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처럼, 강진에 임영웅 노래비를 세운다고 한다.
임영웅의 마량에 가고 싶다를 들으니, 문득 강진이 생각이 난다.
여행자 클럽 최욱제 사장과 봄나들이로 남녁 풍광을 둘러보았다.
식후경이라, 우선 강진 마량에서,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구이로 점심을 때웠다.
담양 소세원에서, 선조들의 운치 있는 정원을 보고. 다산초당에서 선생의 행적을 주마간산(走馬看山)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의 현판은 김정희(金正喜) 선생 글씨다.
경내에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조(茶竈) 등, 다산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정약용
다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후손이다.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가문으로 장가를 들었다.
형제가 있었다.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전과, 천주교도 정약종
다산은 관운(官運)이 좋았다.
22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 대왕을 보필했다.
31세에 홍문관 수찬(修撰)
33세에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했다.
34세에 동부승지에 이어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39세에 정조 대왕이 붕어하고, 어린 순조가 등극했다.
그런데 벽파가 득세했으니, 다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다산이 신유사옥에 연루된 것처럼 꾸며, 강진으로 귀양보냈다. 그곳에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했다.
40세부터 18년간 유배 생활에, 1,500권이 넘는 책을 독파하고, 5백 권의 실학 저서를 저술했다.
다산이 허름한 바깥채에서 유숙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해남 윤씨 문중은, 장서가 많은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이곳에서 20편의 시 ‘다산 화사’를 저술했다.
57세에 해배(解配)되어 고향에 돌아가, 학문을 마무리하고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일화
정조대왕은 다산을 만난 것을, 풍운지회(風雲之會),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했다.
정조 대왕이 붕어하자. 하방(下放)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호를 귀농(歸農)이라고 지었다.
정조는 단옷날, 선방(扇房)에서 쓸 부채를 다산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바른말을 하라는 뜻으로, 붓을 하사했다.
정조가 다산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원 화성의 건축
다산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거중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거중기 11대를 투입해서 2년 4개월 만에 완공했다.
하피첩(霞帔貼)
강진으로 귀양간 정약용에게, 부인 홍씨(洪氏)는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紅裙) 한 벌을 보냈다.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답서
그리워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어쩌지요? (후략)
그는 범부(凡夫)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
젊은 시절에는 말에 거침이 없고, 행동은 도도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진중해졌다. 불운과 역경이 뾰족한 재기를 눌러 준 것이다.
동경대학의 한 교수의 논문
조선왕이 다산을 영의정에 앉혔더라면, 오히려 일본은 조선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투쟁으로, 다산을 귀양 보내서 “앉은뱅이”로 만들어버렸다.
목민심서(牧民心書)
목민심서는 48권 16책으로 구성되어있다.
박헌영이 모스코바 정치대학에 다닐 때, 한 동양인을 만났다. 기개를 보니 한 나라를 이끌 인물이었다.
그래서 목민심서를 주었는데. 그가 호지명이다.
다산 서거 250주년을 맞이하여, 유네스코는 세계기념 인물로, 사상가, 문학가, 음악가. 학자 4분을 선정했다.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시
다산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