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대비하신 아시아의 하나님
------------------- 목 차 --------------------
Ⅰ. 들어가면서 Ⅱ. 아시아 신학의 이해 1. 아시아 신학의 태동 2. 아시아의 상황(정치․경제․문화) Ⅲ. 송천성의 생애 Ⅳ. 송천성의 아시아 해방신학 1. 뾰족코에서 넓적코로(제3안의 신학과 전위신학) 2. 희망의 씨앗 1) 민중을 살리는 대화 2) 자궁에서 태어나는 희망의 씨앗 3) 통애 하시는 하나님 4) 민중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 5) 아우르는 가슴 Ⅴ. 저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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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면서
현재 세계 교회 가운데 가장 작은 수의 교회와 미약한 신학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 아시아 교회이다. 종교적 전통으로 보아도 아시아의 기존적인 종교인 불교, 힌두교, 유교 등에 비추어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낯선 신흥종교는 그리스도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신학은 점점 현대신학에서 계속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학은 서구 신학이 중심적 지도권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질문과 자신들의 해석에 근거한 해답을 반복하는 폐쇄적인 구조를 지녀왔다. 서구 세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발전한 신학적 발상과 신학적 이해는 단지 부수적 참고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러한 서구 중심의 신학적 폐쇄성은 제 3세계의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새롭게 받아들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과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송천성은 이러한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배불뚝이 사내에 비교한다. 즉 큰 배에 소화도 되지 않은 음식을 가득 채우고 있어 걷거나 뛰기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그 배는 서양 교회에서 만들어내고 전통신학에서 제시하는 각종 신학 학파, 각종 성서 해석의 이론, 문화와 종교에 대한 서구 그리스도교적 이해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서구 신학적인 내용물로 가득 차 있는 배 속에 풍부한 문화적인 유산과 활기찬 종교 및 복잡다단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광활한 아시아가 자기 자리도 만들어야겠다고 하면서 비집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 배는 터질 것만 같은 고통스런 소화불량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그 소화불량을 치료하고 아시아의 심성에 꼭 들어맞는 신학을 이룰 것인가 하는데 있어야 한다고 송천성은 지적한다. 이에 본 발제는 아시아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이와 함께 아시아를 기반으로 하는 송천성의 신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신학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려 한다.
Ⅱ. 아시아 신학의 이해
1. 아시아 신학의 태동 아시아 신학의 본격적인 태동은 세계 2차 대전 후 앗아간 식민 상태에서부터 해방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아시아 신학 운동은 아시아인들이 서구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상황 가운데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이런 아시아 신학에 대한 논의는 아시아 교회 협의회(WACC/CCA)의 구성 배경이 된다. 아시아 교회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는 세계교회 협의회 (WCC)의 제안에 따라 아시아의 지정학적 범위를 인도에서 한국에 이르는 축과 중국에서 뉴질랜드에 이르는 축을 중심으로속하는 아시아 교회 협의회의 회원으로 채택하고 있다. 1959년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은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과의 상호관심과 연대감을 나누기 위해서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아시아 교회협의회(EACC)를 결성하였다. 그러다 1973년 제 5차 총회에서 EACC는 구조 개편을 통해 아시아 교회 협의회(CCA)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제 3세계 신학으로서 아시아 신학은 EACC/ CCA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상호의 관심을 나누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적 자기 전개를 가능하게 하였다. ECCA, CCA가 구성 되면서 아시아의 교회들은 기존적 교단의 모교회의 관계를 벗어나서 세계 교회 안에서의 아시아적 교회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아시아 신학의 핵심은 아시아인들의 상황 가운데서 아시아인들의 삶의 주체성을 고양시키는 신앙으로 아시아인들의 역사와 문화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의 사회정치적인 문제와 종교문화적인 현실에 관련되어야만 세계의 다른 신학과의 강조점과 신학적 전망이 구별되는 아시아 신학의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2. 아시아의 상황
1)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상황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수세기에 걸쳐온 강대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온 식민지 국가들이 많이 있다. 빈곤과 불의 그리고 착취의 삶이 아시아 국가들의 현실이며, 이러한 극단적인 불균형의 모습은 계층 간의 모순과 국내 외부세력의 지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시아의 상황에서 우리는 여러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원조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외국의 원조는 제국주의 측의 입장에서는 상품을 매우 비싼 값에 처분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저개발국을 세계 독점 자본주의의 휘하에 잡아두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시아 저개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의 지배아래 있는 IMF「세계은행」(the World Bank)의 기구로부터의 원조에 직접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지원 받은 외국 원조의 상환문제, 즉 높은 이자율과 촉박한 상한기일 그리고 선진국 기술이전에 따른 과다한 내용문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다음으로 식량의 자립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아시아의 식량문제는 자립을 위한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식량 부족은 곧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에게 더욱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미국 제국주의 세계 권력개념에 따르면 식량은 곧 힘이다. 