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53 기독교철학07 요한복음 5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5강-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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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요한복음 열한 번째 내용인데요. 8장 31절부터 32절까지입니다.
[11. 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만약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에 머물면, 나의 참된 제자들이 될 것이고, 32. 그대들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의 말에 안주하여 따르면, 진리의 영인 성령을 깨달아 진리를 알게 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것임.)]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만약 그들이 나의 가르침 안에 머물면, 안주하면,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이 얘기죠. 나의 참된 제자들이 될 것이고 그대들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유명한 유명한 말씀이죠.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 이 말씀은 나의 말에, 가르침에 안주하면 진리의 영인 성령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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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자 어떤 원리로 이게 되는지 한번 설명을 해보죠. 이게 우리 마음이라고 치면요 우리의 에고, 혼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영의 마음이 있죠. 영, 아버지 자리, 성령 자리, 성령과 통하는 이 영이 있어요. 자 여기는 성령이라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이 I Am 아닙니까. 나는 있다. 요게 그대로 성령입니다. 이게 나의 영일 때는 영 이러지만 또 이 신성한 측면에서 볼 때는 성령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영은요 성령과 하나기 때문에 절대 내 안에서 나더러 잘못 살으라고 말하지 않고요 답을 다 알고 있어요. 이걸 지금 우리가 또 양심이라고도 부르는 자리 아닙니까. 양심. 그래서 이 양심이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돼요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실은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지금 나라가 혼란스럽고 위태롭고 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전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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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영이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더 잘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욕심으로 지금 뭘 더 잘해보고 싶고 더 완벽한 걸 하고 싶고 내가 어떻게든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죠? 그런데요 냉정히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이 시키는 거 이상, 하느님이 바라는 거 이상 여러분이 하실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겠죠? 예수님도요 아버지가 시키면 그냥 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별 수 없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나올 것 같다. 그러면 박히셔야죠. “중생들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너가 진리를 위해서 그런 권력의 협박에도 지지 않고 진리를 위해서 너가 한번 목숨을 바쳐야 할 것 같다.” 그러면 하는 거죠. 그런데 에고 마음에는요 싹 벗어나서 더 멋진 좋은 데 가서 더 잘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이 바르게 살려고 뜻을 품으셨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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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 뜻만 품으셨다면 여러분은 오히려 이제 삶이 편해지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양심적으로 살려고 지금 마음을 내셨다면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걱정 없으세요. 양심이 여러분 안에서 뭘 원하는지만 알고 그렇게만 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 또 발 뻗고 주무셔도 되고 쓸데없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걸 해야 되나 저걸 해야 되나 걱정하실 필요 없겠죠. 양심의 소리만 정확히 듣는다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를 정확히 못 들으니까 이제 고뇌를 하는 거지 예수님처럼 정확히 듣는 분은 사실은 뻔한 거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관에 처해도 불안해하실까요? “양심이 뭐라고 하나? 난 어떻게 하라고 하나? 어 그렇게 하자. 십자가에 못 박히자.” 박히면 그만입니다. 모든 일이 편해진다는 거 아시겠어요? 아버지한테 여러분이 모든 걸 맡기시면 여러분은 양심의 뜻대로만 사시면 되기 때문에 모든 게 순조롭게 되고 여러분이 불필요하게 쓸데없이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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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으실 필요가 없어요. 쓸데없이 우울해하실 필요도 없어요. 진짜 아버지 뜻을 알고 아버지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이해되세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게 이겁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안다면 자유가 와요. 쓸데없는 걱정을 안 하시게 되고 불필요한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 이 기쁨을 진짜로 맛보시지 않으면 이 말은 쓸데없는 말이죠. 자 보세요. 지난 시간에 이 성령은 뭐라고 했나요? 진리의 영, 진리의 영이에요. 성령에는, 자 생각해보세요, 성부 아버지, 이 영을 지금 따로 뽑아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우주를 주재하시는, 우주, 우주의 중심인 성부. 그쵸. 그리고 우리 에고에 들어와 있는 중심인 성령.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오시면 성령이거든요. 자 이 성부에는, 성령에는 요한복음 시작부터 제가 얘기했던 그 로고스가 있지 않겠어요? 로고스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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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뜻, 하느님이 실존이라면 그 하느님을, 그 실존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겠죠. 하느님이 한분의 실존이라면, 위대한 실존이라면, 존재하는 영이라면 그 영은 그 영이 일정한 속성을 가지고 어떤 법칙대로 존재하고 살아가겠죠. 그 법칙이 로고스라고 하는 겁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할 때 그 로고스. 그럼 이 법이 있어요. 성부는 이 법을 모르고 있으실 수 있을까요? 성부가 움직이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이 로고스인데 성부가 로고스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다면 여러분 안에도요 이런 십자가에 해당되는, 태양이 춘하추동으로 돌아가는 위대한 자연의 질서가, 그대로 여러분 안에 우주 만물을 만들고 굴리는 법칙이, 질서가 여러분 영 안에 새겨져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뭐가 옳은지 뭐가 그런지 사실은 영 차원에서 다 알고 계시다고 봐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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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우리는 모를까요? 