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해병대 대령 000 안수집사님께서
최근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하신 특강을 이메일로 받고 허락을 득한 후 비스 카페에 올린 내용입니다.
목회자의 길
2011. 7. 6(수) 000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순 서
■ 인 사 및 소 개
■ 서 론
■ 본 론 (목 회 자 의 길)
● 목 표 의 성 찰 과 정 진
● 목 회 자 의 위 상
● 목 회 자 의 품 성 과 역 량
■ 결 론
■ 3 일 만 볼 수 있 다 면
■ 인사 및 소개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는 000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만나서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우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저의 경력을 간단하게 소개 말씀 드리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해병대소위로 임관하여 전ㆍ후방 각지에서 지휘관 및 참모로 군 복무를 하다가 지난 2000. 8. 31부로 대령으로 퇴역을 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에 교육경력으로는 국방대학원, 연세대 행정대학원, 미국 유학 2회, 미국 해군대학 인사관리과정 등을 마쳤습니다. 그 후에 장래의 삶을 위하여 여러 길을 모색하던 중 2002년 10월에 예비군 지휘관 시험에 합격하여 경기도 안산에 있는 반월ㆍ시화산업단지 공단본부에 있는 직장예비군 여단장으로 2003.1.1부터 2008년 6.30까지 일하고 퇴직하였습니다. 예비군 지휘관으로 재직 중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ㆍ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국제를 포함 여러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관련 과목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 서 론
오늘 여러분들과 저에게 주어진 90분이라는 이 귀중한 시간은, 아무렇게 흘러 보내도 되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말 값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어야겠기에 과연 어떤 내용으로 무슨 말씀을 전달하여야 할 것인지? 특강을 준비하면서 자못 고민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회적으로 유명세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생을 아주 훌륭하게 잘 살아온 것도 아닌 반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각자가 받은 달란트 대로 목회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가이시고 사회적으로도 지역사회 내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여러분들에 비하면 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요.
생각해보면, 여러분들과 저와는 정말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전혀 다른 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배우고 익혀온 배경들이 거의 한 가지도 동일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목회자의 길”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여러분들이 지금 종사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것들을 사회의 한 사람으로써 아니 한 성도로써 실제 보고 느끼고 들은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는 과정에 귀에 거슬리는 내용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타산지석의 내용도 있을 것이며, 자성을 해야 할 내용도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진실로 바라는 것은, 거부감을 가지시거나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제가 워낙 말 재주가 없는지라 말을 유수하게 잘 못하더라도 격려의 눈빛만 보내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문자 한 번 써 볼까요? 조금 전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에 부합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논어 “예기(禮記)” 편에(논어의 오경: 詩經, 書經, 禮記, 易經, 春秋)
옥불탁(玉不琢)은 불성기(不成器)요, 인불학(人不學)이면 불지도(不知道)니라.
이는 “보배로운 옥이라 해도 다듬지 않으면 쓰임이 되지 못하듯,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면 도를 알지 못한다.“는 말로 ‘사람은 항상 자신을 뒤돌아 성찰하고 힘써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강조한 말이지요.
“이인(里仁)” 편에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니라.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의미로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킨 김에 하나만 더할까요?
“양약(良藥)이 고구(苦口)나 이리어병(而利於病)이요
충언(忠言)이 역이(逆耳)나 이리어행(而利於行)이라.“
즉,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좋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듣기에는
거슬리지만 실제 행하는 데 좋다는 말입니다.
■ 본론 (목회자의 길)
1. 목표(꿈)의 성찰과 정진(Introspection and Devotion of Dream)
사람마다 자라면서 나름대로 삶의 목표 즉, 꿈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최초 신학교를 입학할 때 그리고 졸업 후 세월이 지나 목사 임직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목표를 세우셨고 지금은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루셨습니까?
저도 해사에 입학할 때에 여느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해군의 참모총장이 되어 멋진 군 생활을 마치고, 나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누리며 살아보겠다는 말 그대로 청운의 꿈을 꾸고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 꿈은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위관장교 시절까지는 원래의 목표(꿈)를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영관 장교가 되면서부터 즉, 세상을 조금 알게 되면서부터는 안타깝게도 그 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 했습니다.
