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 지는 삼매, 산란한 마음의 작동을 멈추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색계 4선정 무색계 5선정. 관은 위빠사나. 신수심법을 알아차리는 통찰 수행. 마음챙김.
玉龍庵에서
石艸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줄 생각한다.
석초형! 나는 지금 이 너르다는 천지에 진실로 나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 許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神印寺의 古趾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 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군이 먼저 편지라도 한장 하여 주리라고
바래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服藥이라도 하려면 이곳을 오려무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 년 전이나 같은 듯하다. 그리고 답하여라. 나는 3개월이나 이곳에 있겠고, 또 웬만하면 영영 이 산 밖을 나지 않고 僧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부럽고 편한 듯하다. 서울은 언제 갔던가? 아무튼 경주 구경을 한 번 더 하여 보려무나. 몇 번이나 시를 써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직 머리 정리되지 않아 못하였다. 詩篇이 있거든 보내주기 바라면서 일체의 問候는 厥하며 이만 끝.
7월 10일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뵈올가 바란 마음 그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든 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1936년 8월 4일
-김용직 외, 李陸史全集(깊은샘, 2008)
「청포도」의 산실, 경주 남산 탑골 옥룡암(玉龍菴)
육사陸史의 초상을 보는 듯 지긋하게 낮달이 걸렸는데
출렁이는 시간의 바다, 그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의 운명은 슬프다. 어떤 것이나 간에 잃어버린 실존의 모습을 처음같이 되찾기는 힘든 법, 그러나 우연히 또 무슨 조화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변천, 이것이 자연적인 인문사(人文史)의 흐름이다. 때로는 산천의 구름으로 어떤 때엔 한자락 바람 되어 서로 그렇게 만나지는 불가분의 인연들, 남산(南山)자락 석경(石徑)의 나무가 그렇고 풀들이 그러하다.
답사에 맞춰서 때마침 만청의 하늘에는 싱그러운 청포도의 영혼, 육사(陸史)의 초상을 보는 듯 지긋하게 낮달이 걸렸는데 계곡에 얹힌 해탈교(解脫橋)는 폭포수 물안개로 세심수행(洗心修行)에 들었다.
지금 촉촉이 젖어 맺히는 자하(紫霞)의 문, 늘 언제나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경주 동남산의 작은 절집 옥룡암(玉龍菴,)
여기 옥룡암은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사설된 암자로서 법명 만석 스님이 주실로 있던 곳이다. 만석스님으로 말하자면 벌써 입적한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경봉스님, 벽안스님과 함께 일찌기 강원도 금강산 자락 마하연강원에서 같이 수행했던바 이들 모두는 당시 전국의 불문에 한결같이 학덕을 떨치던 엘리트 승려였다.
옥룡암 표지석과 청포도의 합성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절에 독립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이었던 육사가 한동안 머무르며 시작 활동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보건데 앞서 말한바 학업과 수행에 있어 불가의 지도급에 있었던 이분들과의 신분상 유대도 결코 무관치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육사도 역시 건천의 화천리에 있던 민족지사 고암(古菴) 박곤복(朴坤復)과도 밀접한 친교를 가지면서 서로 내왕하며 문학을 논하던 처지였다. 그러나 기실은 시 보다도 독립투쟁의 목적이 먼저였던 것으로 보인다.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錄), 1904년 4월 4일 안동에서 태어났다. 그 뒤 1925년에 그의 형인 원기(源棋)와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함으로써 일본 형사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피신, 은거하다시피 경주에 머물게 된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오늘같이 무더운 7월 한여름 밤,
옥룡암 한쪽 비탈에 기대인 듯 초라한 기와집 요사채에서 섬돌아래 애끓는 귀뚜리 울음을 벗 삼아 지새웠으려니 빼앗긴 나라, 민족의 설움과 통한을 시로써 달래며 승화시켰을 육사의 고육지책, 차마 그냥은 견디지 못해 한결같이 기대하는 이상세계로 향하여 피를 토하듯 뱉어낸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생일대 그의 대표 시, 한송이의 「청포도」가 그즈음에야 비로소 달콤한 향미로 영글었으리라. -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 하면서 날이 새기까지 한동안 눈을 감고 육사는 격정에 겨워 남몰래 흐느꼈을지도 모른다.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쪽빛 푸른 바다는 당시에 포항의 도구해변으로 가끔 출입했던 정황에 비추어 보아 분명 그 바다였음이 틀림없을 것 같다. 밤마다 산은 한없이 별빛을 받아 내려서 한 방울 맑은 이슬에 술인 듯 재웠으랴만 처륵처륵 흐르는 계곡물 소리 심연에 스며 아련히 취하게 한다.