이 에고때문에요. 에고가 성령하고 등지고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에고는 자꾸 내 생각으로, 내 감정으로, 내 오감으로 뭔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늘 여기에 내몰려요. 그래서 여러분이 생각 감정 오감으로 뭔가를 하실려고 하는 것들은 늘 이원성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탐진치의 세계,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늘 따라오면서 여러분이 무지와 아집 속에서 뭔가를 헤매시면서 살아가세요. 그래서 사실은 이게 마음대로 내 자유대로 하는 것 같지만 부자유해요. 내가 탐욕을 내면은 분노가 따라오고. 왜냐면 탐욕이 이루어지질 않으니까. 내가 욕망을 품은 게 다 이루어질까요? 이루어질 리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공정한 분이시고 우주 만물이 다 자기대로 욕망을 부리는데 어떤 사람 욕망이 계속 성취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겠죠. 여러분이 부모님이고 자녀가 천만이 있다면 천만 하나하나 다 신경써주다 보면 어느 한 자녀만 원하는 거 다 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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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하느님이 계실수록 더 안 되겠죠. 치우친 하느님이 계셔야 그리고 그 치우친 하나님이 여러분만 이뻐하신다면 혹시 일어날지 모르지만 정의로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 우주를 주재하시는데 왜 여러분만 봐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올바른 자녀라면요 저한테 주지 마시고 다른 형제들한테 주시라고 말해야 돼요. 그런 거 다 무시한 맹목적인 신앙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요. 올바른 신앙에서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진리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있다는 걸 체험하시고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안에는 진리를 아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 아무리 막 생각하고 막 살고 막 보고 듣고 흥청망청 살아도 안에서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선명하게 얘기해 주는 영이 여러분 안에 있어요. 그래서 그 영을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옳지 않다. 바르게 살아라.”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소크라테스 안에서도 저 영이 살아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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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이라고 불렀죠, 소크라테스는. 내 안에서 내가 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러지 마라” 하고 찜찜한 신호를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양심의 소리, 영의 소리가 여러분 선명히 들리신다면요 고뇌할 일이 적겠죠? 어디서 뭐 누가 같이 뭘 하자고 했어요.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내면에서 딱 들여다보면, 양심 분석을 해보면 양심이 찜찜하다라고 하면 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못 살 거 아니냐?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양심을 이해하고 양심이 하느님 소리란 걸 아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거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가치 있는 일이 있어요? 그냥 따르세요. 결과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하느님이 왜? 여러분이 해로운 길로 가게 만들겠습니까? 여러분이 양심을 이해하고 따르는데 왜 죽어 봐라 하고 망치는 어떤 결과를 내놓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으시니까 겁이 나는 겁니다. 양심이, 하느님이 뭔지 정확히 아신다면 여러분은 양심의 소리, 어떤 게 양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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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나 하는, 어떤 게 하느님의 뜻에 맞냐 하는 그거 알아내시는 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걸 식별해내는 능력이 엄청 중요하구나.” 이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뭐가 옳은지만 알면요 여러분 안심하셔도 돼요. “아 저거 하면 되겠구나.” 이해되세요? 이런 삶을 이렇게 사실 수 있겠어요? 이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에요.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이게 동양에서 말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 아닙니까. 내 생명을 죽여서 인(仁), 사랑을 이룬 예수님은 살신성인의 아주 대표자죠. 이게 논어랑 다 통하는 정신입니다. 군자는 자신의 몸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 사랑을 이룬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예수님이 딱 그걸 구현하시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내 양심이 시키는 명령이 “너가 죽어서라도 여러 백성들을 사랑으로 인도해야겠다”라고 안에서 울림을 주니까 예수님이 따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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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그게 옳다고 선명하게 선언하니까. 그래서 여러분들도 양심의 소리가 뭔지를 아시는 게 급하다는 겁니다. 내 욕심의 소리도 물론 알아야 되지만 내 욕심을 어떻게 양심의 맞게 조정할 건지 양심의 소리가 선명히 들리셔야 여러분들도 여러분 욕망을 조절해서 합리적으로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롭게 쓰시겠죠. 이게 이제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죠.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영의 소리를 듣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 영의 소리를 제일 잘 구현해줄 수 있는 분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영의 질서를 자신의 생각으로 감정으로 오감으로 펼쳐 보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은 지혜가 되고 감정은 사랑이 되고 오감은 능력이 돼서 여러분들께 어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시는 존재가 가능해진 거죠. 그래서 “나 왔을 때 배워라.” 왜냐?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영,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영이 안 들리니까요. 안 보이니까요. 그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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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영혼의 그 내면에 존재하는 이 신비한 힘과 지혜를 여러분이 바로 이해하고 바로 쓸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도와주겠다 내가. 그게 성자의 몫이다. 성부와 성령을 내가 에고를 통해서, 성자를 통해서 내가 구현해주마. 이 성령의 뜻대로 생각한다는 건 이런 거다.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산다는 건 이런 거다. 성령의 뜻대로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다.” 