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310-- 태국 방콕 카오산
태국은 가는 곳 마다 마시지가 눈에 띕니다. 숙소 가는 곳에 이런 그림이 붙여져 있습니다.
태국 마사지( การนวดแผนไทย, Thai massage)는 스트레칭과 딥 마사지와 관련된 태국의 전통
마시지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육체 운동은 보통 마루에서 시행되며, 고객들은 편안한 옷을
입습니다. 태국 마사지에는 오일은 사용하지 않으며, 태국에서는 ‘누앗 팬 보란’(นวดแผนโบราณ),
즉, 글자 그대로 고대식 마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국 마사지와 의학의 창시자는 ‘시바고 꼬마르빠즈’(지바까 꼬마라브하카)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2500년 전 불교의 승려였습니다. 사실 태국 마사지는 이 승려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더 일반적인 태국 전통 의학과 마찬가지로 태국 마사지는 인도와 중국 동남아
문화권 그리고 의학의 전통을 복합한 것입니다. 오늘날 시술되는 행위는 19세기 태국 왕국
전역에서 행해지던 치료 행위 전통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조차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며, 치료술사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단일 체계나 하나의 이론적인
틀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2월11일 민속촌에 갔다 숙소에서 쉬고 저녁에 카오산에 갔습니다. 이곳은 MRT나 BTS가
없기에 택시타고 갔습니다.
배낭여행객들의 성지인 카오산로드 여행자거리로 밤문화가 엄청 발달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다국적 관광객들로 카오산로드는 매일밤마다 붐빈다고 합니다.
카오산로드 메인. 불빛이 휘황찬란 번쩍번쩍입니다. 매일밤마다 유흥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시끌시끌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곳입니다.
한국 관광객들은 이곳에 오면 꼭 인증샷을 멕도널드 앞에서 찍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곳에 앉아서 태국음식을 먹었습니다. 3명다 술을 많이 안하기에 맥주1병으로
한잔씩 카오산의 풍취를 즐겼습니다.
카오산 거리(ถนนข้าวสาร, Khaosan Road)는 방람푸 지역에 있는 짧은 거리 이름입니다. 카오산
로드는 300m도 채 안 되는 거리이나, 전 세계 배낭여행객들의 집합소이자 젊은이들의 해방구
입니다. 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카오산 로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베이스캠프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여행자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방콕 왕궁과 왓 프라께우 가 있는 1 km 북쪽에 있습니다.
카오산이라는 말은 "가공된 쌀"로 번역되며, 이것은 이전 시대 이곳이 방콕 쌀거래의 중심지
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이곳은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유명한 주거지로
개발되었고, 1980년대를 거치며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여행자 거리로 번영을 거듭
하고 있으며 카오산은 현재 쏘이 람부뜨리 Soi Rambutri와 타논 쌈쎈Thanon Samsen을
어우리는 방대한 지역으로 확장하였습니다
목동원이도 인증샷을 찍었습니다.ㅎㅎ카오산로드의 매력은 바로 ‘젊음’, 그리고 이곳이
‘무국적 공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400m 남짓한 짧고 복잡한 거리, 거리 양쪽을 차지하는
허름한 건물들, 이 건물들 사이에 걸린 네온사인이 이곳의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온 젊은 배낭족들로 넘쳐납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카오산로드는 비로소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허름한 건물들에 어지럽게 매달린 네온사인
들은 카오산로드의 밤을 밝혀 줍니다
이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카오산 로드에는 장기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박스형
메트리스 형식의 값싼 게스트하우스에서부터 3성급 호텔에 이르는 숙박 업소까지 값싼
숙소가 많습니다. 또한, 여행자들의 구미에 맞는 싸고 맛있는 다양한 음식, 인터넷 카페와
환전소, 태국 전역으로 연결되는 교통편과 투어 신청을 할 수 있는 여행사, 빨래방, 여행자
카페 등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카오산 거리의 음식은 여행자들의 입맛에 맞춰져 있어 무엇을 골라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팟 타이(30B), 바나나 팬케익(30B), 스프링 롤(10B), 팔라펠(60B), 쌀국수(20~30B) 등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가벼운 음식입니다. 여행자 거리답게 레스토랑은 물론 노천 식당도 즐비해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오늘도 특히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지켜주는 맥(Mac)할배. 인증샷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일행을 잃어버려도 이곳에서 모인다고 합니다.
2월12일 오늘 저녁에 목동원이는 다시 치앙마이로 가고 우리는 서울로 떠납니다. 숙소 옆
한인타운에 제31대 재태국한인회 활동안내 프랭카드가 걸려 있습니다. 특히 이민자나 유학생
들은 한인회가 큰 역할을 합니다. 오랜 해외생활에 늘 관심있게 보는것이 해외 한인회입니다.
코러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일찍이 공항으로 왔습니다.
