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모도’ , 속 깊은 이야기 들어볼까요?
발간일 2022.09.26 (월) 14:35
배미꾸미 조각공원, 달콤한 신도 포도 등 볼거리 다양
인천대교를 지나 신도, 시도, 모도에 가기 위해 삼목선착장에 가서 오전 11시 배표를 끊으려고 주민등록증을 찾으니 안 가져갔다. 집으로 가기에는 왕복 40분 이상이 소요되고 취재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했다. 창구에 가서 물어봤지만 신분증이 없으면 갈 수 없다며 단칼에 자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종도 다른 곳이나 가려니 웹에 등록한 신분증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물어보니 재차 안된다는 답변만 들었다.
▲ 신·시·모도로 가는 배는 삼목선착장에서 출발한다.
주민등록증 미지참으로 시작된 섬 여행
사진으로 찍은 신분증도 안 된다는 소리에 더 절망감에 사로 잡혀 어쩔 줄 몰라할 때 다른 창구 직원이 “운서동 주민센터는 왕복 20분이면 다녀올 수 있으니 등본을 떼 오세요.”하는 희망의 동아줄이 내려오는 소리를 한다. 서둘러 운서동으로 향했다. 지문을 입력하고 등본을 200원 주고 뽑아 선착장으로 가서 겨우 배를 탔다.
인천시민은 50% 할인된 가격인 3000원에 배를 타고 20여 분 가면 신도 바다역에 내린다. 공용버스를 이용하여 모도 종점으로 향했다. 차 안은 노년의 남녀가 학교 동창회라도 하는지 시장 안처럼 시끌벅적하다. 텃밭을 가꾸는데 벌써 햇밤이 나왔다며 다음 모임에는 밤을 삶아 오겠다 하는 남자에게 여자 친구들이 예전에 현미로 해온 떡이 무척 맛있었다고 추켜올리자 한 남자가
“쟤는 여자들만 좋아해.”
흰머리를 질끈 묶은 남자를 가리키며 샘을 낸다. 나이를 더 먹으나 덜 먹으나 시샘과 질투는 어느 연령에나 골고루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버스비 1000원을 내면 모도에 갈 수 있다. 모도에는 식당이 세 곳이 있다. ‘섬사랑굴사랑’이라는 곳에 가서 점심으로 멍게비빔밥과 회덮밥을 시켜 먹었다. 각각 1만2000원이다. 김근성(63) 사장은 장모가 살 수 있도록 모도에 집을 지었다가 2009년에 증축하여 현재는 아내와 같이 식당과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주말 장사를 하는데 배가 안 뜨면 손님이 없어 애로사항이 많다. 예전에는 줄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코로나로 손님이 줄어서 힘들다.
어느 연인이 이집을 맛집으로 알고 연애할 때마다 조용히 자기네들만 와서 먹고 소문을 내지 않고 다녔다. 그들이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계속 왔는데 그 사이 손님이 늘어 조용함과는 멀어지자 속상해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족이나 지인들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며 사장 입장에서는 고마운 손님이라고 자랑을 한다. 정갈하게 차려 나온 음식을 먹어보니 새콤하여 맛있다.
▲ 모도에는 식당이 세 곳이 있다. ‘섬사랑굴사랑’이라는 식당에서 먹는 멍게비빔밥과 회덮밥.
점심을 먹고 배미꾸미 조각공원에 가기 위해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옹진군청에서 환경정화 및 관광객 안내를 하는 박관호(62)씨를 만나 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신도는 4개의 마을이 있고, 농업이 98%
신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인천으로 유학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다시 신도에서 살며 모도에 오는 관광객들이 해안에서 불을 피우지 않도록 지도하고 방역 등 안내하는 일을 하루 4시간씩 하고 있다.
▲ 모도 전경
신도는 4개의 리(里)가 있는데 1리는 마을 이름이 구로지이고 중학교와 소방서, 감리교회가 있었다. 2리는 고남리이며 초등학교와 감리교회가 있었고 3리는 염촌으로 염전과 성당이 있었으며 갯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4리는 벚말, 진염, 신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고 감리교회가 있었다. 연육교가 없을 때는 여객선으로 2시간 30분에 걸려 밀물 때만 하루 두 번 인천을 오갔다. 그는 75년도에 인천으로 나올때는 나룻배를 탔으며 그 이후엔 통통배를 타고 다녔다. 모도는 농업이 98%이고 어업이 2%다. 주로 바지락이 많이 나오고 박하지(돌게), 소라, 낚지, 망둥이, 숭어 등이 많이 잡힌다.
