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인조 3)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피신하여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금천 강씨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였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다. 그러나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맺은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 자진하여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소현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소현세자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소현세자는 청군을 따라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함으로써 서양문물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하여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이 되면서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에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고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위는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조선 국왕의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그 위에 인조의 총비 소용 조씨(후에 귀인)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현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니 심양관에서 소현세자의 과도한 영리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소현세자가 인조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어 소현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소현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소현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같은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4월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소현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소용 조씨(후에 귀인)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세자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볼 때 살세자(殺世子)의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으며 공모 내지는 공동정법으로 조소용(후일 재론할것임)일 가는성이 높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고양시(서삼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