식량의 의존은 점차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넓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의 민중들은 빈곤과 실업의 문제에 당면하고 있다. 대량 빈곤, 실업, 인플레이션에 의한 가격 상승 등이 아시아의 비사회주의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대 경제 문제들이다. 또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지배계급들은 인플레이션의 부담을 노동 민중에게 계속 떠넘기고 있다. 그들은 절약이 가능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항목은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뿐이라고 인식한다. 노동대중의 불만에 대해서는 각종 노동악법 등 법률을 제정하여 억압하고 있다. 이렇듯 몇몇을 제외한 아시아의 대다수의 국가들은 강요된 가난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식민지국으로 고통을 당한 여러 국가가 다시 재편성된 자본주의 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빈곤과 불의 그리고 착취가 아시아 국가의 현실이며 이러한 극단적인 불균형의 모습은 계층 간의 모순과 국내외 세력의 지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아시아의 저개발국을 국제기구나 국가연합체등을 이용하여 독점 자본주의하에 묶어두고 있다. 그렇기에 아시아 신학은 억압적으로 강제되어지는 가난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결국 아시아의 신학은 이러한 아사아의 상황을 신학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
2)아시아의 문화 종교적 상황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문화의 세력 밑에 귀속되어 진다. 그리고 문화적 전통의 영향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반면 문화적 전통이나 문화적 환경은 종교적 신앙에 의해서도 조성됨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하여 아시아의 특성을 들라면 종교적 다원성의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아시아에는 7억이 넘는 이슬람교도인, 5억이 넘는 힌두교인, 2억이 넘는 불교인, 3천 8백만이나 되는 신도교인, 2천5백만이나 되는 도교 인들이 있다. 이러한 종교들이 오늘날 아시아인의 심성과 삶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란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전통종교들을 제외시키고 아시아의 문화, 습관, 생활방식, 신조, 개념, 철학 등을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이야기 이다.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많은 종교들 주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소수 공동체의 종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과 견주어서 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은 5%에 불과 할 뿐이다. 이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전파되지 않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교리를 어떻게 아시아의 문화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하는 과제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종교다원주의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교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고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무 설득력이 없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인 아시아에서는 다원주의에 적합한 신학이 모색되어지고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은 남의사고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어떠한 개념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시아에서 종교는 삶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으며, 전통종교를 언급하지 않고는 아시아의 문화, 습관, 생활양식, 철학, 사상 등 어느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의 다원화된 상황 속에서 타종교와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다.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소수 공동체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교가 아시아 전통종교들과 대화하지 않는 한 예수그리스도는 의미를 지닐 수도 없고 수용될 수도 없으며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결국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의 다원주의적 종교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종교들 간의 대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 종교 간의 대화는 종교들 간의 개방을 조성하며, 각 종교들의 신앙의 정수를 이해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Ⅲ. 송천성의 생애
