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친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큼 기쁘고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친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하고 훈련해왔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성을 들었다는 체험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분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이미 듣고 있습니다. 또 더 잘 분별하고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 책의 방법들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이 책의 내용들 가운데 일부는 그러한 간증을 듣도록 만들어준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동일한, 아니 그 이상의 간증을 하실 수 있도록 도우시리라 신뢰합니다. 친밀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의 간증을 허락하시리라 신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심을 논리적으로 증거 하십니다. 부흥의 시기마다 그러한 증언들이 풍성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탁월한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의 간증 가운데서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 세계적으로 더욱 풍성한 간증들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 가운데 더욱 하나님의 친밀하신 음성 듣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으로는 “성경과 설교, 묵상” 등을 통해 들려옵니다. 이 방법은 안전하고도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분의 친밀하신 음성을 듣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이 안 되면 다른 부분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셔서도 말씀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친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들을 살펴보고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성경(설교, 묵상, 연구 등)’과 더불어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들이 있다.”는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은사의 영역들과 또 다른 일반적인 참으로 다양한 방법들로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였던 A. W. 토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언제나 그것을 무시하고 합리화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위치에 서 있다.”
물론 누구나 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비슷하거나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음성을 들려주심을 기억하고 자신만을 향하신 방법들을 발견하고 분별하는 노력과 훈련도 필요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분별의 지혜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한 친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준비되어야 할 부분들도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만 추구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오순절주의 교회나 방언, 예언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 듣는 초자연적인 은사의 영역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뒤에서 계속 살펴 볼 것이지만 하나님의 친밀하신 음성을 듣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각각 다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음성을 듣는 것이 은사라면
모든 신자가 음성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목자 되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음성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주의 자녀들의 삶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부모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것입니다.”
조이 도우슨 여사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구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기도 하시고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기도 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하늘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소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조차 괴상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토록 다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대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 사실이 훨씬 더 괴상한데 말이다.
그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음성을 알며
그를 따른다고(요 10:3-4, 27)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양은 단순하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속삭이시는 사랑의 음성 듣기를 기대하십시오. 친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분의 친밀하신 음성을 듣는 장소로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이리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나아갑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전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전부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전부이십니다!
하나님의 친밀한 음성듣기
1장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친밀함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친밀함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친밀할수록 그분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하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잠시 나누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음성을 잘 듣기 시작한다는 부분입니다. 특히, 어떤 음성을 자주 듣게 되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집회나 예배인도가 없는 날에는 밤을 지새우며 집에서 철야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도의 마음과 자세로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며 카페 관리도 합니다. 글도 씁니다. 책도 읽을 때도 있습니다. 정서적인 휴식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지요.^^
아무튼 그런 활동의 중간중간에 한 번씩 안방에 들어갑니다. 딸내미들 얼굴도 보고 이불을 덮어주려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딸내미들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아빠로서 주님 부어주시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이내 아이들 볼에 뽀뽀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말합니다. 정말로 들려주고 싶은 말, 음성이 있지요. 그 어떤 음성보다 자주 들려주는 음성이 있습니다.
“한별아, 사랑해.”
“은별아, 사랑해.”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왜 그리도 제 마음이 벅차오르는지요. 감동입니다.
더불어서 저 역시 딸내미들을 키우다보니 아빠로서 제가 자주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아이들 귀에 다시금 속삭입니다.
“한별아, 아빠 사랑하지?”
“은별아, 아빠 사랑하지?”
이렇게 제 음성을 귓가에 들려주면 “응.”이라고 대답합니다.
혹은 대답은 안 하지만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사랑을 표현합니다.
(가끔 잠에 취해서 제 목소리를 못 들으면 저는 딸내미들의 귀를 잡아당겨서 잠이 살짝 깨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좀 짓궂지요? 그 정도로 아이들에게 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딸내미들의 저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딸내미들과 함께 생활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시적인 음성은 덜 들려주게 됩니다.
“칼 가지고 놀지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야지.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책에 낙서하지 마.”