왜냐고요? 한마디로 세상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계급사회에서 무엇보다 진급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데, 진급 시 보게 되면 오직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 업무능력이 아닌 지연과 학연, 돈으로 매관매직하는 사례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렸습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오직 충성심, 열성, 능력으로 승부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었지요. 정말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졸도까지 하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령까지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드디어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령에서 장군으로의 진급이었습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출세나 성공을 하고 싶었고 꿈의 결승점까지 가고 싶었으며, 주변에서의 수없는 유혹이 저를 현혹하기도 했었지요.
그렇지만 그 무엇도 저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동안 인생 살아오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고 묵묵하게 지켜온 자긍심과 가치관, 업무능력으로 선후배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을 한 순간에 잃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닌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비리에 타협하여 명예를 얻은 기쁨보다 제가 어떻게 커왔는지를 알고 있는 제 가족과 자식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결과는 뻔했지요.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저의 결단은 아름다운 결단이었고 진실로 불평도 후회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에게로 이야기를 옮겨 가볼까요?
조금 전에 목표(꿈) 이야기를 하면서 제 꿈 이야기로 시작을 하였는데, 여러분들은 꿈이 성도가 최소 일만 명이 초과하는 대형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시는 것이었나요?
국내든 해외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었나요?
교단 총회장의 명예를 얻는 것이었나요?
신학을 좀 더 깊이 있게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덕망 있는 교수로써 학교 강단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꿈꾸었나요? 아니면 사회복지사업을 병행하는 것이었나요?
내로라하는 원로목사님처럼 교계에서의 높은 명성을 원했나요?
아니면, 비록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조그맣고 아담한 교회에서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며 복음 전하는 사역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었나요?
물론, 여러분들도 목사이기 전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대형교회, 많은 성도, 높고 넓은 강단 위에서 멋있게 말씀을 전하고, 좋은 사택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기독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위상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그야말로 축복받은 목회의 백미(白眉)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재의 여러분들에게 놓인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마다 주신 능력과 은사가 제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지만 이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테니까, 다시한번 여러분들이 가졌던 목표와 꿈을 현실에 맞게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 모든 학생들이 모두 서울대학교를 다 들어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울대 가는 사람도, 연ㆍ고대에 가는 사람도, 아니 지방대나 산업대 및 기술대에 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곧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여러분들이 성취한 꿈의 질과 양이 여러분들 스스로가 만족하든 그러하지 않든지 족하다 생각하시고 여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도를 지키며 여호와를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명령과 규례를 잘 지켜 사는 것에 전념하시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욕심과 갈망은 아무리 생각해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 40이면 족한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각자는 높은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멀리 갈 사람은 신발 끈을 동여매고 높이 날 새는 자세부터 낮춘다”는 말이 있는데, 각자 현재 처한 상황에서 지혜롭게 판단하여 꿈의 높이와 깊이를 잘 조절해 과욕으로 결코 원치 않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정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용머리는 못되어도 뱀 머리가 되어 자기만족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 목회자의 위상(position of the minister/pastor)
지도자는 “어항 속에 들어 있는 금붕어와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는 말도 행동도 조심하고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 볼 것과 보지 않을 것을 분별해서 해야 합니다. 또한 지도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관대하며 항상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며, 사랑과 친절을 베풀면서 겸손함과 솔선수범으로 살아야 타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으며 신뢰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종인 여러분들은 목회자로써 앞에서 말한 사항들에 대해 더할 나위가 없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길을 걷는 분들이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든 성도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이제 이것을 이해하셨다면, 만사 튼튼 이라는 말처럼 매사를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위상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얼마동안은 조심하다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 긴장이 이완되고 이를 망각하게 되어 결국은 성도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그러나 직위 상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혼자 생각하고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있고 돈이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정말 가슴에 새기고 경계해야 할 말입니다. 또한 지도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체하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판단력과 혜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한 성패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여러분들의 위상이 그러합니다.
