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를 담은 말
티스토리/ 줄여 쓰기- ‘난쏘공’에서 ‘열폭’까지
⑩ 말 줄여 쓰기 풍경
“얘, 게서 뭐하니?”
어디서나 예사로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준말이다. 그럼 본딧말은 뭘까? ‘이 아이야, 거기에서 무엇(을) 하니?’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본딧말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말 줄여 쓰기는 아주 예사로운 일이란 걸 알겠다.
준말은 글말보다 입말에서 두드러진다. 입말에는 소리마디(음절)를 줄이려고 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것은 같은 값이면 한 마디라도 줄여서 쉽게 말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말의 경제성’을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말을 쉽게 하고자 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고, 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준말을 참 많이 쓴다. 마디가 많은 말일수록 줄이는 게 예사다. 낱소리를 줄이기도 하지만, 낱자를 통째로 들어내어 줄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전력주식회사는 ‘한전’, 대한주택공사는 ‘주공’, 한국도로공사는 ‘도공’으로 줄여 쓴다. 자기소개서를 ‘자소서’로, 취업준비생을 ‘취준생’으로, 중앙도서관은 ‘중도’로 줄여 말한다고 해서 안 될 리 없다. 뜻만 통한다면 말이다.
말을 줄일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소리마디를 줄이는데, 일본사람들은 머리만 남기고 꼬리를 자른다. 이를테면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매스컴’, 에어 컨디셔너를 ‘에어컨’으로 줄여 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이 뭘 어떻게 쓰든 상관할 바는 아닌데, 문제는 우리가 그걸 그대로 본떠서 쓴다는 데 있다. 뭘 많이 안다는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이건 그냥 우리말로 대중매체, 냉방기라고 하면 탈 날 일 없다.
요즘은 달라진 것 같지만, 옛날엔 텔레비전을 많이들 ‘테레비’라고 했다. 요새도 나이 든 사람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 꽤 있다. 이게 일본말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 흔히들 말하는 ‘스텐(스뎅)’은 본딧말이 ‘스테인레스 스틸’이다. 녹슬지 않는 쇠붙이라는 뜻인데, ‘스텐’이라고 일본식으로 뒤를 잘라먹음으로써 도리어 ‘녹’이라는 뜻이 돼 버렸다. 긴 말을 줄이는 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일본을 따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경우엔 본딧말을 그대로 두든지, 줄이려면 우리식으로 줄이든지, 아예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든지 하는 게 낫겠다.
일본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돈가스는 좀 요상한 줄임말이다. 이것이 일본말이란 건 다들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긴 건지 그 내력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하긴, 어떤 말이 어떻게 생긴 건지 시시콜콜 따지는 일이 왜 필요하냐고 물으면 할 말 없다.) 서양말로 얇게 저민 고기 튀김을 ‘커틀릿’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추레또’가 됐다. (이는 된소리는 예사소리로, ‘ㅓ’는 ‘ㅏ’로, ‘ㅌ’은 ‘ㅊ’으로, ‘ㄹㄹ’은 ‘ㄹ’로, 받침소리는 첫소리로, ‘ㅡ’는 ‘ㅗ’로 바뀌는 일본식 소리 법칙에 따라 생긴 말이다.)
이 ‘가추레또’를 일본식 줄임법에 따라 잘라내니까 ‘가추’가 되고, 앞에 돼지고기라는 한자말 ‘돈’을 붙여서 ‘돈가추’가 됐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소리내기에 알맞게 바뀐 것인 ‘돈가스’다. 이건 그냥 우리말로 ‘돼지고기 튀김’이라 하든지, 정 다른 나라 말을 쓰고 싶으면 ‘돼지고기 커틀릿’이라고 하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요새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말 줄이기가 유행인 듯하다. 이를테면 ‘빼박’은 ‘빼도 뱍도 못한다’는 뜻이고, ‘솔까말’은 ‘솔직하게 까놓고 말한다’는 뜻이란다. 그런가 하면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가라앉았다)’는 뜻이고, ‘넘사벽’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줄인 것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이란다. 재미있긴 하지만 이런 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겠다.
이런 말 좀 더 알아보자. ‘까도남’과 ‘차도남’은 각각 ‘까칠한 도시 남자’와 ‘차가운 도시 남자’라는 뜻이고, ‘남아공’은 ‘남아서 공부나 하라’는 뜻이다. ‘버카충’은 ‘버스 카드 충전’을 뜻하고 ‘생선’은 ‘생일 선물’, ‘문상’은 ‘문화상품권’을 가리킨다. ‘제곧내’는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뜻으로 전자우편 같은 데서 주로 쓴다. 우리 같은 구닥다리들은 이런 말도 새롭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런 정도는 이미 한물간 태곳적 말이라니 신기할 뿐이다.
여기까지는, 좀 낯설긴 하지만 대강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런데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이르면 좀 난감해진다. 이렇게까지 줄여야 하나, 그냥 우리말로 ‘얼음 커피’라고 하면 안 되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설참’은 뭔가 했더니 ‘설명을 참고하라’는 뜻이라는데, 처음 들으면 짐작하기도 어렵다. 보조배터리를 ‘보배’라고 하는 건 뜬금없어 웃음부터 나온다. 글쎄, 어쨌든 재미는 있다고 해야 할까?