이런 말들은 점점 안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성숙해지고 있어서 제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지키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은 점점 아이들에게 분별력과 주의력이 생겨서 스스로 잘 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신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종종, 자주 들려주고 싶은 음성이 있습니다. 고백이 있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기에 아시겠지요.
“한별아, 사랑해.
은별아, 축복해.”
이처럼 아빠 하나님께서도 제게 자주 들려주시길 원하시는 음성이 있으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음성입니다.
또한 자주 듣기를 원하시는 고백이 있으십니다.
바로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인지 친밀한 교제에 집중할수록 제 안에서는 폭발할 듯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오릅니다. 더불어 뜨거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제 마음 가운데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 안에 표현하기 힘든 감격과 감동이 흘러넘치며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자주 체험하곤 하는데 문제 때문에 기도를 해도 생각가운데 들려오는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음성이 많습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기도를 해도 들려오는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음성일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기쁨이 넘쳐서 감사드릴 때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음성이 마음에 들려올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제가 아픔 가운데 기도드릴 때는 구체적인 지시사항 내지는 해결책을 음성으로 들려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시는 음성을 들을 때면 거의 대부분 마음에 용기가 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힘이 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이내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음성듣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자주 듣게 되는 그분의 음성은 지시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의 속삭임입니다.
그분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는 음성이 대부분입니다.
부탁드리기는 ‘음성듣기’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전달받는 자물쇠나 족쇄가 아님을 기억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음성듣기’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는 자유함의 열쇠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위로하노라.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
할렐루야~!^^
2장. 친밀한 ‘음성듣기’와 분별력
우리 집은 주택가 골목의 1층 집입니다. 방음이 좀 덜 되는 편이지요. 그래서 창문을 닫아도 옆집 알람 벨 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낮에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하거나 놀고 있을 때 가끔 시끄럽게 떠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지요.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떠들지? 시끄럽게.”
그러나 거기에 계속 집중하지 않습니다. 짜증을 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번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무시해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들이 들려온다면 저희 딸이 한 것처럼 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감히 악한 영의 음성이나 생각이 나에게 영향을 주려고 그러지? 시끄럽게!”
이렇게 분별하시고 그냥 무시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그들은 더 이상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 딸내미들도 시끄럽게 떠들며 집 앞을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영향을 줄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없는데 지나치게 영적전투에 심취하여 여러분이 억지로 그들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만 황폐해지고 분주해집니다. 여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보다 언제나 사랑의 음성을 속삭여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가서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처럼 내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음성에 주목하고 집중하십시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아 2:8)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아 5:2a)
저희 딸내미들은 저희 집 대문이 안 열렸는데도 문 밖에서 제 목소리가 들리면 “아빠다!”하고 크게 외치며 달려옵니다. 문을 엽니다. 아이들이 제 목소리를 잘 분별하고 얼굴도 보기 전에 저를 알아채주는 것이 아빠로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에게 정말 다양하고도 크고 작은 세미한 음성들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분의 음성을 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 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3장. 친밀한 ‘음성듣기’와 주도권
둘째 딸내미 은별이와 단 둘이 지인 댁에 설 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택시를 탔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가 없어서 20분 정도 걸어서 집에 돌아왔지요.
그날따라 날씨가 한파라서 참 추웠는데 은별이와 손을 꼬옥 붙잡고 걸었습니다.
저는 길이 미끄럽기에 은별이의 손을 놓치지 않고자 꼭 잡았습니다.
은별이도 제 손을 놓치지 않도록 꼭 잡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딸내미가 조그마한 손으로 제 손을 꼭 잡아주니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아니, 행복했습니다.
딸과 손잡고 걸어가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음성듣기’에 대해 스쳐지나가듯이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히 ‘음성듣기’도 이렇겠구나.
하나님께서도 나의 친밀함을 위한
의지적인 노력을 이렇게 기뻐하시겠구나.
친밀함의 상징인 ‘음성듣기’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깊은 감동을 느끼시겠구나.