하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제 성령을 구체적인 유형의 성령, 그러니까 결국 성자는 뭡니까? 형체를 가진 성령이죠. 성령은 성자의 본질이고. 이렇게 성자와 성령을 이해하시고 나면 “아버지 안에 나 있고 내 안에 아버지 있다”라는 말이 그 말이라는 거 아시겠죠. 이렇게 해서 보여주니까 우리는 예수님이란 한 에고가 살아온 행적, 자취를 보고 성령을 짐작해냅니다. 아버지는 뭘 원하는지? 아버지는 예수님이 살아오고 말하시는 걸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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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하고 정의롭기를 원하고 진리에 맞게 살기를 원한다는 거 아시겠죠. 그리고 그림이 어떤 거라는 걸 구체적으로 좀 더 이해하시게 되고 느낌을 갖게 되시죠, 예수님의 그 말씀과 행적으로.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지금 온몸으로 보여준 나의 가르침에 너희들이 안주하면” 이 말은 뭡니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이해하면” 이에요 실제로는.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울삼아서 내 안에 있는 성령, 아버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내 안에도 저런 게 있겠구나. 예수님한테 저렇게 말하게 만들고 저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그 근원인 아버지가 내 안에도 있을 테니까 내 안에서 그 성령이 나한테 예수님처럼 말하게 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하는, 그 충동을 일으키는 그 자리가 나의 아버지 자리구나.” 내 아버지 자리도 알게 되고 아버지가 나한테 어떤 걸 원하시는지도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죠, 예수님을 관찰하다 보면.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따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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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그 가르침 안에 내가 머물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 이 성령이 결국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 이제 내 생각 내 감정 오감도 구속받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울고 웃을 수 있게 됐다는 거죠. 이게 자유입니다 자유라는 건. 여러분이 욕망을 제압하고 양심의 뜻을 온전히 따르게 되기 전엔 자유가 없죠. 욕망에 흔들려요. 사도 바울이 성령 체험을 하고도, 성령체험을 하고도 온전히 생각 감정 오감을 본인이 다스리지 못하니까, 불교로 치면 돈오는 했는데 점수를 해야 되는 이 상황이다 보니까 성령 체험한 뒤에 뭐라고 울부짖냐면 “내 마음 안에는 성령을 따르고 싶은 그 마음도 있고 우리 육정, 욕정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내 안에서 이게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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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욕정을 따르는 마음 육정을, 육신의 그런 감정을, 욕망을 따르는 마음도 분명히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겠는데도 거부하기가 힘들다.” 이걸 한탄합니다. 아직 자유가 없죠. 예수님은 자유를 얻으셨으니까 지금 이 말을 쉽게 하시지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쉬운 얘기가 아니에요. 내 안에 있는 묵은 죄까지, 저 무의식의 박혀있는 죄까지 그거를 다 정화시켜서 온전하게 바울이 얘기한 성화, 이 혼이, 에고가 영을 투명하게 반영하게 될 때 우리가 성화라고 합니다. 성스러워졌다는 거죠. 성인 성(聖)자 써서. 바울이 성화라고 부르는 게 이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자” 하는 거죠. 이걸 천주교에서 뭐라고 부르죠 성화를? 완덕, 완전한 덕을 이루자.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울고 웃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존재가 되자.” 이게 천주교에서 완덕이라고 해서 늘 주장하던 겁니다. 새로운 게 아니고.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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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신 핵심이고. 이게 핵심이에요. 단순히 믿으면 이루어진다든가 이런 식의 이론을 얘기하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유를 얻어라”고 하셨죠 우리한테. “너희 안에 성령이 있다. 내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면 너도 결국은 너 안에 있는 아버지와 성령을 이해하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자유로워 질 거다.” 이렇게 해서 이해하셔야 됩니다. 자 아버지께 맡겨야 돼요. 불교에서 “주인공한테 맡겨라.” 그러죠. 이걸 잘못 이해하신 분들이 “주인공, 나 롤스로이스 갖고 싶어. 주인공” 하고 아버지한테 맡겨요. “주인공!” 들어줄 때까지 맡기고 있어요. 이상하죠. 기독교로 치면 “아버지, 나는 저 아가씨가 좋은 거 같아요. 아버지.” 해서 아버지한테 맡겨요. 뭐 좀 이상하죠? 아버지한테 맡기면 이루어준다. 아버지한테 맡긴다는 걸 지금 되게 저차원적으로 이해하고 계신 거죠. 그러다 어쩌다 되면 또 난리가 나죠. “아버지가 나만 사랑하시네. 내 기도는 다 들어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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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자체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자랑하던가요? “아버지는 내 말 다 들어줘.” 그런 유치한 얘기를 왜 합니까? “아버지 뜻대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겠다.”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죠. 제발 유치한 얘기하시는 데 따라가지 마시고 고급스러운, 고급지게 사세요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어떻게 살면 고급스럽게 살 수 있나요? 맡기세요. 맡기는 법을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이것도 배워야 됩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배워야지 저도 처음에는 “다 아시겠지” 하고 말을 좀 생략해 봤더니 아니에요. 다 얘길 해야 되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님이 진짜 힘드셨겠다. 지금 성경에 남아있는 게 일부이지 않을까요? 아마 계속 붙잡고 무화과나무니 온갖 비유를 들어서 “요거 안 먹히네” 하면 다른 거 하고, 알 때까지 얘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게 별게 아니지만 아셔야 돼요. 아버지한테 어떻게 맡길 거냐? 깨어있는 게 맡기는 건데요. 학당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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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괜찮아” 하고 내려놓는 게 맡기는 거예요. 자 왜 그런지? 천주교에서 이 방법을 자세히 다룬 책, 이거 꼭 참고해서 보세요. “무지의 구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게 어디서 가져온 거냐면요 이 영감을 영국에서, 중세의 영국에서 나온 신비 묵상하는 방법을 쓴 책인데, 관상하는 방법, 묵상(默想)에서 관상(觀想)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인데 모세가 구름 속에 40일간 들어가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난 그 사건을 가지고 우리도 구름 속에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느 구름에 들어가야 되느냐? 무지의 구름에 들어가야 된다. 일체 지성을 쓰지 않는, 모르겠다 하는 상태, 일체 피조물에 관심을 주지 않는 그 상태에 들어가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조물주를 만나려면 일체의 피조물에는 관심을 끊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피조물이 뭐가 있나요? 