목사님들은 여타의 사회 지도자들처럼 늘 고독합니다. 효율적인 복음증거와 교회부흥을 위해 고심하고 성도님들의 안위에 문제가 있을 때에도 함께 울고 웃는 즉, 동고동락하는 분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마 어떤 분들은 이 적적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인접해 있는 친구 목사를 찾아다니거나 전화를 하거나 또는 다른 일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목양실이라는 집무실을 주는 것은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도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교회의 각 기관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에 전할 설교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연구하며,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컴퓨터를 비롯한 사무기기와 관련서적 등을 구입하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이러한 책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의 공간이요 사명의 공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목사는 그래야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써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게 되면 세상으로 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이로 말미암아 덩달아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죄 없는 성도들까지 손가락질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너무나 흔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아니라고 강변하실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결코 이 영역에서 자유로울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공동 운명체이니까요. 솔직히 말해 부흥하고 커가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렇지 않은 교회의 담임목사보다 무어가 달라도 다르게 위에 열거한 일들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목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아무렇게나 지칭할 수 있는 위상도 아니기에, 일반인과는 분명 다른 절대적인 신성함과 위엄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부합되는 품성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위상은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 어느 조직이나 단체든지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데,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목회자의 품성과 역량(Character and Quality of Pastor)
목회자들이 지녀야 할 품성과 역량은 사회의 일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그것과는 유사한 점도 있겠지만, 그 정도나 깊이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어야 하며 또 달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계시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목회자는 이 사회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사임직을 받기 전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목사임직을 받은 후부터는 확실히 그렇다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사이기 전에 목자로써 성도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거나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앞장서서 인도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사회의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낙심하거나 상처받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들 중에도 자라면서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란 분들도 있고,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는 사랑을 받고 자란 분들은 타인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는 받으려만 하고 주지는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거만하고 교만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성도들 중에 정말 사랑을 애타게 목말라 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여러분들은 그분들이 누구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분들을 찾아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 눈을 잠시 바깥으로 돌려보면,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에 사랑을 나누어 드려야 할 분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름지기 여러분들은 이분들에게도 교회의 여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교회 이름으로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들 자신과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 여러분들은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데 일조를 하게 되는 목자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둘째로, 겸손의 미덕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겸손과 겸허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겸손(謙遜)의 의미는 “남을 높이고 제 몸을 낮추는 태도가 있음”을 말하고, 겸허(謙虛)의 의미는 “겸손하여 잘난 체하지 않음”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겸손은 겸허와는 의미의 차이가 있고 겸손하여야 겸허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겸허함을 겸손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국어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겸손이 선행되어야 겸허함을 나타낼 수 있는 데, 마치 겸허함이 겸손함의 선행인 것처럼 생각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행위를 하지만 겸허함의 행위를 하면서 실제로는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몸을 낮추지 않음은 물론, 속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다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을 얼마든지 엿볼 수 있거든요. 이는 어제 오늘 사이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이 사회에 오래 전부터 만연돼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말로 또는 행위로 자기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속마음으로 상대방을 자기 잣대로 재어보고 견제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요. 겸손한 체 겸허함을 보이는 처사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과 인간관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겸손과 겸허의 의미를 이제 알았으니, 누구에게든지 겸손의 미덕을 즉,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와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 목회자가 지녀야 할 지고의 선이 아닌가? 라고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첨언합니다.
셋째로, 솔선수범하여야 합니다.
