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거듭나다/김형영-
나는 기억하지
겨울나무들이 대열을 이루고
죽은 듯이 서 있는 것을,
눈이 펑펑 쏟아져 제 모습을 덮을 때면
쌓인 눈에 못 이겨
눈과 함께 온몸으로 쓰러지고
고목은 어린것들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또 기억하지.
나무들이 꼼짝 않고 서서
제자리를 지켜왔기에
숲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새도 벌레도 떠나지 않아
항상 찬가(讚歌)로 가득하다는 것을.
누가 감히
이 대성전을 침범할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이 많은 신전들을 쓰러뜨릴 수 있으며
누가 감히
이 삶의 합창을 막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순환에 따라
나무들은 다시 푸른 힘을 낸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기에
이렇게 산 위에 있을 때면
나도 한 줌 흙이 되어
나무뿌리에 스며드는 꿈을 꾼다.
푸른 잎의 한 줄기로 거듭나는 꿈을 꾼다.
-꿈은 날개가 있다/박재희-
나는 날마다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처럼
A4용지에 쓰다 만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떨어뜨린다
가을도 아닌데 凋落을 느끼며 떨어지는 나뭇잎
생각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가, 어떤 짐승 같은 증오
의 깊이가……
구겨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던져버린 나뭇잎
그것은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소박한 열정이다
꿈꾸다 깨어져버린 조각
꿈은 날개가 있다
아침이면
꿈을 쫓던 내가 잎들에게 벌레 먹힌 헌것처럼 벼려
져 있다
-초여름의 꿈/황동규-
간 겨울 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흥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질경이의 꿈/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나무의 꿈/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
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하얀 꿈/이재훈-
하얀 꿈을 꾼 적이 있다. 구름 위를 걷다가 하얀 피를 흘리는 날 만날 때. 그것은 긴 기다림 후에 나타났다. 태양계의 별들
이 일렬로 설 때까지 몇 백년이 걸린다는데 나는 하루에도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
다. 긴 기다림이 우주에서는 한 끼 식사시간에 불과할지도. 내가 하루를 소진하고 다시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세상이 하얀
빙하로 덮혀 있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비가 내린다. 빗소리가 머리를 후둑 내려쳐 잠이 깬다. 그동안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나는 왜 그토록 잠만 잤을까. 그
시간 동안 비가 내 방에 꽉 들어찰 지도 모를 일인데. 우기를 견디는 도마뱀의 숨소리를 어디서 배워왔던가. 저 비가 그치
고 날이 밝아오면 새들은 또다른 안식처를 찾아 이동하겠지.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떼들.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다
른 세상으로 솟구치는 저 몸놀림 좀 봐.
꿈을 꾸면 때때로 하얀 세상을 보곤 한다. 늙은 어미를 짊어지고 설산을 오르며 부르는 나라야마부시(楢山節)의 애절한
가락을 듣기도 하고, 운좋으면 가슴에 아가미가 달린 소년이 바다를 자맥질하며 뿜어내는 은빛 물무늬를 구경하기도 한
다. 내 영혼이 하룻동안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오면 하얀 꿈이 몇 백년을 지나 내 앞에 멈추곤 한다.
-꿈/이수명-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 푸른 새벽이면 그 나란히 놓여진 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꿈으로 꿈을 붙잡았다. 꿈으로 꿈을 밀어냈다. 밀다가 밀리다가 그의 꿈과 나의 꿈
이 겹쳐지면서 꿈은 지워졌다. 나는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잠 속에서 꿈은 파도가
밀려간 뒤의 조개껍질처럼 드문드문 흉터가 되어 박혀 있었다.
