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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18,18-20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왕이 되고 싶으며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고,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남들에게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꽃길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며 그곳에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실 거라고 세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빛나는 영광의 타볼산에서 내려오시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하시는 말씀인데, 이 길이 가시밭길이요 십자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는 이 길이 꽃길이라 생각하고 미리 ‘자리 청원’을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아무리 수난을 예고하셔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만 하십니다.
듣고 싶은 말만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너는 꽃길만 걸을 거야!’라고.
그리고 엄마의 자리 청원에 대해선 ‘당신 아들은 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주님은 듣기 좋은 말을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길을 가야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어미보다 아들들을 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저는 음악방송을 늘 틀어놓고 일하는데, 음악을 신청하면서 취직하는 사회 초년병 자식 사연을 전하면서 자기 자녀들이 꽃길만 걷기를 바란다는 엄마의 마음을 전하지요.
이런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 엄마의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어미의 마음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신앙인인 우리는 이 지점에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가라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 어미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고 믿는지 도전을 받습니다.
사실 신앙인인 우리가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고, 특히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거나 주실 때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프란치스코처럼 백 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고 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지은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 나의 이 모든 고통에 대하여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백 배의 고통을 더해 주시기를 비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행함이 나에게는 넘치는 위안이 되기에, 나를 가차 없이 고통으로 괴롭히시는 것을 진정 기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신 고통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고, 고통을 더 주십사고 우리가 청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주시고, 우리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순전히 천국 여정을 위해서고, 그래서 그것이 꽃길보다 더 큰 사랑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고난에서 구출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의 행복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 기도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명의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썩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비굴과 겸손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자신을 낮추어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1코린 9,24)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 더 겸손한지 내기하듯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겸손과 비굴함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은 높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고 비굴함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 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바다의 물은 어떤 나무에도 도움이 안 되지만 위에서 내리는 비는 나무에 생명을 줍니다.
이처럼 높이 있다가 낮아질 때 누군가에게 자존감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역의 제과점에서 물건을 배달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청년 시절엔 과도한 관료주의와 잘못된 정치에 대해 저항하는 삶을 삽니다.
총을 여섯 차례 맞았고 무려 13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2009년 정당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는 법에 따라 재임을 스스로 거부하고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받아 퇴임할 때가 더 높은 지지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우루과이 남서부에 거주하는 헤랄드 아스코타라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내용인데, 그는 도로위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지갑까지 잃어버려 택시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쳤지만 잠시 뒤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정차했습니다.
운전자는 그에게 대통령궁까지만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탑승이 중요했던 아스코타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는데 어딘지 낯익은 사람이 운전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운전자와 동승자는 다름아닌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영부인이었고 운전자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그는 사진을 찍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자신의 SNS에 올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호세 무히카가 대통령 궁이 아닌 자기 사저인 농가에서 생활하며 운전기사 없이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궁은 국민의 재산이라며 날씨가 추워져 지내기 힘들어진 노숙자를 위해 피어있는 대통령 궁을 내어주기도 했고, 재임 기간의 급여 90%를 빈민 주택 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중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 계층을 위해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먼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먼저 성체를 영하고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때 그 사람도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이 믿음 없이 하는 겸손은 그저 상대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비굴함에 불과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대해줍시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겸손함이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 꾸며낸 이야기라든지 공상 소설이 아니라 참이라는 것을 종종 깨닫습니다.
냉정하고 정확한 복음 사가들은 제자단의 모습을 묘사할 때마다 아주 가차없습니다.
수제자건 애제자건 핵심 제자단이건 상관없습니다.
나름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들의 모습을 절대로 미화시킨다거나 영웅시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약점과 흠결, 미성숙과 흑역사를 감추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야욕으로 가득했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낯뜨겁게도 노골적인 인사청탁을 합니다.
인사청탁하면서 절대 그냥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품질 좋은 포도주 한 병, 그리고 고급 안주도 들고 왔을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부끄러움도 없는지,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오 복음 20장 21절)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열 제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불쾌해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제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엄마 계셔서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는 건가?’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 혀를 내둘렀을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들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감과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십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을 또다시 용서하시고, 크게 인내하시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낮춤과 섬김>
하느님 나라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 없는 나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압박과 억압을 받는 일도 없고, 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감도 불쾌감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남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낮은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런 일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과 남들에게 세도를 부리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첫째가 되려는 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너희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너희가 바란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저쪽 세상에,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방법이고, 그 나라에서 살기 위한 준비이며 훈련이고,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권력욕, 명예욕, 지배욕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라는 말씀은 당신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고, 어떻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시키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기만 하면 됩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그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낮춤과 섬김의 최고 단계를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낮춤과 섬김은 겉으로만 낮추고 섬기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는 일입니다(요한 15,13).
