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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동원하는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기만(欺瞞) 또는 망상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교육학
‘디지털 대전환’에 부응한다며 교육부가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을 내걸었다. ‘AI 디지털교과서’로 학생 맞춤교육을 ‘세계 최초로’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글은 그것이 기만이거나 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교육부가 꿈꾸는 AI 교과서가 만들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한다고 예시된 방안에 전제된 교육 모형이나 철학은 허술하다고 주장한다. 시류에 부화뇌동하는 정책을 지양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
정부의 교육개혁 구상은 유행 담론을 그냥 흘려 넘긴 적이 없다. 세계화, 정보화, 지식정보사회, 제4차 산업혁명 등 그동안 교육부의 문서를 채워왔던 무수한 용어들을 떠올려보라. 이제 유행은 ‘인공지능(AI)’으로 옮아갔다.
교육부는 지금을 ‘디지털 대전환 시대’라 부르며, 그 대전환에 상응하는 교육개혁은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이어야 마땅하다고 역설한다. 대통령에 대한 연두 보고에서 교육부는 2023년을 ‘교육개혁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10대 핵심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첫째가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이다. 이제까지의 다른 개혁과 달리, 이 대안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성을 품고 있다고 호언하고 있는 셈인데, 그 핵심에 AI를 두었다.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교육부의 꿈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교육부 보도자료가 여기저기서 부연하는 어구들을 모아보면, 그 설명은 두 구절로 모인다. ‘학생 맞춤’ 교육을 위한 혁신이라는 것과 ‘AI 디지털교과서’가 그 혁신의 중핵이라는 것이다. 교육부는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디지털 시대 교육의 대전환 방향”을 묘사하고 있다.1
교육부가 그리는 대로라면, AI 디지털교과서를 동원함으로써, 학교 수업은 교사와 학생이 1대1로 상호작용하는 양상으로 바뀐다. 현재의 “대량 학습 체제”에 비하여, 수업은 더 밀도 있고 적합해지리라고 전망한다. 학생에게 AI 디지털교과서는 “AI 튜터”이다. 그것은 학생이 “자신의 역량과 속도에 맞는 맞춤 학습”을 할 수 있게 돕는다. 말하자면 학생은 개인교습을 받게 되는 셈이다. 다른 한편, 교사에게는 AI 디지털교과서가 조교 역할을 한다. 수업 계획이나 준비를 도울 것이고, 각 학생의 학습 수준이나 준비도도 진단해 줄 것이다. 교사는 “데이터 기반”으로 지도하게 됨으로써 학생 개개인에게 긴밀히 맞춰진 수업을 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AI 조교”가 수업 부담을 덜어주는 만큼, 학생의 비인지적 발달에도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교육부는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으로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학생 “누구나 자신의 역량에 맞는 교육목표를 자기 주도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되며, “잠자는 교실”이 깨어나게 될 것이라 홍보한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은 바로 AI라는 기술 덕분에 열렸다고 말한다. “AI는 기존의 표준화된 획일적 교육에 혁신을 불러와 교육 분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 수 있는 기술”이라고 설명한다.2
교육부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아 우리나라 학교는 모든 학생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될 것이고, 학교에선 세계가 선망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육부는 “AI 기반 코스웨어를 바탕으로 한 교과수업”을 예시하면서 아동에게 일어날 변화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일 수업 시간이 기다려집니다.”3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아동은 숙제로 “디지털교과서에서 제시한 평가 문제를 풀[게 되는데]”, 숙제하는 과정에서 디지털교과서는 “다양한 콘텐츠(영상, 사진 등) 자료를 추천해” 주면서 “계속 개념 이해 설명”을 해주고, “소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 학습을 적용해 친구들과 새로운 미션을 수행할 내일 수업 시간”이 아동에게는 기다려질 것이라는 게 예시의 결말이다.
