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을 진행하는 군이 대장님을 비롯한 모든 산꾼들에게
고암나루터까지 무사 산행을 기원합니다
1.2구간에 낙남팀에 묻어가긴 하지만 전 신백두대간 걷기에
산행기에 조금 다르다고 질책하지 마시고 같은 구간이니 양해 바랍니다
참고로 선달 아우님의 사진 인용했습니다
☞산행일자: 2016년 1월 02일 ~03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음... 초여름같은 더운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3km + 어프로치 6.5km / 10시간 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낙남정맥팀과 함께
☞산행코스: 거림골 주차장-탐방지원센터-홍수대피 경보기-1008교-북해도교-깔닥고개-전망대-세석교
세석대피소갈림길-세석대피소-헬기장-영신봉-자살바위-창불대-전망바위-음양수-집터 흔적
암봉-의신마을 갈림길-석문-전망암-고개-1237봉-한벗샘갈림길-안부-암릉-1278봉-삼신봉
갈림길-갓걸이재-외삼신봉-1265봉-1241봉-안부-묵계재-991봉-902봉-고운동재
☞소 재 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하동군 화개면, 청암면
丙申生 새해 첫 산행지가 공교롭게도 지리산이다
지난 7년동안 대한민국의 산을 다닐만큼 다녔건만 아직도 그 갈증이 해소되지
않으니... 이것도 집착인지...요즘 우리 아들, 딸의 협박(?)이 무척이나 심하다
이러다가 앞서 걷지 못하면 어떡할거냐, 아빠가 지금 청춘인 줄 아느냐...
아빠 올해가 화갑인줄도 모르고 20대인 줄 아느냐는 등 갖은 협박을 다한다
그래도 가고 싶은 산이 너무도 많은데 어쩔손가... 다리 힘있을 때 다녀야지
요즘은 주로 서울 근교의 한남정맥에서 뻗어나온 9지맥을 많이 다니는 편이다
이곳은 여주, 이천, 용인, 화성 평택지역으로 수도권 지역에다가 급격히 도시화가
되어버려 맥이 참으로 많이 끊기어 맥길 찿기가 참으로 난해한 지역에다가 산꾼들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아 산행 기록도 별로 없다... 거기에다 난 오룩스나 트랭글 같은
맵으로 산행하는 걸 싫어하는 정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으로 산행하는 스타일이라
남보다는 10배이상 공부를 해야 겨우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도 난 그게 좋다.
그러던 중 내가 백두대간 남진과 호남정맥을 했던 산악회에서 낙남정맥을 시작한다는
공지가 떠기에 이번 기회에 신백두대간을 해보기로 하고 낙남팀에 묻혀 산행길에 오른다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山自分水嶺)’는 간단한 진리에서 태어난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2,750m)에서 지리산(1,1915m)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분수령의
연속된 산줄기로 백두(白頭)는 백두산의 ‘백’자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의
‘두’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고 ‘대간’은 큰 산줄기를 뜻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은 신라말인 10세기 초에
도선이 지은 『옥룡기』에 처음 등장하고, 이 개념은 1769년(영조45년)경에
여암 신경준 선생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山經表에 의해 완성된다
산경표는 한반도 땅덩어리를 한강등 10대 강을 기준으로 해서
1대간,1정간, 13정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등 ‘산맥’ 개념은
20세기초 일본 지질학자인 고또분지로 논문에 의해 비롯되었고,
우리의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산경표는 지리산에서 취령-황치-옥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취령부터 낙남정맥이 시작된다고 적고 있다
표를 보면 취령에서는 산줄기가 둘로 나뉘고, 그 하나는 황치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인데
다른 한 줄기는 안 보인다.
산경표의 원전이라고 보는 증보문헌비고-여지고-산천총설1에서 보면 그 한줄기는
梨山(이산)- 茅方山(모방산)-河東府治(하동부치)로 이어지고 있고 이를 현대 지도에서
보면 삼신봉에서 하동의 구재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그러니까 낙남정맥의 시작은 영신봉이 아닌 삼신봉이 맞다.
그렇다고 삼신봉이 백두 대간의 끝은 아니다.
산경표의 정간과 정맥은 10대강을 위주로 생활권을 크게 구분하고 있고 그 가지 산줄기는 강의 크기나
산줄기의 길이에 상관없이 부.목. 군. 현 등의 치소를 향하고 있고, 옛 선조들은 산줄기를 면으로 이루어진
산 들의 연속으로 봤지 오늘날 우리들처럼 마루금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표현되는 대간의 끝은 반드시 주봉인 천왕봉이어야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 끝은 삼신봉이 될수도 있고, 황장산을 거쳐 화개에 이르는 산줄기의 끝이 될 수도 있다.
산경표가 생활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면 옛부터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가 산에서 강으로 바뀌는 곳 즉 화개가 끝이다.
호남정맥의 끝 백운산에 부기한 내용을 보더라도 섬진강너머로 지리산을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날라리봉(삼도봉)에서 황장산을 거쳐 화개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대간의 끝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지리산을 면이 아닌 선으로 이어간다면 대간은 영신봉에서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들려
문안인사드리고 되돌아 내려와 삼신봉까지 가야할 것이다.