만일에 사랑 없이 겉으로만 낮추고 섬긴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하기 싫으면서도 그래야 한다니까 겉으로만 낮추고, 겉으로만 섬기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니까 그 일은 곧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낮춤’과 ‘섬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필리 2,5-9)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셨지만 부활하신 다음에는 원래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가신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낮춤과 섬김 자체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로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생략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 그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치 힘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내가 저 사람 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그냥 손을 뻗어서 저 사람을 내가 있는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 질문의 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하느님 나라는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삶 -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시편 90,10)
건강도 젊음도 찰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문병차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로 환자는 보지 못하고 전화 통화로 위로와 강복을 전했습니다.
참 많은 환자들로 병원이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병원이나 그럴 것입니다.
어제 우리 노수도형제도 눈수술을 위해 입원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이발 때는 미리 강복을 받았고 오늘 미사 전에 가게 된다며 특별미사를 청하여 새벽 4시 집무실에서 수사님 위해 함께 미사 봉헌했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불안했던 듯 합니다.
참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참 짧은 날들이요, 대부분은 병고로 근심, 걱정으로 지내는 날들 같습니다.
요즘 들어 병고중인 분들도 많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습니다.
새삼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살아있는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카톡 메시지를 받고 공감했습니다.
천국의 시민들이 가장 많이 쓰는 천국의 언어 7가지라 합니다.
1. 미안해요(I am sorry)
2. 괜찮아요(That’ okay)
3. 좋아요(Good)
4. 잘했어요(Well done)
5. 훌륭해요(Great)
6. 고마워요(Thank you)
7. 사랑해요(I love you)
좌우간 하루하루 많이 사용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를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꼭 기억해야 할 세마디를 나눕니다.
첫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에서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 4,47)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뿐 아니라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눈앞에 죽음을 환히 두고 살 때 언제 어디서나 환상이나 거품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수난과 부활을 세번째로 예고하실 때 심정도 참 비장하셨을 것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주님은 늘 죽음을 기억하며, 염두에 두고, 또 부활의 희망을 내다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죽음을 염두에 둘수록 강화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예수님처럼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음의 위기중에 간절히 기도하는 예레미야요,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을 예언자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둘째,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사상 가운데 하나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참 적절한 삶의 자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짐을 기꺼이, 용감하게 선물로 받아들일뿐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을 선택함으로 아름답고 보람차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는 오늘 제자공동체를 대하는 예수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동상이몽의 철부지 공동체같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다가와 청을 드리니 말그대로 무지와 오해의 반영입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스승님의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완전히 강요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체의 동요없이 참으로 차분하게 대응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소관밖이며 아버지께서 하실 일임을 밝히십니다.
대신 두 제자들이 책임을 다할 것임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은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참으로 사랑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에 앞선 묘사에서 얼마나 공동체 제자들을 사랑하신 주님이신지 아모로 파티의 빛나는 모범인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끝까지 내 삶을, 이웃 형제들을, 심지어 내 죽음까지, 자기의 운명을 통털어 사랑으로 감싸안는 자가 아모로 파티의 사람이요, 예수님이야말로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원망은 추호도 없고 찬미와 감사,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셋째,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아라.
참으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메멘토 모리의 사람은, 참으로 자기 십자가의 책임을, 운명을 사랑하여 힘껏 등에 지고 품에 안고 살아가는 아모로 파티의 사람은,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여 주님과 일치하여 본질적 깊이의 카르페 디엠의 삶을 삽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마치 주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세상의 통치자들이나 고관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종의 영성에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어제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는 섬김의 삶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는 겸손한 사랑의 삶입니다.
마지막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섬김의 삶에 충실하는 카르페 디엠의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메멘토 모리의 사람’으로, ‘아모르 파티의 사람’으로, ‘카르페 디엠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참으로 자주 인용해도 늘 새로운, 이 모두를 요약한 제 좌우명 고백 기도시 마지막 연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수난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마태 20,18)
오늘 복음의 대목은 하필이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제베대오 아들들의 청탁, 두 주제가 연달아 이어집니다.
누차 밝히시는 당신 사명과, 그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요.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인데, 제자들에게는 출세와 영광의 도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공에 편승해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어머니까지 동원해 눈치 싸움에 돌입한 듯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26)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두 제자의 숨은 의도가 드러나 제자단 안에 분열이 시작되니 스승의 마음이 어떠실지 짐작이 갑니다.
그동안의 지도가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실망감과 분노로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싶지만 예수님은 꾹 참고 간곡한 목소리로 만류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 섬기러 왔고 ...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속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엄연히 다르다는 걸 다시 차근히 일러주십니다.
세속 권력의 힘과 사랑이라는 계명의 힘 역시 헷갈릴 수 없이 다른 세계의 일이라는 걸 알아듣길 바라십니다.
아직 십자가 길에서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시기 전이지만, 이미 예수님은 외로우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섬김과 희생 제사의 소명을 일러 주시지요.