교육부장관도 AI 디지털교과서가 가져올 꿈같은 미래를 얘기했다. 한 뉴스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AI 디지털교과서를 ‘국가 차원’에서 도입하는 경우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일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번 정부가 [추구하는]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내세웠다. “디지털교과서로는 아이들 수준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교육이 가능하다”면서, “교과서는 지식의 전달을 담당하고 교사는 코치를 해줄 수도, 사회정서적인 역량을 키워줄 수도, 멘토·학습디자이너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4
교육부가 꿈꾸는 AI는 어디에서 오나?
이야기가 꿈같으면 으레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야 마땅하리라. 교육부는 AI 기반 디지털 교육혁신을 정책으로 내놓고 기회 될 때마다 그 정책의 합리성과 현실성을 홍보하고 있지만, 그것의 일차적인 문제는 방안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현재로서 AI가 교육부가 예시하는 수준의 교육적 역량을 갖출 길이 없다. 적어도 교육부가 제시한 “윤석열 정부 내 교육개혁을 완성”한다는 시간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고,5 앞으로 수십 년을 두고 보아도 교육부가 그리는 AI가 생겨나기는 어려울 것이다.6
AI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두 요소에 달려있다. 학습데이터와 알고리즘이다. 특정한 과제(이를테면, 미적분에 대한 학습)와 관련해서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데이터가 디지털화 되어 모아져 있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주어진 과제 해결에 필요한 ‘인텔리전스’를 갖출 수 있게 기계학습을 이끌 알고리즘을 작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AI는 그 과제에 관한 한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게 개발될 수 있을지 모른다.7 그러나 이 두 가지 전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데이터’가 디지털화될 수도 없거니와, 기계학습을 지시할 완전한 알고리즘을 구성할 수도 없다.
교육부의 꿈대로라면, 디지털교과서가 장착한 AI는 교과 지식에 통달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실천 지식(practical knowledge)까지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교육 전문 AI가 개발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지식의 통달’이나 ‘실천 지식’에는 암묵적 성질이 불가결하다는 데 있다. 잘 알려진 대로, AI는 학습한 결과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 데이터가 품고 있는 패턴과 구조적 확률을 알고리즘이 지시한 표적에 맞추어 계산해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계산 결과만으로는 피교육자마다 다른 미묘한 인지적 차이나 정의적 정황을 포착하고 대응할 암묵적 지혜를 갖출 수 없다. AI는 말 그대로 ‘기계적인 계산’대로 반응할 뿐이다. 암묵적 지혜는 데이터에 근거한 계산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8
교육부에서는 변명할지 모른다. 훌륭한 교사 수준의 지혜를 갖추는 데야 이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평균적인 교사보다는 나은 AI를 만들 수는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아직은 그마저도 요원한 일일 터이다. 현실을 돌아보자. 우리는 아직도 교사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현재 교원 양성이나 임용 프로그램은 필기와 면접 그리고 실기(실연) 같은 시험을 근간으로 예비교사를 거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훌륭한 교원을 키워내는 데 요구되는 실천의 지식(‘알고리즘’)도 정립해 놓지 못한 상태에 있다. 교원을 키우는 데 적용할 우리의 이론과 실천의 수준이 이러한데, 수업에 혁명을 가져올 기계 조교(AI)를 어떤 알고리즘으로 키운다는 뜻인가? 지금의 교원 양성 프로그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양성의 충분한 효능을 지녀서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잠재력 있는 예비교사들이 임용된 후 현장에서 발휘하는 창의적(암묵적) 적응력 덕분에 제도가 겨우 존립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기계(AI)에 대해서는 이런 기대마저 할 수 없다. AI는 암묵적 지혜를 현장에서 스스로 키워 축적할 수 없다.