이 무렵 육사는 서울의 성모병원에서 퇴원, 일본 관헌의 감시를 몰래 벗어나 옥룡암 승방으로 내려와 요양차 숨어 지냈다. 병석에 누웠던 뒤끝이라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육사의 몸, 고암은 물론 서울의 신석초(申石艸) 경주의 김범부(金凡父) 등이 자주 그 곁을 찾아와 위문하기도 했다. 특히 고암은 상시로 함께 기거하며 병 구환과 조석을 도왔으니 이만한 우정이 어디에 있을까? 또 고암은 육사의 권유로 오며가며 짬을 낸 시간에 영제(永齊) 이근창(二根昌)의 한문본 저항시 「왜馬行(말먹이는노래)」을 우리 가사체로 번역하게 되는데 책이 끝날 무렵쯤 고암도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때에 육사가 또 경주를 떠나자 고암은 육사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번역본의 마지막 장에다 그 허무를 적어 내렸다. 「임오 첫가을, 밤차로 벗을 멀리 보내고 외로운 비 오는 금오산 암자 한 옆방에서 역자는 ....」하고서 후문을 적었다. 슬픔이라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멀리 보내야 했던 벗, 이육사 그들의 투사적 동지애와 문학적 친구로서의 애끓는 정리가 왜마행의 번역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신라유적을 사이사이 갈비뼈 안에 감춘 듯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울울청청한 금오산의 품 너른 가슴, 옥룡암도 함께 만세불변의 경전을 펼치는 듯 일몰의 사색을 준비하느라 섬섬이 바쁘다.
청포도의 산실, 여기 옥룡암 앞뜰에 육사의 투혼과 문학정신을 새겨 표징의 빗돌로 세우노라. - 2010년 여름 청포도 시詩 현창 동인회 -
일제 침략기 저항 시인 이육사(본명 이활.1904~1944.)의 시조(時調)가 처음 발견됐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주제인 이 시조는 육사가 경주의 사찰 옥룡암에서 요양 중이던 1942년 8월 4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있던 석초 선생에게 보낸 엽서에 펜으로 썼으며, '前書(전서. 앞에 쓴 편지)는 보셨을 듯/ 하도 답 안 오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라는 머리글 다음에 적혀 있다.
김용직(서울대 명예교수)박사는 "육사가 쓴 시. 수필. 평론. 한시 등은 있지만 시조는 처음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3.4조의 운율에 전형적인 평시조이며 작품성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시조 첫 부분인 '뵈올까'의 대상을 석초나 민족. 조국으로 해석했다.
이육사에 대하여
이육사님의 수인 번호는 264가 아닌 64입니다.
그래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은 것 입니다. 이것을 성과 함께 부르니 '이육사'가 된 것 입니다.
처음에는 '64'를 음만 따서 '六四'로 했다가, 나중에 '대륙의 역사(陸史)'란 뜻으로 바꾼 것 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혼동하여 수인 번호가 264인 것으로 오인하는거죠.
아마도 선생님도 그것을 지적하려 했던 것 같네요.
아래에 사전 검색 결과를 올렸습니다. 참고 하시기를...
일단 이원록에서 이육사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대부분 수인번호가 264인걸로 알고계시는분들이 잇는데..
번호는 64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성인 이를 같이 불러 이육사가 되었습니다..
이육사 생애에 대해서 올립니다.
더 알고 싶으신 내용은 이육사문학관을 참고바랍니다.