(C. S. Song)송천성은 1929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장로교인으로 성장한 그는 대만 국립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대남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후에 신학기금 협회의 책임자로 있었던 쇼키 코(Shokie Coed)의 주선으로 영국 에든버러의 뉴 칼리지에서 신학사(B. D) 학위를 받았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유니온 신학교에서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중국 교포인 메인 만(Mei-Man)과 결혼했다. 그는 대만 장로교 교단 신학교인 대남 신학교에서 구약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으며 1965년에는 쇼키 코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하여 1970년 10월 장개석 정부에 의해 대만인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그의 정치 노선 때문에 강제 출국되기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로는 1971년부터 1973년 여름까지 뉴욕 개혁교회 프로그램 협의회의 아시아인 목회 담당간사로 수고하다가 1973년에서 1982년까지 제네바의 WCC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1976-1977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였다. 1985년 이후로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 있는 태평양 신학교에서 신학 및 아시아 문화학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1997년 세계개혁교회연맹 WARC(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 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 그리고 일본의 도시사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2004년 8월까지 WARC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Ⅳ. 송천성의 아시아 해방신학
1. 뾰족코에서 넓적코로
송천성의 신학 작업은 서구신학의 외피를 벗겨내어서 그것을 아시아적 상황에 전위시키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제삼의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제3안(第三眼)이라는 용어는 선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불교용어이다. 일본 선불교의 큰 선사인 스즈키는 ‘제삼의 눈'의 개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미혹 때문에 가리어졌던 전대미문의 세계를 볼 것을 원한다. 미망(迷妄)의 구름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처음 깨닫는 곳에 무한한 세계가 전개된다."
즉 제1안 혹은 제2안이란 일차원적 혹은 이차원적인 시각으로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밖에 볼 수 없지만 제3안은 직관 혹은 통찰에 의한 것으로서 평면적 시각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아시아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인의 직관에 따라서 사물을 보는 눈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송천성은 이러한 제3안을 주로 중국과 일본의 고전, 시가, 소설 등에서 찾고 있다. 물론 때로는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은 비기독교 선인들에게서 추구하기도 하지만 현대의 아시아 기독교 문학가들에게서도 찾으며 때로는 월남의 고통 받는 여인의 시에서 찾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시아인의 직관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 서구에서 발전되어진 신학적 주제들을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표현하는 자신의 신학을 '제3안의 신학(Third-Eye Theology)'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송천성은 이러한 새로운 시각을 사용하는 자신의 신학방법론을 '전위(transposition)의 신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제3안이라는 관점과 전위라는 것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실제 그의 독특한 신학방법론을 이끄는 동일한 기둥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전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전위란 일정한 시간이나 장소로부터 다른 시간이나 장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경 또는 이동과 같은 뜻이다. 2천년동안 서양세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이제 멀지 않아 제3세계로 옮겨질 것이며 이미 우리는 그 변화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둘째로, 전위는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 즉 다른 언어, 자세 혹은 표현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라고 한다.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전제조건으로 문화와 문화 사이의 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전위가 요구되고 있다. 셋째, 전위는 성육신이다. 의사소통에 대한 의미를 추척하다 보니 어느덧 신앙의 핵심을 다루게 되었다. 그것이 성육신이다. 이에 송천성은 복음이 다른 문화 세계로 옮겨질 때에 복음은 인간사회의 제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변화시킨다는 점을 포착한다. 이와 같이 전위의 의미에서 육화신학을 이끌어 낸 송천성은 아시아에로의 전위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흑인신학도 전위신학의 한 예이다. 미국이나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체험의 핵심은 흑색에 있다. 흑인 신학자들은 검은 피부 색깔로부터 인간의 영혼 안으로 파고들어가려고 모색하고 있다. 그들에게 드러난 것은 박탈당한 자, 빈곤한 자, 압제당하는 자들의 가슴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은 고통 받는 하나님의 가슴에 접하게 된다. 여성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신학에서의 하나님은 남성적인 힘과 권위를 지닌 인격체였으며 심지어 남성적 잔인성까지 띠면서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를 낮추는 일에 공헌했다. 그러나 여성신학은 남성적인 하느님 대신에 자애로운 사랑과 고통을 조용히 감수하는 하나님, 약한 중에서 강하며 부드러운 중에 굳세고 모든 아름다움을 포괄하는 친근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위신학에 있어 방해가 되는 장애물의 하나를 든다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교 역사의 관점이 되었던 소위 중심주의(centrism)란 것이다. 이에 우리의 과제가 있다면 구약성서에 초점을 맞추어 이스라엘을 자신의 중심주의에서부터 끄집어내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속으로 옮기는 일을 첫째 과제라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가 자기 백성들로 혈통-종교중심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 후에야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을 벗어나 광활한 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풀려 나가게 된다.