생각 감정 오감이죠. 이게 선(禪)하고 똑같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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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이 선을 잘하시면요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실 수 있어요. 선을 못하는 사람은 이쪽 와도 안 돼요. 불교에서 참선 잘 모르시는 분은 개종해도요 아버지 못 만납니다. 이해되세요? 아버지 잘 만난 분은 저쪽 가도요 선(禪) 잘해요. 나를 탁 놔버리고 아버지랑 그대로 탁 만나는 분이, 이런 성령 체험을 잘하는 분은 그게 그대로 견성 체험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의 분별심을 내려놓고 나의 본질, 참나를 만나는 그게 바로 아버지이거든요. 참나가 I Am 아닙니까. 여기가 아버지고. 순수한 나라는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순수한 나의 존재가 아닌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실 줄 알아야 돼요. 여러분이 만드신 거죠. 어떤 특정 생각. 생각 자체는 여러분이 만드신 게 아닙니다. 생각이란 재료는 다 하느님이 준 거지만, 참나가 준 거지만 그 생각으로 요런 생각 만들어내고 요런 감정 만들어내고 이런 것 보고 듣고 하는 거 다 여러분이 만드신 거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신성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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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려놓으시고 여러분이 조금도 힘을 쓰지 않으시고 계시면 아버지가 그대로 드러나겠죠. 순수한 나. 그러니까 여러분이요 아버지한테 맡기실려면 첫 번째로 몰라 괜찮아만 잘하시면 돼요. 모르겠다. 일체를 모르겠다. 생각 감정 오감을 쓰지 말아 보세요. 일체를 모르겠다. 가만히 계시면서 순수한 나라는 존재감에만 집중해보세요. 뭔 일이 생기셨든지. 자 당장 지금 큰 병에 걸렸다 뭔 일이 났다. 난리가 났다. 전쟁이 났다. 지금 어떻게 하실래요? 나, 나란 존재로 한번 돌아가 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자 나한테 맡기지 않는 여러분의 생각으로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건 하나도 지금 아버지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좀 당당히 우리가 처신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것은요 불안하고 다 후회될 짓만 하게 돼요. 여기에 머물지 마시고 아버지한테 맡겨보세요. 뭘 맡기십니까? 생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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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다 맡겨버리세요. 다 내려놓는다는 게 사실은 다 맡기는 겁니다. 여러분이 들고 계실 필요가 없고 “아버지 다 아버지께 맡깁니다” 하고 “오직 나”로 존재하셔도 되고 일체를 모르겠다고 힘을 다 빼 버리시고, 내려놓으시고 그냥 존재하셔도 돼요. 여러분이 내려놓으면 자동으로 아버지한테 갑니다 관리가. 그쵸. 여러분이 힘써서 관리하지 마시라고요. 이게 맡긴다는 겁니다. 주인공, 아버지한테 맡긴다는 것은 여러분이 일단 힘을 빼는 거예요. 이게 다가 아니에요 맡긴다는 거. 이제 1단계를 얘기한 겁니다. 이렇게 맡기시면 어떻게 돼요? 편하고 여유로우시고 순수한 여러분의 마음 상태로 계실 수가 있겠죠. 평안과 고요가 오겠죠 잠시나마. 자 잠시나마 이 깨어있음과 평안과 고요, 아버지 자리를 만나고 다시, 아까 내가 맡겼던 생각 감정 오감을 다시 들어서 보면 어떨까요? 맛이 틀려요. 이제 아버지가 주도하십니다. 아까의 그 분노, 아까의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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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고집, 편견, 어떤 행위 이런 걸 이렇게 다시 깨어서 보게 되면요 아까 같은 마음이 안 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뀌어 있어요. 진리의 마음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에 옳지 않은 걸 보면요 더 불편해요.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고 생각은 진정돼 있고 감정도 편안해져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잘못된 행위도 더 할 수 없는 어떤 그 힘이 생겨요. 저항이 생겨요. 그걸 막을 수 있는 힘이. 이렇게 내가 억지로 바꾸려고 했으면 안 됐을 것들이 아버지한테 맡겼다가 다시 내 생각 감정 오감을 받아보니까 변해 있는 겁니다. 자 생각 감정 오감을, 내가 들고 있던 그것을, 내 문젯거리를 아버지한테 한번 맡겼다가 다시 받은 거,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죠. 반대로 설명하면 내가 그 모든 걸 내려놓았다가 초연해진 마음으로 붙잡아서 본 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둘 다 같은 사건입니다 맛만 다르게 설명한 거지. 아까 전자로 설명하는 것이 기독교적으로는 쉽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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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제 고민을 다 아버지한테 맡겼다가 다시 받아서 보니 어떻습니까? 변해 있어요. 아버지가 한번 손을 대버리면요.간단합니다. 여러분 고민 많았어요. 화가 났어요. 깨어 있다가 한 5분 정도만 아버지랑 만나고, 5분 정도만 만나고 다시 그 분노와 그 고민을 들여다보세요. 마음이 편해져 있기 때문에 여유롭기 때문에 다르게 보여요. 이게 아버지가 역사하신 거예요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이 아버지한테 맡겼기 때문에, 여러분 뜻대로 안 하고 아버지한테 맡겼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여러분 영혼에 침투해가지고 여러분 영혼이 아까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반응할 수 없게 막아줍니다. 다스려줍니다. 이게 아버지한테 맡기는 겁니다. 그래서 1단계 “몰라 괜찮아”해가지고 내 짐을 다 아버지한테 맡기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한테 넘겨라” 하셨잖아요 예수님이. 다 넘겨 버리세요 아버지한테. 그리고 다시 그 짐을 받아서 여러분이 양심에 맞게 해결하세요.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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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성찰해주시면 더 좋죠. 이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이미 아버지한테 맡긴 걸로도 이미 양심이 충만한데 거기에다가 “자 내가 하는 행위는 황금률에 맞는 행위냐?”라고 물어봐 주시기만 하면 더욱 힘을 가지면서, 왜냐? 여러분이 한번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다시 욕망도 무지도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한 번 더 그 충만한 양심 상태에서 이제 마음을 쓰기 시작할 때, 고민을 다시 하기 시작할 때, 다시 이 분노를 직면할 때 “나의 이 분노는 나의 아 고민은 황금률에 맞는가? 즉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로운가? 남한테 피해주는 건 아닌가?”라고 딱 생각하시면 “이게 아버지 뜻에 맞는가?”라고 물어보시면요 불순물이 또 떨어져 나가면서 여러분이 여러분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줍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자 첫 번째 아버지한테 다 맡겨 보기. 그게 첫 번째. 2단계, 다시 받아가지고 아버지 뜻에 맞게 아버지와 함께 그 일을 처리하기. 이 두 단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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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살아가시지 못하면요 이걸 아버지한테 맡긴 삶이라고 할 수가 없죠. 다 여러분이 주도하는 삶이에요. 아버지는 들러리예요. 내가 다 주도하는 삶에 “아버지 들어주세요. 믿고 맡깁니다.” 하고 또 가요. 아버지가 들어준다는 말 하지도 않았는데 가요 또. 자꾸 욕심을 부려서 일을 저지르면서 “아버지 맡깁니다. 