솔선수범은 정말 말이 쉬워서 그렇지 지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선, 솔선수범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하고,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내가 먼저 앞장서서 행해야 하며,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하여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남한의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에서 중대장을 할 때였습니다. 백령도는 지금도 북괴가 마음만 먹으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탈취할 수 있는 지역으로서, 군에서 여러 방법을 이용하여 이를 억제하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도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여 놓고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와 대만 사이에 대만 영토인 “금문도” 가 있는데, 혹시 아시는 분 있습니까? 이 섬은 각종 장애물 즉, 어뢰, 용치, 철조망, 지뢰 등으로 사주방어망을 구축하고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는데, 백령도도 금문도처럼 방어망을 구축해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파도와 풍화작용에 의해 용치는 물론 매설해 놓은 지뢰가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있든가 아니면 지표면으로 노출되어 있어, 때때로 이들을 정리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방탄복과 지뢰탐지기를 휴대시켜 현장에 투입명령을 하게 되면, 그렇게 군기가 세고 일사분란하다는 해병대 병사들이 감히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일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중대장으로써 고민이 있었지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 하여 엄한 군율을 적용하여 처벌하자니, 내가 사랑하는 부하에게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전시가 아닌 평시에 말입니다. 전시 같으면 바로 상황은 다르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때 장수가 지녀야 할 덕목인 솔선수범을 적용하였지요.
제가 먼저 앞장서서 현장에 들어가면, 그때야 비로소 부하들이 자기들이 앞장을 서게 되고 임무를 이상 없이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이요 공동체인 교회를 맡고 있는 담임목사이십니다. 성도들 앞에서 설교시간에 말씀하신 내용은 여러분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에 대한 권위와 신망을 한꺼번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복음전도와 심방도 섬김도 모두 앞장서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합니다. 1주일, 아니 일 년 내내 바쁘고 힘들겠지만, 전력을 투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성도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요 사랑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때만이 성도는 따릅니다.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목사가 몸이 열 개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지만, 어떤 조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것이 권한 위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들이 솔선수범하여 언젠가 여러분들이 의도하는 대로 체질화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때에 여러분들께서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선책을 찾아 권한위임을 해주고 필요한 감독을 하여도 될 것입니다.
너무 큰 집이나 화려한 차도 삼가고, 성도 중에 카드를 주셔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부흥성회에 오셔서 마치 이를 자랑하듯 말하며 자기과시를 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설사 그랬다고 해도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 목회사역을 하면서 여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분명 기업체의 CEO는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전반의 운영에 대한 성패책임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나 여러분들에게는 그만큼 솔선수범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드리기 위해 강조한 것이라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넷째로, 전문성 제고를 위해 항상 연구하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요즈음은 말 그대로 정보 홍수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내용은 무엇이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검색하여 알아내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서점에 가면 분야별로 얼마나 좋은 양서들이 많이 있습니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복지 등 분야별로 얼마나 급속한 변화를 하고 있습니까? 이 변화에 적시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사회와 환경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인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보다 매사에 저만큼 뒤떨어져 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 교수들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이론이나 실상을 파악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여 그저 알고 있는 지식만 믿고 학생들을 가르치려 한다면, 그야말로 웃음꺼리밖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이 아무리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여도 사회에 나오면 이론과 현실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에, 현실 적응을 위한 노력을 하듯이, 여러분들 역시 학교에서 배운 이론보다 날로 발전하는 새로운 목회 현장에서의 실제를 연구하고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사역이 목회의 70%이상이며, 설교의 성패가 교회성장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목회사역에서 차지하는 설교의 비중과 중요성을 설파한 내용이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주제를 설정한 후, 충분히 연구하여 원고를 작성한 다음에 반드시 리허설을 하여야 합니다. 리허설을 하지 않으면, 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가 아닌 원고를 읽어 나가는 모습이나 중언부언하거나 잡담을 하는 모습으로 보이기가 다반사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어 설교시간을 지루하게 하거나 짜증스럽기까지 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감을 잃게 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을 민망하게 하고,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시간 맞추기에 너무 구속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설교시간은 30분을 반드시 채워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는 이 시점에서 딱 끝마치면 좋겠다 싶은데, 또 이어가니 이미 크라이막스가 지난 것이라 그만 흥미유발도 안 되고 집중도 되지 않는 설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시간에 구속될 필요가 꼭 있는 것일까요? 10분이 족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설교주제와 부합되는 것으로 흥미유발(동기유발)을 위한 예화와 전하고 싶은 말씀을 요목식으로 간결하게 효과적으로 전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이것이 오히려 시간을 길게 하고 비슷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아, 오늘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도 안 되게 하는 것보다 예배 후에까지 잔잔하게 여운을 남기고 기억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공부와 연구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설교 실력자들의 동영상을 보면서 절차탁마 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도 작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괴성으로 들리면 되겠습니까? 달고 오묘한 말씀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바람직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여기 여러 조직이나 단체의 리더들의 패턴을 조사하여 분석한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그 내용인 즉,
① 영리(지혜)하고 부지런한 리더
② 고집스럽고 지혜롭지 못하며 부지런한 리더
③ 영리(지혜)하고 게으른 리더
④ 고집스럽고 지혜롭지 못하며 게으른 리더입니다.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분류하는 내용이 다소 상이하겠지만 거의 이 4가지 패턴에 가깝게 분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이 중 어디에 해당 되십니까?