나의 노력이 ‘음성듣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의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의 열정을
조금이나마 표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과 교제, 특히 ‘음성듣기’를 추구하는 우리는 이처럼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친밀함의 상징인 ‘음성듣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음성듣기’에서 성공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음성듣기’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며 동행하는 삶이 나의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착각일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음성듣기’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그분의 친밀하신 ‘음성듣기’에 큰 역할, 혹은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것과도 같습니다.
제가 은별이와 손을 꼭 잡고 걸어갔을 상황을 다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미끄러운 길을 손잡고 걸어갈 때 은별이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빠! 아빠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아빠 손을 잡아주니까
길이 미끄러워도 아빠가 안 넘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고맙지?
아빠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제 6살이 된 딸래미가 제게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친밀한 교제를 상징하는 ‘음성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도권이 나의 노력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서 출발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별이가 제 손을 꼭 잡는 느낌에 아빠로서 제가 행복을 느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노력에 행복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은별이가 “아빠는 내가 손을 잡아주니까 안 넘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라고 말했을 때 저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 은별이가 아빠 손 잡아줘서 아빠가 안 넘어지는 거야.
아빠가 은별이에게 정말 고마워.”
사실 제가 은별이 손을 잡았기에 그녀가 안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은별이가 참으로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녀의 노력을 크게 인정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여겨주고 인정해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시기에는 우리의 ‘음성듣기’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노력을 기뻐하셔서 인정해주십니다.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이 ‘음성듣기’가 성장하고 깊어지는 데에 있어서 마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실제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작은 역할을 하는 우리의 노력을 보시며 “잘했다. 기쁘구나.”라고 칭찬하시며 인정해주십니다. 그러나 영적 진리와 원리의 측면에서 보면 친밀한 교제를 상징하는 ‘음성듣기’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의 노력에 기쁨을 느끼셔도 종종 친밀함의 영역인 ‘음성듣기’에서 우리가 영적 메마름을 느끼는 시간을 허락하시곤 하십니다. 그런 시기에는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떤 아는 방법을 다 동원해 봐도 친밀하신 음성이 전혀 안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기에는 많은 경우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가르침을 허락하십니다. 즉, 가만히 있게 하십니다. 노력을 멈추는 것이 사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내 방법을 이제는 다 내려놓은 것 같은데 얼마 못가서 다시 아는 방법을 또 동원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십니다. 우리는 점점 모든 친밀함을 위한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친밀한 교제인 ‘음성듣기’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되새기게 하십니다. ‘음성듣기’의 주도권이 내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음성듣기’의 노력 자체는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감동을 드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노력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할수록 마음 중심에 ‘음성듣기’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신 은혜로 더 깊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친밀한 ‘음성듣기’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를 받았으므로 우리에게는 친밀한 ‘음성듣기’를 위한 노력의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노력이라는 책임에 대해서도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언제든지 친밀한 교제로서 ‘음성듣기’를 시작할 수 있음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우리의 느낌과 노력 여부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보혈의 공로로 쉽게 친밀한 ‘음성듣기’를 시작할 수 있음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보다 더욱 친밀하신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더욱 원하고 또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4장. 친밀한 ‘음성듣기’와 자유함
저희 가족은 종로에 있는 서점에 가곤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지요. 지하철 출구로 나오면 차도가 가까우므로 아이들이 혼자 뛰어가지 못하게 주의를 줍니다. 아니면 손을 붙잡고 함께 걷지요. 모퉁이를 하나 돌면 하천을 아름답게 꾸며 놓은 구름다리가 나옵니다. 이때 아이들이 집 근처에 거의 다 왔으므로 묻습니다.
“아빠. 먼저 가도 되요?”
“그래. 뛰지 말고, 골목에서도 좌우 잘 살펴서 자동차 조심하고 들어가.”
