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점 / 정선례
지구를 촬영했다. 태양 반사광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인간이 만든 물건 중에 가장 멀리 날아간 물건이 우주선이다.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지구는 진공상태인 우주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색 푸른 별이다. 1990년 2월 거대한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을 지날 때 지구를 촬영했다고 한다. 지구에서 출발한 지 46년 된 보이저호는 초고령 우주 탐사선으로 지구에서 보내는 명령은 수신할 수 있지만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해 현재는 어떤 신호도 발신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인공위성 보이저 1호는 지구로 되돌아올 수 한다. 혼자 저 컴컴한 우주를 날아가고 있다. 우리의 작은 세상을 알 수 있도록 푸른 점 하나를 찍어 지구로 보내준 우주선이다. 이사진으로 지구인들이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존재란 걸 보여줬다.
칼 세이건은 천문학자이면서 작가다.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찍도록 의견을 냈다. 그 사진에 깊은 영감을 받아 우주 탐험에 관한 책 <<코스모스>>를 발간했다. 그의 우주 과학 도서는 전 세계 독자들을 끌어모았다. 지구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사람이 살고 있는 행성이다. 그가 우주와 지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왜 지구를 보호해야 하는지 책에 잘 나타나 있다.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서 우리는 보잘것없는 존재다. 우리의 터전인 이 자연이 산업화에 막무가내로 훼손되어 간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산자락의 깊은 골짜기라도 어김없이 두고 간 쓰레기가 버젓이 버려져 눈살이 찌부려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붉은 점이 아닌 푸른 점으로 찍힌 건 무엇을 의미할까? 다름 아닌 나무의 영향이다. 전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된 우리나라는 전국 방방곡곡에 어디를 가도 고개만 돌리면 산을 볼 수 있다. 대도시 서울에서도 남산,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이 서울 도심을 내려다본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중랑구 면목동 인근에도 용마산이 있어 자주 오른다.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 높고 낮은 산에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길 안내 표지판이 있어 편리하게 산책할 수 있다. 실로 고마운 환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 온 뒷날의 앞산은 산안개로 희뿌옇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떤 날은 지척에 있던 산을 안개가 그만 지워버리기도 한다. 이럴 때 숲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나무가 주체인 숲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그늘지고 습한 가장 낮은 곳에서 주로 서식하는 이끼를 비롯하여 온갖 벌레들과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깃들어 산다. 또한 숲은 산소를 내뿜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숨 쉬게 해준다고 하여 허파라고도 불린다. 요 며칠 전 운동 삼아 숲에 올랐다. 저편 산 중턱에 깔려있던 산안개가 구름처럼 자욱하게 뭉쳐 깔려 있다가 산 위로 흩어져 피어오르는 풍경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우리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각의 나무가 숲을 이뤘다. 너와 내가 더불어 우리가 되어 사회를 이룬다. 집 근처에 천관산자연휴양림과 사철 푸르고 큰 키를 자랑하는 편백숲 초당림이 있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발산해서 걷기를 즐겨하는 내 발걸음이 자주 가 닿는 곳이다. 어느덧 지인들은 나를 보러올 때는 편한 운동화를 신고 와야 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차 한잔 마시고 나면 무작정 그들을 이끌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숨겨놓은 길로 향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꾸준히 숲에 들어와 그 옛날 아메리카 어느 원주민 부족의 추장이었던 시애틀의 정신을 새긴다.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 이 대지, 내가 선 이 자리를 나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한다. 자기 아버지가 묻힌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들짐승보다 못한 자이다.’