제일 바람직한 리더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리더이며, 제일 바람직스럽지 못한 리더는 두말할 것 없이 지혜롭지도 않고 고집스런 리더라고 합니다.
① 리더는 우선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리더가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아래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됩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소신이 있습니다. 즉,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또는 “정직한 끝은 있어도 거짓의 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정직하려 노력했고 정도를 걸으려 했고 거짓으로 상관 앞에서 교언영색을 하거나 잘못을 회피하거나 변명하거나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를 지양했습니다.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려 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정직하지 않고 주어진 책무에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 부대관리를 잘하지 않으면서 상급부대 검열이나 시험이 있을 경우에 잘하려면 마음이 부담스럽고 꺼림칙하였습니다. 여러분! 평소에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여러분들이 맡아 하는 사역에 일정한 원칙을 세우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노라면 그 상급은 하늘나라에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며, 이심전심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알고 여러분들을 신뢰하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② 리더는 비전과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는 자신이 맡은 조직의 미래(비전)를 예견하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의 예견은 과대 망상적 미래가 아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미래를 말합니다. 이 비전은 단발성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의 교회를 성도 1만의 교회로 부흥시키겠다고 한다면, 이를 위해 실행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과 계획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에서 서민복지를 위해 “복지비전 2030”이라는 정책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적인 기도로는 달성(응답받기)하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적자원의 확보, 구성원의 능력을 고려한 세부 업무분담, 연령층별로 담당하여야 할 역할,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인구학적 특성(남, 여, 연령비, 경제능력, 직업, 성향, 학교, 주택의 종류/아파트, 빌라, 독립주택 등)을 분석하여 공략(전도)방안을 구상하여야 하겠습니다. 비전 성취를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신념입니다. 조금 잘 된다하여 혹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하여 일희일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어쩌면 비전도 비전이지만 이 신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할 수 있다/꼭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신념과 교회 성도 총원의 신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말 낭패가 될 수 있으니까요.
③ 리더는 조직의 운영기술과 적절한 권한위임을 해야 합니다.
모든 조직은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을 고려해서 편성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은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 조직도 대통령 혼자서 방대한 국가경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휘하에 비서진과 국무총리, 각부 장관을 두어 통치하도록 하고, 군대도 사단장이 거대한 사단을 혼자 지휘 통솔할 수 없기 때문에 사단장과 참모, 예하에 연대, 대대 등으로 부대를 편성해서 조직운영의 효율성과 전투력 발휘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출애굽할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백성을 모세 혼자 인도하고 다스리는 것을 보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각각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여 재판할 것을 가르쳐주었지요. 교회에도 당회장을 중심으로 한 여러 조직들이 교회 형편에 맞게 편성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은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용병술이 탁월하여야 합니다. 편성된 개개인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잘 할 수 있는 임무위주로 임무를 부여하여, 잘했다 칭찬하면 정말 잘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남자는 칭찬(인정)받기 위해 살고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을 통한 경영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심적 부담을 훨씬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의도(방향)만 직분자들에게 말해주고 진행여부를 적절하게 감독하면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주어진 직분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고 활성화시키면 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분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회를 위해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라는 뜻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조직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게 하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편성을 합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과거에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조직을 통한 업무수행이 전혀 없어 우왕좌왕하고 체계도, 질서도 없었으며,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언과 건의를 하였는데, 이를 경청하지 않고 대략난감하게 진행하다보니 훨씬 능률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행사를 비효율적인 것으로 하는 모습이 정말 안타깝기까지 했었답니다. 아무튼 교회 조직은 여타의 조직처럼 종적인 관계가 아닌 횡적인 관계로 거의 대등한 구성원들로 편성하고 있지만, 조직을 통한 운영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 조직 운영의 활성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적절한 권한위임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동역하고 있는 부목사나 전도사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고 관장하게 할 일은 과감하게 위임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육체적, 신체적 피로감과 긴장도를 덜 수 있어 능률적으로 주어진 사역을 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들은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혼자 다하려 합니다. 