*신산경표는 산경표와 달리 산줄기 구분에서 생활권이란 요소를 제외했기 때문에 10대강을 구분하면서
내려온 산줄기가 그 끝에서 섬진강이나 낙동강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대양을 향해 곧장 내려서는 노량을 그 끝으로 봤다
신 산경표의 저자 박성태님 자료 인용
우리나라 맥산행의 大家이신 박종율님께서 백두대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다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님이 백두대간의 끝을 지리산 천왕봉이 아닌 남해대교 앞
노량으로 보는 견해를 밝혔다
깊은 뜻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 짐작으로는
1. 백두대간도 정맥과 마찬가지로 임해처가 바다로 가야 하지 않느냐 하는 점
2. 국토의 물줄기를 대간이 동서로 나눈다는 점.
3. 정맥도 강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데 하물며 대간이 강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지 않는다면 모순이 아니냐?
대간의 끝이 영신봉이 아닌 천왕봉이나 더 나아가 웅석봉 또는 백운산에서 끝을 맺는다면 산줄기 좌측의
임천강→경호강→남강물과 우축의 덕천강물은 진양호에서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즉 영신봉이후의 산줄기 양쪽물은 하나의 물줄기이다.
등의 이유로 백두대간의 끝을 지리산 천왕봉으로 잡지 않고 영신봉에서 산경표의
낙남정맥을 따라 동진하여 삼신봉.고운동치. 돌고지재를 지나 옥산갈림봉 전의
547봉에서 남진하여 2번국도.계봉.금오산.연대봉.노량으로 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튼 그런 견해의 옳고 그름이나 그런 견해를 같이 하든 달리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고
이 산줄기를 어떤 이는 백두대간의 꼬리,또는 백두지맥. 금오지맥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 펌
앞에서 언급한 맥산행 고수들의 언급을 종합해보면 백두대간의 끝은 천왕봉이 아니라 영신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삼신봉, 외삼신봉을 지나서 남해바다로 떨어져야 한다는 결론같다
그걸 신백두대간으로 정의하고 요즘은 꽤나 많은 산꾼들이 영신봉에서 남해대교쪽으로 향하는데
거기서도 대부분의 산꾼들이 신백두대간 산행을 한다면서 시작점을 영신봉이 아닌
돌고지재나, 돌고지재를 조금 지난 546봉에서 시작하는 우듬지 구간을 신백두대간으로
정의하는데 난 그게 싫어서 영신봉에서 시작하려 낙남팀에 묻어서 가는데 오랫동안 나홀로 산행을
했고 무박산행을 하지 않는 탓이라 따라나 갈련지 걱정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의 구글어스
오랫만에 나서는 무박산행이다... 나홀로(독립군) 여유로운 산행을 하다가 일행들을
따라 갈런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7년간 매주 다닌 맥산행의 짠밥이 얼만데
하는 똥배짱 하나만 갖고 밤 10시반에 집을 나서 탑승지인 양재역에 도착한다
밤 11시경에 버스에 오르는데 42명... 만차라 그런지 베낭을 실을데가 없다
버스에 올라 오랫만에 만나는 관광버스 박사장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대간을 타면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도 보이지만 대다수가 모르는 산꾼이다
산꾼을 가득 태운 버스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함양 휴게소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오랫만에 만난 진권 아우가 맛있는 국밥 한그릇을 사주기에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가 이상한 곳에 왔다
거림골로 가려면 단성I.C에서 빠져나와 중산리를 지나가야 하는데 박 사장은
함양 J.C를 지나 지리산 I.C를 나와서 길을 헤매는게 아닌가
이곳은 거림과는 정반대인 백무동으로 오르는 길이다... 다시 버스를 돌려서
단성I.C를 빠져나와 거림골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조금 지났다
어쨌던가 새벽에 눈감고 산행하는게 딱 질색인 범여로서는 얼마나 다행인가
박 사장님... 고마우이... 어찌 내 맘을 그리 잘 아시는가 ㅋㅋㅋ
거림골(居林谷:05:30) -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소재
경남 산천군 시천면은 낙동강의 발원지 강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하여 矢川(화살시,내천)으로 불리고 있으며 물이 빠르고 계곡이 깊고
주변경관이 산자수명하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대리는 골안이 넓다하여 한찰이라 불리는 한차리의 안쪽이라 해서
내대(內大)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내대리의 거림마을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는 거림(居林)이란 이름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으로 마구 벌목이 되었고
8.15 광복 이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나가 한때는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아닌 버스가 2시간 가량 알바를 하는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늦게 산행을 시작하는데
밤에 눈감고 산행을 하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범여로서는 박 사장이 얼마나 고마운지...
