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德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한 복 용
“수필 쓰는 법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때로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저는 누굴 가르칠 능력이 없어요”라며 사양하는데, 그것도 매우 난처한 일이다. 혹여 듣는 이에게 오만하게 보일까봐서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쓴 글을 내게 이메일로 보내고 수정해줬으면 한다. 어떤 때는 사양도 하고 어떤 때는 마지못해 다듬어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요’ 정도일 뿐이다. 어느 쪽이든 내 마음은 편치 못하다. 내 손을 거치면서 글쓴이의 생각이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글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늘 신경이 쓰인다. 사람마다 문장의 특징이 있기 마련인데, 내가 손을 보탬으로써 그 사람의 작품이 훼손되었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사양을 하면서 등단 초기의 나를 돌아다보게 된다. 나 역시 그때는 막연했다. 수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발을 내딛은 거였다. 희미한 실마리를 붙잡기까지 3년여쯤 걸렸다. ‘어쩌다’, ‘얼떨결에’ 수필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 길이 내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거듭 되묻게 되었다. 지난 11년 동안 나는 간헐적으로 나를 의심하고 자주 회의했다. 이렇듯 나는 내 글 한 편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남을 가르치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다. 아직 이렇다 할 상을 받은 적도 없고, 이름을 떨치지도 못했다. 어떤 작가는 책 한 권으로 유명해지고, 어떤 작가는 작품 한 편으로 유명한 문학상을 받는다. 또 어떤 작가는 발표하는 글마다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의 글을 보내는지 알 수가 없다. 궁금하지만 묻는 것도 솔직히 겁이 난다. 허나 프로 스포츠의 경우 꼭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골프 코치들은 대부분 유명한 골프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경력이 없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는 선수가 무사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정구간 함께 뛰면서 그의 페이스를 돕는다. 그런 것들이 수필에도 적용되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과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언젠가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수 조영남 씨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친구인 소설가 김한길 씨에게 글 잘 쓰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김한길 씨는 글 쓰는 법은 알려주지 않고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열심히 읽으라고 권했다.《호밀밭의 파수꾼》은 아주 단순한 내용을 훌륭하게 스토리텔링한 작품이었다. 김한길 씨가 조영남씨에게 가르침 대신 그 책을 추천한 것은 생각할수록 근사한 일이었다.
나는 내게 강의 요청이 올 때마다 다른 이를 소개하면서 ‘기초부터 잘 가르칠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불평을 듣는다.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 시시하다는 것이다. 기본기보다는 스승의 특별한 비밀병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문득, 수필 쓰는 기술을 전수한다는 이들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진다. 도제徒弟 수업을 하듯이 제자들을 가르칠까? 아니면 자신의 수공업적 경험을 아낌없이 모두 전수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을 품고 지내던 중 우연히 플라톤의 저서 《프로타고라스》를 선물 받았다. 얼마쯤 읽다가 한 문장을 보고 내 마음에 번개가 치는 것을 느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프로타고라스에게 말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덕은 개인이 가진 훌륭한 재능이다. 그러니까 나의 재능을 다른 이에게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만일 자네가 내게서 학문을 배운다면 자네는 그날부터 훨씬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걸세”라고 응수한다.
소크라테스의, 아니 플라톤의 주장은 모든 인간의 영혼이 가진 지식의 양은 똑같다는 것이고, 다만 개인에 따라 육체성이 그 영혼을 가리고 있으니 영혼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스스로 꺼낼 수 있도록 자극을 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가 개발한 것이 문답법이었다. 해법을 일러주는 게 아니라 물음을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하드디스크에 들어 있던 정보가 모니터에 출현하듯이 영혼 속에 숨어 있던 지식이 튀어나온다. 그 지식은 가르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위 선생들이 말하는 ‘내가 쌓거나 익힌 모든 것을 전수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고 만다.
나의 스승은 내가 쓴 글을 펼쳐 보이며 이 부분이 미심쩍다며 그곳에 손가락을 대고 연거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입으로 그 말이 튀어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그 문장에 있어야 할 말이 들어가면 그때서야 ‘옳거니!’ 하셨다. 제자의 미비한 점을 짚어주고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야말로 스승의 참사랑이 아닐까 싶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는 학문을 마치 상품처럼 파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소크라테스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이, 자신은 일평생 돈을 받고 지식을 판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가르칠 실력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내 영혼의 보잘 것 없는 양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남에게 파는 것에는 더더욱, 재주도 용기도 없다. 스무 해 가까이 꽃을 다뤘지만 재능기부 수준의 수업 외에 이렇다 할 강의를 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시장에서 사온 꽃을 디자인해서 적절한 가격을 받고 팔고는 있지만 내가 파는 것은 꽃이지 꽃을 디자인하는 기술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글 동네에서 사람들에게 내가 보여주는 것은 나의 글이지 글을 쓰는 기술은 아니다.
수필이 인격의 향훈에서 우러나오는 덕성의 문학이라면 가르쳐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남을 가르칠 엄두는 내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자문한다. 수필은 과연 가르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인가.
한 복 용 hayeul67@hanmail.net
2007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2007), 《인간과문학》 평론 공모 당선( 2016). 수필집 《우리는 모두 흘러가고 있다》, 《지중해의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