2. 희망의 씨앗
1) 민중을 살리는 대화 <농부의 달력>이란 시를 읽어 보자. 이 시는 베트남 민중들이 애송하는 오랜 전통을 지닌 시이다.
12월은 감자 심는 달 1월은 콩 심는 달 2월은 가지 심는 달 3월에 땅을 갈고 벼를 심으면 4월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남자는 갈고 여자는 김을 매 5월엔 추수, 고마우시 신령님들 올해엔 한 마지기에서 다섯 가마니를 냈구려 벼를 찧고 까부르고 왕겨는 거름이 되고 기울로는 돼지를 치고 내년에 소출이 곱절이 되면 당신께 도지세를 드리리다 풍년이든 흉년이든 언제나 있는 것은 당신과 나 우리 둘은 항상 있으니 항상 어느 한 편만 풍족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우리는 민중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민중은 무엇이 자기네를 굶주리게 만들고 무엇이 자기들을 짓누르며 무엇이 자기들을 쥐어 잡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권리가 있다면 어떻게 권리를 쓰고 어떻게 지키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 권리도 없다면 주장을 해야 한다.
송천성은 대만이라는 정치적 불의 속에서 억압당하고 말없고 힘이 없는 이들, 소위 민중들의 어둠을 함께 하면서 반체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아시아 신학의 인식 기초는 민중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아시아의 정치, 사회에 대한 이해는 민중을 알면서, 민중을 통해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민중의 실체는 무엇인가? 민중이란 “정치 권력자들의 희생물로써 무수한 잡초처럼 짓밟히고 있는 대다수의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한 민중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또한 민중 속에서 당신의 희망의 힘을 발휘하신다. 그는 남미의 해방신학, 정치신학이 갖고 있는 힘의 윤리나 혁명이론의 폭력성을 비난한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이루어져야 할 신학은 억압받으며 헐벗은 민중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민중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민중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신학이 “이야기 신학”이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민중의 문화 즉,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고난과 행복, 희망과 절망 등의 민중의 감정과 문화가 깊이 깃들여져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민중들이 마음을 열어 하느님과의 교류가 움트게 하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비밀스런 뜻을 찾을 수 있게 한다.
2) 자궁에서 태어나는 희망의 씨앗
베트남의 청산과부
- 첫 비극 -
노란 전보 단단한 타이프라이터로 찍힌 글자들은 죽음을 통지한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아리는 것임을 안다. 그래도 그녀는 종요히 다짐한다. 스스로를 향해 울지 말자. 이것은 싸움터에서 누구나 겪는 일.
이제야 비로소 눕는가, 조용히 지하에 묻히는가? 사랑하는 이여, 이제는 자유케 되었나니
끊임없이 미래를 생각한다. 퇴색한 믿음으로
자화상을 그린다. 높은 것, 조용한 생염이 감도는 둥근 눈, 폭탄들, 소염탄, 온통 검다. 남아 있는 것은 무(無) 전쟁에서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 누구인가?