엊그제는 휴양림 산책길을 7km쯤 걸었다. 강진과 장흥의 경계인 골투재에서 출발한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상록침엽수 비자나무 숲은 길에서부터 척박한 돌무더기 계곡을 타고 이어져 자라고 있다. 수령 200년은 족히 되었을 수령으로 또래 나무들과 사이의 간격으로 서 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이파리만 살짝 건드려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자 향이 그윽하게 뿜어져 주변에 퍼진다. 고난을 겪는 사람은 웬만한 일에는 삶의 면역력이 생긴다. 숲에 나무도 옹이가 있는 나무와 없는 나무를 보게 된다. 바위산, 동백나무 가지치기 옹이 박힌 나무들은 한겨울 헐벗은 채 서 있지만 북풍이 몰아쳐도 끄떡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초록빛 숲에 들어가서 바위에 멍하니 앉아 물 흐르는 소리와 그 물에 떨어져 다시 피어난 동백꽃을 바라보다 돌아온다. 우람한 몸통이 세월을 가늠할 수 없다. 나무뿌리를 문어발인 듯 척 내밀어 산책하는 이들의 디딤돌이 되어준다. 두 팔로 감싸 기대어 수피에 얼굴을 대면 냉기 어린 바람에도 단단한 나무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채우기에 급급 하느라 흔들려 본 사람만이 삶의 녹진함을 안다. 쉬지 않고 자라는 나무처럼 죽어라 앞만 보고 살아온 날들이다.
어느 순간순간 불쑥 솟구친 공허 어쩌지 못할 때면 나는 이곳을 찾는다. 숲의 신령스러운 노거수가 무언으로 ‘사소함에 얽매이지 말고 싹 비우고 현재를 살라고 이르는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아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하루라도 걷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허전하기까지 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해남 달마고도 4코스이다. 곳곳에 위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두 번째로는 강진 바스락 길의 일부 코스인 다산초당 오솔길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뿌리 길로 동백나무숲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숲길은 일행과 함께 가야 하지만 동백생태숲은 집에서도 걸어서 갈 수 있어 자주 찾는다. 이곳은 호남의 5대 명산 천관산 발치에 자연적으로 분포되어 국내 최대의 면적을 자랑한다. 애기동백꽃이 절정을 이루는 2~3월에는 날마다 팔각정에 올라 군락을 이뤄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 계곡을 바라본다. 동백꽃도 처연하게 아름답지만 사철 푸른 잎새와 매끄러운 몸피가 좋아 즐겨 찾는 곳이다. 동박새는 동백나무숲에서 산다. 개화 시기에는 꽃의 꿀을 빨아 먹으려고 여러 마리 동박새의 수다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지만 듣기에 싫지 않다. 익숙한 숲에 들어와 다양한 나무가 주는 상큼함을 누릴 수 있는 일상은 분명 축복이다.
청정한 숲에서 한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무성하게 뻗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품어주는 나무다. 푸른 산자락에 기대어 농사일과 글 쓰며 그저 안온하게 일생을 살고 싶다. 어제나 내일보다는 오늘에 집중하면 중심이 흔들리지 않겠지. 한겨울 몹시 추워 무표정하기만 한 겨울 숲도 굵은 빗줄기가 몇 번 쏟아지면 나무에 물기가 돌아 연두색 여린 잎이 새로 돋아나고 새들이 지저귀게 된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나무 심기 좋은 계절이 돌아온다. 올봄에는 또 어떤 나무를 심을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사방이 흙인 농촌에 사는 이들의 특권이다. 자연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다. 먼 훗날에도 붉은 점이 아닌 푸른 점으로 보이도록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을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우선순위에 둬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해 볼 일이다.
첫댓글 나무 많이 심어 가꾸시길 바랍니다.
자연에 묻혀 사는 행복 마음껏 누리시고요.
농촌도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하는 시기가 됐네요. 일하면서 글까지 빠지지 않고 쓰는 정선생님은 여장부세요.
장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제 황칠씨앗 뿌리고 왔습니다.
나무와 흙과 자연을 사랑하셔서 선생님의 감성이 이렇게 촉촉한가 봅니다.
선생님 댁 근처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숲도 가깝고 산책로도 많고요.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선생님이 멋지세요.
어, 지난 번에 남편이랑 다산초당 갔어요. 너무 가파른 곳에 있어서 힘들었어요. 하하.
백력사까지 가다 반도 못 가서 돌아왔어요. 크크크.
초당림, 달마고도길 4코스.
언젠가는 가고 말 거야. 마음에 심습니다.
철학자가 된 듯 자연과 우주를 넘나드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