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소년.소녀처럼 가슴 설레이었던 등교길
그건
햐얀 카라에 단발머리를 한 여중생을 만나는 길이었고
까까머리 여드름 투성이 중학생이 건내던 짓굿은 농을 은근히 즐겼던 길이었다.
등교길의 아련한 추억, 세월을 그리며 38년 세월을 되돌아 이렇게 만났다.
나를 잊고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로 살아가는 세상
오늘은 거추장스런 대명사를 잊자!
잊혀진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가 정겹고, 거친 목소리의 욕마져 고향내음이 배여 부드럽게 들린다.
함월산 기림사. 조용하고 고즈넉한 산사이지만 오늘은 사찰순례단의 절집 순례로 일주문 밖부터 스님도 절집도 분주하다. 자식 잘 되라고, 아들 점지해달라고, 건강하고 무탈하게 생활하라고 그런 바램으로 두손 모으는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의 정성이 이땅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고 바로 불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기림사는 신라 선덕왕 12년(643) 창건되었다고 한다. 기림사라고 불리기 전에는 임정사로 불렸는데 이 절에는 광유선사가 머물고 있었고 이 임정사가 선덕왕 12년 원효대사에 의해 기림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함월산 기림사는 동해에서 신라 경주에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데 과거 이 길을 통해서 석탈해가 경주에 들어가 탈해왕이 되기도 하였다. 기림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광유선사와 관련된 설화에 의하면 그는 신라승려가 아닌 외국승려 곧 인도승려로 여겨지는데 그렇게 된 원인은 기림사의 지정학적 위치와 기림사가 인도의 기원정사에서 절 이름을 따온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광유선사와 원효대사가 기림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언급은 후대에 덧붙여 진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의 경우 그가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이 648년으로 선덕왕 12년 당시에는 절 이름을 바꿀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기림사에 관해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681~692)이 신라 삼보 중 하나인 만파식적을 감은사 앞 바다에서 얻어서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쉬었는데 이 때 용에게 받은 옥대의 고리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바람에 용이 날아간 자리에 용연(龍淵)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기림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고려 후기에 가서야 다시 나타난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조에 의하면 기림사 주지 각유(覺猷)가 몽고 침략 때 의상대사 이래로 낙산사에서 보관해오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궁중에 보관할 것을 건의하고 있고, <전후소장사리>조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치아를 몽고 침락시 강화로 수도를 옮길 때 잃어버렸는데 이를 다시 찾아 전각에 모셨다는 사건의 전말을 대선사 각유가 그대로 적어 두었다고 한다.
각유는 궁중의 보물들에 대한 소재를 잘 파악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가 맡았던 대선사라는 직책은 고려시대 선종계통의 가장 높은 계위였고 일연이 노숙이라고 존칭을 붙인데서 당시 그의 위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각유가 기림사의 주지를 맡았다는 점에서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기림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좌의 묵서명에 연산군 7년(1501) 조성이란 글귀가 있는 건칠보살좌상의 조상양식이 원나라 계열로 보이는 점도 고려후기 기림사의 성세와 견주어 있을 법한 일로 보인다.
숭유억불정책하의 조선에서 기림사는 세종대(1418~1450) 해인사, 단속사, 견암사와 더불어 경상도의 4대사찰로 130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7년이 조성의 건칠보상좌상 좌대에서 기림사가 여전히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신라 때의 호국사찰의 성격을 이어받아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대적광전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은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986년 이 불상의 복장에서 고려시대 사경을 비롯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이 유물들은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현재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후 기림사는 조선후기에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전통관광사찰정보
기림사 진입로, 댓닢소리, 바람소리, 계곡물소리에 젖다보면 가끔 나를 잊을 수 있는 진입공간이다. 예쁜 아줌씨와 동행이라면 금상첨화일테고... 요즘 처럼 도화 앵화 피어나고 만물이 기지개를 펼치는 시절에 연두빛 새순을 바라보며 마음을 열지 않은 여자와, 해질무렵 폐사지 석탑 앞에서 넘어가지 않는 여자는 여자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 누가? 내가 그랬던가? 잘났다!. 잘났어!! 저~엉~말!! ㅎㅎ
국어책에 수록되어있던 유주현의 "탈고 안 될 전설" 기억 나시나요? 소설속 주인공이 되어 어린 나이에도 가슴 미어지는 슬픈 사랑에 눈물 흘렸던 추억 없으시나요? 그래서인지 세월이 흘렀어도 사찰에 들리면 박규리의 시 "치자꽃 설화"와 탈고 안 될 전설이 떠오르더군요. 언감생심. 제대로 사랑 한 번도 못해 본 놈이!!!
탈고 안 될 전설 요약 입니다.
"소설속의 화자(話者)인 내가 여름에 불암산 초입에 있는 형의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지키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비오는 날 근처를 지나가는 여승에게 비도 피할겸 쉬어가라고 참외를 깍아줍니다. 이 여승은 20대 중반의 앳띤 얼굴에 교양미가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있었고 비가 그치자 절로 놀러오라는 인사말과 함께 불암사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몇일 후 베트남 전쟁에서 한쪽팔을 잃은 젊은이가 이 원두막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 근처에 있는 절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는 불현듯 그 여승이 생각났지만 그 여승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묻고 싶은 유혹도 참았습니다.그 여승에 대한 환상이 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만 결국 불암사의 위치를 알려주고야 말았습니다.
