또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태전(太田)'이 나타났기 때문에 '대전(大田)→태전(太田)'의 오기(誤記)로 봄이 타당한 것이다.
(2) 둘째 가설 : 일본식(日本式) 표기형(表記形)일 가능성
일인(日人)들은 '대(大)'와 '태(太)' [タイ]로 동일하게 발음한다. 따라서 일인(日人)들에게는 '대전(大田)'혹은 '태전(太田)'이 둘다 [タイテン]이기 때문에 어느 것으로 적어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보(官報)에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혼기(混記)되어 있다. 비록 1910년 이후의 관보(官報)에는 '태전(太田)'이 나타나지 않지만 보다 후대에 간행(刊行)된 일인9日人) 등호계태(藤戶計太)의 최근조선지리(最近朝鮮地理)에서 동일한 '한밭'의 의미인 '대전(大田)'을
大田(定州郡) (平安北道)
大田(大田郡) (忠淸南道)
大田(潭陽郡) (全羅北道)
와 같이 혼기(混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1914년 개정(改定)한 내용에는 '대전(大田)'(담양군(潭陽郡))으로 표기되었다.
또한 삼성당편(三省堂篇(1914))의 「조선지도(朝鮮地圖)」에도 엄연히 '태전(太田)'으로 표기되어 있다(앞에서 제시한 내용 참고). 이 모두가 이른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것으로 오보(誤報)된 1909년 뒤에 혼기(混記)된 사실들이다.
앞의 두 가설 중에서 필자는 둘째 가설이 보다 더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려 한다. 그 이유(理由)는 다음과 같다.
(가) 「태전(太田)」이 비롯된 시기가 을사망국조약(乙巳亡國條約)을 맺은 1905년의 바로 전해인 1904년이다. 이 시기(時期)는 벌써 국권(國權)이 거의 일인(日人)의 손에 넘어간 때이다. 따라서 일인(日人)들이 편의에 따라 일본식(日本式)으로 거리낌없이 적어도 무방한 혼란기였다는 점.
(나) 만일 전중시지조(田中市之助)가 대전발전지(大田發展志)에 기술(技術)한대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면 그것은 오히려 혼기(混記) 상태에 빠져 있는 지명표기(地名表記)를 전통지명(傳統地名)인 '대전(大田)'으로 복원(復元)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결정적인 이유(理由)를 다음 (다)에서 제시한다.
(다) 서기(西紀) 1914년에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第11號에 의거하여 전국(全國)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개편(改編)할 때 그 당시까지 사용하던(고종(高宗) 32년에 확정된) 지명을 그대로 전승(傳承)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에 따라서 고종(高宗) 32년(1895)의 대전리(大田里)가 '대전군(大田郡)'가 '대전면(大田面)'으로 승격된다. 여기서 전래지명(傳來地名)인 '대전(大田)'이 그대로 승계(承繼)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잇다.
(라) 경부선의 가설과 대전(大田)역이 설치된 이후부터 하나의 자연마을이었던 '한밭'(대전(大田))은 리(里)단위 행정지명으로 승격한(1895-*1872 지방지도 공주목 산내면 대전리)때로부터 오래지 않아 급격히 도시화(都市化)한 다. 그리고 이처럼 새로 형성된 도시(都市)인 대전(大田)은 일인(日人)에 이하여 개척되고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초기의 대전(大田)발전과 일인(日人)의 밀접한 관계에 유의할 필요가 잇다. 그리고 일인(日人)들이 이 곳을 적극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한 시기로부터 비로소 '태전(太田)'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태전(太田)'과 일인(日人)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마) 만일 잘못된 일부의 주장대로 '태전(太田)'을 일인(日人)의 어떤 목적 때문에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면 왜 '태백산맥(太白山脈)'은 개정하지 않은건가? 그리고 전국의 전통적인 한자지명(漢字地名)인 '공주(公州), 전주(全州), 광주(光州), 청주(淸州), 대구(大邱), 부산(釜山), 마산(馬山), 목포(木浦), 강릉(江陵), 수원(水原), 인천(仁川), 해주(海州), 평양(平壤)' 등 어느 한 곳도 바꾸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대전(大田)'만이 유일한 개정 대상이 되었던가? 그 맥을 자르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곳은 자를 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개정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부의 잘못된 주장대로 오랜 동안 사용하여 온 전통지명이 '태전(太田)'이었는데 일인(日人) 이등박문이 그 발전의 맥을 단절하기 위하여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면 서기 1945년의 광복과 동시에 왜색이 짙은 '대전(大田)'을 폐기하고 '태전(太田)'을 도로 찾는데 시민(市民)이 앞장섰을 것이다. 