-마른 꿈/연왕모-
길바닥에 뚫린 구멍
그 안은 깜빡 잠들 수 있는 곳
물이 흐르는가 싶더니
바람이 지나가고
해바라기가 만말했다가는
어느새 져버렸다
젖은 북어들이 몸을 펄떡거리다
이내 숨죽여 흘러갔다
주머니는 터져 있었다
구슬, 딱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십 원짜리 동전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왔던 길과 가야할 길의 중간에 서서
내가 품었던 것들을 그리워했다
-다른 곳으로 꿈꾸러 간다/신용목-
밧줄을 당겨놓고 그 위를 걷는 광대처럼
작두를 세워놓고 그 위에 뛰는 무당처럼
이를테면 서울에서 여수까지 철로의 길이만큼 긴 기차
우리는 신발 속에서만 여행을 떠났다 우리가 가진 가장 깊은 바닥 속에서만
겹겹이 뻗은 산맥의 이름이 아니다
푸르게 휘는 해변의 이름이 아니다
밧줄을 놓친 눈빛이 백한 칸 백두 칸 백세 칸 산맥을 잘라 담은 상자로 깨어질 때
작두에 베인 가슴이 다음 칸 다음 칸 다음 칸 해변에 뿌린 피의 동이로 쏟아질 때
광대의 웃음을 닮은 무당의 예언으로
무당의 미래를 닮은 광대의 표정으로
이를테면 서울에서 여수까지 철로의 길이만큼 긴 플랫폼
어디서 타도 좋고 어디에서 내려도 괜찮았다 출발과 도착이 하나인 여행에서
하나 둘 셋 그리고 누군가 신발을 벗고 철로로 떨어졌다
하나의 선을 따라 타들어가는 불꽃을 달고
하나의 선의 끝에 매달아놓은 화약을 향해
-無를 적시는 꿈/김명리-
사철 늦털매미 나는 꿈
유지매미, 말매미, 가을매미 날아오르는 꿈을 꾸네
우화를 끝낸 17년매미가
느릅나무 수피에 몸 바짝 붙이고
와삭와삭 소리 내며 한 방울 감로를 마시는 꿈을 꾸네
막질 날개 속에 파묻힌
선홍빛 봉긋한 진동막을 거쳐
꿈꾸는 사람의 백회 속을 부유하는 바람소리
티티새 한 마리 살지 않는
손바닥만한 대뇌피질 속으로
끊어질듯 이어지는 매미울음 소리
느릅나무 푸르고 긴 가지들
울음의 기포들을 쉬지 않고 감아올리는
어둠의 축축한 산도(産道)를
나 여태 빠져나가고 있네
돗바늘 같은 털이 무성한 꿈의 경계
드높은 담장 밖으로 늦가을 물보라가 튀네
-비-없는 날의 꿈/최라라-
어제는 비가 내려요 베란다의 꽃이 흠뻑 젖어요 닦아 주고 싶은데 그러면 꽃이 아프대요 왜
꽃은 물을 닦아주면 아픈지 나는 궁금해요 우리 엄마가 말할 때는 눈을 보면서 하는 거라고
했는데요 꽃은 나를 안 봐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봐주면 좋겠어요 나중에는 꽃이 추운가 봐
요 새파랗게 떨어요 내가 춥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내 이마를 짚어보는데요 아이구 우리새끼
많이 아픈가보네 그렇게 조금만 만져주면 꽃도 배시시 웃을까요 아, 우리 엄마 아빠는 거실
에서 한참 맥주 마시고 있어요 나도 먹어 봤는데요 토요일 밤에 마시고 일어나니까 일요일이
사라져버렸어요 술은 일요일이 없어지게 하니까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 엄마 아빠는
내 말을 안 들어요 나는 비가 오니까 심심해요 놀이터에도 못 가고 친구들도 놀러 안 와요 참,
내 방에 있는 꽃에 물이나 줘야겠어요 내 방에는 비가 없거든요 그 꽃은요 내가 일곱 살 생일
때 아빠가 사 주셨는데요 일 년 동안이나 꽃이 활짝 피어있어요 엄마는 조화를 사왔다고 아
빠에게 뭐라고 그랬는데요 나는 조화라는 이름이 자꾸 예뻐서 만져주고 향기도 맡아요 조화
라는 꽃은요 아빠냄새가 나는데요 내가 비를 주면 반짝반짝 웃어요 다음에 놀러 오면 소개해
줄게요 이제 잠 올라고 그래요 비 다 내리면 깨러 올게요
-꿈/문태준-
아파트 18층에 누워 살면서 밤은 꿈도 없이 슴슴해졌다
소꿈은 길한 꿈이라는데 뜨막하게 소꿈을 꾸는 때가 기중 좋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다
내 걸음걸이는 얼른얼른 어딜 가자는 것 같고
소는 또 그럴 생각 없이 머뭇거리고 목을 젖혀 뻣뻣하게 버틴다
간혹 혀를 빼 누런 소가 길게 울기도 한다
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그 소와 아주 닮았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어도
소꿈을 꾸는 날에는 하루가 빈 걸상도 있고 악기점도 있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 수유리까지 멀리 나 있다
-꿈의 잠언/배용제-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
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애욕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
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있음을 찬송한다. 마침내 헛것의 창작물들이 내 일생을 대표할 것이다. 먼 날, 유
물이 전시될 때마다 칭송되는 나는 후세의 신으로 군림하지 않겠는가.