이렇게 주의를 주고 먼저 보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달려갑니다. 걱정이 될 때는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위에서처럼 주의와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며 또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도 비슷합니다. 하나님께 여쭤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필요한 훈련입니다. 친밀한 관계가 깊어진 만큼 최선을 다하는 노력은 언제나 제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잘 듣는 친밀한 관계가 성장할수록 점점 자유함을 주십니다. 저희 어린 딸내미들이 생각과 키가 자랄수록 위에서처럼 먼저 갈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음성듣기’라는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서, 특히, 다음의 말씀에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구약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될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거나 그 흐름에 휩쓸렸던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갈라디아교인들이 구약 율법에 묶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음성듣기’가 또 다른 율법주의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음성듣기’라는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음성을 듣지 않고서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것만이 대단한 신앙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조르고 졸라서 하나님께서도 가끔씩 어쩔 수 없으셔서 들려주시는 ‘음성듣기’가 성공할수록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음성듣기’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성령님 안에서 겸손히 묵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도 딸내미들이 더 어렸을 때, 즉, 모든 선택에 있어서 분별력과 주의력이 부족했을 때는 일일이 말해주고 지시합니다. 가르쳐줍니다. 종종 묻기도 전에 먼저 음성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위험할 때는 격앙 된 목소리로 혼내듯이 단호하고 크게 엄포를 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적분별력과 영적주의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음성듣기가 잘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사실 하나님의 음성이 항상 잘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실 때 말씀하시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십니다. 아무튼 이렇게 음성 듣기가 올무가 된 사람들도 때로는 음성이 잘 안 들리니 할 수 없이 무언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으면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듣고 움직여서 결과가 이런가보네.
결국 하나님 음성을 기다리지 못해서 내가 벌 받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준을 적용시켜서 정죄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흥, 내가 전해준 음성을 무시하더니 그 대학에서 떨어지는 그런 결과가 나왔지.
내가 전해준 음성대로 이사 안 하더니 부부싸움이 시작된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유치하고 소심하신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쭤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자신의 믿음의 분량의 한계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잠시 정리하면서 말씀드리자면 곁에 계신 하나님께 여쭤보는 것은 나와 동행하시는 분을 존중해드리는 마음의 표현이므로 좋으며 괜찮습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내용들까지 답을 듣기 전에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 문제가 큰 문제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음성을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성듣기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음성듣기가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그런 부분에서 자유함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우리 딸래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다치기도 합니다. 다쳤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음성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 아니야!
아빠 말 잘 들었어야지!
왜 아빠 말 안 듣고 뛰어가서 넘어지고 그래?
앞으로는 항상 뛸 때마다 나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고나서 움직여!”
이것은 참 웃긴 것입니다. 다친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뛸 때마다 저에게 보고해야 하나요? 저보다 먼저 집에 들어갈 때마다 제게 보고하고 제 허락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그 얼마나 삭막한 가정이며 웃기는 가정인가요?
저희 가족이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들어서 저희 큰 딸 한별이가 식사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밥을 마신다고나 할까요. 걱정이 되어 지나치게 빠를 때만 천천히 먹기를 당부합니다. 그런데 식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별아, 아빠의 음성을 듣고 천천히 먹어야지.
식사할 때마다, 한 숟가락 떠서 먹을 때마다
아빠의 음성을 듣고 천천히 먹으렴.
그렇지 않으면 체하거나 배탈날거야.”
만약 식사 시간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서로가 식사 시간이 기쁘지 않을 것이며 가장 짜증나는 시간일 것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 딸내미들이 제발 제 음성을 듣고 움직였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바로 화장실, 욕실에 제가 있을 때입니다. 저희 딸내미들은 저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들인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곤 합니다. 가족으로서 너무 친밀한 이유이죠. 그럴 때 화를 내진 않지만 예의범절을 가르쳐야 하기에 “아빠의 음성을 듣고 들어와야지.”라고 차분하게 부탁하곤 하지요. 그래도 아이들은 문부터 열고서는 “아빠, 저 들어가요.”, “아빠, 저예요.”하고는 들어오기 일쑤입니다. 그러고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인생과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에 그분을 존중해드리는 마음의 표현으로서 여쭤보는 존중의 훈련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친밀할수록 성령님 안에서 잠잠히 기다리다보면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 자연스레 알게 하십니다. 알게 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분의 친밀하신 음성을 듣고자 여쭤보고 기다리는 훈련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과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셔도 그 음성은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A입니까? 아니면 B입니까?”여쭤보아도 의외로 많은 경우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단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
A인지 B인지 제가 원하는 음성은 안 들려주셨지만 위와 같은 음성을 들으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도 나타내 주시므로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겠다.”싶은 용기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음성듣기’에서의 ‘자유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을 신뢰하시기에 각자의 자유의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빠 하나님으로서 우리 각자가 자원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봇이 아니라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의지로 기쁘게 선택하는 능력이 성장하도록 이끄십니다.
