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본받아
2023년 6월 11일 창 22:1-12
1. 설교 에피소드
(1) “40년은 좀 심했다.”
저는 신당동에서 났고 어려서부터 왕십리중앙교회를 다녔습니다. 신학대학원을 가면서 교단이 바뀌어 그 교회를 떠났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그 교회에 가서 오후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저를 가르쳤던 교회학교 선생님부터 시작하여 우리 동네 사셨던 구역식구들, 중고등부 시절 선후배들, 그리고 저희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설교를 하는 것이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이런 예화로 시작했습니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촛불을 켜고 앉아 있었는데, 긴장한 신랑이 화장실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신방에서 나오다가 그만 문돌쩌귀에 바지 밑단이 걸려 찢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밖에 나간 신랑은 경솔하게도 ‘신부가 음탕하여 예절을 잃고 뒤에서 내 바지자락을 잡았구나.’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갔다가 마음이 상하여 신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발길을 돌려 그 집을 떠나버렸습니다. 신랑은 떠나가고 첫날밤이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도 신부는 신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는 나오지 않고 누구를 막론하고 그 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죽어 자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 집은 흉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환갑이 다 된 신랑이 볼일이 있어 그 마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신랑이 그 마을에 들렀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지나간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집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40년 전 신방을 차렸던 그 집에 들러 방을 살펴보니 신방 문지방 돌쩌귀에 걸려 찢긴 신랑의 바지 조각이 보였습니다. 그 찢어진 바지 조각을 본 순간 신랑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어 신방 안을 들여다보니 기가 막힌 장면이 있었습니다. 신부는 원삼 입고 족두리 쓴 채 40년 전 첫날밤의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신랑이 40년 전 그날 밤 자신의 경솔한 오해를 탄식하고 탄식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에 신부의 어깨에 손을 얹으니 신부는 그만 폭삭 재가 되어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부로서는, 더없이 소중한 첫날밤에 신랑으로부터 정말 큰 오해를 받았고, 이것은 신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는 어디다 호소할 데도, 변명할 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신부의 깊은 한이 되었습니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요. 실제로 경북 영양 지방의 전설입니다. 아무튼 이 한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입니다. 이런 예화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2) 뭔 말인지 알지?
설교가 끝나고 난 뒤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데 저희 어머니가 조용하게 제게 귀띔을 해주셨습니다. “얘, 아무리 그래도 40년은 너무 한 거 아니니?” 어머니가 생각하시기에 40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어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에 대한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일한 소감이자 평가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지적에 제가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렸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순수하고 순진하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의 태도 가운데 좋은 점은 어머니께서는 너무 생생하게 설교를 듣고 받아들이신다는 점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으신 분인데, 집중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전설을 들어도 마치 실화처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 생각에는 40년은 좀 길고 5년이나 10년 정도로 하면 더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대목입니다. 또 하나의 소감은 좀 아쉬운 점인데, 그 예화를 통해서 설교자가 뭘 말하고자 한 것인지를 헤아리셨나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예화에 꽂힌 나머지 설교 전체의 주제에 대해서는 좀 산만해지셨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화를 들려드리는 까닭은 우리가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2. 창세기 22:1-12
(1) 이상한 이야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오늘 본문은 정말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이래도 되나?”, 말은 안하지만 실은 “하나님도 그렇지 어찌 이러실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건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는지 나름대로 궁색한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히 11:19상) 하지만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생각일 뿐, 창세기에는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2) 믿음을 보여주는 일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일화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포인트란 말입니다. 배경, 분위기, 흐름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나 죽으면 물가에 묻어다오.” 하는 청개구리 어머니의 유언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지요. 물가에 묻으라 했으니 곧이곧대로 물가에 묻으면 잘 이해한 것이 아니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 속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이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건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입니다. 등장인물은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만,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대목의 주제도 부자간의 윤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3. 믿음이란?
(1) 믿음은 순종입니다.
교회에서 믿음 얘기를 많이 하는데, 믿음이란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따르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따르는 것, 이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이 아니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지만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아는 대로 행하기보다는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 더 많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고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신과 마음의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손과 발의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며, 무슨 일을 하는가, 어디에 내 정열과 에너지, 자원, 돈을 쓰는가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은 이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핵심은 그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따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사실 이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믿음은 이해가 아닙니다. 내가 이해가 되는 것을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가 생각해봐도 그것이 좋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물론 순종입니다만,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내가 생각하기엔 아닌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런 순종의 화신이자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라시니 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이 누굽니까? 100세에 얻은 자식이자, 약속의 자손, 언약의 후손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와서 낳게 해 준 아들이 아닙니까?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요구이자 비정한 요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시면 안 되지요. 그러니 당사자인 아브라함에게 있어선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성경은 이 대목에서 침묵합니다.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마음이 어땠을 것이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이해되지 않는 명령에 대하여 묵묵히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 상충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이러고 싶은데, 성경에서는 다르게 말하네.” 그런 대목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 이른바 주일성수지요. 일주일간 얼마나 고단했는데, 하루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벌떡 일어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4. 아브라함을 본받아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 말씀이 나의 마음에, 내 생각에, 내 계산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음 가운데 묵묵히 따르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이 순종이 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뒤 15절 이하의 주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시는 복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18절 말씀만 봉독합니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복된 삶의 원인이 됩니다.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을 구원사의 시작으로 봅니다. 왜 아브라함이 구원의 시조가 되었을까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자식을 제물로 바친다는 비정한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이끈다는 비밀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죽으란 말이지요. 죽어야 산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죄악으로 망가져버린 인간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니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를 때 우리 삶이 진정으로 복된 삶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따를 때, 인생이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따를 때!
이해되지 않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누리는, 우리 하늘샘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