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술을 먹고 여행을 기록하면서 글이 너무 길어지는 주사가 생긴 것을 깨닫고 어제는 일찍 숙소에 들어가 술은 한잔도 마시지 않고 여행을 기록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을 기록하는 앱인 리라이브가 자꾸 먹통이 되면서 같은내용을 다섯번 정도는 다시 작성한 것 같다. 그 바람에 새벽 한 시가 넘어서 잠을 들 수 있었다.
역시나 아침 6시 알람은 과감하게 꺼버렸다. 어렴풋이 깬 잠 속에서 ‘이제 5시간 밖에 안 잤다고’라며 내면 깊숙한 곳에서 고함치고 있는 자기 합리의 달인인 내가 느껴졌다.
결국 더 늦어져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며 눈을 뜬 시간은 어제보다 더 느린 7시 30분이었다.
반쯤 깬 잠을 자면서도 일어나면 뭘 해야 되겠다 라는 계획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마치 잘 짜여진 계획표를 실행하듯 세수를 하고 컵밥을 데워 빠르게 식사를 하고 그와 동시에 커피를 끓여 식혀두어 한 번에 털어 마실 수 있는 준비까지 하고 있었으며 귀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오늘 날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건 완전 상병 말호봉이 5분대기 훈련 군장을 꾸리는 건 만큼이나 주저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동작들의 연속이었다.
어제 밤에 대충 정리 해 놓은 배낭을 능숙한 솜씨로 꾸린 후, 하의는 온열 장비까지 다 착용하고 상의는 가볍게 입고 모텔 슬리퍼를 신고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바이크로 향한다.
배낭을 바이크에 결속하고 시건 장치와 핸들락, 키박스까지 열쇠로 해야 될 것은 모두 다 정리하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와 문 입구에 준비해 놓은 무거운 상의를 걸치고 부츠로 갈아신고 헬멧을 쓰고 방을 나선다.
바이크의 시동을 건 시간이 8시 30분이니 잠에서 깬 후 한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준비하고 출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가 대단하다 생각할 정도로 잘 짜여진 출발 준비라 뿌듯함이 느껴진다.
시골이라 생각했던 임계의 아침 풍경은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산 했다. 모텔 앞 도로에는 이미 출근 차량들과 덤프트럭, 거리의 사람들로 정체가 일어날 정도였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만난 어느 마을 보다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스타트 포즈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부산스러운 거리의 모습에 한가하게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을 만한 장소를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주민센터 앞에 임계를 상징하는 듯 한 사과 모양의 조형물이 있어 스타트 포즈를 취해 볼까 하였지만 거기도 부산스럽게는 마찬가지라 사진은 커녕 나로 인해 도로 정체가 생길 것 같아 자리를 뜨기로 했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인 갈고개를 향해 스로틀을 당긴다.
갈고개로 들어서는 초입, 바로 에스짜 코너가 나타난다. 어제 구룡령, 운문령, 대관령 등을 지나온 나에게 이정도 코너는 별 다른 감동을 주지도 않는다.
출발 때 하지 못한 스타트 포즈를 뒤늦게 잡아 본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도로 오른쪽으로 산의 급한 경사가 완만해 지는 곳을 따라 길게 개간된 배추 밭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이 보이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근면함을 가졌다고 하는데 지금 바라 보고 있는 곳이 바로 그 현장 인 것 같다.
백두대간 21 번째 포인트 의 이름은 백복령이다 백복령은 한의학에서 아주 많이 쓰는 약재의 이름이다. 내 직업이 한의사이다 보니 이 고개 이름을 보면서 ‘설마 한약재 백복령 있겠어? 100개 복을 주는 봉우리라 백복령 이겠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백복령 명칭에 유래를 보다 그만 빵 터져버렸다. 백복령은 한약재 백복령을 말하는 게 맞았다. 물론 과거에는 복될 복 자를 써서 100개의 복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로 기록이 되었던 경우도 있었는데 현재의 지명은 이 산에서 백복령이 많이 나서 백복령으로 지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혼자서 한참을 낄낄거리다 길을 떠난다. 백복령이 그 백복령이 맞다니!
백복령을 내려오는길도 재미있는 S자 코스의 연속이었다. 낙동정맥의 배태고개처럼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산맥 들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 할 수 있었다.
어제는 아침햇살을 다이아몬드처럼 흩뿌리고 있는 호수를 만났는데 오늘은 아침햇살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호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제는 다이아몬드 오늘은 금. ‘로또를 사야 하나’ 생각하며 로또 판매점을 검색해보았지만 가까운 곳에는 그런 곳은 없다 라고 나와 포기한다.
내일은 에메랄드 루비 뭐 이런 게 나올 건가 생각하며 또 비실비실 한동안 웃으며 코너를 돌았다.