길상선사 입구
요즘 날씨가 따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리산이 아닌가... 서울과 비교하면 안되지
무거운 겨울 장비에다가 장갑 2컬레, 모자 2개, 양말 3컬레, 고어텍스 자켓에다 구스다운,
아이젠, 스팻치까지 챙겼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이건 완전히 봄날씨같다
그래도 윗쪽은 다르겠지 생각하며 베낭을 그냥 지고 가는데 무게가 족히 20kg정도 될듯 싶다
거림골 입구에는 왜 이리 점집들이 많이 보이는지 그 와중에도 꽤난 큰 사찰인
길상선사 표지판이 있는 도장골 방향으로 보이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행대장은
마치 자기가 알바해서 2시간 늦은줄 알고 미안한 마음인지 내리자마자 산행을 시작한다
난 늦게가면 늦게 갈수로 좋은데... 볼것 다보고 가니까...ㅋㅋㅋ
지리산 거림탐방지원센터(05:38)
거림골에 있는 음식점들은 아직도 야심한 밤중이라 곤히 잠든 민초들을 깨울까봐 조심스레 걷는다
선두들은 벌써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오랫만에 같이 산행을 하는 진권 아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데 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우측으로는 도장골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5년전인가 가을에 세석산장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식당 아줌마와 둘이서 술한잔 했던 기억이 아득한데...
그 아줌씨 아직도 잘 사는지 모르겠다
홍수통제경보기(05:45)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가운데 계속에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역시 지리산이다...이곳 어디쯤에 신선바위가 있는데 칠흙같은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이정표(06:20)
천팔교(06:30)
해발 1,008m에 지점에 설치되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다소 옹색해 보인다
철계단을 오르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베낭의 무게 때문에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 지는데 평소같으면 진작에 도망갔을 진권 아우님이 뒤쳐지는 나를 보고는
‘행님아! 베낭이 너무 무거운 보인다’ 하면서 자기 베낭을 나한테 주고 내 베낭을
자기가 지는데 ‘뭔 베낭이 이렇게 무겁노’한다... 평소 혼자 다니던 버릇 때문에
이것저것 다 들어서 무거운 모양이다... 아우님 덕분에 지금부터 편하게 걷는다
젊은이 복받을겨... 어둠속에 무명폭포도 보이는데 똑닥이 카메라로는 그림을 잡을 수가 없다
북해도교(北海道橋:06:40)
왜 하필이면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북해도교라니...
누가 작명을 했는지 참으로 개념이 없고 그걸 그대로 사용한 국공파도 그렇고...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곳이 일본의 북해도처럼 기온이 많이 낮아서
지명을 붙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일제강점기에 오부자와 관련해서 붙혔다는
기록만 해놓고 구체적인 내용의 설명은 없다.
깔딱고개(07:10)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거림골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깔딱고개이다
이제 주위는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능선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망대(07:20)
깔딱고개를 지나면서 등로는 서서히 유순해지기 시작하고 잠시 후 전망대가 나온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남해 삼천포를 찾아 보셔요’ 팻말이 서 있는데 아직까지 어둠이
가시지 않아 볼 수가 없고 동이 트려는지 동쪽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사진찍기 좋아하는 진권아우와 후미대장을 맡고있는 배 원장이 사진을 달라고 한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진권아우... 행님의 무거운 베낭을 메고 고생이 많소
세석교(細石橋:07:25)
구조이정목(07:30)
이제 날은 완전히 밝았고 해도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인데 이곳은 계곡에 푹 파인 곳이라
해를 구경할 수가 없다... 하긴 3代가 덕을 쌓아야 지리 일출을 볼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세석산장으로 오르는 길에는 음지라 그런지 잔설과 얼음이 보인다
대성골 갈림길(07:40)
지난 7월말경에 지리산 남부능선 종주길에 이곳을 왔으니 5개월만 다시온다
우측 세석산장으로 향하는데 지리산의 멋진 설경을 상상하며 왔건만 눈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지난번 지리종주 알탕을 했던 찬물샘을 지나 세석산장
식수대에 도착하니 선두로 도망(?)갔던 동료 산꾼을 만나 물한모금 마시고
세석산장을 지나고 영신봉으로 향한다
세석산장(08:00)
헬기장에서 바라본 촛대봉과 세석평전(細石平田)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제공을 한 그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저 촛대봉은 알고 있는지... 지리산에 올때마다 범여의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아 한국의 지붕이라는 개마고원(蓋馬高原)에 빗대어
남녁의 개마고원이라 부르는 세석평전 이곳은 동쪽의 촛대봉과 서쪽의 영신봉
사이에 30여만평에 작은돌 밖에 없는 토양이라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는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수련장이도 한 곳이다.
