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2:13-17절. 319.360.424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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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병이 없다면 의사도 의과대학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병이 없다면 우리나라처럼 양약과 한약의 싸움도 필요 없을 것이고 병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칭 건강한 자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의인인체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킵니다. 병든 자는 사실 모든 인생이 다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주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쾌하게 설명한 구절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왔다면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학벌, 가문, 재산, 미모를 조건으로 우리를 불렀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아시고 우리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줄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본문을 찬찬히 살피면서 이 본문이 제시하신 깊은 진리를 깨닫고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이 본문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부터 그가 선포한 설교와 가르침은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면서 입에서 입으로 동네에서 동네로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이 본문에서 설명한 대로 무리를 지어서 다가왔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갔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앉은 자리는 언제나 역사의 중심이었고 문제 해결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머물든지, 산에 있든지, 바닷가에 있든지 간에 따르는 사람들로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는 참된 말씀이 그리웠습니다. 당시는 그 누구 하나 시원한 대답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누구 하나 제대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자도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바닥이어서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었고, 종교는 있었으나 형식과 외식에 사로잡혀 있는 화석화된 종교였고, 사회적으로 무질서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고, 진리도 없고 의도 빛을 잃은 당시대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흡사 오늘 우리 사회의 구조와도 다름없습니다.
이른바 S.K 회장과 동생 사건이라든가 한화그룹총수 옥살이 CJ 그룹회장 동양그룹 회장 구속사건이 이 나라 전체의 도덕과 양심의 부도이고, 우리 사회의 전체의 부도입니다. 이런 절박한 때 아무 지도자도 대답이 없고 대책이 없습니다. 교계 지도자들도 정치권과 세상의 눈치를 살피고 할 소리를 못하는 이때입니다.
오히려 종교는 기득권 수호에 앞장서는 정도입니다. 흡사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낭패와 실망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등장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입니다. 그의 처방은 인간은 모두 병들었기에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쾌하게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문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의 대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병들었고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윗물만 맑으면 아랫물은 자동으로 맑아질 것이라는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사고방식에서 속히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윗물도 썩고 아랫물도 썩고 그리고 시궁창 같은 인간의 마음을 현실로 인식하고, 인간이 변화되기 전에는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의 열매는 데모가 아니고, 프로농구나 K리그나 올드컵이아닙니다. 아홉 마리의 용도 아니고 먼저 믿는 우리부터 회개하여 온 국민이 함께 통회자복하는 역사가 있기 전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국가의 문제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해결 얻기 위해서 몰려와야 합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교만하면 하나님이 넘어지게 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죄를 용납하면 하나님이 징벌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을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 곧 마태를 부르신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세리 마태를 택했는지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평판이 좋지 못했습니다.
세리와 가까이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요즈음 그룹총수들의 사태로 그와 점심 한 끼 나눈 정치인도 잠을 못 이룰 정도일 것입니다. 명함 한 장 나눈 것도 언제 불똥이 날아올런지 전전긍긍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제자로 택한 그 자체가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마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일방적인 부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꼭 깨달아야 할 것도 예수님께서 그의, 구속사역의 큰 틀을 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리 마태를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세리는 유대사회에서는 부러움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러움이라 함은 경제적으로 찌들게 가난한 식민지 백성 중에 로마의 권력층에서 세금을 받는 일은 그나마 선택된 사람이요 안정된 직장이요 머리를 굴리는데 따라서 짭잘한 재미를 보아왔습니다.
비난이라 함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세금을 무겁게 매기고 그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이 그 당시의 관례였기에 세리를 창녀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비난을 무릅쓰고 세리 마태를 택했는가 함입니다. 그것은 이미 17절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는 의인만 믿고 세리와 창녀는 죄인이기에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어버리었습니다. 병이 있기에 의사가 있듯이 죄인이 있기에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극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과 성도를 같이 보면 안됩니다.
종교인은 종교행위와 종교적인 삶을 통해서 자기의 이권을 추구하는 자라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줄 믿고 그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편견(偏見)을 깨뜨리고 스스로 의인인 체 하지 말아야 바른 신앙(信仰)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향해서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어나 좇았다고 14절에 말씀했습니다. 아무 것도 준비된 상태가 아닌 그 사람! 직장은 괜찮으나 주위의 비난을 의식하고 살아야 할만큼 콤플렉스는 많았지만 그래도 딸린 식구가 있고 앞길이 창창한데 그 직장을 버려두고 요즈음 말로 명퇴 곧 명예퇴직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의중을 물어본 일도 없고 장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덮어놓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한 것은 마태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황스런 일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모든 것이 생략된 채로 그냥 따랐다고만 했습니다. 설명은 생략되었습니다. 왜 그는 따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항거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 앞에 어쩔 수 없이 붙들린 것입니다. 마치 큰 자석에 무수히 많은 쇠조각이 달라 붙듯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준비와 상관없이 우리를 강력히 붙들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를 부르심으로서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은 소망이 없다는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은총 아래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리 마태의 삶을 변화시켜서 복음서 첫 번 기록자로서의 예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마태는 일찍이 행정관료로서 경험을 살리고, 유대인 사회를 위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되 족보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아니 구약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명쾌하게 저술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도 이미 그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당연히 공갈, 협박, 비방과 욕설이 날아왔습니다. 선지자로 자칭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하면서 어떻게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 없이 죄인들과 먹었습니다. 그 행동 자체가 자신이 누구이며 왜 세상에 오셨는가를 증명하는 셈입니다. 미국의 척 스미스 목사님은 한국에도 너무나 잘 알려진 목사님입니다. 그의 교회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로도 유명합니다.
그 교회의 잔디 위에는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이혼자들이 척 스미스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며 죄를 회개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그들과 함께 부등켜 안고 울어주는 목사가 있다는 그것이 복받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분명히 돌출적인 것이요 관례(冠禮)에 없는 일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醫院)이 쓸데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우리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병과 우리 죄짐을 지시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세주로 영접한 분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분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권받은 자가 날이 갈수록 많아질 수있도록 하는 전도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봉웅