AI의 발달은 흔히 인간의 성장에 비추어 얘기된다. AI를 얼마나 사람의 지능에 가깝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란 뜻인데, 그 관건을 풀어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알고리즘으로 번안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기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해내는 발달과업들을 기계가 해내도록 명시적인 ‘지시’로 풀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AI를 사람 수준으로 키워낼 수 있는 알고리즘을 명시적으로 써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결국 AI는 ‘블랙박스’로 만들어진다. 주어진 프롬프트에 AI가 반응하기는 하지만, 그 반응이 어떤 과정(근거)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학습을 위해 주어진 데이터가 품고 있었던(데이터를 제공한 개발자도 모르는) ‘관계의 정형(定形)’을 찾아내, AI는 그것을 근거로 ‘답’을 낸다. 그러나 이때 ‘정형’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찾아낸 ‘추론’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데이터(input)와 답(outcome)은 드러나 있지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리 과정은 미지로 남는 것이다. 다만 AI의 답이 인간의 것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하여 그 수행의 쓸모를 판단할 뿐이다. 이를테면, 진단 영상에서 병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과제에서 AI가 인간 의사보다 확률상 비교 우위를 차지한다면, AI가 마치 영상 판독과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여 고용하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블랙박스 AI일 터이다. 기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AI가 학습 문제를 출제할 수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학생의 풀이를 채점할 수도 있으며, 학생의 풀이가 틀렸을 때 보충으로 어떤 과제를 더 수행해야 하는지 ‘진단’도 할 수 있다면, 교육부가 주장하는 대로, 튜터 또는 조교로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맥락과 효용성을 전제하더라도,9 AI 디지털교과서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개혁’이 잠자는 교실을 깨우고 모든 학생이 행복해지게 만들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풍이다.
교육부의 AI 기반 디지털 교육혁신 방안이 허풍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듭 얘기하지만,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AI 튜터’(또는 조교)도 우리 현실에서는 개발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AI를 키우기 위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갖춰질 수 없기 때문이다.10
AI 튜터를 키우기 위한 알고리즘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과 지식의 구조에 대한 치밀하고도 타당한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 이론을 장착해 주어야 AI가 학생들에게 어떤 개념을 어떤 순서로 공부해야 할지 알려줄(진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이론을 AI에 학습시키는 데 필요한 디지털 데이터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교과 지식은 긴 역사를 통해 꾸준히 정련되어 온 것이니, 그 구조(계열과 위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편적인 합의가 되어 있다고 치자.11 그러나 그 지식을 어떤 자료로 학습시킬 것인가? 우리말로 쓰인 교과서나 교재 그리고 참고서 등을 모두 디지털화해서 ‘먹이면’ 될까?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더욱이 학생들이 학습 과정에서 드러낼 의외의 다양한 반응을 분석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만큼의 진단 또는 교수 능력은 어떤 데이터로 배양할 것인가? 학생들이 AI와 상호작용할 때 나타낼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반응 양태를 충분히 집적한 데이터가 있기는 한가? 없을 것이다.
결국 AI의 개발은 프로그램 학습이니 완전 학습이니 하며 과거에 시도했던 위계적 학습 과정을 ‘컴퓨터화’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교과 내용의 위계 또는 계열성과 수준 맞춤 검사(adaptive test)의 기술을 조합하여 수업 기계(teaching machine)인 듯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학생들에게 문제를 출제하고 학생들의 답에 따라 후속되어야 할 문제 풀이(학습)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안할 수 있는 기계, 그리고 그런 일련의 상호작용 과정을 학생의 ‘프로파일’ 양식으로 조직하여 교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한 최고 수준이리라는 짐작이다. 이 정도 수준의 개발도 수학과 같이 컴퓨터화하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과목에서나 가능하고,12 그나마 다른 과목들에서는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불가능할 것이다.
첨단 ‘에듀테크’가 교육 문제의 ‘솔루션’?
교육부가 공언한 수준의 AI가 만들어지기 어렵지만, 기적처럼 AI가 제법 쓸모 있게 개발될 수 있다면 어떨까? 보통의 인간 교사 수준으로 학습지도를 해낼 수 있는 AI를 개발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몇십 년 후에라도 가능하게 된다면, 학교 수업이 더 ‘맞춤형’이 되고 교육 결과도 나아지지 않겠는가? AI 기반 디지털 교육혁신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둘러댈지 모르겠지만, 이에 대해서도 그 여지를 인정해 주기는 어렵다. 에듀테크를 동원한 맞춤교육(personalized education)의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기술이 교육 문제의 해결사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게 우선 맹신에 불과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정책이 함축하고 있는 교육관과 이념이 인본적이지 못하다.