년
나이
연보
1904년
0세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1909년
7세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
12세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1919년
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
16세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
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
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
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
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
22세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
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
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
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
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
28세
베이징, 텐진에 머뭄.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
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에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
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
31세
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
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
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
34세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
35세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
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
37세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
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
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 징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
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6년
1월 16일 인천 송현동(松峴洞) 동생 원창의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집안이 모인 자리에서 원창의 셋째아들 동박(東博)을 후사(後嗣)로 결정하다. 동년 10월 20일, 여러 지면에 흩어진 시고(詩稿)와 유고 등 20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다.
1956년
4월 10일 서울 범조사에서 미발표 유고로 발표된 「편복」과 수필 「산사기(山寺記)」를 추가한 『육사시집』을 다시 간행하다.
1957년
가을, 대구 한양 다실에서 <육사 추도의 밤>을 가지다. 이 때의 행사로는 조지훈의 「육사의 민족 운동」, 김종길의 「육사의 시」등의 강연과 박양균의 추도시 「초인(超人)에의 노래」낭독 등이 있었다.
1960년
봄에 유해를 고향 원촌으로 이장하다.
1964년
음력 4월 초4일 환갑을 맞아 장조카 동영(東英)이 시비 건립 운동을 펴서 신석초(申石艸)·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하다. 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를 가지다. 이 해 가을에 딸 옥비(沃非)가 경산 사람 양진호(梁振鎬)에게 출가하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가 제막되다. 그 전날 <추모의 밤>이 경안 극장에서 열리고, 또 추모 강연회(연사 : 노산 이은상)가 안동예식장에서 각각 성황을 이루다. 시비 전면에는 유시 「광야」를 새기고 비문을 조지훈(趙芝熏)이 짓다. 그리고 전면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뒷면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쓰다.
1974년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이 새로이 발굴되다. 이것은 육사가 직접 신석초(申石艸)에게 준 것으로서, 그동안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라사랑> 16집 특집을 계기로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몇편의 한시(漢詩)도 석초가 등초해 두었던 것이다. 작품의 연대는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同人) 때로 추정된다.
1945년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曠野]이 소개됨 1946년 원조에 의해 {육사시집(陸史詩集)} 출판됨
항일 이육사 시조 ‘첫햇살’
| 기사입력 2004-07-27 20:38| 최종수정 2004-07-27 20:38
[한겨레]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본명 이원록)의 미발표 시조가 처음
발굴돼 경북 안동시 이육사 문학관에 전시된다.
서울대 김용직 명예교수와 안동대 손병희 교수(국문과)는 태평양전쟁 당시
이육사가 신석초(1909∼1975·본명 응식)에게 보낸 엽서 안에 담겨 있던
시조(사진) 한 편을 새로 발굴했다고 27일 밝혔다. 그동안 육사의 현대시와 한시,
소설, 평론은 있었지만 시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시조는 3장 6구의 평시조 두 수로 된 연시조로, 1942년 8월4일 경북 경주시
남산 탑골 옥룡암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이육사가 보낸 엽서를 신석초 선생의
며느리인 강한숙씨가 보관해 오다 이번에 유족들과 두 교수에 의해 공개됐다.
이육사는 다소 여성적인 내용이 쑥스러운듯 시조 앞에 “하도 답 안오내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라는 머리글을 붙였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워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하노라”
김용직 교수는 이 시조가 “떨어져 있는 벗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담은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시조는 선생의 미발표 편지글 3편, 기사문 등이 실린 <이육사 전집>(깊은샘)과
<이육사 탄신 백주년 기념시집―광야에서 부르리라>(도서출판 성심)에도 수록된다.
시조가 실린 엽서 원본은 31일 이육사 문학관에 전시된다.
안동/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하면서,“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 <평론가?수필가?시인의 삶> 중에서, p.199 -김희곤, 이육사평전, 2010년
시와 같은 저항, 저항과 같은 시 이육사
한국인에게 이육사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 지하철역의 쉼터에 이르기까지 <청포도>나 <광야>와 같은 그의 시를 일상에서 여상히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알려진 이육사의 생애는 문학적인 성취를 쫓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시인으로서만 설명될 뿐, 그의 다양한 모습과 격렬한 저항활동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마저 잘못 알려진 것이 상당했다.
《이육사 평전》은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육사의 생애를 복원하여 이육사를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저항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이육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낯선
기존의 이육사의 삶을 소개한 많은 글들은 육사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수준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육사 평전》은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사라는 새로운 시각과 치밀한 자료 조사 및 검증과정을 통해 이육사의 삶에 접근한다.