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음성듣기’에서 자유함을 배웁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음성을 듣고자 여쭤보고 늘 기대는 합니다. 하지만 여쭤보는 이유 자체가 현재는 하나님과 친밀하기 때문에 그분을 존중해드리는 목적과 의미로 여쭤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이기에 음성을 잘 듣고 인도하심을 잘 받았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지만 그 선택이 실수일 때도 있습니다. 실수의 열매를 맛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그 자체로 영광과 기쁨을 얻으십니다. 우리는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하셔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합력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음성듣기’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자연스럽게 듣고 기쁘게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각 사람에게 적합한 ‘음성듣기’의 방법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다양한 종류의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시고 기대하십시오.
그러나 ‘음성듣기’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자유함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영적 자유함이 없는 ‘음성듣기’를 거절하십시오. 부디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된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5장. 친밀한 ‘음성듣기’와 마음지킴
하나님의 음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려옵니다. 그 가운데 일반적으로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또한 감동의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들이 들려오곤 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마음을 지켜야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보통 전국에서 진행되는 부흥회나 정기집회, 정기모임 등 예배인도를 하러 갈 때 기차를 타고 많이 다닙니다. 그날도 대전에서 예배인도가 있어서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늘 일찍 출발하여 기차 출발 20-30분 전에 올라타는데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도착하여 기차에 앉아서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찬양을 듣는데 얼마나 은혜 안에서 감동을 받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나를 향하신 십자가 사랑에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였습니다. 그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동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닌데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별로 노력을 안 했는데, 특별히 어떤 날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은혜를 부어주시는 날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은혜가 너무 크게 부어지고 있어서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조태성씨죠?”
“네, 전데요. 누구시죠?”
이때 제 대답은 은혜가 참으로 크게 부어지고 있었기에 목소리도, 단어와 문장의 사용도 은혜가 담겨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참으로 차분하고 은혜로운 목소리와 톤으로 말하게 됩니다. 언어에 주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공손함이 담겨 있습니다. 계속 상대방이 말합니다.
“네. 저는 서울 지방법원 법무팀 000검사입니다.”
“(차분하게)그런데요?”
“네. 다름이 아니라 조태성씨와 관련된 사건이 접수되었는데 혹시 지금 시간 있으십니까?”
“(더 차분하게)아니요. 시간 없습니다.”
“네? 아... 네... 네?... 네...”
이렇게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하며 혼자 대답을 합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전화를 끊지 않고 들고 있다가 끊더군요. 저는 지금 은혜가 참으로 커서 이 전화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잠시 후 갑자기 저도 모르게 “하하하”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아시겠지만 이런 전화는 보이스 피싱이라는 사기 전화이지요.
사실 전화한 그 사람은 전화를 걸때 2가지 반응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자기 전화에 겁을 먹고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보이스 피싱인 것을 알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말이지요. 이때 화를 내면 보통 사기 전화를 건 사람은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끊지요.
그런데 제가 시종일관 차분하게 대답하고 놀라야 할 상황에서 전혀 놀라질 않으니 자기가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당황한 상태에서 우물우물, 웅얼웅얼 거리다가 그냥 끊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나니 이 모든 상황이 얼마나 웃겼는지 한참을 웃었습니다.