에듀테크를 동원하면 학교 교육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근대 학교 교육이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일어왔다. 우리나라의 교육사에서만 보더라도 과학기술의 변화를 따라 늘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리라 법석대 왔다. 시청각 교육, 컴퓨터 활용 교육, 인터넷 활용 교육, ICT 활용 교육, 이러닝, 유러닝, 스마트 교육, 소프트웨어 교육, 사이버 교육, K-MOOC 등 그동안 유행했던 정책 조어만 열거해 보아도 ‘에듀테크 개혁’ 프로그램의 명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때마다 기술 유행에 열광했던 정부가 장담했던 혁명적 변화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제 차례는 AI라는 또 다른 기술에 이른 것인데, 이번만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실험되어 온 기술이 학교 교육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발된 기술들이 사회 전반에서 범용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의 일상에도 스며든 부분이 없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정부가 외쳤던 혁신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기술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소소한 변화를 얘기하지 않았다. 에듀테크가 학교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를 단방에 해결해 주리라고 늘 외쳐왔지만, 그들의 ‘혁신안’은 잠깐 유행하고 곧 사라지곤 했다.
기술에 대한 열광과 개혁의 시도가 점멸해 온 역사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구적인 수준에서, 근대 학교 교육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 얘기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예를 보자.13
이 시스템을 발명해 도입한 사람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은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학습과 과학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 그것[시스템]은 개인의 모든 성취와 인격 그리고 품위가 투영되는 거울이다.
위의 경탄은 흑판(blackboard)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에듀테크(‘시스템’)는 흑판이다. 그것을 도입하면(흑판을 교실에 걸고 수업하면) 굉장한 일이 일어나리라 호언하고 있다. 물론 오래전 이야기이다. 앞 문장은 1841년 얘기이고, 뒤 문장은 그 40년 후 또 다른 흑판 장수가 했던 이야기이다. 슬레이트 같은 ‘미디어’가 전부였던 이전의 학교 형편에 비추어 보면, 흑판 도입이 작은 사건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흑판이 학생들의 공부와 마음을 모두 투영하며 교육과 지식 발전에 이바지하리라는 주장에 당시 사람들이 수긍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는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AI에 열광하는 모습은 과거 흑판에 열광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위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책(‘Tinkering toward utopia’)은 미국 공교육 100년 역사에서 꾸준히 시도됐던 교육개혁의 호언장담들이 그대로 실현된 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교육은 꾸준히 유토피아를 추구해 왔지만, 그 진척은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에듀테크에 특정해서는, 위에 인용한 얘기에 이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흑판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교육공학에 대한 열광과 주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교육 라디오, 활동사진, 텔레비전, 프로그램 학습 등등이 그 대상들이었다. 모두 수업 수행의 니르바나를 예언했지만 실현된 적은 없다.
이런 역사와 관련해서, ‘발명왕’ Edison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1913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14
책은 곧 쓸모 없어질 것이다. 학생들은 눈으로 수업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식 모든 분야는 활동사진으로 가르칠 수 있다. 학교 체제는 10년 안에 완전히 바뀔 것이다.
Edison이 한 것과 같은 주장은 이제까지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활동사진이란 ‘테크’ 대신 텔레비전, 컴퓨터, AI 등이 자리를 바꾸어 차지해왔을 뿐이다. 최근 사례로는, 예컨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도 번진, ‘모든 아이에게 랩탑 한 대’(One Laptop per Child)라는 사업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어마어마하게 호응을 얻었다.15 아이들 모두 노트북컴퓨터를 갖게 되면 ‘알아서 공부하게 되는’ 교육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 주장은 MIT의 ‘미디어랩’(Media Lab)을 창립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됐고, 그들의 혁신적 후광은 거대 재단들의 재정적 후원을 끌어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까지 끌어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얼마 안 가 곧 사양길에 접어들었다.16 이런 유행의 역사는, 앞에서 인용했던 책을 다시 보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17
개혁가들은 교육에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으레 기술을 동원하려고 한다.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하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배경으로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교사들의 의견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수의 교사가 새로운 기술을 반기며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교사는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지부진해지는 중에 다시 새로운 수업 기술의 유행이 부각하고, 그 유행에 얹힌 새로운 개혁 사이클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지금 교육부가 홍보하고 있는 AI 디지털교과서는 과연 위와 같은 역사적 전철에서 벗어날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히 최근 ChatGPT를 경험하며 열광하는 사람들은, 이번 AI만은 다를 것이라 믿는 듯하다. 미래에 대해선 물론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AI가 예외적인 기술이 되리라 믿기에는 역사적 반증(反證)이 너무 견실하다.