마치 '한양(漢陽)'·한성(漢城)'이라 부르던 수도명(首都名)을 일제(日帝)가 '경성(京城)'으로 바꾸어 불렀던 것으로 이해한 나머지 광복과 동시에 왜색지명인 '경성(京城)'을 버리고 '서울'을 택한 국민의 슬기처럼 만일 '한밭·대전(大田)'이 전통지명이 아니고 '태전(太田)'이 전통지명이었다면 '태전(太田)'이라 도로 부르기 운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저항없이 '한밭·대전(大田)'이 사용되었음은 곧 그것이 전통(傳統) 혹은 정통(正統))의 지명이었기 때문임을 증언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항일투쟁으로 옥고까지 치른 지헌영(池憲英(1971))의 대전(大田)을 예찬한 시(詩)의 제목도 '아! 대전(大田)아'이며, 역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 때 옥고를 치룬 김형기(金炯基(1970))의 대전(大田)을 찬미한 시(詩)의 제목도 '대전팔경가(大田八景歌)'이다. 위 두 사람은 대전(大田)을 지켜 온 항일투사이다. 그런데 만일 '대전(大田)'이 왜인의 지명이었다면 제일 먼저 앞장 서서 본래의 지명을 찾는 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大田)'을 시(詩)의 제목으로 삼은 것을 보면 그것이 전통(정통) 한자지명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3) 지명의 개정 문제
일 우리 고장의 옛 이름을 찾아서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바와 같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고유지명인 '한밭'이다. 한자 지명인 '대전(大田)'은 고유 지명인 '한밭'을 한자(漢字)로 옮겨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공식명이나 행정지명으로 공용되고 있진 않지만 아직도 이면에서는 '한밭식당, 한밭고등학교, 한밭중학교' 등과 같이 쓰이고 있으니 고유지명 '한밭'으로 되돌아가도 지명사적인 면에서나 어휘사적인 면에서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런 회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한자지명(漢字地名)으로 고유지명인 '한밭'에서 파생한 '대전(大田)'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것이 아마도 500년 이상(문헌에 나타나는 시기로부터 기산하여도)을 '한밭'과 공존하여 왔다. 근래에 와서는 '한밭'보다는 '대전(大田)'이 오히려 행정 지명으로 공식화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꾸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애로가 뒤따를 것이다. 문패로부터 호적, 주민등록, 등기부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대전(大田)'이 오히려 행정 지명으로 공식화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꾸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애로가 뒤따를 것이다. 문패로부터 호적, 주민등록, 등기부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대전(大田)'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만일 '대전(大田)'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꿈이 마땅하다면 '공주(公州)'는 '곰나루∼곰골'로, '전주(全州)'는 '비사벌(比斯伐)'로, '청주(淸州)'는 '살매(薩買)'로, '대구(大邱)'는 '달구벌(達丘伐)'로, '경주(慶州)'는 '서라벌(徐羅伐)'로, '부여(夫餘)'는 '소부리(所夫里)'로, '광주(光州)'는 '무진주(無珍州)=무돌골'로, '강릉(江陵)'은 '아비라(阿琵羅)'로, '수원(水原)'은 '매홀(買忽)'로, '인천(仁川)'은 '미추홀(彌鄒忽)'로 바꾸는 거국적인 고유지명의 되찾기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와 같은 우리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막대한 경제적 뒷받침과 인력 그리고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그것이 고유지명이든 한자지명이든 오랫동안 사용하여 온 전통지명(傳統地名)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이다. 연대(年代)가 올라갈수록 문화재(文化財)의 값어치는 상승한다. 지명(地名)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문화재(文化財)는 장구(長久)한 세월에 걸쳐 전해져 오면서 누대(累代)로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껏 간수(看守)한 조상들의 얼이 깃들어 있기에 그것은 훼손됨이 없이 고이 간직하고 길이 보호하여야 할 지존(至尊)한 존재인 것처럼 고지명(故地名) 역시 오랫동안 민족의 입에 회자(膾炙)되어 왔기에 그 속에는 민족혼(民族魂)이 대대(代代)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인(公認)할만한 특별한 사유(事由)가 없는 한(限) 정통지명(正統地名)은 물려 받은대로 보존(保存)하여 길이 후손(後孫)에게 물려 주어야 할 막중(莫重)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라 하겠다.