이튿날 햇살이 부채살처럼 퍼질 무렵 그 외팔이 젊은이와 여승은 참외밭머리에서 헤어지고 있었습니다. 돌아서 가는 외팔이를 바라보는 여승은 합장한 채로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있고.......나는 그들의 이별이 어떤 쓰라림인지 모르겠지만 진실과 사랑의 참회로 다가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들의 이별이 탈고안될 전설처럼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쉴새 없이 달려온 길, 어느날 탈고안될 전설을 더듬었더니 유주현 소설과 반대로 스님이 여자를 돌려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가 다가오더군요.
치자꽃 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진남루
기림사 진남루는 문화재자료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막돌로 된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위에 주춧돌을 올리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측면의 중앙기둥만 네모기둥이다. 기둥위에는 이익공을 놓아 굴도리와 보로서 결구한 이익공구조다. 익공의 끝부분은 앙서이고 쇠서위에 연봉을 조각하였고 내부 는 초각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대적광전 전면은 창호를 설치하지 않고 개방하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각 칸마다 세짝의 빗살창호를 달았다. 진남루의 측벽은 판장벽으로 마감하였고 천왕문에서 보이는 배면에는 각 칸마다 두짝의 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남쪽(南 ;왜구 일본)을 진압하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남루는 동해를 통해 진입하는 왜군을 차단하기 위해 구국의 승병 군영이 설치된 곳이라는 기록 또한 갖고 있다.
범종루
범종.법고.운판.목어
구라가 통한다.
우리끼리니까!! 그쟈.
대적광전
대적광전을 향해 걸어가는 뒷태 좀 보소!!
아직 젊었다고?
뒷짐에 익숙해진 우리세대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린 노땅 반열에 들어갔단다.
대적광전은 보물 제8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계로 맞배지붕이다. 장방형의 낮은 기단위에 자연석 막돌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약간 있는 기둥을 세웠다. 배흘림 기둥위에도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짜 넣은 다포집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 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 공포에는 연봉을 초각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공포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어간과 협간은 4짝의 소슬빗살꽃창살을 달았고 측간창호는 3짝식이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우물천장(평반자)과 빗천장으로 구성되었다. 부연을 달아 겹처마를 이루고 맞배지붕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측벽에는 공포가 없다.
3층탑 앞에서 성산벌 옛추억을 더듬어며 수학여행 기분으로 한 컷
응진전 앞에 세우져 있는 일반형 석탑으로 비교적 완전한 탑이다. 이 탑의 하층기단은 갑석부터 남아 있고, 상대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그 위에 놓여 있는 상대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있다. 또한 상면에는 4단의 층급괴임이 있다. 각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초층옥신은 장대하나, 2층의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탑 전체가 고준한 느낌이 든다. 2~3층의 옥개석은 각 층 4단의 층급 받침이 있고, 추녀는 수평하며 낙수면은 완만하나 전각에서 약간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몇몇 동기는 기림사도 식후경을 외치며 주막집 주모 꼬임에 동동주판이 벌어졌다.
부처가 따로있냐?
내마음이 불성이고 부처이지!!
가끔 경허선사 이야기도 통하잖아 우리는...
마주 앉아 바라만 보아도 통한다.
어려웠던 시대를 함께한 친구이기에 그냥 즐겁다.
우리의 옛이야기와 더불어 맛을 더한 싱싱한 회
파도에 밀려온 미역을 건져
너도 한 입, 나도 한 입
웰빙이 별건가?
좋은사람과 함께하면 그게 웰빙이지.
등을 돌린 한 남자와 한 여자
무슨 사연 있을까?
ㅎㅎ
이렇게 사이 좋은 커플도 있어야제?
그쟈???
어라?
이거 뭐꼬!!!
달리기 시합
룰 정하고 선수 선발에 시간을 다 소비 했다.
그래도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다.
읍내초교 출신과 연합팀의 시합
쪼촘바리와 깽깬
모두가 경기 진행요원이다.
신기하다
사공이 이리 많아도, 바톤을 떨어떠려도 쪼촘바리는 계속된다.
동심으로, 동심으로
술과 담배가 원수다.
입을 벌려도 숨이 차다.
청추~~운을 돌려다오!!!!!!!!!!!!!!!!
뒤에 오는 놈 넘어질 듯 불안하다.
살 좀빼라!!!
꼭 이겨야지!!
집에 사분도 떨어지고, 하이타이도 바닥났는데
반드시 상품으로 받아 갈 거다.
봄내음 가득한 감포바다.
배경 음악 에버그린 처럼 우리도 늘 푸르렀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동무들과 헤어져 30년만에 군대 동기들을 만나러 부산으로 갔습니다.
좋고. 좋고, 돌리고 돌리고
초전초교 동창생의 가을 동화 재연
송혜교와 송승헌인가?
이커플은 겨울 연가?
최지우와 배용준?
어라?
가는겨? 안가는겨?
ㅋㅋ
참 빨리도 흘러갔다.
꿈 많았던 소녀.소년이 중년이 되어 이렇게 어깨를 기대고
그시절을 반추한 하루였다.
추억은
늘 가슴 뭉클하고 설레이며 아름다운 말 아닌가?
나와 너
아니
우리가 있기에...
친구야!!!
반가웠고 사랑한데이!!!!!!!!!!!!!!!!!!!!!!!!!!!!!!!!!!!!!!!!!!!!
2010.04.24
사진...임종구(대가초/성주중)
글...임병기(성주초/성주중)
첫댓글 친구들아 잘 봤당. 행복한 미소가 구수하게 날아드넴....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병기친구의 구수한 해설이 더 정겹습니다.. 아름다운 그추억 영원히간직하고시퍼...
애궁 잼났겠당 ㅋㅋ늘시원...사연이많던곳인데...근처에 울사돈댁모텔도있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