기술을 동원해 교육을 바꾸려는 데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달려들었던 Steve Jobs는 아래와 같이 얘기했다. 학교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기술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인터뷰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18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세계 누구보다도 더 많은 컴퓨터로 더 많은 학교를 도우려고 애써보았다. 그 결과로 확신하게 된 것은 가장 중요한 게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채워줄 사람이다. 기계는 그런 일을 사람처럼 해낼 수 없다. 발견의 요소는 주변에 널려 있다. 컴퓨터가 필요 없다. 자, 여기 [물건이] 떨어진다. 왜 떨어지는가? 아이가 여기에 흥미를 느끼고 중력 현상을 가지고 한 주일 씨름하게 하고, 나름의 이해에 도달하게 만드는 데 컴퓨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컴퓨터는 반응할 뿐이다. 솔선할 수 없다. 컴퓨터는 행위 주체가 되지 못한다. 학생들이 필요한 것은 이끄는 주체이다. 가이드가 필요하다. 보조자가 필요한 게 아니다.
Jobs의 말에서 ‘컴퓨터’ 자리에 ‘AI’를 대입하면 사실이 달라질까? 대입한다면 얘기 끝부분은 이렇게 될 것이다. “AI는 솔선할 수 없다. AI는 행위 주체가 되지 못한다. 학생들이 필요한 것은 이끄는 주체이다. 가이드가 필요하다. 보조자가 필요한 게 아니다.” Jobs가 뜻했던 바는 교육부가 열광하는 AI에 대해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에듀테크에 열광하는 교육철학은?
기술이나 기계로 교육 혁명이 가능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특정한 교육관과 사회적 이념을 주창하고 있다. 에듀테크 열광자들의 근본적인 한계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개인 자유 우선의 신념(libertarianism)을 드러내며, 교육적으로 행동주의적 실천을 신봉한다.
먼저, 컴퓨터가 됐건 AI가 됐건, 기계(기술)를 제공하면 학습자(수요자, 소비자)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생각을 들여다보자. 지금 교육부가 맹신자처럼 외치는 ‘맞춤’의 논리나, 모든 학생에게 컴퓨터 한 대를 안기면 교육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외쳤던 저명한 컴퓨터(미래) 과학자들(Nicholas Negroponte, Seymour Papert 등)의 주장이나, 모두 기본적으로 같은 가정을 품고 있다. 학생이 알아서 사실상 만능인 기계를 이용하여 학습할 것이라 상정한다. 학생이 알아서 자신에 대한 교육 서비스를 주문하고, 기계는 그 주문에 교육적으로 충실하게 응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기계가(설사 오늘날의 AI라 하더라도) 교육적으로 충실할 수 없으리라는 얘기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했다. 이 점을 접어두고, 학생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전제를 짚어보자. 길게 얘기할 것 없이, 문화적 자원이 가까이 없는 아동을 떠올려보자.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매일 일터에 나가야 한다. 집에 있다고 해도, 컴퓨터든 교과 내용이든 제대로 배워 본 바가 없으므로, 부모님이 자녀들의 학습을 도와줄 길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환경에서도, 교사가 아동에게 적절한 과제를 부과하고 AI 디지털교과서가 옆에 있기만 하다면, 학생이 혼자서도 무리 없이 수업을 따라가게 될까? 교육부의 시나리오처럼, “내일 학교 가기가 기다려[질]” 정도로 따라가게 될까? 실소할 수밖에 없는 상상이자 주장이다.