혼란의 와중에서 그녀는 내려다 본다. 그녀 속에서 생명에로 다가가고 있는 태아를 삶의 비극에로 다가가고 있는 태아를 아가야, 아빠와 같은 사람으로 자라다오.
아시아인들에게 인간 희망의 집중이 자궁에 있다. 자궁을 통해서 인류는 생명의 신비에 접한다. 생명이 창조되고, 자라는 꼴을 갖추는 곳이 그곳이다. 그것은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현상이다. 자궁의 어둠 속에서 씨앗이 생겨난다.
송천성의 아시아신학 과제는 새로운 틀에 의한 변혁이 시도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신학이란 새로운 창조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 그는 아시아 여성신학의 신학적 근거를 좀 더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곳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여성의 창조능력인데, 바로 여성의 자궁을 인간 존재의 시작으로, 희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송천성은 자궁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여성의 본질 안에서 하느님의 구속 사업을 발견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적 구속적 사랑의 구현이다. 그리고 자궁에 수태되어 모양을 갖추어 가는 생명은 따뜻이 환영해야 할 희망의 징조이다. 따라서 여성은 응당 열심한 신앙인이요, 타고난 신학자이며 하느님의 통애를 곧 세상의 희망으로 알아듣는 탁월한 해석가이다.”
그는 이와 같은 자궁을 하느님이 간직하신 구원의 통애에 도달케 해주는 힘있는 신학적 주제로 승화시키고 이다. 이것이 “자궁의 신학(The Theology of Womb)”이다. 그는 자궁신학의 실체를 3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순종의 신학이다. 가부장적인 순종이 아니라 비천한 신세를 돌보는 자상함이다. 둘째, 불의와 압제와 증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정의와 자유와 사랑으로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뛰어드는 투신의 신학이다. 셋째, 자궁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이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희망과 생명이 한 육체가 되어 하느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로 역사를 밀고 나간다. 간단히 말해서 자궁의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혈연관계가 인간 공동체의 내면적 구조의 추축임을 깨닫게 한다. 자궁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공동체의 하부구조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궁을 통해 인류 역사에 들어가시며, 자궁을 통해 새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 위에 선 새 인간 공동체의 기초를 놓으신다. 공동된 혈연관계로 온 인류의 결속시키려는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자궁에서 시작된다.
3) 통애 하시는 하나님
- 기원전 3세가 중국 진시황제는 북방의 몽고 유목민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역사에 관하여 많은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 왔다. 그러한 이야기 중의 하나인 ‘맹 부인의 눈물’
“만리장성을 쌓는데 이상하게도 쌓는 대로 성벽이 무너졌다. 그래서 황제는 제물로서 결혼잔치를 하고 있는 완이라는 신랑을 잡아다가 성벽 속에 생매장했다. 얼마 후에 과부가 된 신부 맹 부인은 남편의 뼈라도 찾으려고 만리장성을 찾았다. 그녀는 성벽 앞에서 남편의 뼈를 찾을 길 없어 처절한 울음을 토해냈다. 그 눈물이 성벽을 감동시켜 성벽 한 모퉁이가 무너지면서 남편의 뼈가 나왔다. 진시황제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맹 부인을 불렀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를 황비로 삼으려 했다. 맹 부인은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하고 제단 위에 올라가서 추악하고 잔혹한 황제의 비행을 고발 하고 몸을 물에 던졌다. 황제는 크게 분노하여 맹 부인의 시체는 건져서 살을 썰고 뼈는 가루를 내서 버리게 했다. 그런데 그 살점들과 뼈 가루들이 작은 은빛 물고기가 되고 맹 부인의 혼백은 그 물고기들 안에 영원히 살게 되었다.”
아시아 사람들을 고난을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삶의 경험 바깥의 것이 절대 아니다. 물론 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하지만 싸우면서 동시에 그 고난을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고난에 대한 투쟁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투쟁이 되고 만다.