지리산 10景중에 하나인 세석척촉(細石躑躅)
이곳은 5월말에서 6월초에 피는 수십만그루의 철쭉이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소설가 이병주가 쓴 「산을 생각한다」에서 세석 철쭉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표현한 기록이 나오는데 세석 철쭉이 화려하게 만개해 있을 때 빨치산이 자살을
하면서 “지리산아! 꽃으로 치장하고 너만이렇게 호화스러울 수 있느냐 ”고 했고
또다른 소설가 문순태는 ‘철쭉제’라는 소설에서 세석의 철쭉을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 놓은 것”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함양군 마천면의 모습헬기장에서 세석평전을 한번 더 바라보고 영신봉으로 향한다
영신봉(靈神峰:1,652m:08:05)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 하동군 화개면에 걸쳐있는 3군 경계봉이며
산꾼들은 이곳을 낙남정맥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 곳으로 지리산의 봉우리중에서
가장 氣가 세고 신령스럽다는 곳으로 지명의 유래는 봉우리 아래에 있었던 영신사에서
유래된 걸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영신사는 지리산에 있다. 절 뒤에 깍은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김종직(1431~1492)은 “유두두록(遊頭流錄)”에서‘영신봉과
좌고대를 바라보니 여전히 멀리 있다’ 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과 대성골 계곡, 북사면으로는
함양군 마천면 한신계곡이 있고, 남서쪽 사면으로 내려오면 화개면 대성리로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남서방향으로 흘러 화개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향한다
영신봉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은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지리산은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라는 뜻의 지리산,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르키는 뜻의
방장산(方丈産), 백두산의 맥이 뻗어내렸다는 뜻의 두류산(頭流山)등으로 불리운다
영신봉에서 바라본 반야봉의 모습
지리산에서 천왕봉, 노고봉과 3대봉우리로 꼽히는 반야봉
2개월전에 알현했는데도 또다시 마고할미가 나를 부르는듯 하다
마고할멈... 요즘 범여가 바빠서 못간다고 전해라
영신봉 정상에서의 새끼노루
진권아우와 함께 영신봉 정상에서(선달아우님 작품)
2010년 8월 22일 낙남정맥 종주 졸업사진
반야봉, 노고봉, 왕시루봉 등 지리산 서북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영신봉을 내려와 禁線을 넘는다... 국공파들이 가지 말라는 곳을 넘어서 창불대로 향한다
제도권 산에만 들어오면 늘 국공파의 잔소리... 언제쯤이면 안 들을까.
하지말라, 가지말라... 벌금 30만원 때린다 이곳에서 음양수까지가 그런 곳이다
낙남정맥의 시발점이라는 이 곳... 온 산을 다 파헤치는 멧돼지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산꾼에게 기껏해야 50cm 폭의 길만 만들어 주면 될것을...
民草들의 祿을 받아먹고 사는 국공파들이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갑질해대는
저 못된 버르장머리는 규제개혁 대상은 아닌지.. 그래서 이꼴저꼴 안보고 맘껏 걷는 지맥길이 최고여
영신대 갈림길(08:25)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영신대 방향이다
점필재(岾畢濟) 김종직(金宗直)은 영신암에서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한다
箭括車箱散策回(전괄거상산책회): 전괄(창불대)과 거상(대성폭)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노선방장석문개) 방장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명조갱답홍진로):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려니
須喚山都沽酒來(수환산도고주래): 모름지기 촌장(은둔선비)을 불러 술이나 받아오게
靑鶴仙人何處棲(청학선인하처서): 청학을 탄 신선은 어느곳에 사는고?
獨驥靑鶴恣東西(독기청학자동서): 홀로 청학을 타고 마음껏 다니겠지
白雲滿東松杉合(백운만동송삼합): 흰구름 골에 가득하고 소나무 삼나무가 모였으니
多小遊人到自迷(다소유인도자미): 약간의 유산객만 들어와도 저절로 길을 헤맨다네
千載一人韓錄事(천재일인한녹사): 천년의 세월속에 일인자인 한녹사(韓惟漢)는
丹厓碧嶺機獒遊(단애벽령기오유): 붉은절벽 푸른고개에서 얼마나 노닐었던고
滿朝卿相甘奴虜(만조경상감노로)): 조정 가득한 경상들은 노예와 포로됨을 감수하는데
妻子相携共白頭(처자상휴공백두):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와 함께 백발이 되었네
雙溪寺裏憶孤雲(쌍계사리억고운): 쌍계사 안에 고운(최치원)을 생각하니
時事紛紛不可聞(시시분분불가문): 어려웠던던 당시의 일을 들을수가 없구나
東海歸來還浪跡(동해귀래환랑적): 해동(신라)에 돌아와서 도리어 유랑했던 발자취는
祗緣野鶴在鷄群(지연야학재계군): 다만 야학이 군계속에 있었던 연유로다
(고운(孤雲)이 여럿가운데 홀로 특출 난 까닭이라네)
영신대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창불대로 향한다
그래도 이곳은 잔설이 조금은 남아있다
단속구간인 비법정탐방로라 그런지 등로는 상당히 거칠다
자살바위(08:33)
1951년 한국동란 때 국군과 UN군이 지리산 빨치산 토벌당시 대성골에 패한
남부군에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여성대원 15명이 지리산 국군 토벌군에
쫒기다가 이곳에서 포위가 되자 전원 자결했다는 슬픈 기록이 있다
이곳 바위에서 대성동을 향해 뛰어내려 이곳 자살바위에서 대성계곡 방향으로
몸을 날려 생을 마감 했다는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의 슬픈 이야기는 아직도
전세계에서 아직도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의 아픔과 괘를 같이한다
자살바위 바로 아래에는 병풍바위가 보이고...