4. 마무리
지명(地名)은 소지명(小地名)으로부터 대지명(大地名)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독특한 뜻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런데 지명의 대소(大小)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지명은 보다 작은 단위(單位)로 격하(格下)되기도 하고, 어떤 지명은 보다 큰 단위로 승격(昇格)되기도 한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비풍군(比豊郡)이 회덕군(懷德郡)으로 변경된 이래로 군단위였던 이 지명은 군(郡)>현(縣)>면(面)>리(里)·동(洞)과 같이 그 지칭범위가 점점 축소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무명(無名)의 소지명(小地名)이었던 '대전(大田)'은 최근에 와서야 리>면>군>부>시>직할시와 같이 대도시의 유명한 지명으로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듯 하루가 다르게 번영하여가는 희망찬 '한밭'이 '대전(大田)'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고장의 전통지명인 '한밭'과 '대전(大田)'의 어원과 어의를 파악하고 나아가서 그 정통성을 재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이 고장의 한자지명(漢字地名)인 '대전(大田)'이 기록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서기 1530))이다. 이 문헌에 현재의 '대전(大田)'이 '대전천(大田川)'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책의 원본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6))이니 '대전(大田)'은 오히려 40여년이 나 더 앞선 시기에 나타난 사실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숙종 15년(1689)의 「초산일기」에 '대전(大田)'이 나타나며, 영조 27년(1751)의 「충주박씨별급문서(忠州博氏別給文書)」에도 '대전(大田)'이 나타난다. 그 뒤의 영조때(1757∼1765)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전(大田)'은 공주목(公州牧)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에 있었던 마을이었을 것인데 목척리(木尺里)만 나타나고 대전리(大田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의 대전(大田)은 아직 리(里)·동(洞)단위의 행정지명에도 못미치는 소지명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록년으로부터 270여년 두에 저술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3)」에 '대전천(大田川) 일운관전천(一云官田川)'이라 적혀 있고, 호서읍지(湖西邑誌(1871))의 공주목조(公州牧條)에 2일과 7일에 서는 시장명(市長名)으로 대전시(大田市)가 나타난다. 이때까지는 아직도 '대전(大田)'은 리동단위(里洞單位)의 행정지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명(市長名)이나 천명(川名)으로만 겨우 나타날 뿐이다.
고종 32년(1895)에 단행된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대전(大田)'은 비로소 회덕군 산내면의 '대전리(大田里)'란 리(里)단위 행정지명으로 등장한다.(*1872년 공주목 지도에 '산내면 대전리(大田里)'가 등장함.) 그 뒤로 '대전(大田)'은 1901년 경부선 의 대전역(大田驛)을 설치함에 따라 급격히 발전되어 1914년 일제의 군면폐합에 의하여 대전군(大田郡)이 설치되고 대전리(大田里)는 대전면(大田面)이 되었다. 이후로 1931년에 대전읍(大田邑)으로 격상하였고, 1932년 공주에서 도청이 이전된 뒤인 1935년에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었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이 고장의 한자지명(漢字地名)의 전통명이 '대전(大田)'이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을사망국조약을 맺은 1905년부터 관보에 느닷없이 '태전(太田)'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후에 관보(1906∼1909 사이)에도 여러번 '태전(太田)'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한편 관보(1908)의 부록에는 '태전(太田)'과 '대전(大田)'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도대체 이 '태전(太田)'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서 요약 규명하기로 하고, 우선 일차적으로 내릴 수 잇는 결론은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그 정통명이 '대전(大田)'일뿐 결코 '태전(太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아주 후대(1904)에 대전이란 전통명 곁에 '태전(太田)'이 잠시(7년동안) 관보란 문서에 제한적으로 나타났을 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고유지명과 한자지명을 아울러 사용하고 잇다.
'한밭'과 '대전(大田)', '곰나루'와 '웅진(熊津)', '한절골'과 '대사동(大寺洞)' 등이 바로 그 좋은 예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고장에 대한 두 지명이 존재할 경우에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먼저 발생하였고, 이 고유지명을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들이 이른바 한자지명(漢字地名)이다. 따라서 '한밭'이 '대전(大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발생한 우리 고장의 고유지명이라 하겠다. 그러면 발생 당시의 '한밭'은 '대전(大田)'의 어느 곳이었던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의 설명에 의거하면서 '대전천(大田川)'의 상하류역을 제외한 중앙부의 양천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동, 원동, 정동, 중동, 대흥동, 은행동 일원인 한밭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한밭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의 지명을 우리 조상들은 '한밭'이라 불렀던 것인데 이 고유지명을 표기할 때에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漢字를 차용하여 적었다. 그러면 '한밭'을 어떤 한자(漢字)로 표기하여 왔던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한'에 대한 대응기록을 찾아 보면 신라의 관직명인 「한내마(限奈麻) : 대내리(大奈麻), 한사(韓舍) : 대사(大舍)」를 비롯하여 지명표기에서도 「한내 : 대천(大川), 한골 : 대동(大洞), 한머리 : 대두리(大頭里), 한뿔이 : 대각리(大角里), 한다리내 : 대교리(大橋里), 한뫼 : 대산리(大山里), 한티골 : 대치동(大峙洞), 한재 : 대치(大峙), 한밤이 : 대율리(大栗里), 한절골 : 대사동(大寺洞)」등과 같이 오로지 '대(大)'자로만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밭'에 대한 대응표기를 찾아보면 「삼밭 : 마전(麻田), 대밭 : 죽전(竹田), 삼밭개 : 삼전도(三田渡), 진밭들 : 장전리(長田里), 꽃밭들 : 화전리(花田里), 갈밭 : 갈전(葛田)」등 모두가 한결같이 '전(田)'자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주 동량면의 '한밭', 청풍 원남면의 '한밭', 평북 정주의 '한밭' 등 전국에 수없이 분포하고 있는 모든 '한밭'이 '대전(大田)'으로만 표기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자지명의 전통표기법도 오로지 대전(大田)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 함」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하겠다.
