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 머리말 ♣
조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50여 개의 이미지를 통해
한강과 주변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게시물입니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틈틈이 수집 발췌한 자료인데 한 곳에 모아 보았습니다.
사진 촬영의 연대는 인터넷상에서 수집 과정에서
다소 설명이 잘 못 표기된 것이 있었지만 이미지와 관련된 시대적 배경과
문헌을 참고하여 발췌한 내용을 첨부했고, 원래의 설명에 충실했습니다
자료들은 오래된 사진이고 현 게시물의 이미지보다 작은 것은 크게,
큰 것은 작게하여 편집했는데 더 크게 할 수도 있으나 보정해도
선명도가 떨어지기에 동일한 크기로 했습니다.
편집 및 작성 과정에서 혹시라도 잘 못 표기된 부분이 있으면 양해 바라고,
지적해 주십시오.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게시물 성격이 긍정 또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그러한 의미를 배제했음을 양지하시기 바라며,
아울러 본 게시물은 다른 용도로 쓰임을 불허하며,혹시라도 저작권
과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글을 남겨주시면 그 부분을 삭제하겠습니다.
2014년 3월 27일
작성자 닉네임-한가람, 아이디- 네이버 nahasa1, 다음 nahasa
1800년대부터 1980년 까지의 한강의 모습인데
주제별이 아닌 년도 순으로...
한강이란 예전에는 서울의 남산 남쪽 기슭인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한강이라 하였고,
이곳의나루를 한강 도라 하였다.
오늘날 한강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시점에서부터
물줄기의 끝까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한강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네이버 백과>
조선시대(구한말) 용산 한강나루(漢江津)
1880년대 한강의 돛단배
1890년대 한강 용산나루터. 인부들이 발가벗은 모습
1890년대 한강 용산 원경, 사진은 한강 상류에서 온 뗏목의 모습.
?땟목의 절단 부분을 보니 톱이 아닌 도끼로 찍어서 통나무를
벌채(伐採)한 것으로보인다.
동작나루(銅雀津)
동작진(銅雀津) 현재의 동작구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 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년(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 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를 만들고 인릉(仁陵)에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흑석나루(黑石津)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이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이곳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광복 이후 이곳은 조정경기 훈련장으
로 되어 몇 척의 카누가 멋지게 물살을 가르고 오가기도 하였다.
1890년 구한말 대한제국시대, 여울 흘림 낚시꾼 가장 오래된 낚시꾼 사진
서울 한강의 황포돛배
1890년대 한강을 건너 다니는 황포 돛배 모습 -
자료: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황포돛배가 닿은 곳은 한강의 어디쯤인지?
한강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나룻배. (바로 위의 사진과 같은 장소)
마포나루 주변 풍경
마포나루 전경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 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1894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리학협회 회원
마포나루(麻浦津)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터로
일명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그리하여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1894년 마포나루에서 배를 기다리는 서양인들.
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오늘날 마포대교 북쪽 방면으로,
반대쪽에 있는 여의도는 예전에 백사장이었다.
백사장을 지나면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다.
도선장에는 주로 상선들이 운집했으며 나룻배는 사선(私船)이 많았다.
마포나루는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까지는 서해에서 뱃길이 열려있어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새우젓 각종 생물 및 건어물 등이
한강 하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뱃길을 따라 운송되었으며
서울의 대표적 해산물 집산지였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절두산(잠두봉)에서 천주교인 처형 장면. 출처:두산백과
1900년 경 서울 한강 도선
1900년대 한강의 나룻배. 오른편 위에 한강철교가 보인다 >
한강의 황포돛배
1903년 경인선, 경부선에 이어 군대를 동원한 경의선 부설공사.
경의선 부설권을 환수한 조선정부는
1899년 7월 박기종 등이 설립한 대한철도회사에 부설권을 넘겼다.
하지만 대한철도회사가 자금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9월에는 정부가 서북철도국을 설치해 직접 철도건설에 나섰다.
서북철도국도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1904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3월 경의선 부설을 강행했다.
결국 경의선 부설권도 일본에 강점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군인까지 동원하면서 속성공사를 강행했다.
경의선은 1905년 4월 3일부터 용산~신의주 사이에 직통 운전을 개시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시군용철도 감부철도 제2연대 보통철도 부설작업
조선철도의 가장 큰 특수성은 군사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관통하는 종관선인 경부·경의선은
긴박한 군사적 요청에 따라 속성으로 완성되었다.
조선철도의 군사적 성격 은 철도부설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은 경부선·경의선을 부설하면서 1마일당 6만 2천여원의 건설비로
320마일의 철도망을 완공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철도의 1마일당 평균 건설비가 16만원이 었던 점에 비춰볼 때
거의 공짜로 철도를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철도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수탈 당한 조선민중의 고통과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도 공사장은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에는 일본의 군율이 반포되었다.