배미꾸미 조각공원 설립자 이일호 작가와 조우
배미꾸미 조각공원에 가니 한창 포클레인이 돌담을 쌓고 있다. 그곳 카페 실장이 마침 운이 좋다며 이일호(76) 조각가가 와서 공사를 관리하여 만날 수가 있다고 알려준다. 이일호 작가는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쓰고 수줍게 맞아주며
“나는 말을 잘 못 해요.”라고 말한다.
▲ 모도 배미꾸미 조각공원을 만든 이일호 조각가
▲ 이일호 조각가의 작품
▲ 버들선생 조형물
이 작가는 보령이 고향으로 아는 사람을 만나러 장봉도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바다가 좋아서 모도에 땅을 사고 작품을 2005년도부터 설치했다. 현재는 2000원의 관람료를 받는데 손님 중에 왜 돈을 받느냐고 따지거나 작품이 늘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돈을 받는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단다. 바닷가에 설치한 작품들은 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손님과 일일이 소통하기가 어렵다. 작업장은 김포에 있고 사는 곳은 고양이라 인천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본 적은 없다. 이번 광복절 백중사리에 수해를 입었지만 사비를 들여 보수 공사를 했다. 손 모양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 작품이 물에 잠겨 쓰러져서 보수 중이다.
이일호 작가는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더 만들고 훗날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나이가 있어서 좋은 사람이 배미꾸미 조각공원을 인수해 잘 지켜준다면 작품도 넘겨주고 싶단다. 큐레이터를 두고 많은 작품을 더 들여놓고 비싼 입장료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제 자꾸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라며 본인이 쓴 책 한 권을 실장에게 말해 받아 가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카페에 가니 <어느 예술가의 잠꼬대>라는 책이 다 떨어졌다며 전시된 것을 최경혜(59) 실장이 내어준다. 그냥 받기에 너무나 미안해서 먹으려고 가져갔던 사과 3개를 내밀었다. 또 팥빙수를 시켜 먹고 계산을 하려니 돈을 받지 않으려했다. 민폐라 여겨 기어이 팥빙수 값 8000원을 지불하고 나오며 조각가를 닮아 실장도 인심이 후하다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아 조각가와 인터뷰를 하고 책까지 선물로 받은 기자는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들어 나오면서 그곳에 손님들의 방문이 많아 번창하여 오래 남아 있기를 빌었다.
고 김기덕 감독의 ‘시간’ 영화도 배미꾸미 조각공원서 촬영
최 실장은 김기덕 감독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배미꾸미 조각공원에서 촬영하게 된 비화를 알려준다. 갑자기 나타난 김 감독이 영화를 찍고 싶다며 뭍에 있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 작품을 물속까지 크레인으로 옮겨 하정우와 성현아가 와서 한나절 반 만에 촬영을 끝내더란다. 영화에 한두 장면 나올 줄 알았는데 저 예산으로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 장면을 이곳 조각공원에서 촬영했다니 놀랍다. 김기덕 감독은 이곳에 15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여 촬영에 쓴 배를 놓아두기도 했다. 이 영화를 이탈리아 사람이 스무 번을 넘게 보고 한국에 찾아왔더란다. 자가용 없이 모도까지 오기란 쉽지 않은데.
▲ 이일호 작가의 저서 <어느 예술가의 잠꼬대>
▲ 책에 실린 ‘천국으로 가는 계단’
실제 장소가 있는지 세트장인지 문의가 많이 왔다. 활주로가 있어 야경을 볼 수도 있는 그곳은 정말 아름답다. 펜션까지 운영한다는 것을 실장이 알려 준다.
모도에서 나오다 이민자(85) 할머니를 만나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14살 때 북한 개성에서 피란을 와서 23살에 결혼하여 여러 식구들 밥을 일주일에 쌀 한 가마니가 들 정도로 해댔단다. 시부모, 시동생들과 5녀 1남을 낳아 살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치매가 온 할아버지는
“어떤 놈 손 잡고 쩌기로 올라간 것 보았어!”
하며 헛소리를 하셔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면회를 처음으로 간 날
“아까 봤는디 또 보네. 어떤 놈하고 손잡고 가던데 누구여?”
하더란다. 하하~
평생을 섬에서 산 모도사람들의 이야기
지금은 하늘나라에 간 할아버지지만 할머니는 혼자 살다 보니 그리운지 할아버지 원망보다는 눈가가 촉촉해진다. 나이를 먹으면 자주 아파서 문제라고 안 아프고 싶다는 희망을 말한다. 아프면 삼목선착장까지 아들이 나와서 병원으로 데려가므로 자식 못할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한다.