만약 제가 은혜 안에서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다면 저는 검찰청의 검사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혹은 이것이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라도 지나치게 흥분하여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해서 욕을 먹었겠지요.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제 안에 계시고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드리는 것이니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었을 뻔 했습니다.^^
한번은 제 아내가 한 번 아침 일찍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조태성씨 집이죠?”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네, 조태성씨가 빚이 있습니다.”
“저희 남편은 빚이 없거든요!!!”
“아니. 어머니 김우순씨가 조태성씨 이름으로 빚을 지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시거든요!!!
제가 이 번호 저장해서 경찰서에 연락해도 되죠?!!!”
“뭐라고? 이 삐리리 삐리리야~.
어디 경찰에 연락하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 줄 알아.
이 삐리리 삐리리야~”
제 아내는 사기 전화라는 것은 알았지만 상대방이 평소 들을 기회가 없었던 온갖 욕설을 들려주므로 당황했습니다. 놀랐습니다.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이들 유치원 보낼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서 바삐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는 그 충격으로 머리가 아픈지 잠시 누워있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 아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연약하므로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비슷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지키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마음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부분에서도 환경의 영향을 덜 받을 것입니다. 아니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고 분주할지라도 마음을 잘 지키는 훈련을 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과 생각 가운데 들려올 때 잘 분별하고 들을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평상시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마음을 잘 지키시기를 소망합니다.
6장. 친밀한 ‘음성듣기’와 약속시간
저는 잠자는 어린 딸내미들 곁에 다가가 귀에 속삭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속삭이지요.
“한별아, 사랑해. 한별이도 아빠 사랑하지?”
“은별아, 사랑해. 은별이도 아빠 사랑하지?”
귀에 계속 속삭이면 잠이 살짝 깨서 대답을 합니다.
“응... 사랑해”
“(고개를 끄덕끄덕)”
다른 아빠들도 저처럼 이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잠자고 있는 딸내미들 귀에 사랑을 속삭이며 기쁨이 솟아오름을 느낍니다. 또한 살짝 잠이 깨서 제 목소리를 아빠의 목소리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견딜 수 없는 감동을 느낍니다. 제 목소리에 ‘아빠구나.’ 생각하고는 “사랑해”라고 속삭이듯이 화답해주는 딸내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과 감격에 둘러싸이곤 합니다.
이 글을 옮겨 쓰는 오늘 저녁에는 욕실에서 둘째 은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아니, 부탁을 했다고나 할까요? 제 기쁨이 커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은별아, 이따가 은별이가 자고 있을 때 아빠가 은별이 귀에 이야기 할 거야.”
“무슨 이야긴데요?”
“응, 아빠가 사랑한다고 은별이 귀에 속삭일 거야.
그때 은별이가 꼭 대답해줘야 해!
은별이도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줘. 알았지?”
“음...... 부끄러워~”
은별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환하게 소리 내서 웃으며 ‘쌩~’하고 뛰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언제나처럼 은별이가 사랑으로 대답해주리라는 것을요.
욕실에 혼자 남은 저는 감동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렇게 은별이와 약속 아닌 약속을 했는데 벌써부터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밤이 깊어지고 잠자고 있는 은별이 귀에 사랑한다고 음성을 들려줄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은별이도 저녁의 약속을 기억하고 언제나처럼 사랑의 반응을 하리라는 것이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저 혼자 이렇게 감동과 감격에 젖어들어 있을 때 성령님께서 큰 감동으로 마음에 속삭이시기 시작하십니다.
“사랑하는 태성아.
네가 느낀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란다.
아버지께서도 너와 이렇게 약속 된 시간에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길 원하신단다.
그리고 거기에 화답하는 너의 사랑과 감사,
찬양의 목소리를 들으시기를 참으로 원하신단다.”
저는 마음 가운데 들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에 더욱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시간을 약속해드리고자 결단하게 됩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도 아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시간을 약속드립니다.
제게 기대하시는 시간을 아빠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실 이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인도하심을 받으셔서 주님과 약속 된 기도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랑하는 딸내미와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절하신 사랑을 마음으로 절감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종종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셉 S. 캐럴은 [기름부음의 예배자]라는 책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을 드리기로 약속한 헌신 된 자매님에 대해 귀한 간증을 나누고 있습니다.