창불대(唱佛臺)에서 바라본 자살바위
창불대(唱佛臺:08:35)
병풍바위는 사실상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자살바위는 주마간산격으로 지난다
창불대라는 곳에서 바라보니 훨씬 잘 보이고 창불대 위에는 제단처럼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는데 제단(祭壇)이라기 보다는 수행처로 보인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자살바위, 병풍바위 전체가 창불대라 보면 될 것같다
창불대(唱佛臺)라... 붓다를 위해 다게(茶偈)와 오분향래(五分香禮)를 올리고
찬불가를 불러서 붙혀진 지명인가?...(범여의 생각 中에서)
17세기 조선 선조때 까지만 해도 '영신사'라는 사찰이 세석평원에 존재 했으며
영신사에서 찬불가를 올리는 곳이라 하여 창불대라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창불대 아랫쪽의 대성골과 빗점골 계곡을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천길 낭떠러지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에서 발췌
지리산에서 오늘 눈을 밟아본 곳이 여기가 마지막이다
곰출현 지역이란다
음양수로 향하는 지역엔 그래도 눈이 제법 쌓여있다
전망바위(08:45)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지리산 남부능선
매번 지리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벅찬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다가오는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아 여자들의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장쾌하고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산이라 부르고 싶다.
골짜기마다 슬픈 역사와 동족상쟁의 아픔을 가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비법정 탐방구역인데 겁(?)없는 산꾼들이 영역 표시를 해놨다... 국공파의 ‘甲’질에 얼마나 시달리려고...
누석제단(累石祭壇:08:55)
이곳은 우천 허만수라는 분이 좌선대를 만들어 도를 딲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는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이로 지리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처자식까지 내팽겨치고
20대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초막하나 지어놓고 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같이 온 낙남팀들이 낙남길 무사종주를 위해 지리산신을 모셔놓고
山祭를 지내는데 신백두대간을 타는 진권아우와 난 이벤트 팀이라 굿만보고
떡만 먹는다...참으로 정성스레 많은 준비를 해 왔는데 어느 분이 과일의 머리를
깍아놨다.. 조상신과는 달리 산신에게는 과일을 껍질째 올려야 하는데 근데 어느
재치있는 분이 과일을 거꾸로 놨다... 굿 아이디어이다
단 밤이 눈에 좀 거슬리기는 한데... 지리산신은 신식이라 열대 과일인 바나나도 드시는가 보다
그래도 이 높은 곳까지 저 무거운 곳을 지고온 정성이 얼마나 가득하랴...
다들 ...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막걸리와 시루떡 정말 잘 먹었습니다
낙남정맥 집행부들이 여법하게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山祭를 지난 다음에
떡과 막걸리에다가 각자 가져온 음식으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후 길을 떠난다
음양수(陰陽水:1,450m:09:58)
음양수의 유래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공(山公)도 이 못난이의 호소를 가엾다 함인지 얼마 아니하여
수림을 드뭇드뭇 틔우면서 이 높은 산 위에 어디에서인지 물소리를 마중보냄은
분명히 어디 무슨 영천(靈泉)의 성구(聖區)가 있음이겠다.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귀 따라 급히 힘두르매 길 왼편에 큰 바위가 솟고 암극(岩隙) 사이로서 새어
떨어져나오는 석천(石泉)이 대번에 지금까지의 모든 난고를 돈망(頓忘)케 한다.
이것이 소위 ‘음양수(陰陽水)’ 이다. 두 갈래의 천류(泉流)가 있기 때문이어니와,
때때로 자식을 원하는 남녀들이 여기에 분집(坌集)하여 이 물을 먹고 하늘에
빌어 득자(得子)의 기쁨을 얻는다 한다.
이 물을 마십시다
하늘에 비옵시다
내 마음 이어나갈
뒷사람을 얻읍시다
한 잔은 못 미덥구려
실컷 量껏 마십시다.
이 음양천이라 함은 벌써 그 이름부터가 민간신앙의 기도장임을 정(定)함이려니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음양천 바위 뒤에 돌로 쌓은 제단이 꽤 대규모적이요,
방금도 한 노파와 장정 두셋이 말로는 병을 빙탁(憑托)하나 무슨 소원을 기도하러 왔는지
밥을 지어 먹으며 머물고 있음을 본다. 민신(民信)을 실증하는 일단이다.
1938년 이은상 선생 지리산탐험기 中에서
지리산 능선 해발 1450m 고지에 있는 이 샘은 신령한 영신봉에서
내려온 약수이다. 좁은 돌틈 사이에서 비집고 이 물은 지리산 샘중에서
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음양은 易學에서 우주만물을 만들어내는 상반된
성질의 두 기운을 합친 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흔히들 지리산을 물이 많다고 해서 여자의 산이라고 한다. 해발 1800m 고지부터
풍부한 수량의 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니 말이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에는 식수를
많이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샘터가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말이다.
