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윤복희
토요일입니다. 강원도 태백에서 사시는 할아버지의 생신날이기도 하고요. 휴대폰으로 피파(FIFA) 게임을 하던 예준이는 드디어 날두 형과 바페 형 캐릭터를 얻게 되어 오늘은 왠지 운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습니다.
‘엄마가 집에서 숙제를 하라고 태백에 가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을까? 서호랑 세현이를 불러서 라면파티를 해야겠다. 게임도 실컷 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의 날 되겠다.’
“예준아, 얼른 옷 갈아입어. 방과후학교에서 배웠던 마술, 할아버지 생신 선물로 멋지게 보여드려야지.”
그런데, 예준이의 행복한 예감은 슬프게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엄마, 학원 숙제가 잔뜩 쌓였는데, 집에서 숙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 생신인데.”
엄마의 대꾸에 환상의 라면파티 꿈이 와장창 무너지고 예준이는 하는 수없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이때 동생 예린이가 왼쪽 입 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오늘 집에서 자유를 만끽하려던 계획이 틀어져서 열 받은 건 아니지?”
예린이는 예준이의 속을 긁어놓고 얼른 제 방으로 가버렸습니다.
“엄마, 태백까지 네 시간이나 걸리잖아. 피파게임 하면서 가면 안 될까?”
“너 엄마랑 약속한 거 벌써 잊었어? 할아버지 댁에 갈 때는 핸드폰을 안 가지고 가기로 했잖아. 그래서 태백에선 숙제도 안 시키잖아.”
“엄마, 요즘 세상에 시골집에 가서 생일파티 하는 집이 어디 있어?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를 서울에 모셔다가 호텔 뷔페나 가지. 할아버지도 그걸 좋아하실 걸. 핑계에 서울구경도 하시고.”
“예준이 너 할아버지한테 그러면 안 된다. 지금부터 조용히 아빠 차로 간다. 실시!”
아빠의 한마디에 예준이는 하는 수 없이 시동을 걸어놓은 차에 올라탔고, 기분이 상한 티를 잔뜩 내면서 바깥 풍경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숙제가 없는 게 어디야?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거지. 이게 인생의 법칙이지.’
예준이는 기분이 나빴지만 대들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아빠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치악휴게소에 들려 소떡소떡이랑 초코우유를 사주셨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할아버지 댁 앞, 차에서 내린 예린이는 열린 대문 안으로 달려가며 외쳤습니다. 예준이는 속이 상했지만 마지못해 할아버지 댁으로 걸어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귀욤 뽀짝이들 왔어요!”
“우리 예준이랑 예린이 왔어? 어디 보자. 예준이는 키가 더 큰 것 같고, 예린이는 더 예뻐졌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TV를 보시다가 예준이네 목소리를 듣고 얼른 나와 반겨주었습니다.
잠시 후, 마루에 둘러앉아 할머니가 만든 식혜와 감자떡을 먹었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린이가 예준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오빠, 이럴 줄 알았으면 뽀삐분식에서 초코탕후루도 몇 개 더 먹고 오는 건데.”
“아침에 그렇게 놀리더니, 즐기세요. 강예린 어린이, 감자떡 맛있게 드시고요.”
티격태격하는 남매의 허벅지를 꾹 누르며 엄마가 말했습니다.
“예준아, 예린아. 준비한 거 보여드려야지. 아버님, 어머님, 기대하세요.”
예준이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어났습니다. 기왕 할아버지댁에 왔으니 할아버지랑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할아버지 생일 마술쇼를 시작합니다.”
예준이는 동전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준 뒤, 왼손으로 동전을 움켜쥐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할아버지, ‘후우’ 하고 크게 불어보세요.”
할아버지는 입을 잔뜩 오므렸다가 ‘후우’ 하고 예준이가 주문한 대로 부셨습니다. 뜸을 들이던 예준이는 동전을 쥐고 있던 손을 펴 손바닥을 보여주었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관객들은 “와! 와!” 환호를 지르며 손뼉을 쳤습니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였고, 이제 진짜 마술 나갑니다. 엄마, 손수건 좀.”
엄마의 손수건을 건네받은 예준이는 그걸 꼬깃꼬깃 접더니 이번엔 오른손에 넣고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족들의 콧기름을 손등에 바르기 시작했고, 시간을 한껏 끌다가 양손으로 손수건을 이리저리 옮기며 움직이더니 어느덧 한 송이 장미꽃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프러포즈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생일 축하해요!”
할아버지는 눈물까지 보이시며 예준이를 힘껏 안아주었습니다. 다음 차례로 예린이의 쇼가 시작됩니다. 원피스 자락을 잡고 한참 뱅글뱅글 돌던 예린이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립니다. 모두의 시선이 예린이의 주머니로 향합니다.
“짠!”
예린이가 꺼내든 건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만든 하트였습니다.
‘저걸 쇼라고 보여주는 거야? 강예린, 진짜 유치해.’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예준이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예린이를 따라 하트를 만들어 하트 키스를 날렸습니다. 남매의 쇼가 끝나고, 엄마와 아빠는 백화점에서 산 베레모와 스카프와 함께 하얀 봉투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고, 생일축하 파티가 열렸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먹기가 싫던 할머니의 곤드레 밥도 어쩐지 구수하게 느껴졌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게임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제일 중요한 선물이 또 있어요. 오늘 애들 여기서 재우려고요.”
예준이의 하늘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게임은커녕 이 산골짜기에서 하루를 보내라니….
“엄마, 무슨 소리야?”