“나는 40년간 사역을 하면서 수십 가정에서 머물러 보았다. 그 중에 한 가정의 여성은 일곱 명의 자녀와 매우 무심한 남편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두 자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대가족을 돌보고 여가 시간에 가족의 사업까지 도맡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었고, 나는 그것에 감탄했다.
어느 해 컨퍼런스가 열리는 동안 나는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새벽 5시쯤, 어느 방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 보니 그녀가 피아노 곁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몇 시에 일어나세요?”
“그것을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오래 전에 저는 주님이 저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면
언제든지 응하기로 했어요.
주님은 저를 다섯 시에 부르실 때도 있고,
여섯 시에 부르실 때도 있어요.
어떤 때는 새벽 두 시에 부르시기도 해요.
아마 저를 테스트하려고 그러시나 봐요.”
그녀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일어나 피아노 의자 옆으로 가서 주님께 예배했다. 또 다시 물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계세요?”
“예, 그것은 주님께 달려 있어요.
주님이 잠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가요.
만일 주님이 잠자지 않기를 원하시면,
저는 그렇게 계속 깨어 있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자매님은 잠자는 가운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을 드린다고 주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와의 대화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기다립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아빠 아버지로써 동일한, 아니 그 이상의 설레임으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과의 특별한 음성듣기, 친밀한 교제 시간을 약속 잡으시기 원하십니다. 아빠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기 원하십니다. 또 우리의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들으시기 원하시는 구별 된 약속시간을 원하십니다. 구별 된 약속장소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 미명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점심 식사 후의 한적한 시간과 장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퇴근 후 집에 오는 길에 교회에 잠시 들러서 기도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잠자리에 들기 전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현재 저에게는 늦은 밤에 거실에서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는 여러분도 마음을 드리시고 이렇게 결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아빠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의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듣기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는 비슷하거나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를 향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기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시간을 구별하십시오.
그 시간만큼은 아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시간으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 시간만큼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시간으로서 주님과 약속을 잡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을 지키십시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주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움 받으십시오.
저는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곧장 딸내미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딸내미들은 잠에 취해서 꿈나라를 여행 중일 터이니 저와의 약속은 잊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약속을 지키러 갑니다. 가서 저는 약속대로 반드시 아빠의 사랑의 목소리를 들려줄 참입니다. 그녀들은 제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잠이 너무 깊으면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제 음성이 안 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실망할까요? 약속을 어겼다며 화를 내고, 자는 애를 깨워서 혼낼까요? 절대 아닙니다. 저는 실망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편하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음! 깊이 잠들어서 안 들리는구나.
아쉽긴 하지만 할 수 없지.
아이고, 이 사랑스러운 것들.”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딸내미 볼과 입술에 사랑을 듬뿍 담아 뽀뽀를 해줍니다. 꼭 안아줍니다. 볼과 볼을 맞대고 부비며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먼저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 잡은 시간에 음성이 들려오리라고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약속 시간에 제가 딸내미들에게 반드시 찾아 갔듯이 아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먼저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저희 딸내미들처럼 우리의 영적인 귀가 덜 열려 있거나 영적 민감함, 영적 감수성이 약할 때는 음성이 안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일단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에서 하나님과 제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즉, 친밀함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음성이 잘 들리고 안 들리고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제가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잘 감지를 못 할지라도 아빠의 사랑으로 안아주십니다. 품어주십니다. 평안함을 나타내시며 함께 계심을 나타내십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왕이면 약속 된 시간에 들려오는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친밀하신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영적인 민감함이 깨어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부탁드리며 부디 약속 시간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리고 우리도 사랑으로 속삭입시다. 사랑으로 반응합시다.
“네, 아버지. 감사드려요.”
“네, 주님. 저도 사랑합니다.”
“네, 성령님. 사랑해요.”
저는 이제 약속 지키러 딸내미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갑니다.