철도 공사나 운행을 방해하는 자들은 잔인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1904년 용산에서 시행된 총살형이 대표적인 경우다.
1896년 9월 1일부터 ?1907년 12월 24일까지 한성부의 공문을 집대성한
"한성부래거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일본 헌병의 한국인 공개처형
오늘(9월 21일) 상오 10시경에 일본 병참사령부로부터
헌병 1명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상오 10시에 용산 부근에서
일본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한 한국인 김성삼·이춘근·안순서 등 3명을
총살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그 사실 여부를 탐문하고자 본부 소윤을 급파하여
앞서 가서 알아보게 하였던 바, 해당 범인 김성삼 등 세 사람은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어쩔 수가 없 었습니다. 후일의 폐단을 생각해서
병참사령관에게 반복해서 따진 결과, 동일 오후 4시경에 이르러서야
그들 군법이사의 통첩이 별지와 같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살펴보니 사건이 군사상 중요하다 하여 이처럼 막중한
형안(刑案)을 당초부터 조회하여 밝히지도 않고 또 입회자도 없 이
이와 같이 서둘러서 사형을 집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하여 우리 백성들이 원통함을 당할까
몹시 염려됩니다.” [네이버 백과]
공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한국인들.
식민통치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조선인들의 목숨은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1904년 마포나루
1904년 구한말, 서울 한강의 잉어 낚시꾼. 예나 지금이나
고기를 잡아 포즈를 취하는 태공의 환한 얼굴빛은 비슷하다.
1904년 낚시 중인 사람은 위와 동일인이며
뒤에 가족들로 보이는 두사람이 잡은 물고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사진 촬영자의 주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05년 뚝섬의 한강 상류에서 도착한 뗏목 모습
1930년 목재운반 압록강의 뗏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강의 뗏목은 아니지만...)
뗏목이 도착한 곳인가?..
한강에서 본 것과 비교는 안 될정도로 엄청나군요.
남한강 물길따라 서울까지 목재를 운반했던
강원 정선 아우라지 뗏목 재현(실제는 뗏목 길이에 따라 한척에
보통 3~4명의 떼꾼(사공)이 타고 운반한다)
서울에 도착한 뗏목들은 아주 비싼값에'떼돈'을 번다는 단어가
생겼을 정도였지만, 그들은 동강의거센 여울을 잘 넘어가야만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물을 암만 잘 타는 뗏사공일지라도 때로는 거센 여울목에서 뗏목이
뒤집히고 파손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실력이 좋았던 송점용이란 떼꾼은 물 좋을 때 3일만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스로 가장 자신있어 하는 신동 운치리 여울목에서
빠져죽고 말았다고 전한다.
그들은 목숨과 맞바꾸며 동강을 지나 유장히 흐르는 남한강물 위에서
애잖한 정선아리를 부르며 서울에 도착했다.
대게 아우라지를 떠난 뗏배는? 서울 마포나루까지 물길이 좋으면
5~7일만에 가기도 했는데, 물이 줄어들면 한 달까지 걸리기도 했다.
영월 선암마을 뗏목(뗏배) 두척이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 (최근 재현)
한강유역에 댐이 들어서기 전 물줄기가
남북으로 갈라진 한강의 경우 뗏목에 의한 목재 운반은 더욱 손쉬워서
태백산맥을 낀 인제지역의 목재는 북한강으로, 오대산을 낀 평창과
영월 등지의 목재는 남한강으로 운반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남한강 유역(충주댐으로 수몰된 곳)에 살며
영월 정선 등지에서 벌채한 곧은 목재를 여름철 큰물이 날 때
뗏목이 동내의 강을 통과 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어떤 때는 가뭄으로
동내(면 소재지 나루터) 아래 함암 여울목의 수심이 얕아 통과하지
못하게 되면 동내 앞의 강변에 여러날 동안 뗏목을 세워두기도 했다.
동내 앞의 강물은 평상시에도 수심은 깊지만 강폭과 강변이 넓고 길어
물의 흐름이 약한 곳이라 여러 척의 뗏목들이 접안하기 적합 할 정도라서
물길이 좋아질 때까지 뗏목을 정박해 놓고 떼꾼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비가내리고 물이 늘어날 때 쯤 되면 떼꾼들이 나타나서 뗏목을 정비하고
물길이 좋아지면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어린시절 여름철에 뗏목 여러개가 강변에 대 놓았을 때는 발가벗고
멱을 감으며 땟배(뗏목) 위는 수상의 놀이터로 아주 그만이기도 했다.
당시 실제의 뗏목의 폭과 길이는 재현한 뗏목의 것 보다 좀 더 넓고
길었지 않나 생각된다.
1966년에 팔당댐 공사가 착공되기 전까지는 뗏목이
서울을 향해 물길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뗏배를 자주 본 기억이 있다.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2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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