아버지한테 맡깁니다.” 이게 전혀 바뀐 게 아니죠. 내 마음대로 사는 거죠. 그런 걸 또 부추기는 또 사이비 영성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 하세요 그런 거. 뭐 변하신 거 있나요? 그거 해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어요? 답답하시죠 뭔가? “이것마저 아니라면 난 어디로 가나?” 이러고 계시지 않으세요? 일찍부터 빨리 아버지 뜻을 알고 사시면요 그런 고민에서 완전 해방입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질 않아요. 아버지 뜻에 맞나 안 맞나만 보지 고민을 안 해요. 그리고 내 맘대로 아버지 뜻을 억측하는 게 아니라 진짜 아버지 만났다가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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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랑 만난 상태에서 느꼈던 그 평온과 고요 그 속에서 결정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힘을 안 들이고도 쉽게 쉽게 올바른 길을 찾아가실 수 있다니까요. 이 좋은 길을 모르시고 여러분이 어떤 여러분의 힘을 써 가지고 용을 써서 문제 해결을 하시려고 하면요 참선을 하다가도 병에 걸리고요 기도를 하다가도 병에 걸려요. 뜻대로 안 돼요. 욕망으로 하니까 병에 걸립니다. 아버지한테 다 맡겼는데 왜 병까지도 다 맡겼는데 왜 병이 고쳐지고 마음이 편안해지지 왜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문제가 생겼으면 내가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아시고 힘을 좀 더 빼세요. 별건 아니고 힘을 좀 더 빼세요. 이런 식으로 맡기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자유가 오지 내가 생각하는 자유,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 이렇게 자꾸 고집을 부리고 계시는 동안 여러분이 만든 창조물에 집착하시는 동안은 절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얘기가 제일 중요해요. 오늘 요한복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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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핵심이 이겁니다. 여러분이 고민이 생겼을 때, 문제가 생겼을 때 맡기시느냐? 양심 분석, 우리 양심 노트 있죠? 그게 아버지와 함께 문제 푸는 방법입니다. “양심과 함께 내 문제 풀어보기” 노트예요. 그래서 자 친구랑 싸웠다. 내 기분에는 이렇게 풀어주고 싶은데 욕을 한번 날려주고 끝내고 싶기도 하고, 뭐 다신 안 보고 끝내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없었던 일처럼 지내고 싶기도 하고. 자 그런데 이건 내 생각이고 아버지는 뭘 원할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양심은 뭘 원할까? 그러면요 양심 노트를 쓰세요. 첫 번째, 뭡니까? 모른다 하기. “모른다 괜찮다”고 마음을 좀 비우고 아버지랑 하나가 된 마음을 만든 다음에 아버지와 하나가 된 그 초연한 마음에서 두 번째, 사랑을 물어보죠. 상대방의 입장 어떨까? 어떨 것 같아? 정의, 상대방한테 피해준 거 없나? 있다. 없다. 뭔가 나오겠죠. 세 번째, 예절, 상대방한테 나는 무례하지 않았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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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너의 그 판단은 자명해? 이걸 쭉 질문해 보고 1단계에서 이제 2단계로 넘어간 겁니다. 나의 이 초연한 마음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마음에서 이 질문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다 보면요 내가 혹시 조금이라도 욕심 부린 데가 있으면 보입니다. 그거 하지 마세요. 아버지 뜻에 맞게 바로 잡으세요. 이렇게 매순간 매일매일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면서 살아가시면요, 자신의 생각이나 언행을 모두 점검하면서 살아가시면 그분은요 이미, 이미 여러분은 성화 된 길을 걷고 계세요. 여러분의 에고의 욕심을 다 비운 뒤에 성화가 진짜 되겠지만 매순간순간마다 여러분이 욕심을 물리치고 성령의 뜻을 따를 때마다 찰나찰나 여러분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여러분은요 성인같이 사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에 충실한 대변인, 성자의 맛을 보신다구요. 성자로서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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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세요. 여러분도 어차피 성자가 되셔야 되니까 순간순간 아버지 뜻대로 살 때 아버지의 충실한 자녀 아닌가요? 성자처럼 사세요. 하시다보면 요령은 자꾸 나서 실력은 자꾸 늘어서 더 완벽한 성자가 되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순간순간 성자로서 사세요. 이런 성자들이 우리나라에 많다면 우리나라의 지금 정치적인 온갖 시련, 경제적인 문제, 사회적인 분열, 남북관계의 이런 해결 그리고 이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살릴 건지? 그리고 온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앞으로 잘 살 건지? 이런 답이요 성령에서 안 나올까요? 조금도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시면 그건 에고의 욕심입니다. 편견이에요. 왜 그게 안 나올까요? 그렇죠. 아버지는 다 답이 있어요. 아버지는 이 지구 하나 움직이는 것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 아버지가 “답이 없어. 지구 어떡하지?” 막 이러고 있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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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인간적이지 않나요? 자꾸 성부, 성령, 아버지 자리, 우주의 초월적 의식 자리에다가 인간적인 한계를 붙이지 마세요. 거긴 한계가 없는 자리입니다. 인간이 문제지 거기에 문제가 아니라고요. “근데 왜 아버지는 우리한테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아주지 않고 인류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 막아주지 않을까요? 왜 하나님은 인류를 버렸나요?” 하느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그러기에 좀 시킨 대로 좀 해라.” 이러죠. 그렇게 양심에서 하지 마라고 하는데 꼭 하면서 “아버지 왜 날 버리셨나요?” “그러지 마라 그랬지.” 우리 안에서 성령의 말을 안 들어서 일어난 일이에요. 성령의 말을 어기니까 어긴 거에 대한 대가로써 우리가 그 벌을 자꾸 받는 거지. “왜 자꾸 벌을 주시나요?” 하고 지금 얘기하는 거랑 같은 얘기입니다. 벌 받을 짓을 안 하면 돼요. 그리고 안 할 수 있는 능력을 아버지는 우리에게 줬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걸 지금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너희는 그렇게 힘들게 살 존재가 아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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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자녀다. 아버지 뜻대로 좀 살자”란 얘기를 계속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돌 던지려고 하고, 또 저놈이 또 헛소리한다 하고, 죽이려고 하고 그랬습니다. 지금 시대라고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예수님이 지금 시대에 오셔서 또 이런 얘기해도요 또 어차피 지금 여기 지금 한국 교회가 호응할까요? 그건 미지수인 것 같아요.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진실하게 사랑의 아버지 뜻대로 사신 분은 예수님을 알아보시겠죠. 그런데 혹시나 어떤 자신의 욕망 때문에 신앙을 했던 분들은 역시나 못 알아보실 겁니다. 그때 가면 갈리겠죠. 이래서 막 무서운 휴거 이론이 나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런 공포 분위기 조장하는 얘기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지 “한번 지옥에 가서 한번 굴려봐야겠다”라고 독심(毒心)을 품으신 아버지가 있을까요? 