교육부의 정책결정자들이나 그 위대하다는 과학자들이나,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환상에 빠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성장 경험 탓이거나 그런 성장 신화에 빠진 탓일 것이다. 그런 환상을 지니게 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인지하기에 그렇게 성장했거나, 그런 성장 신화에 탄복하는 사람들이기 십상이다. 흔한 신화는 압축하면 이런 이야기이다: 시대에 앞서서 집이나 주변에 컴퓨터(첨단기계)가 있었고, 조숙한 아동은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것에 관련된 새로운 상품(프로그램)을 개발해 세계적인 기업인으로까지 성장했다.
이런 신화에는 ‘배경’이 있게 마련이다. 회자되는 얘기에서 명시적으로 적시되지 않지만, 사실은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서 빠질 수 없었을 요소이다. 훗날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아동들에게는 대체로 배경의 도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자녀가 ‘놀이’에 빠져도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이나 지혜를 갖춘, 그래서 아이에게 적절한 자극과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었던 부모나 다른 ‘의미 있는 타자’가 으레 가까이에 있다. 그런 뒷받침이 없었다면 성공 신화는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화 속의 아이들은 결코 스스로 학습해내지 않았다. 본인은 혼자 힘으로 일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들의 신화에는 이면의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 ‘조력의 조건’을 간과할 때 ‘학습의 자유의지론’과 ‘교육 기술(기계) 만능론’이 나온다.
기계 만능론에 스며 있는 사회적 이념은 바로 개인 본위의 자유주의이다. 말하자면 ‘자유의지주의’이다. 개인의 일에 사회나 공동체가 관여하는 것을 불온하게 여기는 생각이다. 교육을 포함해서, 개인이 자라며 학습하고 지위나 부를 차지하는 데 정부나 사회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개인이 자유의지대로 선택하고 배워 나아갈 것이며, 능력과 노력에 따라 각자 합당한 자기 몫을 거두게 되리라고 여긴다. 이런 철학은 각자도생의 경쟁주의나 능력주의와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정책이 어떤 사회를 추구하고 있는지는 확인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책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이 옳다 그르다 단정하게 전에, 우리는 정부가 추진하는 AI 기반의 교육혁신 정책이 어떤 사회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는 드러내고 논의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교육의 측면에서는 정부 정책이 어떤 인식을 품고 있는가? 행동주의적 접근이 그 핵심에 있다. 교육심리학이나 교육정책의 역사에서 이미 정리돼왔듯이, 행동주의적 접근은 ‘자극-반응’의 학습 이론에서부터, 수업 기계, 프로그램 수업, 완전 학습, 컴퓨터 보조 수업, 거꾸로 학습 등으로 끊임없이 변전하며, 교육에 대한 실증 과학적인 이해와 그것에 근거한 처방이 언제나 유효하리라고 장담해왔다.19 요컨대 학습과제는 체계적이고 분절적으로 상세화될(specified) 수 있고, 그 상세화대로(기계적으로; 행동주의적으로; 자극과 반응, 강화, 피드백 등의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학습(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고집해 왔다.
교육부의 정책 문서에 드러나 있는 행동주의적 면모를 보자. 앞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디지털 교육혁신의 핵심 수단은 AI 디지털교과서이다. 교육부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20
학생 개인의 능력과 수준에 맞는 다양한 맞춤형 학습 기회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을 포함한 지능정보화기술을 활용하여 다양한 학습자료 및 학습지원 기능 등을 탑재한 교과서
교육부 구상에 따르면, AI 디지털교과서는 학생에게 튜터이고 교사에게는 조교이며, 학부모에게는 학생의 교육 상황에 대한 정보 제공자이다. 이 교과서에서 학생이 보게 되는 ‘대시보드’를 교육부가 보도자료에서 예시했는데, 그것이 보여줄 주요 내용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뉘어 있다. “이렇게 해봐요!”라는 제목의 첫 칸에는 과제 이행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 있고, “학업 성취”라는 제목의 중간 칸에는 단원의 상세화된 세부 목표별로 성취도가 표시된 일종의 프로파일이 원형 막대그래프로 그려져 있으며, 아래 칸에는 “맞춤 학습”이라는 제목 아래 “맞춤 콘텐츠”를 제공할 것처럼 되어 있다.