이 책은 당시 문인들이 남긴 자료에 일제 경․검찰 기록과 언론보도, 경북 안동에서 중국까지 아우르는 현장 답사 및 인터뷰 등을 추가하여 잘못된 사료는 바로잡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육사의 행적은 새롭게 소개한다. 여기에 2000년 첫 발간 이후 어문학과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지적과 새로 발굴한 성과를 반영하여 초판을 수정․보완, 이육사 생애 복원의 완성도를 높였다.
‘264’에 숨겨진 뜻 《이육사 평전》에서 이육사가 사용한 필명의 변천사를 정리한 것은 이러한 이육사 바로알기의 대표적인 예다. 이육사라는 필명이 그의 수인번호에서 유래했다는 에피소드는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수인번호를 이름으로 택한 이유와 ‘육사’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육사의 한문 표기가 처음부터 ‘陸史’는 아니었음을 소개하며 이름의 변천과정과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육사’는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시작하여 세상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담긴 肉瀉(고기를 먹고 설사하다)와 강렬한 혁명의지를 드러낸 戮史(역사를 죽이다)를 거치면서 이 모든 뜻을 품어 陸史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육사가 ‘육사’외의 필명으로도 활동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육사는 시 못지않게 시사평론에도 힘을 기울여, 장제스 정책 비판과 중국 농촌의 몰락에서 국제무역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비평을 다수 남긴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시사평론에는 대부분 육사가 아닌 '이활'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무인으로서의 이육사를 새롭개 소개하다 동해송도원에서 요양했기 때문에 그를 병약한 문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육사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김원봉이 운영하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여 보병전술에서 특수공작까지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이기도 했다. 단아한 시인으로만 알려진 통념과는 사뭇 다른 사실이다. 간부학교 동기이자 처남인 안병철 역시 육사가 권총명사수였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무인으로서의 기질을 바탕으로 육사는 순국 전까지 충칭과 옌안을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戰線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여 항일무력투쟁을 준비했었다.
잘못 알려진 <이육사>를 바로잡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풍부한 문서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육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하나하나 바로잡는다. 예를 들어 이육사가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상식은 재고해야 한다고 밝힌다. 육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따르며 뜻을 함께 했지만 동시에 레닌주의자로서 김원봉과 사상적으로 충돌하여 의열단 소조에서 배제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저자는 이육사가 넓은 범위에서 의열단의 범주에 속할 수는 있지만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에 위반하고 중국에서 조선인 자신이 조선의 혁명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육사가 김원봉을 비판하며 저자는 육사가 장진홍의거에 직접 개입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근거가 희박함을 지적한다. 육사가 장진홍의거에 대한 혐의로 수감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일제 경찰의 마구잡이식 수사로 육사뿐 아니라 대구에서 활동하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함께 받았던 고통이었다. 당시 육사는 폭탄상자에 적힌 필체가 동생인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또한 육사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현상공모를 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도 오류임을 밝힌다. 조선일보의 1933년 9월 20일자 <현상소설 예선당선자 근황> 기사에 '이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의 이활은 육사와 동명이인인 황해도 출신의 문인이다.
못다 푼 <이육사>를 공개하다 육사의 중국유학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의 시기가 엇갈리고 장소도 불분명하여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박훈신과 조지훈은 육사가 베이징대학을 다녔다고 언급하지만 일제에 의해 작성된 신문조서에서는 육사가 베이징의 쭝구어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나온다. 이에 저자는 중국 현지답사를 통해 2000년 초판에서는 쭝산대학에 재학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 후 십년간 축적된 여러 연구자들의 검증노력을 바탕으로 개정판에서는 베이징유학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과 더불어 ‘쭝구어대학’의 실재를 함께 소개한다. 또한 이번 개정판에서는 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동창후뚱 1호에 일제의 문화특무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위치했음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육사의 죽음과 일제 기관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광야에 노래의 씨앗을 뿌린 초인
친일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당시 한국인 거의 모두가 대일부역자였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일제라는 같은 시기를 감내하면서도 친일과 항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이 있다. 이육사는 야만 앞에서 대세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번 떠나온 항일투쟁의 대열에 다시 뛰어 들어 자신이 노래한 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았으며 그러한 삶을 시로 남긴 진정한 시인이었다.