그게 아니죠. 그런 겁주는 말도 왜 나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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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런 것도 방편이에요. “제발 좀 빨리 정신 차리라”고 나온 얘기일 겁니다. 그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하는 그런 신앙은요 일단 피하세요. 그런데는요 진실된 신앙이기가 힘들어요. 공포 분위기 왜 조성할까요? 진짜 잘 되라고 그럴까요 그분들이? 아니에요. 그렇게라도 해서 빨리, 보통 사이비교들이 꼭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언제 뭐 휴거 있다. 아니면 언제 개벽 있다. 꼭 이렇게 날짜 박아가지고 돈을 뜯어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돈을 내지 지갑을 열지 막연하게 온다고 하면 겁을 안 내세요. 자꾸 겁이 나게 연도를 자꾸 고정해서. 보통 아무 일 없죠. 그래서 예전에 사이비교를 연구했답니다. 그렇게 맞추지도 못하는 종교에 계속 또 다녀요 사람들이. 그 심리가 아주 신기해서 연구해봤더니 사람들이 일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자기가 한 행동을 좀 틀렸다고 하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이 날짜가 하나 잘못되죠. 거기 불안 속에 있으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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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질 못하고 있어요. 또 본전도, 바친 본전도 찾아야 되고 투자한 것도 아깝고.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기도 쉽지 않고. 또 이미 그 사이비 교주의 영향력 하에서 내가 또 살아가고 있고. 떠나면 죽을 것 같고. 세뇌당한 거죠. 자 이때 이분들이 취하는 게, 이 중에 과감한 분들은 나가는데요 상당수는 또 남아있어요. 근데 불안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불안감을 감출려면? 사람들을 또 꼬드겨요. 여러분 막 불안하면 “이 조직이 될까? 안 될까?” 아님 어떤 사업이요 “이거 다단계 같은데 다단계 중에서도 좀 악질 같은데” 막 불안해 할 때 연예인이 하나 와서 “저도 이거 합니다.” 그러면 어떨까요? 안심이 확 되시겠죠. 사람들을 꼬드기는 방식으로 그 불안감을 해소하려고요 유명인들을 좀 꼬시고 싶고 더 열심히 포교에 전념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론이. 그러니까 사이비교일수록 포교에, 전도에 더 열을 내요. 그래야 덜 불안하니까. 결국 그것도 양심의 작용이죠. 찜찜하니까 찜찜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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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려고 더 열심히 뛰는 겁니다. 여러분 힘드실 때, 마음이 힘드실 때 더 열심히 몸을 혹사시키시죠? 잠시나마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더 퍼붓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으려고. 마찬가지로 사이비교의 그 신도들은 알아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도 전도에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는 겁니다. 이게 자유입니까? 자유가 아니죠. 진리는 자유를 주는데 이렇게 구속을 주는 종교들이 많은 이유도요 우리가 이런 데, 진짜 진리를 못 보고 자꾸 어떤 교주나 어떤 잘못된 교리에 빠져서 그렇습니다. 진리의 영이 주는 진리 아니면 믿으시면 안 돼요. 여러분이 아무리 진리 같은 생각이 나고 진리 같은 교리를 믿고 계시더라도 조금이라도 내 양심에서 “수상하다”라고 신호를 보내시면 반드시 의심하시고 양심한테 물어보세요. 수상하다고 한 그 마음에다가 물어보세요. 거기에 답이 있죠. “왜 수상하지?” 양심 분석을 해보시면 안에서 나와요. “이런 이런 것들이 수상하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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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다.” 뭔가 황금률에 어긋난 부분이 있으면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따라가시다 보면 여러분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고 진리를 영접하면 자유가 옵니다. 결국 진리를 따르기 전까지 여러분은 계속 찜찜해지실 수밖에 없어요. 뭔가 유사한 가르침, 유사한 진리들을 믿으시면 당장에는 뭔가 위안이 오지만 조금만 거기에 머물다 보면, 진리에는요 머물수록 자유가 오는데 진리가 아닌 것은요 유사 진리들은, 사이비 진리들은 머물면 머물수록 불편해져요. “뭔가 여기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옵니다. 그게 또 성령의 사랑이에요. 보혜사 성령님이 보호해주고 은혜를 주려는 마음으로 “아니라”고 신호를 보내주시는 건데 또 무시해요. 성령의 말은 무시하고 사이비 교주의 말은 따르고. 또 소경의 길안내를 자꾸 따르시다 보면 여러분들은 못 벗어납니다 그 상황에서. 자 이게 전 사이비교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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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니까 종교로 얘기했지만 사이비종교만 여러분을 등쳐먹는 게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여러분을 등쳐먹어요. 뭐라고 하나요 정치인들이? 사이비 교주들은 뭐라고 하나요? “그대가 하느님이다” 하면서 꼬시는데 사이비 정치인들의 뭐라고 하나요?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얘길 하면서 꼬십니다. 등쳐먹어요. 막 절을 하고 막 엎어지고 당선된 뒤에는 이렇게 내려다봅니다. “뭐 아래 것들이 지금 와가지고 나한테 시비야.” 또 착취당하시는 거예요. 그러고 또 벼르다가 또또또 엉뚱한 걸 찍어가지고 또 무시당하고. 이게 끝날 일이 아니에요. 그쵸. 사이비 교주만 조심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인간의 삶은 모두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어요. 가부장적인 가정이 있잖아요. 아버지가 교주예요. 아버지가 믿는 게 진리고. 종교는요 우리 삶 구석구석에 다 있습니다 이 종교성은. 진리, 자명하지 않은 종교는 다 사이비종교고 여러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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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정치인도 사이비종교예요. “우리 지도자는 단군이래…” 벌써 이 말이요 나는 신도입니다라는 선언밖에 안 되죠. 이미 신도예요. 자명함을 따르고 있지 않아요. 이미 우리 교주님이에요. 교주님이 틀릴 리가 없어요. 왜 무섭냐면요 종교의 어떤 빠의 마음을 가져 버리면요 그 사람의 잘못을 못 보게 됩니다. 자명함을 따르지를 않아요. 왜 빠가 되면 안 되느냐? 왜 종교, 이때 말하는 종교란 자명하지 않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그런 종교를 말합니다. 뭔가 맹목적인 신앙, 맹목적인 신앙에 빠져버리면요 여러분은 영의 소리를 듣질 않아요. 자기가 지금 믿기로 한, 여러분이 만들어낸, 그건 진짜 교주의 본모습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상상하고 있는 그 사람의 그 말만 따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완벽하다고 믿고 따르게 돼요. 피조물을 창조물로 오해하는 겁니다 창조주로. 이걸 뭐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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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우상숭배라고요. 여러분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돼요. 이게 문제지 부모님 제사 지내는 게 왜 우상숭배입니까? 부모님이 하느님이라고 믿으세요? 그러면 우상숭배입니다. “아버지 우주를 창조하십시오” 하고 제사할 때 절하나요? 신이라고 믿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 하고 절하는데 절을 못해요. 살아서 돈 받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돌아가셨다고 딱 생까는 건 이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어긋난 얘기 아닙니까? 지옥에 가 계시면 아버지 아니에요? 