아빠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약속 된 장소로 가실 것입니다. 기대하십시오. 할렐루야~!^^
ps.
이번 장에서 나눈 내용은 평상시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평상시에 기도하는 삶이 필요 없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언제나 곁에서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도 당연히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다만 특별히 구별 된 시간도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원하심을 나누는 내용입니다.^^
7장.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사람
얼마 전 저녁 시간의 일입니다.
뉴스에서 안타깝고도 긴급한 뉴스가 흘러나옵니다.
“종교의 문제로 부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50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족민들은 이웃 나라로 밤새 걷고 뛰어서 망명하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아이들의 모습과 절규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파왔는지요. 특히, 그 나라는 거의 이슬람교입니다. 그런데 소수 기독교 부족의 행동이 괘씸하다는 이유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대학살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어도 정부에서 일부러 지켜주지 않습니다. 장관이 방송에 출연해서 말리는 척 “자제하십시오.”라는 말만 할뿐 학살극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 나라에서 살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종용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희 딸 은별이가 제 앞에 웃으면서 서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빠! 제가 율동 보여 드릴께요.”
“응? 그래, 알았어.”
제 마음은 뉴스를 보고 들으면서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아픔으로 가득한데 은별이는 제가 뉴스를 계속 보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그거 보지 말고 저를 잘 보시라니까요!
제가 율동 보여 드릴께요.”
“그래. 알았어. 아빠가 은별이 보고 있으니까 시작해봐.”
모든 아빠가 그렇듯이 저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은별이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 노래에 맞게 앙증맞고도 귀엽게 율동을 했습니다. 율동을 마치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저 참 잘하죠? 헤헤~^^”
이 때 참 신기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뉴스에서는 계속 안타까운 부족 간의 전쟁, 아니, 일방적인 기독교 부족의 학살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가 은별이를 바라보느라 뉴스 화면을 못 보지만 귀로는 그 자세한 소식을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계속 듣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하면서 그 소식을 귀로 듣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동시에 은별이의 율동을 보면서, 딸래미의 재롱을 볼 때만 얻을 수 있는 흐뭇함도 느낍니다. 기쁨도 느낍니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할 때 지금의 제 감정 상태가 참 요상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뉴스 때문에 마음으로는 울면서 동시에 딸래미의 재롱을 보면서 흐뭇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사실 은별이는 아직 6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이기에 뉴스에서 아무리 가슴 아픈 소식이 흘러나와도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정상이지요. 오히려 저희 딸래미가 춤을 추면서 놀다가 갑자기 긴급 뉴스를 보더니 울면서 안타까워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은별이가 중학생 정도만 되었더라도 저는 뉴스에 관심을 가지라고 권면을 하거나 야단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친밀한 교제를 추구한다면서 아직도 영적 어린이처럼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에는 관심도 가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마음을 제게 나누어주시길 원하실 때 제 기도제목과 제 문제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없다면 제 미성숙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물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24시간 내내 제가 하나님의 아픔, 슬퍼하시는 이유들에만 집중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많이 하나님 주신 은혜를 예배의 삶 가운데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가끔씩 성령님을 통하셔서 제가 중보적 기도를 하기 원하실 때가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바라시기 보다는 인도하심이 있으실 때 그저 제가 합당하게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되시는 기도제목들을 나누어주실 때 인도하심을 따라 함께 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실제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다양한 감정들, 생각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신 기쁨과 근심들, 재앙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하신 아픔, 전쟁을 바라보시면서 느끼시는 고통들, 가난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시며 아파하시는 마음 등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성숙해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는 예배의 삶을 사는 가운데 기도제목을 나누어주시면 중보적 기도로 합당하게 반응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뉴스를 보시는 가운데 마음에 아픔과 기도의 부담으로 다가오십니까?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나눠주시고 중보적 기도를 요청하시는 음성일 수 있습니다.
길을 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에 부담과 아픔으로 다가온다면 주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보시고 성령님께 여쭤보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로서, 성숙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사람으로 바라보시면서 큰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