첫 칸의 피드백 예는 이렇다. “주영이는 받아올림이 있는 (두 자리 수) + (한 자리수)는 정답률이 92%로 잘해요. (두 자리 수) – (두 자리 수)는 ‘받아내림’을 이해하면, 정답률이 현재 55%에서 80%로 향상될 거예요.” 그리고 중간 칸의 학업 성취 프로파일은, ‘덧셈과 뺄셈’이라는 단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상세 목표별로 어느 성취 수준에 도달했는지 그래프로 보여주고 있다.
◦ 선수학습 성취도: (몇)+(몇)=(십 몇), (십 몇)-(몇)= (몇)
◦ (두 자리 수) + (한 자리 수)
◦ 여러 가지 방법으로 덧셈하기
◦ 받아내림이 있는 (두 자리 수) – (두 자리 수)
◦ ….[이하 생략]
AI(디지털교과서)가, 학생 개개인에 대하여, 100%(만점)를 목표로 하는 계열적 학습 진도를 교육의 기본 구도로(알고리즘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학업 성취의 목표는 상세화된 세부 목표들의 과제 모두에 대해 100% ‘성공률’에 도달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지극히 행동주의적인 기계(AI) 설계이다.
‘교사용 대시보드’의 예시를 보면 그런 경향을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성취 수준별로 학생들에 대한 “행동 분석” 결과를 보여주는 양식으로 예시되어 있으며, ‘수업’이란 메뉴에서는 “사전 진단 문항, 수업 설계, 평가 문항 생성, 성취도 분석, 수업 효과 분석” 등의 정보가 제공되도록 양식이 예시되어 있다. 전통적인 ‘수업 지도안’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21 전형적인 행동주의 모형에 근거하고 있는 양식이다. 사전 진단 문항을 이용해 학생의 준비도를 평가하여 그에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에 맞는 과제를 선정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설계하게 되며, 그런 수업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한 문항을 생성해 평가함으로써 수업 효과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행동적(기계적) 구도를 바탕으로 한 대시보드이다.22
행동주의적이며 기계적인 교육 모형이 지닌 한계는 많지만, 결정적인 것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잘 알려져 있듯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증거만으로 교육 사태를 규정하는 것이 그 모형의 결정적인 한계이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안은 상태에서, 교육의 과정과 성과를 기계적 공정으로 재구성해버린다는 것이 버금 한계이다. 대시보드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학생들의 교육은 주어진 평가 문제를 모두 해결하게 되는 지점에서 완성된다. 평가 문제(객관적 행동)가 포착해내지 못할 교육(수업)의 내면은, 그것이 인지적 영역에서건 정서적 또는 심동적 영역에서건, 모두 무시된다.
더 나아가, 교육받은 인간상을 표상하는 ‘전인’(全人)의 개념도 분절적으로 구성한다. 대표적으로 Bloom의 행동주의적 교육목표 분류를 따른다면, 인지적, 정의적, 심동적 영역(domain)의 목표들은 서로 분절되어 있다. 한 사람의 인격 총체가 교육의 목적이고 그것은 몇 개 범주로 나누어 각각 별도로 함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Bloom의 세 영역도 교육의 과정과 성과에서 통합되고 엉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행동주의 접근에서 세 영역은 서로 독립적이며 마치 별도로 키워질 것처럼 구분되어 있다.