카이저 루트를 보면 어느 포인트에서 어느 포인트로 이동할 때 경유지를 설정하라는 당부가 있는데 백복령에서 대댓재로 가는 길에 미로면 파출소를 지나 가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랑 경유지를 통해서 가야 코스가 중복 되지 않고 갔던 길을 돌아나오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미로 파출소 쪽은 경치가 좋은 곳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경유지를 잘 설정하면 득이 되는데 오늘 나는 이 경유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배째는 대나무가 많이 나서 댓재라고 한다. 예전에는 호랑이도 자주 출몰 하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범재이기도 한 건가?
건의령으로 넘어 가는 길, 강원도의 밭들은 대부분 배추 밭이라 배추 걷이가 끝난 땅은 밭갈이를 하여 계분을 뿌려놓거나 수확 이후 시든 배춧잎 정도가 널려 있는데 저쪽 길 끝에 계절을 착각한 듯한 초록빛의 너른 밭이 나타나 가을 황토빛 나뭇잎빛에 식상해 하던 두 눈에 눈부신 청량감을 준다.
가꾼 모양새로 봐서는 잡초는 아니지 싶은데 무슨 작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물이 색을 읽고 시들어가는 때에 이런 창연한 초록 빛깔을 볼 수 있어 눈이 오랜만에 색깔 편식에서 벗어난다.
건의령을 내려서는 바이크를 몇 번씩 세워야 할 정도로 절경의 연속이다. 오늘 되도록이면 강원도를 벗어나고 싶기에 마음이 살짝 급해진다.
네비게이션을 보니 마음이 좀 더 조급해 진다. 며칠전 낙동정맥의 끝무렵에 만난 통리재와 삼수령이 백두대간과 겹쳐 있다. 그날 태백에서 시작하여 다시 태백으로 들어오는 지루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태백시로 넘어 오는 통리재에 들어서는 순간, 그날의 지루했던 감정이 되살아나며 기운이 빠지고 눈에 힘이 풀리며 졸린 하품이 나오기 시작 하였다.
삼수령에 도착하니 며칠전 삼수령에서 나를 마치 주인처럼 반겨 주었던 고양이가 또 다시 야옹거리며 내게 다가 온다.
그날은 정말 먹을 것 하나 없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줄 게 없었지만 오늘은 그래도 과자 부스러기가 좀 있어 녀석에게 나눠 준다. 하지만 녀석은 먹는 등 많은 등 하며 꼬리를 치켜들고 자기 몸을 내게 부비며 ‘내가 널 간택 했어’라는 표정으로 야옹거린다.
녀석과 잠시 놀아주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인 바람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 네비게이션이 신호를 잃어버린 듯 경로를 이탈 했다며 계속 경고음을 내뱉는다.
네비게이션 도움 없이 갈 수 있는 편도 길이 었기에 내비게이션을 정지하고 바람의 언덕을 돌아 나온다.
바람의 언덕을 다 내려와 삼수령에 다시 도착했을 때도 네비게이션이 신호를 잡지 못한다. 다음 목적지를 위해 두 군데 경유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슬쩍 보았던 경로를 추측하여 방향을 잡는다.
여기서부터 길을 잃고 동선이 꼬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노나무재를 지아 두문동재 그리고 경유지를 통해 함백산으로 가야하는 데,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노나무재를 빠뜨리고 두문동재를 향해 달린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두문동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 없고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두문동재와 다음 경유지를 먼저 다녀온 뒤 노나무재로 향했했다가 함백산으로 가는 길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초행길에 길이라 두문동재와 경유지 두문동 끝길을 돌아 노나무재를 왔는데 오투리조트 갈림길로 해서 함백산으로 가려니 다시 두문동재와 두문동 끝길 경유지를 거쳐 함백산으로 가게 되어 두문동재 즈음에서 약 1시간 30분 이상을 돌고 돌고 돌았다.
오늘 강원도를 벗어나겠다는 마음과 지난번 낙동정맥 루트와 겹쳐 약간 식상해 있던 마음에 불이 번지듯 화가 일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간혹 뭔가 순리되로 안풀리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실수나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는 경험을 몇번 하게 되었는데 이때 욕심이 앞서거나 시간이 촉박하다는 등의 이유로 어거지로 일을 끼워 맞춰 풀다 보면 운이 좋아 다시 일이 순리되로 되는 때도 있지만 결국 실수와 착오가 일어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지만 일이 진행되는 경험을 했었다.
욕심과 서두름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리고 더 많은 실수를 가져온다.
마을을 가다듬고 노나무재를 출발해 두문동재와 두 군데 경유지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한다.
