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매일 바꿔서 드는 여자 / 이영숙
책상 앞에 색색의 가방이 나란히 줄을 서고 있다. 화요일에 들고 다니는 가방은 색깔이 초록색이다. 물감과 화선지, 붓이 들어 있다. 이 가방은 나를 화가의 길로 이끈다. 옆에 놓인 갈색 가방은 수요일용이다. 하모니카와 악보를 담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가방에는 수를 놓기 위한 물품이 들어있다. 순백의 천 위에 홍실, 청실로 봄의 꽃밭을 한 뜸씩 수를 놓을 소품들이 가득차 있다. 햇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바늘을 옮겨간다. 어느새 어지러운 마음이 가라앉은 내가 수틀에 담긴다. 군대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놓여있는 가방을 보면 나의 바쁜 일주일이 스쳐 지나간다.이 모든 가방들은 나를 행복한 세상으로 이끄는 꿈의 보따리다.
일주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사용법은 다르다. 나는 바쁘게 산다. 월요일은 특별한 일정이 없다. 한 주 동안의 일정을 살피며 강의 자료를 만들거나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여유가 있는 날이다. 오후에는 가까운 송화산을 오르거나 보문 들녘을 거닌다. 나도 휴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자위하며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둑길과 논두렁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어머! 너는 어쩜 이렇게 예쁘니? 색깔은 어찌 이렇게 곱노?” 감탄하느라 바쁘다. 또 폴짝거리며 뛰는 메뚜기를 쫓다가 질퍽한 흙탕물에 발이 젖기도 한다. 이렇게 혼자 놀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철딱서니 없는 마누라.”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가버리곤 한다.
화요일부터 본격적인 나의 취미활동이 전개된다. 나는 아직까지 직장에 다닌다. 낮에는 먹고사는 일에 매여 틈을 낼 수가 없다. 근무를 마치고 난 저녁시간이 되면 분주해진다. 취미활동의 하나인 민화 강좌에 참석한다. 민화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반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실제와 똑 같이 그려내었나!" 감탄을 연발하였다. 나는 우리 고유의 문화와 그 전통의 보전에 관심이 많다. 우리 주위에서 자라나는 풀, 꽃, 벌레들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어 붓을 들게 되었다. 나도 한번 해보리라.
막상 붓을 들고 앉아 있어도 손은 둔하고 화폭에는 담고자 하는 것들이 마음 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일 년이 지났다. 지도 선생님은 처음보다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칭찬을 하지만 아직도 제 자리 걸음임을 나는 안다. 모란 꽃잎을 잎마다 다른 색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정작 내가 그린 것은 초록색 하나로만 되어있다. 자연스러운 맛이 나지 않아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수요일 오후에는 화요일에 하던 민화그리기 연속수업이 있다. 어제 그리던 모란도에 색을 한층 더 입힌다. 겹겹이 색을 입힌다. 자연색을 내기 위하여 여러 번 색을 입히고 모양을 다듬고 하는 작업을 쉼없이 한다. 잎맥의 앞면과 뒷면을 차별화하기 위해 섬세한 붓터치를 한다. 평소에 눈으로 보았던 풍경을 떠올려 가며 이건 아니야 스스로 평을 하면서 이 과정을 즐긴다.
민화 가방을 던지기 무섭게 새로운 가방을 바꾸어 들고 나선다. 이어서 하모니카 교실에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도 초급반이다. 불고 빨아 당기는
기초적인 기법을 배웠다. 이제야 도레미파솔을 어떻게 부는지 입술이 알아차린다.' 나비야 나비야..'를 부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제는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뒤 산길 어두워질 때~ ' 가을밤 노래곡도 불 수 있다. 하모니카의 애절한 음색과 노래 가사가 이 가을 저녁에 촉촉이 가슴을 적신다.
하모니카 교실에 다니는 것은 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다. 박자를 잘 맞추지 못하고 음의 높이도 맞지 않는 나의 노래 실력을 알기 때문에 악기는 하나 다루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학기에 시작했다. 조금 서툴러도 전문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위로하며 연주한다. 하모니카를 부니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를 부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같이 놀던 동무들의 얼굴이 떠올라 더 행복해진다.
목요일, 금요일은 나의 전공인 간호학 강의가 10시간 이어진다. 병원실습지도를 3시간까지 하고 나면 파김치가 된다. 일주일치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버린다. 그래도 할 일이 남았으니 어디선가 새로운 에너지를 길어와야 한다.
토요일 연필화 수업시간의 그림숙제를 해야한다. “귀찮다. 숙제 안 하고 그냥 가자.”하면서 침대에 드러눕는다. 침대에 누우니 지난 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중간 중간 펼쳐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들이다. 엎드려 읽기 시작한다. 내용에 공감하면서 이런 글을 쓴 작가에게 감탄과 더불어 질투를 하게 된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하고 벌떡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앉는다. “내일 수필시간의 과제는 어찌하나” 걱정하며 스마트폰을 꺼내본다. 글감을 위한 제목들이 메모지에 적혀있지만, 퇴고를 끝낸 글도 없고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어설픈 글들이 딸려 나온다.
아무것도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육십을 지나왔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을까. 여러 가지 펼쳐놓고 있는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나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조도를 그려 새로 가정을 꾸리는 신랑신부에게 선물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고 어변성룡도를 그려 취업을 준비하는 조카에게 그 의미를 새겨주는 일도 즐겁다. 하모니카를 어설프게 불면서 아빠하고 나하고 나팔꽃을 보던 장면을 추억하는 일도 재미가 아닌가. 글쓰기를 통하여 살아온 육십 평생을 되돌아보며 삶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곧 정년이 다가온다. 이제 주야장천 놀 일만 있을 것인데 지금 바쁜 것이야 대수랴. 이 또한 즐거운 시간이니 얼마나 행복하지 않은가. 천성이 모질지 못하고 모든 일에 관심이 많고 흥미를 가지는 것이 나의 장점이니 계속 바쁘게 살아보자.
남편은 ‘多慾 缺才 而 多味 多忙(호기심은 많은데 재주는 부족하고, 그러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니 재미가 있어 매우 바쁜 사람)' 라고 적은 글을 내보이며 이제 그만 자자고 한다. 이번 주 글쓰기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일 수필시간에는 고개를 떨구고 있어야 하리라.
첫댓글 열정과 호기심이 있는 곳에 젊음이 머무는 것 같습니다~
靈氣문 滿병 민화에
石壽花香 深江無聲이란
화제도 좋아요.
수필도 잘 읽었습니다.
마르지 않는 감수성이 윤슬처럼
빛나니 영원한 소녀로 삶을 곱게 수놓으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