나보다 경험과 연륜이 짧은 사람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도 맡길 수 없으며, 맡기고 보면 늘 시원치 않고 불만족스러워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매우 비현실적인 처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후배들을 여러분 보다 훌륭하게 육성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권한을 위임하되 뒤에서 지도 및 감독을 철저히 해서 홀로서기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④ 리더는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으로부터 정부 조직을 포함하여 구성원들 간에, 상하 간에, 동료 간에, 정부와 국민 간에 이르기까지 의사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상호 의사존중이 되지 않고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정책은 있으나마나며 그 조직은 화합할 수 없고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잡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사 소통의 부재는 정치 발전의 가장 큰 저해요소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때로는 리더의 독단과 카리스마가 요구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꼭 필요할 경우에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무엇을 하려 할 때, 리더가 즉흥적으로 “이것을 하자 또는 한다.”라고 말을 해 버리면 나중에 구성원의 반대의견에 부딪히는 경우 그 말을 거두어들이기가 영 어렵고 힘이 듭니다. 따라서 기술(테크닉)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엇을 하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무엇을 언제까지 하였으면 좋겠는데.......” 라고 운을 띠우는 방식이 좋은 방법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이 바로 “임무형”입니다. 그리 해놓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수렴)하여 최선의 방안을 선택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결심하면, 모든 사람이 불평이 없을뿐더러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될 수 있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키도록 하며, 중간보고를 받고 필요한 경우 보완하거나 추가적인 지침을 주어 발전시키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의사결정과 실행의 원칙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보면, 담임목사가 당회에서 교회발전을 위해 무엇을 하자고 해 놓고 장로나 기타 구성원들의 반대의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 일의 필요성과 구체적 계획, 방법, 대안 등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실행을 강요하면 반드시 무리수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반대에 부딪히면, 그 반대의견을 경청하지는 않고 어떤 경우에는 반대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마치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또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천만부당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어떤 사안을 구상하고 시행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구상을 먼저 “임무형”으로 알리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한 다음, 전체 성도들에게 상세하게 알려 주어야 하고 지지(동의)를 얻은 후에 시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조금 늦은 것 같아도 빠르고 하나 된 마음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는, 일반 성도들은 물론 교회에 다년간 소속되어 섬기고 있는 안수집사나 권사들도 누가, 무엇을, 언제, 왜 등을 전혀 모르고 실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예산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산은 바로 돈이고 돈은 아시겠지만 모두에게 상당히 민감한 일이지요. 실제적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⑤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와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관계가 어떤 관계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의 운명이 거의 좌우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회복지학에서는 사회복지사와 ct'와의 좋은 관계를 “라포(lapport)"라고 합니다. 이 관계에 따라 사회복지실천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비중을 두고 취급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목회사역에서도 어쩌면 성패의 전부를 판가름 하는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달콤하고 오묘한 설교말씀이라도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인간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 설교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꽹과리 울음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목회사역에서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목회현장에서의 인간관계는 목회자와 부교역자, 장로, 평신도와의 관계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관계들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리더의 자질들을 연마하여야 가능할 것입니다.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정직하고 성실해야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릅니다. 전문성이 있어야 인정받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해야 상대방도 내 말을 경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고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 결 론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같이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는데, 혹시 불편하거나 지루하지 않으셨는지요? 아무튼 끝까지 경청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목회자를 지도자로 비유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말씀드린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의 최초목표(꿈)를 성찰하고 정진하시기를 권면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가질 수 있고 또한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과대 망상적이고 허황한 것이 아닌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나이 들어 만족할 줄 아는 것도 지혜인 줄 압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안 되는 것을 무리하게 이루려 한다면 오히려 시간과 노력 낭비는 물론, 경제적 손실, 심신의 피로를 가져와 전체적인 목회사역에 폐해가 됨을 직시하시고, 약간은 낮추어진 꿈으로 조정하여 정진함으로써 꿈을 이루는 것도 결국은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목회자의 위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자는 아무나 할 수 있고 지칭될 수 있는 위상이 아니며, 항상 외롭고 고독하며 말과 행동, 먹을 것과 입을 것, 볼 것, 보지 않을 것,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어항속의 금붕어처럼 4방8방에서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투명한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교회의 전반적인 성패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어야 하는 위치라 하였습니다.
