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李秉喆, 1910년∼1987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성그룹의 창업주이다.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다. 생애 초기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뿌리를 내렸다. 12대조 유(宥)가 승정원 좌승지, 6대조 태운(泰運)이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조부 홍석(洪錫) 대에 천석의 부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하고 영남의 거유라는 허성재(許性齋)의 문하로 인근에 알려진 유림이며 시문에 능하였다. 부 찬우(纘雨)는 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아버지는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성에서 이승만을 만나 서로 친분을 쌓았다.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한테서 자신의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청년기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에서 매달 학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이때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대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 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병철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터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1930년대, 대구 삼성상회.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사업가로서의 시작 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제조업과 기업 활동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사카린 밀수 사건 전후 1964년 8월 13일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고,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 것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가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병철 등이 직접 개입되어 있는가, 정부의 재벌 죽이기식 표적수사였는가의 사실관계 여부 확인은 오리무중이다. 복귀와 기업 활동 그러나 1966년에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1966년 11월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후 1968년 2월 이병철은 다시 경영에 복귀하였다. 그 뒤 모직회사가 성장하면서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고,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등을 설립하였다. 1975년 5월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그의 사후에도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말년과 사망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서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이듬해 다시 재위촉되었다. 미술에 심취했던 이병철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울산공단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에 폐암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사후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삼성전자는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고 장녀 인희는 한솔그룹을 창업하였으며 나머지 네 딸 중 막내인 신세계그룹의 회장 명희를 제외한 3명은 출가 후, 기업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계열에게 상속되었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제일그룹은 장남 맹희에게 상속되었다. 차남 창희는 새한그룹을 창립하였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되었고,1999년 12월에는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도 선정되었다. 폐암 진단 이병철은 1985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은 직후 어느 일본인 저널리스트를 만나 이병철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다.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담담하게 답하였다. 종교 그는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부조리, 종교들의 배타성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죽기 한달 전인 1987년 10월에 카톨릭 종교인들에게 던진 질문에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과 종교의 배타적인 행동들에 대해 묻는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며 첫 질문부터 종교의 급소를 찔렀다. 물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종교가 없어도,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라며 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부자를 악인으로만 취급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라며 항의하였다. 마지막 질문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것을 질문하기도 했다.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라며 당시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종말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첫 질문은 시작, 마지막 질문은 끝에 관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