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이웃을 돕는 하얀 마음,,
★<부제 / 그래도 내가 기부하는 이유,,?>
글쓴이/ 시인: 매산 안 재 운
나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어나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격고
4,19 5,16혁명을 거처 오는 동안 민족의 서러움을 물려받은
보리 고개라는 굶주린 뼈아픈 시절도 살아 보았다
특이 나는 몸이 허약하여 배가 늘 아파 회 배라고 하여
회충약만 먹으면서 자가 치료를 하였는데 요즈음에 알았지만
위염을 알아 위에 흉터가 있다고 의사는 말하고 있다
초등학교는 밑창이 닳아 버린 해어진 고무신을 신고
중의 바지를 입고 헐벗고 다닌 기억만 있을 뿐 이어서
지금도 가끔 꿈에 비 오는 날 밑창 없는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는 꿈도 꾸곤 하였다,
중학교는 돈이 없어 가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으며
고등학교에 입학하여서는 학비를 벌기 위해 고수 조산 저수지를
막는 곳에서 땅때기 라는 막노동을 하였고 학비를 벌기위하여
20리나 되는 산속에 가서 나무를 하여 읍내까지 지고 나가
팔아서 학비를 보테기도 하였다
몇 일전에 고등학교 동기 동창회 모임에서 김군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학비를 못 주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불러 나가면 들고 있던 분필로 머리를 짓누르면서 왜 학비
안 가져와 하면 김군은 의례히 소 팔아서 준데요 라고 하였다고
옆의 동창이 엣 날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니 김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때 그 시절은 어찌 그리 어려웠던지 몰라
하면서 한숨을 쉬였다
그래서 나는 학비를 내지 않는 고등공민학교에 가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래도 김군은 소도 있고 아버지가
일을 열심히 하였으리라 짐작하니 나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았나 보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우리 집은 가난하여 소도 없는데 배매기 소를 받아다가
기르면서 나는 꼴망태 짊어지고 서당 앞을 지나가려면 천고 일월명이요
지후 초목성을 하면서 추구를 외우는 서당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찌나 나의 심사가 외로웠던지 그때 시절을 생각하면
소설이라도 써 낼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도 희망이 있었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청운의 꿈을 키워 왔다 그리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초등학교 준교사 시험에 합격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군에 가지 않아서 공군을 지원입대 공군 생활 3년을 마치고
돌아와서 교사가 되려니 사범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나와
3년 후에나 발령이 난다고 하여 국립경찰에 투신 30여년의
민생 치안을 하는 경찰관이 되어 열심히 봉사를 하였다.
그래서 6-70년 전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을 살면서
몸서리 칠 정도로 가난하였던 그 때가 내 생활의
눈높이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절약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처지가 되었고 경찰생활 중
집세를 내지 않으려고 관사에서 살면서 빈터가 있으면 의래 땅을
파고 퇴비를 넣어 상치 들깨 무 배추 등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 하였고
아내는 시장에 가서 제일 싼 식품을 사다가 정성들여
요리를 하여 자식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첫 아이를 데리고 산에 가서 갈퀴나무도 하였으며 왕겨를 갖다가
풀무질을 하여 밥을 지어 먹기도 하면서 절약 또 절약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우렁이 각시라고 하였다.
그래서 퇴직 후에는 공무원 연금도 타고 국민연금도 타면서
생활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되어 준답시고
이장도 10여년 하면서 많은 군민과 같이 동고동락도 하여 보았다
이장 10년은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하여 준
고마운 봉사 시절로 생각 되어 진다 그래서 고희를 맞으면서는
보수 없는 모임에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고 도우면서
편안한 노후 생활을 할 계획이다.
그동안 고창예술인들의 사기진작과 창작활동을 돕는 뜻으로
고창예술인상 제정 기금을 출연하여 지난 11월 9일에는
제11회 고창예술인상 시상식을 갖게 되었다.
5년 전에는 고창고등학교에 장학금 1억 원을 출연 그 1억 원을
종자돈으로 하여 금년 3월2일에는 이자 600만원을 받아 12명의
학생에게 50만원씩을 주었다 그래서 총 32명의 장학생에게
1,8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1억 원을 준비하려면 매일 1만원씩 1만일만 저축하면 된다.
아주 간단한 것 같다 1만일하면 짧은 세월 같으나 년 수로는
27년 반이나 되는 긴 세월이기도하다.
또한 모 사회복지법인에 후원자로 있으면서 수년전부터
매월 1만원씩 기부하고 있으며 라면 수건 치약 비누 등
생활 용품과 김치 등 반찬들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세모가 저물어 갈 즈음 조손가정을 쌀과 라면을 들고 찾아 갔다
할머니는 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하여 주었고 손자에게는 공부
잘하고 할머니 잘 모시며 건강하게 살라고 하면서 선물을 준적도 있다
또 한 번은 소녀 가장 집을 방문하였더니 어려운 환경에 외롭게
살고 있는 모습이 안타가워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부자인줄 안다 그렇지만 나의현실은
승용차 유지비 기름 값이 아까워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아들 딸 생일날
외식을 외면 한 적도 있고 아내가 막내아들 말 장난감을 사온 적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으니 아내와
자식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
장난감을 다시 주어 살펴보니 파손 된 곳이 없어서 깨끗이 닥아
막내에게 안겨 주니 그 얼굴엔 웃음이 가득 함박꽃이 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희비가 쌍곡된 나의 삶이 측은하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버리기가 아까워 양말을 기워 신는 버릇도
여전하게 생활화 되고 있다.
도와준 사람들로부터 인사나 고마움을 받자는 것이 아니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흐뭇하면 그로서 만족해야지
어떤 대가성이나 반대급부를 생각하여서는 안 되고 만의 하나라도
커서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어떤 사람은 기부를 받는 사람들이 냉담(冷淡)하다고도 말하면서
기부할 마음이 싹 없어 진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래도 내가 기부하는 이유는,,,
▶여섯 살 때 고창시장에 따라왔다가 길을 잃어
울고 해매일 때 집을 찾아 주신 아저씨,
▶학비가 없어 정규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하여 주신 오성탁 교장선생님과 은사님들,
▶땅때기 지게질 할 때 어른 노임을 처 주신 십장 아저씨,
▶경찰시험때 물을잔뜩 먹고 오라하여 몸 무개를 합격시켜 주신 시험관님,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4은(四恩)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그래도 내가 기부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고 물 항아리에는 스위치만 누르면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며 나무청에는 스위치만 틀면 파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방한 방풍 방습이 잘 된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이것이 도(道)요 도란 평상심(平常心)인데 평상심이란 배고플 때 밥 먹고
피곤할 때 잠자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천국에서 살고 있는 샘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채우려고 기를 쓰는 것을 본다.
나는 그저 덜어 쓰면서 그간 입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성심껏 심부름 해 드리고 손자들의
생일도 챙겨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면서 노후를 보내련다.
2010, 12, 22 동짓날 매산 안 재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