계속해서 gps 신호를 잘못 읽어 오류를 내던 핸드폰이 정상적인 안내를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gps 기반의 기록장치인 relive도 정상적인 기록이 된다.
다시 순리대로 돌아왔다.
무언가 이상할 때는 실수한 지점에서 다시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는 지혜를 다시 한번 체득한다.
더불어 기분도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함백산 정상에서 서산으로 지는 햇살이 눈부신 코너를 만났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마음이 느긋해졌고 조급한 마음에 내 눈 앞의 길만 보이던 눈은 시야가 다시 풍경을 향해 넓어졌다.
일체유심조.
사실 이번 여행은 내가 일터에서 도망나온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 한의원 운영도 와이프가 운영하는 식당도 피해가 크다.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여러가지 시도와 노력을 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 야속했다. 나는 이렇게 죽어라 노력하는데 따라오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는 두 곳 직원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사소한 실수조차 내게는 큰 상처로 다가왔고 점점 옹졸하게 마음을 쓰는 나를 보면서 직원들의 행동과 얼굴은 더 굳어갔다.
퇴근을 해도 즐겁지 않은 일상과 해서 풀리지도 않을 걱정을 하느라 와이프나 아이들에게도 마음을 쓰지 못했다.
계속 이런 상태면 내가 먼저 포기하게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실패할 것 같아 1달을 길 위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오늘도 길 위에서 지혜를 배운다.
만항재 네비 좌표를 잘못 찍는 바람에 비석을 못찾아 산길을 이리저리 오갔다. 또 길을 잃은 것이지만 뭐 어떠랴. 결국 길은 찾아냈고 그바람에 재미있는 장승도 보았다.
만항재를 내려오는 길. 지는 해의 노을을 받은 산등성이를 보며 마무리 점프를 남긴다. 어두워지면 못할것 같아서. ㅎㅎ.
사길령 팔보암의 보살님은 해 넘어가는 시각에 조용한 산골로 쿵쾅거리며 들어온 길손에게 뭐하러 왔는지 궁금해 하는 눈빛이다.
저런 눈빛은 경계심의 눈빛이기도 하여 엔진을 정지하고 사길령이 어디냐고 묻는다.
30분 걸린다, 걸어가야 한가 대답해 주신 곳은 진짜 사길령 정상이었고, 비포장 도로 10여미터 뒤에서 사길령 비석을 볼수 있었다.
화방재를 거챠 내리고개로 향한다.
붉은 노을진 해를 받아 붉게 빛나는 산봉오리가 아름답다.
고개를 내려와 내리고개로 향하는 상동 고등학교 입구의 아름다운 계곡.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학교 선생님인 듯 한 분이 무슨 사진을 찍냐며 말을 걸어오신다. ‘계곡이 예뻐서 사진좀 찍으려구요’라 는 대답에 ‘그런가요? 나는 매일 봐서 그런가 모르겠는데’라 하신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익숙함이라는 뿌연 암막이 내 눈을, 마음을 가리면 퇴색된 무채색으로 낡아 가는 사진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시큰둥해진다.
매일 보는 와이프, 아이들, 직원들.
와이프를 처음 만났을 때 여러 학교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고도근시의 시력으로도 핀으로 꼭 찝어내듯 그녀를 골라낼 수 있었다.
아름다웠고 유행가 가사처럼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시험기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보고싶어 미칠것 같아 꽃 한송이 품이 안고 대림 슈퍼리드를 타고 추워가는 한강다리를 건너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름다운 그녀이나 내 눈이 마음이 ‘그런가요? 나는 매일 봐서 그런가 모르겠는데’라 한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바이크에 앉아서도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한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다 길을 나섰다.
상동 고등학교 입구에서 내가 큰 배움을 얻고 간다.
해가 지자 빠르게 밤이 찾아온다. 아직 3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보조등을 밝히고 고개를 지난다.
칠흑같은 산골. 산 어귀에 불빛이 띄엄 띄엄 보이는 곳이 인가겠지. 긴 밤 산골 사람들은 엄마 뱃속같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또 내일은 꿈꾸겠지.
조용한 산골 마을에 메이리쳐 들리는 배기음 소리가 죄송하여 고단 기어에 스로틀을 조금만 열어 통통거리며 시내로 들어온다.
드디어 강원도를 통과하여 경북 봉화에 들어와 긴 여정에 자기도 힘들었는지 미연소된 가솔린 냄새 섞인 가스를 헐떡거리며 배기관으로 뿜어내는 애마를 쉬게 한다.
오늘 여정은 2개 도, 6개 시군을 지나는 여정이었다. 강원도는 정선, 삼척, 태백, 인제, 영월의 5개 그리고 경북 봉화까지.
오늘의 여정 백두대간 20. 갈고개~36. 도래기재.
첫댓글 드뎌 떳네떠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