그쵸.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아버지 지옥에 계시니 힘드시죠” 하고 절도 못합니까? 영혼은 살아있는데 기독교 교리상. 기독교에서 영혼은 안 죽어요. 그래서 지옥에 있든가 천국에 있든가 살아 계세요. 근데 밥 차려놓고 절도 못해요? 뭐가 좀 이상하죠? 자기 욕심 때문에 안 하는 겁니다. 그거 한번 절하기 시작하면 불편해지거든요. 제사해야죠. 이게 다 그런 게 힘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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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교리로 도망가는 겁니다. 명분을 자꾸 삼는 거예요. 또 산소 가서도 절 안 하시잖아요. 교회, 믿음이 좀 강한 분들 안 하세요, 우상숭배라고. 대체 왜 그게 우상숭배입니까? 아마 어떤 분이 돈 주겠다 그러면 무릎으로도 길 걸요. 그게 진짜 우상숭배인데요. 돈이 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에서. 여러분한테 자유를 줄 수 있는 건 뭐죠? 이게 아니라 “돈을 벌어라. 그러면 번만큼 자유를 얻으리라. 돈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이 확 와 닿죠. “진짜 그래.” 그러니까 예전에 보니까 교회 교당에서요 기도를 하는데 “물질의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이래요 당당하게. 뭔가 잘못됐죠. 하느님에 대한 지금 나만의 이미 편견이 있고 내가 믿는 그 하느님이어야만 돼요. 다른 하느님은 안 돼요.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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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라는 하느님이 지금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물질의 축복도 안 주는 아버지는요 아버지도 아니에요. 자녀를 사랑하시지 않는 거예요. 용돈 안 주는 아버지는 이건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내 아버지 아닙니다.” 진짜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제가 생각하시는 분이 아닌 것 같다”고 거부할 수도 있어요, 만남을. 그쵸. 우리 마음이 그래요.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지금 신을 바꾸고 있는 건요 신을 돈으로 바꾸고 있어요 물질로. 이런 게 심각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기독교나 종교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요 우리 인간은요 에고의 형태가 자기가 믿은 데 빠져버리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 신자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계시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착취를 당하고 계세요. 이 교주가 꼭 종교의 교주가 아니에요. 정치인도 교주예요. 유명 정치인들이 다 교예요. 그 교. 어느 교 신도신가요? “친노냐? 반노냐?” 그럼 “우리 교냐? 다른 교야?”라고 물어보는 거죠. “어느 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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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야 진보야?” 일단 그 양대 파죠. 장로교 뭐 이런 거처럼요 보수교와 진보교가 있고 “진보교 중에서 누구 어느 분 믿으세요?” “나 누구 믿어요.” 그 계열들이 다 있죠. 그럼 자기 교주들을 자꾸 띄워야 되니까 “위대하신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오신, 우리나라를 구하시기 위해 오신 그분” 자꾸 이런 신앙적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럼 정치에선 이러죠. 그럼 또 연예계로 가면 누구죠? 누구 오빠 밑에 쭉 줄을 서죠. 누구 오빠, 누구. 그쵸. 여자는 누구라고 하나요? 뭐 소녀시대니 뭐니 다 그 교, 빠, 빠들이죠. 밥을 먹어도 그분을 이미 생각하면서 먹고 이 정도 종교적이에요. 오늘 그 오빠는 어떠실려나? 막 이런. 그쵸. 이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우리 에고는 기본적으로 그래요. 인정하셔야 돼요. 에고는요 기회만 주면 바로 종교적으로 돌변합니다. 신앙 형태로 빠져요 자기가 좋아하는 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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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헌신도 하고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 마음을 어떻게 할 순 없잖아요. 그건 인간이 갖고 태어난 거니까. “다 자명하냐?”라는 검증을 계속해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저 종교적인 심성 자체가 없어질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렇죠. 그러니까 자명한지 따져보고 믿을만한 데, 나를 착취하지 않을 사람한테 저런 마음을 주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여러분이 제일 믿고 따라야 할 건 양심이라는 겁니다, 결국. 성령. 피조물 중에 뭘 택할려고 하지 마시고. 안 할 순 없어요. 그러니까 이왕이면, 예수님 같으면 뭐죠? 이 성령의 뜻을 그대로 산 그 에고한테 빠져야 그나마 다행이죠. 그랬을 때는 우리가 진리를 만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성령한테 라고 안 하죠. 자기한테 라고 얘기해요. 그렇죠. “힘든 자들이여 수고로운 자들이여 내 멍에를 매라.” 이렇게 얘기하죠. 참나와 동일시해서 얘기하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진짜 성자들은, 이 에고들은 성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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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에고들을 보고 빠져서 살아가는 건 좋은데, 그래도요 자 그분의 외양에만 빠지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꾸 경고 줄 때가 있어요. “난 아버지 뜻을 그냥 전할 뿐이지 나한테 빠지지 마라”는 얘기를 한 번씩 하실 때가 있습니다.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 성령한테 빠지는 또 내가 도구가 되어야 되니까 한 번씩은 또 허용해 주시는 거예요. 이 미묘한 관계를 아시지 않으면요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도 다 분석해서 이해해야 됩니다. 심플하게 가르치는 데들은요 “아이구 뭐 복잡해.” 제 강의 듣고 그러실 거예요. “뭐 그렇게 복잡한 거야. 예수님 하면 그만인 걸. 난 예수님 빠 하면 그만인데, 당장 소화도 잘 되고 밥도 잘 넘어가는 것 같은데 왜 저런 소리를 하고 있을까?” 그럼 그냥 영원히 빠로 남아요. 양심의 빠가 되지 않는 한은 여러분이 성인의 길은, 성화가 안 일어납니다. 어떤 한 피조물,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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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 유형의 세계에 빠져서는요 진리랑 만나질 못해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을 만나야지 예수님이란 한 인격에, 에고에만 빠져 계셔서도 영원히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과연 성령을 제대로 영접했을까?” 하면 의문이 나는 이유가 그겁니다. 성령을 온전히 품은 분을 우리가 상대하더라도 그분만을 보면 안 되고 그분 안에 있는 성령에 우리가 빠가 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제일 깨끗해요. 이해하시죠? 그러니까 본인이 우리 에고가 어떤 현실에서 뭔가 사랑하고 빠지고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면요 이게 착취 구조가 돼요. 누군가가 여러분을 사랑하죠. 사랑에서도 그러지 않나요? 연애에서도 더 사랑한 사람이 착취당합니다. 그쵸. 인간은요 언제든지 착취가 일어나요 삶의 모든 곳에서. 더 마음 낸 사람이 착취당해요. 해야죠. “너 나 만나기 싫어? 만나려면 이거 해야 돼.” 그거 해야 돼요. 그쵸. 약육강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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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다구요. 