이 글 읽는 분들, 혹시 ‘만반잘부’가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 또 ‘번달번줌’은? 그것이 각각 ‘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와 ‘번호 달라면 번호 줌?’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고 나면 좀 허탈해질 수도 있다. 비슷한 보기로 ‘안물안궁’이 있는데 이건 ‘안 물어 봤고, 안 궁금하다’라는 뜻이란다. 또 ‘엄진근’은 ‘엄격 근엄 진지한 것’을, ‘꾸안꾸’는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것’을 말한다니, 이쯤 되면 ‘별다줄(별걸 다 줄인다)’이라고 핀잔을 들을 만하다. 또 나이 든 이들에겐 ‘문화충격’이 될 법도 하다.
요새 젊은이들은 대개 유무선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말을 주고받을 때도 입보다 손을 더 많이 쓴다. 그러다 보니 컴퓨터든 손전화든 자판을 하나라도 적게 두드리려는 버릇이 생겼고, 거기에서 이런 줄임말이 나왔다.
그런데 줄임말이든 새로 만든 말이든 문제는 소통이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못 알아듣고 우리끼리만 알아듣는 말이라면, 그건 줄임말이 아니라 변말(은어)이 돼 버린다. 변말은 끼리끼리만 써야지 여럿한테 쓰면 안 된다.
요새 들어 첫소리만 쓰는 것도 유행이 되었다. 이를테면 고맙다는 뜻으로 ‘ㄱㅅ’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ㅊㅋ’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ㅇㅈ’을 쓰는 것 따위이다. 이 또한 자판 두드림을 최소화하려는 버릇에서 나온 것인데,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알아먹기는 쉽지 않다. 두 낱자 정도는 그래도 덜하지만, 세 글자 네 글자를 넘어가면 정말 어려운 수수께끼 풀 듯 머리를 싸매야 한다. 이쯤 되면 줄임말이라기보다 암호에 가까워진다. 암호는 애당초 소통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요새 유행하는 줄임말에는 다른 나라 말이 섞인 것도 많다. 이를테면 ‘반모’와 ‘존모’ 같은 건데, 각각 ‘반말 모드(상태)’와 ‘존댓말 모드’를 나타낸 걸 알고 나면 싱겁다. 학생들 사이에선 ‘노잼’이나 ‘노답’ 같은 말도 많이 쓰나 본데, 각각 ‘재미 없음’과 ‘답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란 건 짐작이 간다. 그런가 하면 ‘인싸, 아싸’ 같은 말도 많이 쓴다. 이건 각각 ‘내부자(인사이더)’와 ‘외부자(아웃사이더)’를 가리키는 줄임말이다. 짐작한 것처럼 여럿 속에 들어가 잘 어울리고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이 인싸다. 이런 말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 이를테면 ‘핵’이나 ‘개’가 붙으면 강조하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핵인싸’는 인싸 가운데서도 으뜸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뇌피셜’은 뭔가 했더니 ‘머리로만 생각해서 짐작하고 주장하는 것’을 뜻한단다. ‘뇌’와 ‘오피셜’을 합친 말로, 근거 없이 생각만으로 우기는 것을 풍자하는 말 같다. ‘워라밸’은 ‘일(워크)과 삶(라이프)의 균형(밸런스)’을 합친 줄임말이라는데, 굳이 이렇게 다른 나라 말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하다. 하긴, 아예 로마자로만 만든 ‘티엠아이(투 머치 인포메이션, 곧 너무 많은 정보)’ 같은 말도 있고 보면, 서양말에 젖어 사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런 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썩 개운치는 않다.
줄임말에는 세태를 비춘 말도 많다. 혹시 ‘인구론’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를 떠올렸다면 너무 순진하다. ‘인문계는 구십 퍼센트가 논다’는 뜻이란다. 일자리 못 찾은 요즘 젊은이들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갑통알’은 ‘갑자기 통장을 보니 알바(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는 뜻이고, ‘장미족’은 ‘장기간 미취업자 신세’라는 뜻이란다. 이 모두가 실업자 많은 세태를 딛고 태어난 줄임말이다.
그런가 하면 ‘자낳괴’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을 말한다. 돈 앞에서 양심도 신념도 쉽게 버리는 요새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면서 씁쓸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미자’는 여자 이름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를 줄인 말이다. 다시 말해 갈 데까지 간 극단 자본주의로,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생각이 낳은 괴물이다. 모두 요새 같은 배금주의 세상이 아니면 생길 수 없는 줄임말이다.
말속에는 세상이 담기고 생각이 담긴다. 줄임말 하나에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 이러하다. 그래서 이 땅의 어른들에게 권한다. 말을 함부로 줄여서 ‘국어를 파괴’한다고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만 할 게 아니라,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젊은이들 삶과 생각을 헤아려 보자. 그리하여 공감하며 함께 문제를 푸는 일에 나서자.
또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말을 바르게 하자는 어른들 충고를 꼰대 잔소리라고 흘려들을 게 아니라, 말의 생명이 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그리하여 ‘우리끼리만’ 알아듣는 말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세상을 밝히자. < ‘누구나 쉽게 쓰는 우리말(서정오, 도서출판 보리,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5. 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