신학은 삶에서 시작하여야한다. 고난 속의 삶, 고난뿐인 삶-이것이 아시아인들의 삶의 자리이다.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현상적으로만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 고통의 실체를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영광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고통의 하느님 울고 괴로워하는 통애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천성의 신학은 아시아인들의 불의와 고통에 동참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아픔의 신학”을 말하고 있다. 송천성은 아시아적인 ‘애’의 감정을 승화시켜 ‘통애의 신학’을 말하고 있다. ‘애’는 동양 고유의 감정이다. 그래서 ‘애’의 하느님은 노여움의 하느님보다 동양적인 정감이 간다. 이같이 쓰라림이 담긴 의미로써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아픔의 상징이다. 그는 기따모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 받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조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고통이 사랑에 앞서기보다는 사랑이 고통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송천성은 통애라는 각도에서 보는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상대방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사랑은 통애가 된다. 여기서 사랑이 진할수록 아픔도 크다는 얘기가 도면 그만큼 통애가 세차다는 말이 된다. 사랑의 힘은 통애의 세기로 잴 수가 있다. 노여움 때문에 미움이 되지 않는다, 앙갚음으로 벌을 주지 않는다. …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 상대방은 온전과 건강을 보전케 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통애를 느낀다.… 그 통애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헌신이다. 인간 세계의 통애를 맛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림잡을 수 있다.
이 통애가 구약의 헤세드(hesedh) 아가페(agape)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느님의 처절한 통애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위하여 아픔을 앓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박고 있다고 이해한다. 하느님 사랑의 열렬함과 그 비극성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중심 곧 하느님의 통애의 최고 표현이신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라고 본다. 구원이란 하느님의 통애가 집 잃은 인간들을 찾아내시어 하느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대외적인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신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이다. 그래서 송천성은 신학적 모든 행위가 통애에서 우러나는 행위라고 말한다. 송천성은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그리스도 고통 안에서 이해하고 수요할 수 있는 근거는 아시아인들의 고통에 깊이 관여하는 공감하는 하나님 통애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고통 중에도 힘을 느끼며, 이 고통을 희망으로 새롭게 알아보게 되는 데 이것을 송천성은 희망을 이르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이 희망은 신학적으로는 곧 부활로 연결된다. 그래서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 속에 승리의 메아리를 듣게 해준다. 송천성은 고통을 통하여 부활을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 부활은 정치적 의미로 확대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4) 민중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
정치신학에서는 인간의 권력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정치신학은 인간의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무엇이 요청되는지에 관심을 둔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밖에 살면서 인간의 자유와 정의, 사랑을 찾는 아시아의 민중들에게 하나님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끊임없이 아시아를 속박하는 가난과 고통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송천성은 그의 저서 끝부분에서 예외 없이 정치신학을 다루고 있다. 그는 제이스 콘(James. H. Cone)의 흑인신학, 세군도(J. L. Segundo)의 해방신학, 그리고 아프리카 신학을 폭 넓게 수용하면서 참다운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성의 회복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하는 신학은 민중 신학이며 또한 그리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신학임을 강조하고 있다. 송천성은 민중이란 예수 시대나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도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문화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하고, 성적 인종적 계급적으로 차별 당한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이라 말한다. 이렇게 민중이 담긴 이야기는 하나님의 고난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실제로 민담에서 나타난 정치신학은 그리스도교 정치신학보다 강력하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강력하게 다가오고 있다. 송천성은 역사와 정치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역사적 하나님은 정치적 하나님이며 역사적 신앙은 정치적 신앙이다. 또 역사적 그리스도 공동체는 정치적 공동체요, 역사적 크리스찬은 정치적 크리스찬이다. 역사적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역사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정치사이다. 송천성은 ‘이러한 노예의 땅으로부터 해방으로 체험된 구원은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모세의 배후에는 노예 상태와 힘든 노동이라는 비인간적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 그들의 외침과 신음은 하나님이 들을 정도로 컸으며, 강력했고, 우렁찼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공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출 3:7-8)
이 출애굽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서적, 정치적 역사 핵심이 이스라엘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과 신음이 파라오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 하나님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읽게 된다. 민족의 강한 외침과 신음으로 무장한 모세는 강력한 정치 요구를 가지고 파라오와 맞섰다.
