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7일 오전, 파리에서 비행기로 프라하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려 약 10분 정도 택시를 타고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엠버시호텔이다. 당시 숙박료 5만원과 세금 5천원을 지불했다. 지금 나의 기억에 남는 건 조식과 벽에 붙어 있던 카를교 그림이다. 치즈를 좋아하는 나의 초딩 입맛에는 참 좋다. 바로 프라하성으로 간다.
프라하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카를교와 볼타바강 그리고 주변의 희뿌연 집들은 체코의 역사적 상흔들을 들여다보지 않을 땐 그저 아름답거나 다시 또 오고 싶은 곳일 뿐이다. 체코의 어둡지만 아름다운 역사의 지평 위에 체코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공간 짓기를 해 온 것이다. 이방인의 공간 지각을 통해 그들의 역사적 상처들이 얼마나 온전하게 경험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불러낼 방법이 없는가? 결국 그 공간을 살아온 그들의 삶을 문학과 철학 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건축 역시 그들의 존재의 집이다. 시와 건축은 단지 방법만 다를 뿐 존재를 불러내는 메타포들이다. 프라하의 봄을 벨벳 혁명으로 완성하기까지 그리고 벨벳 이혼으로 민족이 다시 분리되기까지 그들의 존재를 겹겹이 안고 있는 곳이 카를교이다.
프라하성과 카를교의 콘트라스트는 그들만의 역사적 공간 지평에서 이루어진 역사의 주름이다. 그 주름이 관광객에게 주는 위로와 을씨년스러움은 선물이다. 카를교는 그 위를 걷는 우리에게 ‘사색’이란 선물을 허락한다. 자국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국의 이해타산에 휘둘려야 했던 한국과 체코는 닮아 있다. 난 여기에서 해한(解恨)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곳은 그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와 디아스포라의 한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도 가장 다시 오고 싶은 곳일지도 모른다. 체코 역시 슬로바키아와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처가 있다. 프라하는 상처로 생긴 깊은 주름을 안으로 겹겹이 쌓고 있는 중년(重年)의 도시다. 프랑스 파리의 다양한 얼굴들이 연출하는 화려함에 식상할 때쯤, 이곳은 그 화려함에 의해 가려졌던 성찰의 시간을 허락한다. 그래서 프라하는 사색의 정원이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 조명도 슬프다.
카를교는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인간사에 찌든 세속 언어로는 들리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가 인간의 한계이다. 하이데거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존재의 문을 열 수 있는 길은 시 짓기(詩作: Dichtung)라고 말한다. 시적 언어는 우리의 세속 언어를 탈색해 낸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옛 보헤미안 왕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독일을 거쳐, 스위스에서 죽는다. 그는 영원한 보헤미안으로서 자신의 참다운 실존을 찾아 방황한다. 그는 이미 1968년에 올 프라하의 봄을 예견한 듯이, 「봄을 그대에게」를 속삭인다. 영원한 보헤미안 릴케의 아리랑이다.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
프라하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를 잠시 기억한다. 그가 완성한 〈슬라브 서사시〉는 민족의 슬픔과 희망을 담고 있다. 무하는 1881년 체코를 떠나 프랑스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후반의 삶은 떠났던 조국으로 다시 돌아와 행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채워졌다. 그 결정체가 바로 〈슬라브 서사시〉의 완성이다. 하지만 만년에 나치에 의한 고문으로 80세 나이를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나치의 폭정에 시달렸고, 결국은 민족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진 한은 두텁고 깊다. 디아스포라 무하는 그 한을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풀어낸다. 꽃과 여성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아르누보 양식이다.
첫댓글 _((()))_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