셋째, 목회자가 지녀야 할 품성과 역량(자질)에 대해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첫째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즉 “사랑”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데 이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나누어 주셔야 하며, 베풀어주셔야 하는 하나님의 종이심을 망각해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둘째는 겸손하셔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겸손과 겸허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진정한 의미의 겸손에 대해 말씀드렸으며, 현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형태로의 겸손을 행할 수 있으니 이를 절대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을 낮추고 남을 높여야 하는데, 낮추지 않고 낮추는 체만 한다는 것이며, 속마음은 상대방을 견제하거나 무시하는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셋째는 솔선수범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섬김에 있어 몸이 열 개라도 되는 듯 최선을 다해 섬김의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고 신뢰받을 수 있으며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넷째는 연구하고 공부하여 전문성 있는 목회자이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평소에 자신의 전공분야를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목회자인 여러분들도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최고가 되는 것은 결코 높은 이상과 꿈만 가지고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한 땀과 눈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항상 절차탁마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다섯째는 바람직한 리더십을 갖추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리더의 4가지 분류를 말씀드렸고 최상의 리더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리더라 하였습니다. 리더십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이 수없이 많지만,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요구되는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첫째는 정직과 성실함입니다.
여기에는 여러분들 사역에 자부심과 긍지가 겸비된 것이어야 참 정직과 성실함이 묻어나올 수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비전과 신념을 말씀드렸습니다. 비전은 앞에 말씀드린 목표(꿈)의 일부이지만, 현실과 직면한 비전이면서 미래에 대한 예측과 기대의 그림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분석된 현 상황을 극복하여 목회의 비전을 달성할 기회이기도 하며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고 줄기차게 참을성 있게 꾸준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셋째는 조직을 통한 운영의 활성화와 적절한 권한위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필요해서 조직하였고 편성하였을진데,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충분히 유효적절하게 활용하여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교회운영이 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보며, 적절한 권한위임은 여러분들의 육신적, 정신적 피로감을 덜고 후배들의 육성에 대한 책임과 의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봅니다.
넷째는 의사소통을 강조하였습니다. 의사소통은 한 마음이 되게 하고 불신을 없게 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첩경이기도 합니다. 열린 자세로 목회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사항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바람직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째는 좋은 인간관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목회사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리더가 갖추어야 할 사랑, 겸손, 솔선수범, 정직과 성실, 전문성 등을 겸비하여야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타협은 안 되며 원칙을 준수하여야 합니다.
이상으로 오늘 여러분들과 나눈 말씀들을 결론 겸 요약을 하였습니다. 끝으로 모두 영육 간에 강건하시고 이 세상을 건강하게 하시는 영혼구원의 사역자로서 바른 길을 가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참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주시길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헬렌 켈러 여사의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낭독해 드리는 것으로 이 시간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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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 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친구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눈 뜨고도 두 귀 열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할 말 조차 없다니..........
그래서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만약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제목으로 ‘애틀란틱 먼스리’ 1933년 1월 호에 발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글은, 당시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을 적잖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습니다.
첫째 날에는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셜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보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누구나 경험하고 사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