엄마는 재빠르게 예준이의 입을 틀어막더니 “애들도 좋다네요.”라며 웃었습니다.
예준이는 뜻밖에 엄마의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화가 났습니다. 핸드폰이 없어 게임도 할 수 없는데 이 시골에서 뭘 하란 말인가. 빨리 집으로 가서 게임을 할 생각으로 참고 있는데. 예준이는 옆에 있는 예린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강예린, 너 가만히 있을 거야? 뭐라도 해봐!”
하지만 예린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몰라? 난 여기서 자는 거 좋아!”
휴대폰을 서울 집에 두고 온 예준이는 게임도 할 수 없고, 유튜브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이 컸습니다.
“우리 소화도 시킬 겸 동네 산책이나 할까?”
엄마와 아빠가 떠나고 나자 할아버지가 제안했습니다. 예준이네 가족은 매번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산책을 했던 기억이 없었습니다.
예준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서서 나무들이 자라는 숲길을 걸었습니다. 예준이의 마음도 모르고 예린이는 할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며 앞서 걸어갔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숲에는 정말 많은 신기한 들꽃이랑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새들이 울음소리도 날아오고.
‘이렇게 숲길을 걷는 것도 나쁘진 않네. 휴대폰이 없으니까 근질근질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던 예준에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 이 소리는 뭐지? 파도 소리 같은데?’
“할아버지,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근처에 바다가 있나 봐요?”
“아니, 바다는 삼척에나 가야 있지. 고것 참 신기하네. 우리 손자한테 초능력이라도 생겼나?”
“들어 보세요. ‘쏴아아, 쏴아아’ 이건 분명히 파도 소리라고요.”
고개를 갸우뚱하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넵니다.
“여보, 혹시 얘가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를 파도 소리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것도 같고…. 예준이가 확실히 감성적이라니까요.”
예준이는 그 신비로운 파도 소리에 푹 빠졌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바닷가에 온 것만 같습니다. 그 소리는 여름 바다보다 겨울 바다에서 나는 것 같았습니다. 예준이의 진지한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며, 그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 연화산 근처엔 대나무가 정말 많단다. 대나무 사이로 샛바람이 불어오면 줄기와 잎이 어우러져 신기한 소리가 나거든. 샛바람은 동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니까 산골짜기 파도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저 소리를 들으면 우리 어머니가 생각 나. 한평생 대나무 돗자리와 그릇을 만들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셨거든.”
어머니가 생각나시는지 할아버지 목소리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를 시집오기 전에 살았다는 삼척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준이네는 하늘까지 곧게 뻗은 대나무들이 줄지어 선 대나무 숲에서 한 동안 머물렀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가 흔들리면서 댓잎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가족들이랑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가파도에 갔을 때 들었던 파도 소리 같았습니다.
한참 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예준이가 말했습니다.
“강예린, 너 빨리 서울 가고 싶지 않냐?”
“오빠도 그 생각했어? 나도 그랬는데.”
“내일 아빠가 데리러 오시겠지?”
“그럴 거야. 그렇지만 하룻밤쯤 할머니랑 자는 것도 나쁘진 않아.”
예린이는 웃는 얼굴로 얘기했지만 예준이는 빨리 서울에 가고 싶었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으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생일잔치를 핑계로 할머니 댁에 두고 간 엄마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심심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산책하면서 들었던 파도 소리도 다 시시해졌습니다.
“엄마가 편지를 주고 갔어. 한 번 읽어볼래?”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셔서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예준이는 궁금해서 엄마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가끔 말은 잘 안 듣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우리 아들, 강예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예준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심하게 아팠어. 엄마, 아빠는 너를 잃는 줄 알고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울었지. 10개월도 되지 않은 우리 조그만 아들에게 혈액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생겼대. 의사 선생님은 골수라는 걸 이식해야 한다고 하였고. 나와 아빠 그리고 모든 가족의 피를 검사했는데 할아버지만 너에게 그걸 줄 수 있었어. 그때 할아버지도 넘어져서 크게 다치셨는데, 아무런 망설임 없이 너에게 골수를 주셨어. 예준이만 살릴 수 있다면 본인은 돌아가셔도 좋다면서. 이제, 엄마가 거기에 있으라고 한 이유 알겠지? 이제 예준이도 다 컸으니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할아버지 많이 안아드리고, 할머니랑 예린이도 잘 챙겨줘. 사랑한다. 우리 아들! |
예준이는 편지를 읽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오빠가 울어요!”
깜짝 놀란 예린이가 크게 부르는 소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달음에 방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예준이는 할아버지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아이고. 이 다 큰 녀석이 왜 이러니? 예준아!”
할아버지는 처음엔 예준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셨지만, 오랫동안 예준이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저는 벌써…. 엉엉엉.”
“엄마가 알려주었구나? 우리 예준이가 이렇게 건강해졌으니 난 아주 행복해.”
“할아버지도 많이 아팠을 텐데요?”
“하나도 안 아팠어. 우리 예준이만 살릴 수 있다면, 난 더 한 것도 했을 걸.”
할아버지는 예준이의 뺨을 꼬집으며 웃었습니다. 그때 파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나무숲에서 나는 파도 소리는 예준이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예준아, 너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께 효도해야 돼!”
파도 소리는 조용히 예준이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자주 놀러 올게요! 귀찮을 만큼.”
“나도 같이 올래요!”
예린이까지 덩달아 말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이 활짝 폈습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밤이 되어 산바람이 대나무 숲으로 불어와 내는 파도 소리. 그리고 할아버지 가슴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파도 소리.
예준이는 그 소리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할아버지를 꼬옥 안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