그러니까 양심이 뼛속까지 박히지 않으면요 인간이 그런 착취를요 착취에 중독돼 있어요.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모님 착취하고 살아남았지 않나요? 뱃속에서부터 어머니 뼈와 살을 착취하고. 나와 가지고 당연한 듯이 돈 내놓으라고. 하고 받아서 쓰고. 그쵸. “전생에 뭔 죄를 지었는지?” 하면서 이렇게 부모님이 한탄할 때 우린 다 받아썼잖아요. 이 자연계 그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그럼 그 안에 사랑이란 게 들어가지 않으면 그건 그냥 단순한 착취로 끝나버린다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사랑해서 해주는 거고 자녀는 그 사랑을 받고 미안해서 결국은 또 효로 갚게 되면요 이게 좋게 끝나는데. 이해되십니까? 착취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자본가랑 노동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노동자가 또 비정규직을 착취하고요. 조금이라도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 착취하게 되어있습니다. 착취하게 돼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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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양심과 사랑이 들어가지 않으면, 황금률이 그때 개입되지 않으면 착취가 일어나요. 그리고 우리가 착취를 하는 사람은 편하기 때문에 이 관계를 방치해요. 그렇죠. 알지만 넘어가죠.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양심이라는 게 거기 들어가지 않으면 반성이 일어나겠습니까? “내가 이 사람 혹시 착취한 거 아니야?”라는 반성이라도 해 봐야 되는데 양심이 들어가지 않으면, 개입되지 않으면 이런 반성조차 없어요. 그래서 인류 전체가 반성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게 답이지, 사회주의도 답이 안 되는 이유가요 그렇게 제한적인 착취만을 우리가 설명할 일이 아니에요. 인류 모든 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착취에서 사이비 종교로부터 착취당하는 신도들을 구해내야 되고, 사이비 정치인들로부터 착취당하는 그런 국민들을 구해내야 되고요. 또 사이비 경제인들이, 또 여러분 삼성교, LG교, 하나의 교입니다. 애플교, 다른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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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은 이교도예요. 이단이나 이교도, 배신자, 변절자. 이거 쓰다가 이거 쓰면은요 “내가 어떻게든 한번 내가 한번 손을 봐줘야 되는데” 이런 마음이 돼요. 그 마음들이 사이비종교들에서 살인까지 부르는 사건으로 간 거예요. 여러분도 똑같은 마음을 갖고 계세요. 나랑 종교가 다른 사람, 나랑 정치 이념이 다른 사람 보면요 “저거 좀 어떻게 손봐야 된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그 마음 때문에 밤새 악플 달고 싸우고 하는 거죠. 이렇게 못 견뎌하는 우리 에고, 여기에 지금 구원이 있을까요? 있다는 겁니다. 양심만이, 황금률만이 이걸 구원해줘요. 여러분의 이런 힘든 삶에서 착취하는 쪽도 나중에 힘들어져요. 왜냐? 여기서 착취하면 저쪽에 착취당해요. 이쪽에서. 뭐 혼자 이렇게 독야청청하는 게 아니라 이쪽에서 삥 뜯고 저쪽에다 또 갖다 바치고 있고 이런 구조. 자본가가 노동자한테 삥 뜯죠. 자본가는 또 어디 사이비교주한테 갖다 바치고 있어요. 그렇죠. 사이비교주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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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한테 갖다 바치고. 정점에는 사이비교주 와이프가 다 모든 걸 먹고 있어요. 그럼 또 와이프는 자식한테 뺏기고 있겠죠. 끝없는 이 착취 구조. 그쵸. 사랑이라는 게 들어가면요 이건 아름다운 행위가 되지만 사랑이 빠져 버리면 이것은 참 자연계의 냉혹한 현실이 됩니다. 사자가 토끼 잡아먹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비난하기만 하기도 힘든. 저렇게 살지 않나 자연은? 그래서 인간이요 그렇게 그냥 살았어요. 그런데 성인들이 나와서 뭘 가르쳐 준 겁니까? “인간은 하나 더 하게 돼 있다. 사랑까지 하게 되면, 지혜와 사랑만 얻게 되면 너희들의 그런 이런 착취의 삶이 그대로 승화돼서 지상천국이 펼쳐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얘기해 준 겁니다. 요한복음은 그 얘기예요. 지상천국이 되냐 못 되냐는 우리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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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욕심의 삶에서 홍익인간의 양심의 삶으로 내 삶의 방식을 전환할 때 이루어집니다. 한 명씩 두 명씩. 지도자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거 아시겠죠. 사회 전반이 그런 문화가 성숙돼서 과반수 이상이 이런 양심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인류는요 완전히 다른 차원대로 갑니다. 그전엔 답이 안 나와요. 답이 안 나오는 걸 뭘로 증명하느냐? 세계사 책 사서 보세요. 세계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답이 한 번이라도 나왔는지? 여당 야당은 늘 있었고 진보와 보수는 늘 싸웠어요.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이 안 나오고 계속 그렇게 싸우고만 있는 이 현실이 원인이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문화를 안 바꿨기 때문이에요. 양심의 소리를 안 듣고 진리에서 자유를 안 찾았기 때문에, 가짜 진리들 속에서 계속해서 가짜 진리, 가짜 진리, 부족한 진리 속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빠가 되는 마음으로 그렇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래서 희동오이(喜同惡異)라고 합니다. 율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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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자는 선비는 절대 희동오이 하면 안 된다. 기쁠 희(喜) 같을 동(同) 미워할 오(惡) 다를 이(異). 나랑 같은 편은 좋아하고 다른 편은 미워하는 그 욕심의 마음, 요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왔기 때문에 그동안 진리가 눈에 안 보인 겁니다. 불교는 기독교를 미워하고 기독교는 불교 미워하고. 삼성은 LG 미워하고 LG는 삼성 미워하고, 또 다른 나라 미워하고. 진보당은 보수당 미워하고 보수당은 진보당 미워하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미워하는 행위가 나는 꼭 정당한 것 같아요. 그런데요 세계사 책을 제가 꼭 보시라는 게 “그렇게 그렇게 미워하고 서로 살다 보면 딱 이 꼴 나는구나” 하는 게 세계사에 끝없이 쓰여 있습니다. 다 그렇게 살았어요 선조들이. 선조들은 머리 안 좋아 가지고 예전에 지금 우리처럼 못 살았을까요? 우리 사는 거요 만 년 전에도 2천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조선시대 사색당파 할 때도 똑같이 이렇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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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뭐 나올 줄 알았죠. 또 똑같아요. 전반이, 이 양심의 진리의 영에서 자유를 얻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이게 펼쳐질 때 최소한 과반수, 51%라도 될 때 저는 이런 사회로 우리가 진입한다고 보고. 요한계시록에요, 요한복음의 저자가 썼다고 전하는 요한계시록에서 내린 결론이 선이 승리해서 지상에 천국이 펼쳐진다는 내용은요 결국 제가 말씀드린 방금 이거라고 봅니다. 과반수 이상이 진리의 영을 따를 때 그 사회를 새 하늘 새 땅 속에 사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새로운 시대라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쉬고,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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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53 기독교철학07 요한복음 5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