지난해 여름에 왔을때는 물맛이 참으로 좋았는데 지난해 가을의 가뭄탓인지
물은 그리 많지 않으나 한모금 마실 물은 충분하다... 물한모금 들이키고 삼신봉으로 향한다
이곳은 물이 참 많은 지역인데 가뭄탓인지 바짝 말라있다
암봉(10:08)암봉에서 뒤돌아 본 촛대봉과 세석평전의 모습
다정한 노루부부... 참으로 부럽다
지리 남부능선은 지리산 다른 능선과는 달리 산꾼들이 그리 많지 않아 독립군인 내 스타일이다
5개월만에 만난 멋진 암릉구간
의신마을 갈림길(10:15)
조선시대 유몽인, 이륙, 김일손 같은 선비들이 천왕봉을 구경하고 세석고원의
영신사로 이동했다가 쌍계사로 하산할 때 대부분 대성동 길을 이용했다는
문헌을 남겼는데 이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선비들의 힘든 여정이 녹아있는 대성동을 오르는 이 코스는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대성동 계곡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60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지리산은 옛날 신선이 내려와서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중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의 뜻이라는 지리산(智異山)은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내려다하여 '두류산(頭流山)'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소(沼)를 품은
산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1967.12.29)으로 지정되었고, 쌍계사와 화엄사, 실상사, 대원사 등
수많은 고찰들은 품은 산으로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25.5 km에 이르며, 이 산의
둘레는 320 km에 달한다
石門(10:30)
높이가 10m 정도되는 커다란 석문을 지나 삼신봉으로 향한다
아픈 삶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자빠진골과 거림마을
세석평전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 한벗샘에서 발원한 물이 내려가는 곳이
자빠진골이라 하는데 능선에 삐뚜름하게 붙어 자빠진듯 생긴 모양이라 붙인 지명이다
자빠진골은 지리산의 아흔아홉 골짜기중에 하나로 능선에 그 아래로 거림마을이 보이는데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6.25라는 한국전쟁이 일어난지도 벌써 반백년도
훨씬 넘은 65년이나 넘었건만 아직도 아픈 역사를 가진 거림마을...
민주와 공산주의 이데오르기라는 이념 전쟁에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民草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중에서도 마지막 여자 빨치산(남편을 찾아 빨치산이 된 여인) 정 순덕이라는 여인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51년 빨치산 정 석조와 결혼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향을 거부하며 비전향 장기수로 남아 있다가 2004년 생을 마감한
비극의 여인 정 순덕이라는 여인이 마지막 활동한 곳이 이곳이다
전망바위(10:37)
전망바위에 올라 있는데 선달 아우님이 멋지게 한장 박아준다
지난해 7월말 지리산 남부능선을 걸을 때 엄청난 베낭의 무게 때문에
개고생하면서 걷다가 이곳에서 아우님과 둘이서 소주 한잔에 오이를
맛있게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아우님 그땐 왜그리 무식했지 ㅋㅋㅋ
전망바위를 지나 다시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암릉구간을 만난다 고개(10:55)고개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멋진 암릉구간을 오르지 못하고 우회
한다는 것이 마루금을 고집하는 맥산꾼으로서는 아쉽다면 아쉬움일까
옆사면 아래로는 대성골이 65년전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지리산을 지키고 있다.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야 하는 암릉구간
다시 오름길에 오르니 서서히 산죽길은 시작되고...
아직까지는 낭만적인 산죽길이다
1237봉(11:18)
보도블럭을 깔아둔 폐헬기장에 이정표와 긴급시에 상용할 수 있는 비상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한벗샘 갈림길(11:25)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한벗샘이 나오는데 국공파들이 목책으로 막아놨다
한벗샘은 거림으로 이어지는 자빠진 골(엎어진 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안부(11:32)
암릉
말라죽은 산죽구간
지난해보다는 죽은 산죽의 면적은 더 늘어난듯 하다
1278봉(11:55)
정상은 오르지 못하고 사면길로 우회하며 삼신봉으로 향한다
가야할 외삼신봉(좌)과 삼신봉(우)의 모습
오늘은 진권아우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지난해 신낙남 정맥을 같이 걸었고, 춘천지맥 2구간을 걷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 같으면 진작 도망가야 할 친구가 오늘은 ‘행님을 확실히 예우하는구먼’ ㅋㅋㅋ
조금을 지나니 산불이 난 흔적인 고사목 지대가 나온다.
이곳은 1997년 10월 21일 삼신봉 일대에 일어난 산불로 인해서란다.
그 당시 약 50ha의 산림을 불태웠는데 지리산이 국립공원 국립공원이
지정된 이후에 가장 큰 산불이라고 하며 등산객의 실화에 의해 발생됐는데
1천명의 인력과 13대 헬기로 진화에 나서 하룻만에 진화를 했는데 뒷불
진화용으로 비가 내렸다고 하니 과연 지리산은 영산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삼신봉 가기 직전에 오늘 처음 본 산꾼 한명이 무릎에 쥐가 나는 모양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스피린 한알을 건네주고 먼저 삼신봉으로 향한다
산불 흔적이 있는 지역을 지나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약간의 바람이 불긴 하지만 날씨는 따뜻하다
삼신봉 아래에는 국립수산진흥원 산악회 소속 산꾼이 이곳에서 추락사한 모양이다
추모비를 지나 암릉구간으로 올라 삼신봉 정상으로 향한다
삼신봉(1,284m:12:35)삼신봉은 성산(聖山)인 지리산 봉우리 중 성봉(聖峰)으로 자리매김한다.
삼신봉 정상에서 보면 천왕봉과 노고단의 100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쌍계사사와 세석을 잇는 등산로의 중간 기착지이다.