그러면 서기 1904년부터 1909년까지의 관보에 나타나는 '태전(太田)'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자표기는 '대전(大田)'이었기 때문에 '태전(太田)'은 오히려 일본식 표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일인(日人)들의 발음으로는 '대(大)'와 '태(太)'가 동일음인 「タイ」인 것이다. 말하자면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동일한 발음인 고로 그네들은 어느 것으로 적어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보에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혼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등호계태의 저서인 「최신조선지리지」에서도 담양군의 대전면(大田面)을 태전면(太田面)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고장 '태전(大田)'은 태전(太田)'으로 적지 않고 '대전(大田)'으로 적었다. 그런가 하면 '태백산(太白山)'을 '대백산(大白山)'과 '태백산(太白山)'으로 혼기하고 있다. 이처럼 태전(太田)은 일인들의 발음으로 '대전(大田)'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임으로 혼용 표기한 아주 단명한(7년간) 표기지명일 뿐이다.
실로 우리 조상들이 남긴 지명개정법은 현명하였다.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라 두 지역을 통폐합할 경우에는 반드시 두 지역의 지명에서 한 자씩을 따다가 새로운 지명을 삼았다. 이와 같이 양쪽 지명의 일부를 따다가 새지명 만드는 법을 日人들이 그대로 습용하여 개정한 새지명이 '대전군+회덕군→대덕군, 대면+덕면→대덕면(담양군), 대치면+갈전면→대전면(댬양군)' 등이다. 이처럼 통폐합의 경우에 한하여 전래지명의 개정이 허용되는 것인데 그것도 전통지명의 명맥을 이어주는 범위 안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행정지명이 개정될 때는 반드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전통명인 '한밭'만이 시종일관하여 사용되어 왔고, 한자지명으로는 '대전(大田)'만이 「대전리(大田里), 대전면(大田面), 대전군(大田郡), 대전부(大田府), 대전시(大田市), 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와 같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어 왔을 뿐이다. 우리가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기록인 「고종실록」의 서기 1894년(갑오(甲午))조와 서기 1899년조에 나타나는 '대전(大田)'이 이 고장의 정통 한자지명(漢字地名)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의 정통지명은 오로지 '한밭'과 '대전(大田)'일 뿐임을 재삼 강조하여 마땅하다.
제4절 대전직할시 연혁
현재의 대전지방은 역사상 행정구역의 변천이 여러번 있었지만, 대체로 백제(百濟) 때에는우술군(雨述郡), 신라(新羅) 때에는 비풍군(比豊郡), 고려(高麗) 때에는 회덕군(懷德郡)·유성현(儒城縣)·덕진현(德津縣)·진잠현(鎭岑縣)의 지역이다.
우리나라 지방행정 제도의 실질적인 확립(確立)은 조선 태종(太宗)때부터인데, 태종(太宗) 13년(1413)에 전국을 8도로 정할 때 대전지역(大田地域)은 공주목(公州牧) 관할하(管轄下)의 회덕현(懷德縣)·진잠현(鎭岑縣)에 속했었다. 이러한 체제는 조선말엽까지 큰 변동없이 계속되어 오다가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懷德郡)·진잠군(鎭岑郡)의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고 식민정책이 시작되면서 1914년 3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우리나라 최대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는데, 그 때 회덕군(懷德郡), 진잠군(鎭岑郡)과 공주군(公州郡)의 일부를 합쳐서 대전군(大田郡)이 신설되었다. 대전군(大田郡) 밑에는 종래의 회덕군(懷德郡) 외남면(外南面) 지역(현 仁洞, 元洞, 中洞, 貞洞, 三省洞)을 중심으로 대전면(大田面)을 설정하고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있던 군청을 현재의 원동(元洞)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대전(大田)이 지방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1914년의 일이었고, 이 때부터 설치된 대전군(大田郡) 대전면(大田面) 지역이 현 대전시(大田市)의 모체(母體)가 된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고장의 유래를 이렇게 자세하게 잘 정리하신 일은 정말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