“나의 백성을 내어 보내라.”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도하에 해방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고대 근동의 역사적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라고 모세에게 위임한 하나님은 정치적 하나님이다. 이후 파라오와 같은 이방 군주에 대항한 해방 운동은 후에 내면화되었고 비인간화시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회적, 정치적 부분에 대해 지극히 관심을 보인 이유도 하나님이 정치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빛으로 허구의 정치를 폭로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치는 피 압제자들을 억압과 불의에서 해방시킴은 물론 압제자들을 그들이 통치로 강화하는 허식과 폭로 행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정치는 힘의 포악성에 대항하는 정치이며 권력의 변화에 목표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의 정치는 권력의 회개를 초래하고자 한다. 또한 송천성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린 민중으로 본다. 예수의 정치 활동은 권력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치를 메시아 정치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선교는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치는 불의를 정의와 대치시키고 사기를 진리와, 예속을 자유와, 테러를 사랑과 대치시키고자 한다.
5) 아우르는 가슴
송천성 신학의 특성인 종교․문화신학과 정치신학의 두 요소는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의 신학은 타문화․타종교적인 문제에서 가난과 소외를 낳는 정치․경제적 권력과 체제 문제 그리고 인권과 여성, 이데올로기, 인류의 평화 등의 일치를 위한 연대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송천성은 오늘 이 세계 속에서 하느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하는 숙고와 함께 개방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을 재구성해야 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과제를 발견한다. 송천성은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를 이끌어온 민중을 만나고, 아시아의 종교, 문화 뒤에 숨겨진 민중의 이야기를 찾아내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중의 힘을 배제시킨 종교나 문화는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신학에서 종교․문화와 정치가 서로를 매개로 하여 하나의 신학 체계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송천성은 그리스도 교회가 모든 권리를 재구성하고, 진보적인 인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하기 위해 지적 활기(Intellectual Vigor), 사회적 관련성(Social Relevance), 그리고 에큐메니칼 생명력 (Ecumenical Vitality)을 불러일으킬 것을 요청한다. 첫째, 지적 활기를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활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를 교회 내에서만 찾지 않고, 교회 역사 이전에 존재하였던 종교 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관련성을 가져야 한다고 송천성은 제시한다. 이는 그리스도교회가 지금까지의 중심주의의 배타적 자세를 버리고 비그리스도인, 이방인이라 비난하였던 세계와 다시 관련을 맺으므로 하느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고 계셨던 신비스러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신학적 자세를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견지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재구성은 교회가 화해의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인들 속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문화, 인종 및 종교적, 국가적인 배경에 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들 속에서 보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교회의 사명과 실체는 배타적이고 편협된 성격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성격을 띤다. 송천성은 이러한 것을 인식하도록 부르시는 분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교나 타종교, 타문화 속에서 재생의 작업을 계속하고 계신 하느님의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문화 해방”뿐임을 암시 하고 있다.
Ⅴ .저서 소개 그의 대표적 저술로서는 1993년 ‘희망의 신학’으로 번역된 ‘Christian Misson in Recontruction' 과 1982년 ‘아시아인의 고난과 신학’으로 번역된 ‘Third-Eye Theology’를 포함해서 ‘맹 부인의 눈물: 민중 신정치신학의 한 우화’ ‘예수, 십자가에 달린 민중’ ‘아시아 이야기 신학’, ‘아시아 모태 신학’,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등의 번역본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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