삼신봉은 지리산 남쪽에서는 한 개의 봉우리이지만 실제 삼신봉은 외삼신봉과
내삼신봉과 더불어 세 개의 봉우리다.
삼신의 사전적 의미는 환인, 환웅, 환검의 세 삼신인 三聖 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 三神靈. 즉 삼신 할머니를 지칭하고 있어 신화적인 의미와 생명을 점지
하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편이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인 봉래산(蓬來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컫는다.
삼신봉은 신화적인 의미와 영적(靈的)인 의미가 진하게 풍긴다.
더군더나 저 아래 청학동의 청학(靑鶴) 역시 神仙이 부리는 전설속의 새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삼신봉과 청학동은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을 지칭하며 지리산 남쪽
어느 자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봉우리에서 3km 아래에 모든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찾아들었다는 청학동...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1,000년이 지난 신라말기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상향을 찾아
들어갔다는 지리산...선생의 입산 자취가 이 일대에 유난히도 많다
삼신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외삼신봉의 모습
삼신봉 아래쪽에는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몰려 들었다는 청학동이 있다
청학동은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도선국사 등 유명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동방제일의 명지로 인정하여 선인의 도를 닦던 장소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지리산의 옛 이름은 두류산이었다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백두대간을 따라 흐른 한반도의 정기가 마지막으로 집결된 지점이라 한다
두류산은 선가와 불가에서 영악으로 인정한 곳으로 동은 천왕봉 서는 반야봉
중앙에는 영신대가 있어 병풍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영신대에서 남쪽으로
맥이 이어져 삼신봉을 만들고 삼신봉이 동서로 맥을 확장시켜 신선대 삼성봉
삼선봉 미륵봉 시리봉을 잇는 주변 40리의 청학동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청학동(靑鶴洞)은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노닐던 지상의 선경(仙境)이라 하여
중국의 무릉도원과 같이 세파의 이해에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다
지리산의 전설적인 유토피아, 이상향(理想鄕)인 청학동은 여러 시인묵객,
은둔거사들의 글과 행적 속에 나타나 있다.
처음으로 청학동으로 나선 사람은 고려시대에 이인로(李仁老)라고 한다
이인로는 푸른 학이 산다는 청학동을 찾을 결심으로 소 두세필에 죽룡(竹龍)을
싣고 떠나 화엄사와 화개를 거쳐 지리산의 신흥사까지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곳이 없었으며...’ 그러나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하며 되돌아 나왔다고 한다
지난해 7월말에 걸었던 내삼신봉의 모습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던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다고. 그래서 지리산은 이성계의 뜻에 불복했다는 불복산(不伏山)...
빨치산의 근거지라는 적구산(赤狗山) 등의 명예롭지 못한 지명도 전해지는 지리산...
그러나 지리산은 어머니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지리산이 난 너무도 좋다
삼신봉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모습
지리산 봉우리에서 가장 조망권 좋다는 삼신봉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一望無際다
우측의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반야봉, 삼도봉에다 왕시루봉
날라리 능선까지 맨 좌측의 노고봉까지... 손에 잡힐듯이 범여의 시야에 다가온다
흔히들 지리산의 일출의 보려면 3代가 德을 쌓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오늘같이 이런 仙境을 보려고 해도 3代가 덕을 쌓아야만 하니... 낙남팀의 대장인
군이 대장님은 아마도 조상의 음덕으로 이런 멋진 선경을 볼 수 잊지 않을까
난 군이 대장님과는 산행을 같이한 기억의 거의 없고 오늘 산행도 난 낙남팀이
아닌 신백두대간을 걷지만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선배(?)로서 무사완주를 기원한다
삼신봉 갈림길(12:45)
진권아우와 삼신봉 갈림길을 지나 갓걸이재로 향하는데 먼저간 선달 아우님
일행이 좌판을 벌려놓고 술한잔 하고 가란다... 듣던중에 얼마나 반갑던지...
이곳에서 이름모를 산꾼이 준 담금주 2잔을 연거푸 마시고 길을 걷는데
저절로 힘이 나는듯하다...고맙습니다
갓걸이재(900m:12:55)
삼신봉에서 조금 내려와 좌측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길이 보이는데
이곳이 고운 최치원선생이 삼신봉을 오르다 이곳 재에 갓과 의관을 벗어
걸어놓고 잠시 쉬었다 해서 갓걸이재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신라 말 최치원은 혼란한 사회 상황을 보며 지리산 화개동천 상류의
절승지를 자기 나름의 이상향 삼신동(三神洞)으로 정하고 은둔을 꿈꾸었다.
그는 나중에 지리산과 가야산을 맴돌면서 은거하다가 짚신 두짝만 남기고
사라져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반달곰 활동지역 조심하라는 경고 플랑카드도 만나고...