육사는 시를 통해 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며 훗날 백마 탄 초인을 기다렸다. 2000년 평전 출간 이후 새로운 연구업적이 나왔듯이, 이번 개정판의 성과와 풀지 못한 숙제 모두가 새로운 추적과 연구의 디딤돌이 되어 육사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본문 중에서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하면서,“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 <평론가․수필가․시인의 삶> 중에서, p.199
이제 그런 김원봉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육사는 김원봉이 과연 어떤 생각과 뜻을 가진 영웅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이고, 반대로 김원봉도 윤세주가 추천하는 그를 시험해보는 일이 필요했을 터였다. … 며칠 지나 육사는 김원봉과 단 둘이 배 위에 올라섰다. 김원봉이 육사를 저울질하는 시간이었다. 이는 결코 우연한 기회가 아니라 김원봉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넓은 호수 위에 유유히 노를 젓는 낭만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보트 위의 두 사람은 팽팽한 긴장으로 얽혀 있었을 것이다. 멀리까지 배를 저어가서, 근처에 다른 보트가 없는 것을 살펴본 김원봉이 말을 꺼냈다. - <난징에서 만난 의열단장 김원봉> 중에서, p.147
차례
이육사 연보 육사 가계도
책을 펴내며
평전을 다시 쓰면서 뜻을 모으니 기리기도 새로워 아직도 남은 수수께끼들
육사가 사용한 이름 ‘이원삼’에서‘이활’로 이활李活과 대구 264二六四_ 264에서 육사肉瀉·戮史·陸史를 거쳐 육사陸史로
육사의 고향, 원촌마을 이육사를 만나러 가는 길
육사의 출생과 집안 전통 육사를 둘러싼 무서운 규모
육사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 한문을 배우며 자라다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대구로 이사하다 결혼과 처가에서 다닌 백학학원 일본 유학
중국을 드나들며 민족의식을 키우다 대구 조양회관에서의 문화활동 베이징 나들이 베이징에서 쭝구어대학中國大學상과에 다니다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꺾이지 않다 장진홍의거에 따른 억울한 수감생활 1년 7개월 대구에서의 기자생활 ‘대구격문사건’으로 2개월간 구금되다 잦은 만주 나들이, 결국은 베이징으로 중외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초급군사간부가 되다 윤세주尹世胄가 권하는 난징행 베이징을 거쳐 난징에 도착한 의열단 의열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다 난징에서 만난 의열단장 김원봉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니다 졸업 기념으로 연극을 공연하다 육사가 맡은 임무 봄비 내리는 난징에서 국내 침투 준비 의열단에 가입하지 않았다는데
국내 근거지 확보하다가 체포되다 상하이에서 루쉰을 만나다 서대문 감옥에 갇히다
평론가·수필가·시인의 삶 본격적인 글쓰기와 사회 활동
시사평론에서 보이는 시대인식 시사평론가로서의 이육사
친일의 물결 헤치고 투쟁의 길로 또다시 베이징으로 간 이유는? 충칭과 옌안을 연결하려 하다 베이징에서 순국하다 ‘베이징 감옥’은 어디일까 고향에 묻히다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주석 찾아보기
저자
소개
김희곤
1954년 대구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편찬위원장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2004년부터 2년여 동안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맡기도 했다.
주된 관심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에 두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1995, 공저), 《백범김구전집(1-12)》(1999, 공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2004), 《대한민국임시정부1-상해시기-》(2008), 《제대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2009, 공저) 등을 집필하거나 편찬에 참가했다. 또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안동의 독립운동사》(1999)를 비롯하여 7개 시군의 독립운동사를 정리ㆍ발간하고, 《박상진자료집》(2000),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2001), 《잊혀진 사회주의운동가 이준태》(2003, 공저),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2005, 공저),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2006),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2007),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2009, 공저),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2009), 《이중언; 나라위해 목숨 바친 안동선비》(2010), 《권오설》1ㆍ2(2010) 등을 집필하고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