제1독서에 드러난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에 예수님이 어른거립니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예레 18,20)
이 질문에서 예레미야의 서러운 울분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밤낮없이 수고했지만, 돌아은 건 조롱과 모욕, 모함과 박해 뿐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제 입맛에 맞는 말을 해 줄 사제와 현인, 거짓 예언자에게 백성의 운명을 맡긴 채, 하느님의 목소리를 무참히 훼손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예레 18,20)
사람에게 이 말을 했다면 괜한 공치사 밖에 되지 않을 터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시는 오직 한 분, 하느님께 온갖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충실한 기도와 축복, 용서의 중재는 하느님과 예언자, 둘만의 숨겨진 짝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아는 이들과 구원의 현실을 누리면서도 이를 모르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닮으려 애쓰는 이들은 물론, 당신을 모르거나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배척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자기들을 위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모르는 가운데 그를 해치려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치르신 몸값의 수혜자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는 무지일 뿐, 그렇다고 주님께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중단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는 않으시지요.
그러니 수난의 목전에 이르러서도 움켜쥐고 있는 제자들의 야심 정도가 그분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예언자는 그런 운명입니다.
매번 이해 받고 갈채와 덕담에 취해서 살고 있다면 오히려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인지 예언자적 소명을 살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언자의 기도와 중재, 축복은 하느님과 자신만 아는 숨은 짝사랑일 때 진짜일 확률이 큽니다.
사랑하는 빗님!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웃들이 우리의 호의에 어떻게 응답하든,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묵묵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체에 대한 허기와 함께 깊어가는 이 사순절에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더 기도하고 희생하며 세상의 고통을 보듬고 떠받치는 오늘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회전하고 있습니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우리 은하(Via lactea)’라고 합니다.
태양계에 있는 별들 중에 지구와 비슷한 별은 금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생명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별은 지구보다는 작지만 화성이라고 합니다.
관측 결과에 따르면 화성에는 지구처럼 ‘물’이 풍부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물은 지구나 화성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우주에서 고체의 형태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는 아직도 생명의 터전인 물이 풍부한 반면, 화성에는 그 많았던 물이 모두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장’의 크기라고 합니다.
지구에는 강력한 자기장이 있어서 태양풍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지구 밖 35,000킬로까지 밀어낸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지구의 물은 우주로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품에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화성에는 자기장이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태양풍을 그대로 받아야 했고, 그 결과 화성을 가득 채웠던 물은 허망하게도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의 자기장과 관련된 영화 중에 ‘코어(The Core)’가 있습니다.
2003년에 나왔으니 20년 전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첫째, 지구 대기권을 이루는 공기층이 얇아지거나 사라집니다.
지구의 자기장은 마치 비를 막는 우산처럼 태양에서 오는 태양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유전자의 심각한 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빠집니다.
태양풍이 사람이나 동식물에게 그대로 피폭되면 세포의 유전자가 파괴됩니다.
셋째, 지상의 전력 시스템과 지상의 통신 시설에 큰 피해가 발생합니다.
수시로 내려치는 어마어마한 번개의 위력 앞에 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바닷물은 증발하게 되고, 결국 화성과 같이 사막뿐인 행성이 되고 맙니다.
영화는 멈춰버린 지구의 자기장을 되살리면서 끝이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이 지구를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인간들이 인공지진으로 무기를 만들면서 지구의 핵이 멈추는 일이 생겼다고 설정합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인공지진으로 지구의 핵이 멈추면서 자기장이 멈추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장이 사라지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진처럼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억누르려는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재물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은 사람들도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자기장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섬김과 겸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들에게 춤을 춰 보라고 하면, 한때 ‘개다리 춤’만 췄었습니다.
다리를 흔들면서 박수치며 손을 번갈아 머리로 넘기는 춤입니다.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춤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아이들에는 인기 있는 춤입니다.
한번은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이 춤을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합니다.
겨우 이런 춤을 추냐는 비웃음도 보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동창 신부가 “이 춤 진짜 어려워. 너도 한 번 춰봐.”라고 말합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의 뻣뻣한 몸으로는 도저히 출 수 없는 어려운 춤임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뒤, 그 중 딱 6초 동안의 안무를 보고서 춰보라고 했습니다.
딱 6초입니다.
전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춤을 제대로 추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나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운전 실력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자기 운전 실력을 스스로 점수 매겼습니다.
사람들 모두의 평균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요? 80점? 85점?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93점이었습니다.
모두가 90점 이상의 베스트 드라이버인데 왜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을까요?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똥멍청이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또라이다.”
자신은 잘한다는 착각. 이 착각으로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단죄했을까요?
훨씬 부족함이 많은 나인데도 말이지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부모님의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소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자기 아들이 다른 제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고, 그 당연한 생각을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 역시 스승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시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달리, 나를 낮출수록 높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자기는 잘하고 남은 못한다는 교만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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