이런 인식은 교육부 정책 문서 행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교육부 문서는 AI 디지털교과서가 ‘인지적 영역’의 교수 부담을 맡아 해결해 주게 되면 “교사는 학생의 인간적 성장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술한다.23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교육부장관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AI 디지털]교과서는 지식의 전달을 담당하고 교사는 코치를 해줄 수도, 사회정서적인 역량을 키워줄 수도, 멘토·학습디자이너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24 지식의 습득과 사회 정서적 발달은 한 개인 안에서 ‘화학적으로’ 융합된 현상일진대, 그것을 구분하여 교육상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고 여기는 행동주의적 인식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교육부 문서나 장관의 발언은 상식적으로도 수긍하기 어렵지만, 학교 교육에 관한 수많은 학제(學際)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눈감은 것으로, 지나치게 편협하다.
학교에서는 인지적 학습활동이 주축을 이루며, 그 활동 과정에서 정의적 자아개념이나 신념이 생겨나고 사회적 공감과 행동의 습관이 형성된다. 역으로, 이른바 사회 정서 함양을 노리는 ‘비교과’ 활동에서 인지적 개안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확실하다. 이런 사실이 이제는 특정 연구물을 들어 입증할 필요도 없이 수긍되지만, 그런 보편적인 교육관을 정부의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정책에서는 AI를 앞세워 밀어내고 있다.
기계 맹신에서 벗어나 인본적 성찰을
교육부는 AI를 높이 쳐들며 ‘교육개혁 원년’을 선포했다. ‘초능력’ 테크인 AI의 신탁(神託)을 따라 학습하고 수업하게 된다면, 모든 학생에게 맞춤의 교육 서비스가 시혜되고, 학교는 그들에게 가고 싶어지는 곳이 될 것이라 선전한다. 그러나 이런 선포나 선전은 과장이며 성급한 것이고, 따라오는 정책은 또 한 번의 착오가 될 뿐이다. 거듭 얘기하거니와, 새로운 에듀테크에 대한 열광은 근대 학교 교육이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부글거리곤 사라져왔다. AI라고 예외일 것 같진 않다. 적어도 현재 교육부가 구상하는 정책으로는, AI가 예외적인 테크로 부상하게 된다 해도, 우리 교육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 정책 자체의 바탕을 이루는 교육 모형과 철학 자체가 허술하고 허접하다.
교육부가 외치는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은 앞섰던 수많은 개혁의 시행착오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시류에 편승해 대중의 호응을 얻으려는 정책이 달리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안타까운 일은 그런 정책상의 유행 추종이 초래하는 낭비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것이고, 학교 교육과 공공정책에 대한 실망과 싫증이 우리 사회에 더욱 완고해지리라는 것이다. 필경 정부는 정책 실패를 학교와 교사 탓으로 돌릴 것이고, 그런 핑계는 또 다른 개혁의 꼬투리로 작용할 것이다. 십중팔구 또 다른 시행착오로 이어질 뿐일 ‘개혁’ 말이다.
우리가 맞을 미래는 이제까지의 ‘미래’와 다르다고들 법석댄다. 미래를 위해서 예전과 다른 대전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는 오늘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위의 결과일 터이다. 미래가 급속하게 달려오고 있고 또 그 미래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일 듯하면, 지금 우리가 미래로 가는 속도를 늦추고 또 미래가 예견되는 모습이 되도록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교육으로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바꿀 수 있지 않은가. 미래를 축조할 마음의 블록을 교육으로 새롭게 만들고 쌓으면 될 일이다. 미래는 다가오는 재앙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교육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다.
‘미래 문제’가 신기술을 서둘러 교육에 투입한다고 해결될 리 만무하다. 관건은 사회 구성원(인류)의 마음에 있다. 진정 미래가 우려스럽다면, 현재 교육이 미래 세대의 마음에 어떤 사고와 행위 양식을 심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그런 성찰의 바탕에서라야 비로소 우리는 미래를 위한 교육 철학과 실천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시대가 되도록 만드는 데 참여할 공분모의 마음을 키우려면, 교육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교육정책 움직임은 옹색하고 경박하다. ChatGPT와 같은 기술 하나가 세계 시장에서 이목을 끈다고 국가 정책까지 들먹이며 새로운 좌판 깔듯 부하뇌동하는 모습이다. 즉흥의 정책은 기만이거나 망상이기 마련이다.25 AI를 동원한다는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이 바로 그 꼴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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