나는 쾌락의 아들; 오, 여자들아. 검은 구멍을 열어다오. 내 모든 감각들은 은밀한 숲과 험악한
늪에서 죽음의 꿈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나는 애무의 고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3.
얼음의 나라에는 얼음의 군주가 있고, 얼음의 백성이 있고, 얼음의 길이 있고, 얼음의 자동차
가 있고, 얼음의 계절이 있고, 얼음의 산이 있고, 얼음의 숲이 있고, 얼음의 꽃이 있고, 얼음의
나무가 있고, 얼음의 석양이 있고, 얼음의 집이 있고, 얼음의 아이가 있고, 얼음의 노인이 있고,
얼음의 시계가 있고, 얼음의 램프가 있고, 얼음의 하수구가 있고, 얼음의 계단이 있고, 얼음의
창이 있고, 얼음의 눈물이 있고, 얼음의 노래가 있고, 얼음의 춤이 있고, 얼음의 기억이 있고, 얼
음의 생각이 있고, 얼음의 꿈이 있나니.
그러니 어떤 꿈이 흘러 다니겠는가.
어떤 희망이 범람하겠는가.
4.
내 정신은 끊임없이 환각 속으로 진화한다.
5.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으며 썩어버린다. 다행한 일이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고정할 수 있는
건 권태뿐이다. 다시 늙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저녁이 왔다. 잎의 그늘이 사라진 허공으로 거대
한 구름들이 몰려온다. 얼어붙은 별들을 향해 짐승들이 날아간다. 단아하고 선명한 달빛은 언
제나 배후를 비칠 뿐이다. 한 번 사용한 계절은 돌아가 지옥의 방이 된다. 겨울의 밤은 환기구
가 없다. 저 태연한 세월.
시계는 늘 무뚝뚝한 변호를 하고 나는 도덕과 가치로부터 제명당했다. 탄생의 죄악을 감당할
어떤 정신이 있을까? 몸은 한 방울의 물이 되기 위해 영혼의 능욕을 견뎌내지만 내 쾌락은 고
귀하고 당당하다. 이제 나는 모든 증오를 절제한다. 고요하고 불길한 새벽에 이르기 위해.
단언하건대, 나는 부패한 집이고 몽상이고 노래다.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꿈속에 산다/황금찬-
북악산 아래 초막을 세우고
노을을 마시니
바로 이웃이
도연명일세
손끝에 먼
홍매화
시녀라 부르지 말라.
길을 열고
고향에서 손이 오면
백학이 구름머리에서
맞아주리라.
천금이라
귀할 것 없고
구름밭에 구르는 나뭇잎인걸
태양이
눈 뜨는 때를 기다리고
산새들의
피리소리
갈대 숲 속에 있거니
이제
더 찾을 것이 없다
다만 소 먹이는 아이들의
풀피리 소리 밖에는....
-낮꿈/상희구-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새와 모든 짐승들은
제각기 태고의 상형문자로
되돌아갔고
상형문자들은 다시 돌과 별과 새까만 물체들
속으로 들어가 박혔다
은하수만큼은 멀어진
왼손과 오른손 사이의
간격
어릴적 가랑이 사이로
올려다 본 세상은
낯 익은 異邦
-실개천의 꿈/안용태-
개울을 떠나 산모롱이 돌아올 땐
난 그저 조잘대는 개천이었지요.
강물이 되거나 바다가 된다는 꿈
한 번도 가져본 일 없었답니다
녀석들 대처로 떠난다기에
앞서가는 조각달 꼬리별처럼
어딘 줄도 모르고 흘러만 왔어요
날 밝자 달도 별도 놓쳐버리고
함께 떠나온 친구마저 잃어버렸어요
돌아보니 아득한 가야산 자락
어머니, 어머니 불러볼 때는
이미 나는 개천이 아니었어요
대가천 여울목 물살도 어우르고
낙동강 둔치 감자 꽃도 피우고
검푸른 무청 머리카락 흔들며
시름겨운 사람들 가슴 속에 흐르는
붉고 뜨거운 강이었어요
달구벌 사람들과 노래 부르며
바다로 흘러가는 낙동강이었어요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