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제1독서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5,16-23
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실히 설명해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이는 단순한 단식 논쟁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율법보다 앞서시고 당신이 아니면 율법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확실히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율법도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계약에 심취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출구 없음’의 연극 대본을 봅시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고통 속에 갇혀 서로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출구가 없다면 이러한 자기와 타인의 지옥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방에 창문이 있었다면, 그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보였다면 어떨까요? 그곳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희생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으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만 바라본다면 둘은 타버립니다. 부부도 자녀를 키우면서 사랑을 확장해야지 자신들 안에만 갇혀있으면 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창문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죽음과 부활로 사랑으로 인해 도달하게 될 저 세상을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피조물의 본성상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희망 없이는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는 게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와서야 완성됩니다. 부부 갈등을 겪다가 공공의 적을 만나 함께 싸우다가 다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는 설정의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부부도 자녀를 낳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려고 하면 결국엔 사랑이 소진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에 그리스도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하면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닫힌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 책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지만 읽지 않았던 책이어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분의 표정에서 실망이 느껴집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서 이 책도 읽지 못했냐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솔직히 약간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돈키호테 읽어보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히 읽었죠. 초등학교 때 이미 읽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 읽은 분을 보기 힘듭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돈키호테’는 전문이 아닌 극히 적은 내용만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 돈키호테는 전체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분량은 권당 700페이지가 넘습니다. 그래서 그 두께에 질려서(또 상당히 지루하기도 합니다) 곧바로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분은 돈키호테를 읽었다고 하셨지만, 사실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지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습니까? 유명한 책이라 해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판단은 주로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비교하면서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비교 자체가 잘못되는 경우도 많아서, 그 판단은 더 힘을 잃습니다. 특히 주님을 향한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많은가요? 주님의 이끄심이 잘못되었다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단식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다교 전통을 준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단식하는 사람은 열심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께 열심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은 형편없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며 못마땅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무조건 단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안에 담겨 있는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우리는 먼저 읽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이 자기 판단에 맞지 않다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고정관념이 헌 옷이며, 헌 가죽 부대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새 옷, 새 가죽 부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축복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미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말이다(브라이언트 맥길).
사진설명: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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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탈출기 5-8장 읽었습니다~^^
영화 '십계'로 유명한 모세의 이야기..
그래도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였다.(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