모도는 물이 짜서 군청이나 소방서에서 2리터 6개짜리 물을 2달에 한 번 25개를 준다고 한다. 요즘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짜지 않지만.
시도에 가려고 걷다가 노루메기 펜션을 하는 장금란 사장의 차를 얻어 타고 시도에 있는 북도 보건지소에서 내렸다. 코로나로 작년보다 올해가 더 손님이 없어 힘들다는 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면 좋은데.
마을 이곳저곳을 걷다가 열심히 겨울 김장 배추를 돌보는 박남영(92) 할아버지를 만났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어머니와 아홉 살 남동생과 다섯 살 여동생과 살다가 6.25 전쟁 때 남한으로 왔다고 한다. 군인으로 가면 밥을 줘서 두 살을 올려 군대에 갔고 24살에 결혼하여 아들만 넷을 두었단다. 인천 석남동의 3000평 과수원에서 2년 일하다 쌀 아홉 가마니를 들고 시도에 들어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개간사업을 하여 땅 한 평에 1원 할 때인데 땅 사서 뭐 하나 싶어 안 샀단다. 지금은 후회가 된다며 1000평의 농지와 집은 장만하여 아들의 도움을 받아 아직까지 농사일을 한다니 대단하다. 박정희 정부 때 밀가루 사업을 해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단다.
▲ 모도에 사는 이민자(85) 할머니는 14살 때 북한 개성에서 피란을 와서 23살에 결혼해 여러 식구들 밥을 일주일에 쌀 한 가마니가 들 정도로 했다. 시부모, 시동생들과 5녀 1남을 낳아 살았다.
▲ 시도에 사는 박남영(92) 할아버지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어머니와 아홉 살 남동생과 다섯 살 여동생과 살다가 6.25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살아온 이야기를 다 말해서 한결 마음이 후련하다며 차라도 한 잔 하자며 집에 가자고 권했지만 폐 끼치기 싫다며 손사래를 치고 신도를 향해 걸었다.
섬 포도의 달고 상큼함 가득한 신도 포도
신도에는 포도밭이 제법 많다.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먹어보라고 권해서 맛을 보았는데 무척 달콤하다. 5kg에 삼만 원이고 3kg에 이만 원에 팔고 있다. 90년을 신도에서 살았다는 김인신(90) 할머니는 3남 1녀를 낳고 벼농사, 포도, 고구마, 고추, 깨 농사를 하는데 이제는 늙어서 아들인 나순조(70)씨가 도와주고 산단다. 올해 포도 농사는 엄청 잘 되었다고 미소를 머금고 자랑한다. 높이 쌓여있는 포도 상자가 증명이라도 하듯 차곡차곡 쌓여있다.
▲ 달콤 상큼한 신도 포도. 김인신 씨 포도를 팔고 있다.
삼목선착장에 내리니 힌남노 태풍이 오고 있어 하늘은 잿빛이고 바람이 세어지고 있다. 한반도에 피해 없이 무사히 넘어가기를 지는 석양에 기도한다.
▲ 모도 해당화 길의 네발나비
▲ 삼목선착장의 석양
기자가 처음으로 모도에 갔던 아주 오래전, ‘두상에서 입상으로’와 ‘윤회’라는 작품이 뇌리에 남아 책을 읽다 발견하니 새삼 모도 끝까지 가서 어린 자식들과 작품을 대하고 놀랐던 일이 생각난다. 머리 모양이 따로 떨어져서 차례로 몸통과 하체가 손으로 이어 서 있는 사람 모형의 조형물로 변해 가는 섬뜩한 작품. 또 사람과 동물이 연달아 항문과 입에 이어 원을 만들어 윤회를 표현한 작품이 약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지만 바닷가에 그런 조각공원이 있어 뭔가 든든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의 작가를 몇 십년이 지나 직접 만나볼 수 있는 행운을 얻다니. 정말 인생은 윤회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더구나 미술에 어떤 보편적 기준을 만드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낯설고 해괴한 작품이라도 다음 시대에 인정받고 사랑받기도 한다.”는 이일호 조각가의 글에 마음이 쏠린다.
신분증 불 지참으로 하마터면 귀한 인연까지 날릴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간 신도, 시도, 모도에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돌아오는 길은 시간이 멈춘 섬의 충만함이 가득담겼노라고 감히 말해본다.
글·사진 현성자 I-View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