본격적인 악명높은 산죽지대에 들어선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암릉구간을 올라선다
드디어 외삼신봉 정상에 오른다
외삼신봉(外三神峰:1,288,4m:13:20)
경남 하동군 청암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삼신봉을
가운데 두고 가장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바로 아래 청학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외삼신봉 정상에서 바라본 진양기맥 능선
저 멀리 거창의 기백산, 금원산, 황석산이 보이고 그 너머 합천의 황매산이 아련히 보인다
저 멋진 진양기맥의 명산을 걸어본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구나
선달 아우님이 천왕봉을 배경으로 멋지게 한방 박아줬다... 젊은이 복받을 겨
외삼신봉 내리막길
이곳 외삼신봉부터 고운동재까지는 비법정 탐방구간이란다
이정표도 하나 없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산죽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거기다가 내리막길에 있었던 로프마저 국공파들이 짤라버려 나같은 숏다리는
이곳을 내려서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는다... 민초들의 녹을 먹고 사는 자들이
벤뎅이 소갈머리보다 더 좁으니 ㅉㅉㅉ... 그렇다고 맥 산꾼이 안 가는거 봤어
롱다리 진권아우는 훨~~~ 편하게 내려온다
1,265봉(13:35)
사면길로 내려서는데 내 키보다 더 큰 산죽들의 심술이 시작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다가 약간 얼어있어 엄청나게 미끄러운데 잠시 또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조금전에 지나온 1,265봉의 모습
1,241봉(13:50)
안부(14:15)
지나온 1,241봉의 모습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난 베낭의 무게 때문인지 자꾸만 쳐진다
앞서가던 진권아우가 ‘행님 어딘교’ 하면서 나를 기다려 준다
암릉구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죽과의 전쟁은 시작되고...
묵계재(默溪峙:835m:14:25)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연결되는 고개로 개념도상에는
헬기장이 있다고 했는데 고개 자체가 산죽에 점령당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데 예전에 민초들이 넘었던 고개이건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묵계란 고개의 지명은 묵계마을에서 따온듯 하다
묵계리는 京鄕 각지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찾았다는 청학동이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삼신봉 터널이 뚫려 1047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사람키보다 훨씬 높은 산죽길을 걷는데 태클을 거는 넘은 산죽만이 아니다
넘어진 나무들이 갈 길 바쁜 산꾼의 발목을 잡는데 미치고 환장하겠다.
입에서 ㅆ.ㅍ ㅆ.ㅍ 하는 육두문자 절로 나온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
뭐가 잘 보이질 않아서 보니 안경이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베낭을 벗어놓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 10분정도 가니
등로에 내 안경이 쥔장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이게 뭔 지랄이야
묵계재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치고 오르니 산죽속에 묻힌 991봉이 나온다
991봉(15:05)
난 안경을 찾아 헤메다가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산죽길을 헤치고 정상에 오르니
진권 아우님이 또다시 나를 기다리면서 사진 한장 찍어 달라고 한다... 난 죽을 지경인데
드디어 지긋지긋한 산죽길을 벗어난다
묘지를 이장한 듯한 낙엽이 푹신한 곳을 만난다
902봉(15:20)
외삼신봉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처음으로 산패를 만난다.
대산꾼 준.희님의 표지판을 바라보면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愛馬가 보인다
고운동재(孤雲洞峙:800m:15:30)
경남하동군 청암면 북계리 청학동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좌측의 반천리에는 양수발전소가 자리를 잡고 있고 이곳에서 가까운 덕산에는
남명 조식선생을 모신 산천재가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산청에서 청학동으로 향하는 차들이 꽤나 보였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교통이 엄청나게 좋아서 이곳은 산꾼들 이외는 다니지 않는다
고운동재는 고운(孤雲)...즉 외롭게 떠도는 구름이라는 최치원의 호에서 유래 했다.
산청쪽으로 신라 고운 최치원이 공부하던 고운동 마을이 있고 고운이 이상향이라
생각하고 청학동이라 여기고 머물렀다 한데서 마을 이름과 고개가 유래 했다
이곳에서 먼저 내려오신 산꾼이 주는 맥주 2잔을 마시고 버스에 올라 산청군 시천면
덕산으로 가서 부페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목욕탕에 들려 사워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아! 힘들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아우님 무거운 베낭 지느라 고생했어... 다음 구간도 우린 끼리빠시고
돌고지재 지나면서 다른 길을 가야하니 둘이서 조신하게 가세
남해대교로 빠지는산행 자료는 내가 준비해 갈테니 찌게거리는
내가 가져갈테니 버너, 코펠은 아우님이 챙기셔
이번에는 삼신봉에서 제대로 지리능선을 감상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어쩌시려고 그리 큰 배낭을 짊어 지셨나요!!!
형님 가벼이 다니셨으면 합니다.
산행기 잘 감상하고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에 왜 안오셨어... 이번에도 지난 여름 남부능선 산행시 못지 않은 선경이었는데
@선달 아우님 늘 고마우이... 근데 소주 한병씩은 챙겨야지
삼신봉 아래서 술 주신분 닉도 모르고... 대신 고맙다고 전해주셔...
오랬만에 같이 산행해서 좋았습니다~`
노루대장 자상한 모습 보기 좋았고... 부럽네
난 평생 그리 살아보질 못해서... 늘 안산하시게나
후기가 멋지십니다. 안경을 찾으셔서 다행이네요.
산죽구간 겨우살이 따려다 못다고 내려온게 아깝네요 키가 조금만 컷어도 다는건데....
안경이 없으면 장님이나 마찬가진데...ㅋㅋㅋ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