이곳에 오니 유명한 짐 탐슨 매장이 있습니다. 짐 탐슨(Jim Thompson)은 1948년부터
방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실크회사(Jim Thompson Thai Silk Company)를 설립, 운영
했던 미국인이었습니다. 생전에 예술에 조예가 깊은 탓에 태국의 예술작품들을 수집하며
실크의 매력에 미끄덩 빠져든 그는 사양산업이던 태국 실크산업의 중흥기를 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가적 안목때문인지 그가 방콕에 살았던 집과 내부에
전시된 컬렉션을 보기 위해 여전히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유물을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딴 짐 탐슨 아트센터(The Jim Thompson Art Center)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시립미술관 전시도 그 아트센터에서 출품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실크회사를 차리기 전 독특했던 그의 이력도 흥미를 끈다.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이 끝나기 직전에 CIA 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들어가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던 톰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진
공산주의 도미노현상을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에 투입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주로 부패하고
무능하지만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사랑을 받았던 세력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내 미국의 야누스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스파이 생활을
은퇴한 이후 자신이 활동했던 태국에 정착해 실크왕이 되었습니다.
한때 '동남아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으로 알려진 탐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그가 '동양과
서양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실크라는 동양적인 소재에 서양식
기술을 접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교론’의 핵심입니다.
실제로 1950년대 태국의 실크산업은 수공예 수준으로, 서구의 합성섬유와 공장제 기계공업
의 출현에 밀리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방콕 근처의 수공업자들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서양식 염료와 디자인을 가미할 수 있도록 나선이가 탐슨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의 기술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태국 실크를 알리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양국가들을
대상으로 홍보활동에도 열성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헐리우드 영화 "왕과 나"에 짐탐슨 실크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열성적인 홍보활동을 두고 탐슨은 "일종의 비주얼이 두드러진 선교
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7년 3월 26일자
기사). 태국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었더라면 행하기 힘든 일종의
'선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짐 탐슨 집입니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진정성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채 사람들은 다른 이슈들로 짐 탐슨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에게 닥친 의문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967년 3월, 자신의 61세 생일이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 놀러간
말레이시아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정글로 걸어들어가 감쪽같이 사라진 그를 두고 호랑이가 물어갔다,
CIA 에서 청부살인했다 (그는 은퇴이후 태국에 정착한 이후 상당한 반미성향의 발언을
일삼았다), 라이벌 실크업체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구름처럼 피어났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정글로 들어갈 때 평소 복용하는 약도,
즐겨피우던 담배도 숙소에 남기고 사라졌다는 정황으로 보아 그는 작심하고 죽으러 갔거나
아니면 가볍게 산보를 떠났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언론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그가 미국인
이었던 만큼 미국 언론도 꽤나 흥미로운 기사를 많이 양산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당수의
언론들이 탐슨의 실종 직후 구성된 수색대를 눈여겨 봤다는 사실입니다. 수색대는 특출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말레이시아 말로 orang asli 라 불리우는
숲에 사는 원주민들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숲을 근거지로 하여 그곳을 지나는 사람
이나 동물이 지나간 흔적을 잘 찾는 사냥꾼 스타일의 원주민들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그외에
상당수의 심령술사도 동원되었는데 한 신문에 따르면 당시 신과 접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한 말레이시아 청년은 "톰슨이 아직 살아있으며 악령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어 쇠약한 상태"
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탐슨이 돌아올 시간까지 예측했다고 합니다 (New Straits Times
2004.2.1 기사). 물론 탐슨은 돌아오지 않았고 언론은 동남아시아의 수색 방식에
오리엔탈리즘 렌즈를 들이대며 낄낄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제3세계의 토착신앙형 사람찾기
와 톰슨 생전의 (서양기술)선교인 이미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한 자연인의 죽음이
'희생'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탐슨 사후에 언론을 통해 증폭된 미스테리를 적극 이용한 것은 짐톰슨 실크회사였습니다.
짐탐슨 실크회사가 실크소재를 이용한 인테리어 분야에 진출했을 때 내건 슬로건은 "living with Jim Thompson" 이었습니다. 짐탐슨의 삶과 죽음을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일 법 합니다. 브랜드 전문가인 마이크 머피는 이를 두고 "브랜드는 신화와
이야기로 구성되지요. 짐톰슨의 페르소나에도 그런 아우라가 풍겨요" 라고 말하며 짐탐슨
실크의 판매전략에 창업주의 죽음이 도움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Far Eastern Economic
Review 2001년 7월26일자 기사)
짐 탐슨이 정글로 사라지고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여전히 그의 이름은 - 브랜드로 그리고
자연인의 이름으로 -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그가 살던 집은 싼들해 지기는 커녕
관광객들의 온기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비결을 굳이 찾아보자면, 서구식 합리주의 사고를
가진 한 사람의 인생이 동양적인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갖은 미스테리와 감상적 추측들에 의해
적당히 버무려지는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정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편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지
않고 여유로운 시간으로 즐겼습니다.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느라 이곳에서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어느곳으로 갈까?ㅎㅎㅎ)
첫댓글 오붓하면서도 코로나19때문에 좀 찜찜한 여행..... 그래도 좋은 추억을 만든 여행 함께해준 풍원,동원에게 감사.... 여행 후기를 생생하게 올려준 풍원아 수고했다.!
같이 좋은 시간으로 즐겁게 보낸 상원, 동원 고마우이..
더 힘찬 체력으로 남은 인생을 알차게 보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